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피해자라고 해서 현재의 악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2차 대전 당시 수백만 명이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를 겪었기에, 전후 유럽과 미국은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상관이 없는 국가도 이스라엘이 겪은 홀로코스트트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부채 의식은 유럽과 미국의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서도 드러났다.
특히 할리우드의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들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연민과 부채감을 동시에 남겼다. 나 역시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나 문학 작품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겪은 학살에 대해 상당한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한편 이런 의문이 든다.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민족만 겪은 것은 아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 집단학살, 보스니아 학살, 난징 대학살처럼 수십만, 수백만 명이 희생된 사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비극들은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만큼 세계인들이 부채의식을 지지는 않고 있다. 심지어 그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국제 정치에서 막강한 파워를 보이는 이스라엘과 다른 국가들의 영향력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미디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극은 전 세계가 기억하고, 어떤 비극은 잊히는 현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 역시 전후 유럽 사회의 부채의식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벨포어 선언' 이후 이어진 일련의 흐름 위에, 홀로코스트 이후의 분위기가 더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동 한 복판에 건국된 이스라엘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중동 지역에서 끊임없이 분쟁과 갈등의 축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중동에서 벌이는 일방적인 암살과 폭격, 전쟁 범죄 행위를 국제사회의 선택적 침묵이나 방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이 벌이는 이란과의 전쟁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하게 된다. 과거의 비극이 현재의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럽과 세계인들의 부채의식은 그 시효를 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