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실족' 사이에서

[리뷰]'언어의 온도'에는 없지만 '그쇳물 쓰지마라'에는 있는것

by 김인철

책 두 권을 읽었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와 인터넷 댓글 시인 제페토(필명)의 '그 쇳물 쓰지 마라'. '언어'와 '온도'. 그 쇳물과 (온도). 손에 잡을 수 없는 두 단어의 조합이 묘하게 어울린다. 언어의 온도는 베스트셀러다. 어떤 내용일까? 이 책은 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까? 궁금했다.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 예약을 했다. 오늘 아침에 문자가 왔다. 책이 도착했다고. 김/인/철. 이름 모를 사서가 책 사이에 써놓은 내 이름이 부드럽다. 손 글씨로 쓴 편지의 수신인 외엔 다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써준 적이 있었나? 키보드를 벗어나서 손으로 쓴 내 이름은 삐뚤고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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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름이 김인철일까? 생각하곤 했다. 김진, 김혁, 김준. 이름을 지어 보기도 했다. 이름은 대부분 외자였다. 하지만 어떤 이름도 김/인/철이라는 이름보다 '나'를 완벽하게 증명하지 못했다. 이름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인생의 표지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닫혔던 표지가 스르륵 넘어간다. 그러므로 이름은 매일 매 순간 타인의 부름에 정신과 몸이 끌려가는 숙명이다. 하지만 방향도 모른 채, 있는 힘껏 내 이름 세 글자를 던져놓고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며 가는 길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김인철이 아닌 다른 이름을 소망한다. 내 이름이 '김소진'이나 '기형도'라는 인생의 표지였다면 그 내용도 달랐을 테니까.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언어의 온도 P.18>

상처를 덮는 것은 더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의 따뜻한 위로 한 마디이다. 이 책을 삼분의 이쯤 읽었을 때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를 알았다. 작가는 지하철과 버스의 승객들에게 글 빚을 지고 있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남의 이야기를 읽으며, 연고를 바르듯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 상처를 보듬는다. 하지만 그 감정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지 않는다. 따스한 이불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아픔만 공감할 뿐이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샘터'나 '좋은 생각'을 한 사람이 써 내려간듯한 글이다. 그리고 다른 온도의 책이 있다.

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인터넷 댓글 시인 제페토의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 시 한 구절이다. 그 쇳물 어디에 쓰였을까? 시인의 바람처럼 청년이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어 쇳물로 부어 빗물에 식은 얼굴 정성으로 다듬었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후속기사는 없다. 시인의 글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지만 그뿐이었나 보다. 당사자들은 잠깐 악어의 눈물 후에. 뭐? 어쩌라고 했겠지. 내 새끼 한번 만져 보자고 정문 앞에 찾아왔을 어미의 한은 어디다 풀어냈을까?

제페토(시인)가 인터넷과 신문기사에서 건져 올린 주인공들의 삶은 너무 뜨겁다. 내팽개쳤던 삶의 고통스러운 '실존'을 불러낸다. '그 쇳물 쓰지 마라'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인간이기에 '실존'이어야 하지만 나날이 '실족'만 되풀이한다. '새엄마에게 맞아 죽은 딸', 실종된 수도검침원', '보일러 끄고 자다 죽은 70대'.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나무의자와 다를 게 없다. 팔걸이가 부러지면 버려지듯이 거리가 깨끗해지면 청소부는 자신의 몸뚱이만을 닦아야 한다.

시인의 사연들은 하루, 한낮, 찰나의 기사로만 존재한다. 스쳐가면 그뿐이다. 대개는. 그러나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 용광로에 사그라져간 청년처럼. 그들처럼 살았던가? 나도. 무너진 담벼락 같은 내 인생 오늘도 ( ) 안의? 였던가? 내 괄호는 언제나 쓰다. 쓰다가 만 공란이다. 쓴 소주 한잔과 찌게 국물 한 숟가락 들이키며 "다들 그렇게 살잖아"하면서 넘겨왔던 수많은 괄호와 그 안의 물음표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넘어서야 마침표가 된다.

언어의 온도와, 그 쇳물 쓰지 마라. 에세이와 시. 형식적 장르는 다르지만 내용이 전하는 주인공들의 삶의 온도는 극명하다. 전자가 약간의 뜨거움이었다면 후자는, 삶의 용광로에서, 훨훨 타오르는 화염에 가깝다. 언어에 온도가 있다면, 삶에도, 이름에도 적정한 온도가 있겠지. 이름을 앞에 던져두고 질질 끌려가는 나는 절절 끓는 용광로의 쇳물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가? 지금 내 이름과 삶의 온도는 몇 도일까? 오늘 집을 나올 때 내 방의 온도는 24도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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