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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적 고민. 19화

그날의 진실

by 김인철

18화 요약


K는 결국 화려한 경력 뒤에 표절과 자기기만, 가스라이팅으로 얼룩진 인물이었다. 소진은 고고학 교수와 옥스퍼드 대학의 회신을 통해 K의 거짓 학력과 과거를 파헤친다. 이후 K의 피해자들이 SNS와 메일을 통해 그의 심리적 폭행은 물론 물리적인 악행을 잇달아 폭로하기 시작한다. 익명의 인물이 학내에 대자보를 붙이며 K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고발한다. 결국 K는 모든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고 선의로 포장된 지옥행으로 빠질 위기에 처한다.



19화 : 그날의 진실


소진이 지난주 토요일 K의 또 다른 피해자를 만나러 가고 있을 때였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제보자를 기다리고 있을 때 경수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소진에게 경수가 K와의 사건이 있던 날 이후부터 녹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소진은 당연히 그녀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알고 있었어요."

"경수가 택시에 뛰어들기 전... 그러니까 소진 씨와 술을 마실 때도 녹음을 한 모양이에요."

"소진은 깜짝 놀랐다."


그날은 경수가 녹음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진은 순간....


"혹시 녹음된 내용 들어 봤어요?"

"전부는 아니고 앞에만 조금.... 근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조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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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은 알고 싶었다.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날 자신이 경수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경수는 왜 자신과 헤어진 후에 택시에 뛰어들었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경수 누나가 보낸 녹음 파일은 43분 12초였다. 소진은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한참을 망설였다. 잊어버렸던 그날 경수와의 대화를 미치도록 알고 싶었지만 막상 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날, 경수는 소진에게 분명히 말했다.


“오늘은 녹음기 안 가져왔어. 선배랑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소진은 그 말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더 섬찟했다. 경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거짓말까지 하며 소진과의 대화를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소진은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처음 10분간은 평범한 대화였다. 소진도 취하기 전이라 이 대화는 기억이 났다. 학교 생활, 논문 이야기, 수아와의 관계, K의 요즘 모습. 그리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사람 참 무섭지. 진심인 줄 알았는데 다 쇼였다는 거야.”


그 뒤로 다시 침묵. 경수의 낮고 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넌 그걸 지금에서야 믿게 된 거야?”

“섬배,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그냥… 너도 그 사람 안에 있었구나 싶어서.”

소진은 피식 웃는다. 그 웃음소리조차 낯설게 들린다.

“나라고 안 그랬을까? 나도 좋았거든. K한테 인정받는 거.”

“근데, 그게 선배한테는 어떤 의미였는데?”

경수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선배도 나처럼 K한테 짓밟혔잖아. 근데 어떻게… 어떻게 K옆에서 조교를 할 수 있어?”

“경수야, 사람들이 왜 너를 신중하다고 하는 줄 알아?

“글쎄?”


소진이 경수에게 신중하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유연함이 부족하다거나 융통성이 없다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중함이란 세상과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외골수라는 의미였다. 대쪽 같은 성미일지언정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을 감추고 둥글둥글하고 유들유들한 면도 보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경수는 자신에게 그러한 부분이 부족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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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너는 어때?”

“어떻다니?”

“넌 이제껏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어.”


경수는 미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점점 말이 빨라지더니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 눈물이 그렁거리기까지 했다.


“그게 어떻다는 건데? 나보고 지금 저렇게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주정뱅이처럼 술에 떡이 된 채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실실거리고 그들에게 이년 저년,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막말을 내뱉고 술집을 나와서는 길바닥에서 비틀거리고 엎어진 채 한심한 몰골로 누워 있으란 말이야. 그럼 그게 내가 신중하지 않다는 증거라도 되는 거야?”

“비약하지 마.”

“비약이라고?”

“본질은 그게 아니잖아.”

“본질?”


소진은 이쯤에서 경수에게 진실을 말해주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말이야.”

“그게 뭔데?”

“K는 너를 자신의 색깔로 물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뭐라고?”

“하지만 그 점이 K의 착오였어.”

“무슨?”

“너도 K만큼 자의식이 강하니깐. 어쩌면 그 자의식이란 것은 네가 훨씬 더 강할 지도 모르지.”

“......”

“K는 그걸 나중에야 깨달은 거야. 그리고 용납할 수 없었겠지.

“뭘?”

“자신의 영역이 침탈당하는 것.”

“그게 무슨.....”

“그는 이제껏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을 과하게 침범하거나 조금이라도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려 든다고 생각하면 그게 누가 되었건 그 점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로 잡아 왔었으니까.”

“자기만의 방식?”

“그래, 자기만의 방식."

"TS엘리엇의 말을 빌리자면... K는 자신이 아닌 것들의 황무지 위에 스스로를 높이 세웠지. 너 또한 너만의 폐허 위에 너를 세우려고 했고. 그건 네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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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는 고개를 들고 잠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방금 소진에게 들었던 말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경수의 의식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동상'을 세우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 그저 폭력만이 상대를 굴복시키는 방법이 아니라는 역설. 황무지, 폐허,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된 채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진은 K가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지적 허영의 제단' 위에 자신만의 동상을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모두가 그 동상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K의 권위를 묵인해 왔는데, 경수가 그 암묵적인 합의를 깼다는 것이다.


"맞아, 나는 결코 그럴 의도는 없었어."


경수는 맹세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소진에게 항변했지만,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너, 자신조차도 몰랐으니까."


녹음기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소진에게는 마치 죽음처럼 고요한 순간이었다. 경수는 자신이 K에게 무심코 던졌던 말이나 행동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소진은 차분하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시화전 뒤풀이."


그제야 경수의 머릿속에 그날의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K와 자신이 춘원(이광수)과 만해(한용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모습. 작품으로만 작가를 평가해야 한다는 자신과, 작품과 행적을 분리할 수 없다는 K의 팽팽한 대립. 그리고 자신이 술기운에 K에게 던진 말, "교수님은 과격한 근본주의자시군요." '근본주의'라는 단어를 K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뱉어버린 실수. 그 순간 싸늘하게 식어버린 분위기.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였군."


경수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알겠어?"


경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뭐지?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기만 했다는 거 말이야. 부당한 사실을 알면서 침묵한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거 아닌가?"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도 그런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들의 목적과 수단이 너무 분명해 약점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수는 달랐다고 했다. 처음에는 K와 같은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K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갈 길을 부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K는 자신의 동상과 탑이 무너지지 않게 해야 하기에 경수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선배는 왜 처음부터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지?"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네가 그 진실을 알아야 할 때지. 그리고... "

"그리고...."

"나도 사실은 무서웠어. 나는 너처럼 K에게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거든."


소진의 말을 모두 들은 경수의 표정은 마치 풀리지 않던 복잡한 수학 문제가 우연히 친구의 노트에서 답을 발견한 것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알게 된 진실은 공식만 대입하면 간단히 풀리는 일차방정식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경수야, 조심해. 내기 보기에 너는 지금 심적으로 너무 고통받고 있어. 심리적 고통도 통증이야."


경수의 녹음기에 담긴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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