파우스트적 고민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한 건 십오 년도 전이었습니다. 서양 고전 『파우스트』의 모티프에 제 개인적 아픔과 시련을 더해,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려고 했던 한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그 욕망의 끝에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고민이었습니다.
K는 형식적으로는 몰락했지만, 과연 자신의 욕망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렀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된 K를 만납니다. 그들이 허락받지 않은 욕망의 대가를 받았다면 너무 비현실적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정의는 여전히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요? 그 질문은 아직도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놀라울 만큼 지루한 현실과 희미하게 빛나는 소설 속 공간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습니다. 이야기가 막힐 땐 절망하고, 풀릴 땐 저만의 성취와 희열을 맛보았습니다. 고통스러우면서 행복했던 이 여정에 함께해 주신 작가님들, 구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공감 하나, 댓글 한 줄이 제게는 큰 힘이었습니다. 『파우스트적 고민』은 여기서 마무리되지만, 이 이야기는 완성된 게 아닙니다. 더 밀도 있고 입체적인 서사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인철 드림
22화 요약
K는 과거 자신이 지배하려고 했던 이들의 환영에 시달리며 서서히 무너져간다. 소진은 방송과 신문사 등에K의 독일 유학 시절 가스라이팅과 폭력교사, 논문 강탈및 표절 등이 담긴 USB를 공개하고, K의 실체를 밝힌다. Y대학교는 K를 징계위원회에 세운다. 소진과 K 두 사람은 벨에포크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며 K의 욕망을 저격한다. 결국 K는 교수직에서 파면되고 그에게 피해를 보았던 수많은 제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며 그는 사회적으로 몰락한다. 경수는 과거의 기억을 회복하고,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회복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23(최종화) : 파우스트적 고민
K의 사건이 있고 일년이 지났다. K는 어느날 예고없이 자취를 감췄다. 남해의 한 섬에서 은둔생활을 한다고도 했고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팀장으로 구호 활동을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K를 찬양하고 옹호하던 이들은 비난과 경멸, 조롱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강기현, 아니 이니셜 K로 불리던 존재는 완전히 잊혀졌다. 그는 처음부터 어느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는 철저했다.
소진은 책상 앞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했던 한 인간의 욕망과 몰락을 담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소진은 수없이 많은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고칠수록 문장은 나아졌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늘 예외였다.
파우스트적 고민, 칠년 전 소진이 처음 이 제목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이 소설의 제목은 단지 문학적 은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K라는 인물을 만나기 전이었다. K를 통해 모두가 겪은 현실이 되었다.
소진은 소설을 완성하고 퇴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도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출판사를 하는 선배에게도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반년이 되도록 '파우스트적 고민'을 출판을 하겠다는 출판사는 없었다. 고치고 고쳤다. 고칠수록 K는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소설이 매우 흥미롭군요. 가능성이 보이네요. 수정은 조금 해야겠지만."
한 출판사에서 '파우스트적 고민'을 출판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경수는 석 달 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경수가 소냐의 게스트하우스 ‘벨에포크’에서 보내온 사진 속엔, 옅게 웃는 얼굴과 자전거 한 대가 있었다. 경수에게 하루는 짧지만 밤은 길다. 경수는 밤을 좋아하다. 그는 아침마다 익숙하지 않은 독일식 아침식사를 대충 넘기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경수는 수업이 끝난 뒤에는 한국에서 그랬듯이 학교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다. 책상 위엔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수첩 한 권이 놓여 있고, 수첩엔 경수가 책에서 발췌한 문장이나 무심결에 떠오르는 상념들이 적혀있다. 경수는 조금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경수씨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침이면 자전거로 템즈 강변을 따라 라이딩을 하고, 강의가 없는 오후에는 거실이나 베란다에서 책을 읽어요. 옥스포드의 석양을 좋아해요. 벨에포크에서는 누구도 그에게 과거를 묻지 않아요. 어디에서 왔던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머무는 날까지 하루를 함께 살아가요.
—소냐의 메일 중에서.
소설이 출간되고 한달 만에 3쇄를 찍었다. 소설가 협회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문제적 소설' 본심에 올랐다. “파우스트 박사는 나였을지도, 혹은 당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독자의 한줄 평이 기억에 남았다.
수아에게 전화가 왔다. 자신도 이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벨에포크 시절에는 시를 한줄도 쓰지 못했지만 그리고 지금은 심리상담센터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문 상담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선배, 소설 출간을 축하해요. 우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류가 있어요. 먼저 사귀자고 고백한건 경수가 아니고 저예요."
소진은 ‘벨에포크’에서 활동하던 시원, 창훈, 소영이를 떠올렸다. 창훈이는 졸업작품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를 지역 영화제에 출품했다. 제목은 <교정>.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 그리고 침묵한 사람들의 얼굴을 담은 작품이었다. 시원이는 청년 권리 플랫폼의 콘텐츠 디렉터가 되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된다’는 그의 말은 작은 캠페인을 통해 퍼져 나갔다. 소영이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경은은 변함이 없다. 그녀는 오랫동안 동생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말로 다 하지 못할 순간들이 쌓였다. 함께 무너진 밤도 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울음을 참아야 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경수를 혼자 두지 않았다. 경수가 생사를 넘나들며 병원에 있던 시간, 침대 옆에 묵묵히 앉아 책을 읽던 사람도 그녀였고, 손을 잡아주던 손길도 그녀였다. 소진은 얼마 전, 책을 주기 위해 경은을 만났다.
"고마워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소진은 파우스트적 고민의 마지막 문장을 소리내어 읽었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청문이 흔들린다. 창문을 가리던 그늘이 걷히더니 밝은 햇살이 들었다. 커튼이 흔들리더니 따스한 봄기운이 서늘하던 방 안을 채운다. 벨에포크는 이제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 시절은 다시 피어난다. 그리고 그날의 진실을 말하려 했던 이들은, 더 이상 그 진실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간다. 소진은 노트북을 덮고,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두서 없는 감정들이 일렁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