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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 들이는 시계

이별에도 시간이 필요해

by 그리여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세상사에는 상반된 이치가 따르고 나쁜 것과 좋은 것이 공존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은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오기 마련이다


전자시계를 부엌에 두고 쓴 지 꽤 오래되었다

식사준비를 하다가 시간을 보고 가족들과 식탁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다가도 보고 출근 준비를 하다가도 보고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위치에 두었다

마치 습관처럼 보았고 일정을 체크했기 때문에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시계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쓰면서 건전지 몇 번만 갈아주었을 뿐 큰 말썽 없이 잘 써 왔다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 생기고 낡아가는 느낌이 났으나 그래도 무리 없이 시간이 잘 간다

일부러 2분 정도 빠르게 맞춰두고 그 시간에 맞춰서 나간다 아침시간 1분이면 1시간처럼 소중하다

이상하게 버스는 꼭 1분 정도 나보다 먼저 출발하고 신호등은 꼭 1분 정도 먼저 바뀐다

뛰기 싫어서 1분 일찍 나간다

왜인지는 미스터리지만 어찌 됐든 제시간에 나가려면 잘 안된다

그래서 1~2분 정도 빠르게 해 두고 그 시간에 맞추어 나가면 틀림이 없다

물론 빠른 건 알고 있는데도 그 시계의 시간만 보고 나가게 된다


어느 날부턴가 시계가 조금씩 삐끗 대기 시작했다 알람은 원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12시가 되면 자기 마음대로 울린다 알람 설정을 꺼놔도 듣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시끄러워서 불편했는데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나름 장점도 있다

뭔가에 집중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12시만 되면 울리는 그 녀석 때문에 시간을 알게 된다


그동안 잘 썼다 싶었는데 결국은 사달이 났다

그날은 이상하게 시계가 계속 우니까 둘째가 거슬러서 탁 쳤는데 그치지 않는다

짜증이 나니까 한대 더 치고 나갔다고 한다

집에 오니 시계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하고 툭 쳤더니 다시 끔뻑거리며 LED 등이 켜지고 시간이 나온다

그러나 시간이 맞춰지지 않았다 8시간이나 오차가 나는데 그냥 멋대로 가고 있다


딸이 불편해서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시계를 주문했다

시계를 쳤던 둘째가 시계를 붙잡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때려서 니가 고장이 났네!"라고 하니까 LED는 꺼져있는데 소리만 '삐삐삐' 조그맣게 울렸다

"이거 다시 켜지려나 봐" 그랬더니 둘째가 소오름 한다

"내 말을 듣는 거야?"

"언니가 사과하니까 시계가 힘을 내나 봐 자기 괜찮다고"


조금 있으니 LED가 다시 켜진다 그리고 맞지 않는 시간이 흘러간다

이건 마치 시계가 이별을 준비하는 듯하다

고장이 났는데 최후의 순간까지 힘을 짜내어 작별을 고하는 것일까

강산이 몇 번 변할 오랜 기간 동안 같이 했다


다음 날 주문한 시계가 와서 이제 낡은 시계는 치우려고 만지니 이제는 정말로 완전히 고장 났는지 LED가 더 이상 켜지지 않았다

문제는 새로 산 시계다 불량이었다 건전지를 넣어도 안되고 아예 작동하지를 않는다

그래서 반품하고 다시 주문하고 이번에는 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숫자가 제대로 켜지지 않고 또 불량이다

역시나 반품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물건을 구매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말없이 죽어있는 시계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별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인가


사물에도 정이 붙으면 쉬이 이별하기 쉽지 않다

난 사물이라도 정이 들면 마르고 닳도록 쓰지 잘 바꾸지 않는 편이다

늘 그 자리에서 시간을 알려주던 시계가 없으니 허전했다

물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보내기 미안함이 드는 건 왜일까

마지막까지 켜졌다 꺼졌다 하는 걸 봐서 그런가

마치 이별을 하기 위해서 뜸을 들이는 듯 보였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이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그 후폭풍이 더 힘든 거 같다

안녕이라고 말하고 마침표를 찍어야 끝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는 그렇게 제 할 일을 하고 이별을 고했다

오랜 시간 고생했다

이제는 너를 대체할 녀석을 허락해 주겠니

왜 오는 것마다 불량인 거니

괜히 죽어있는 시계에 대고 혼잣말을 매일없이 해봤다



#시계

#이별

#뜸들이다

#일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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