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온정
세상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어떤 힘이 좀 더 따뜻하게 세상을 움직인다면 아이들이 혹은 우리가 좀 더 살 만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결국은 그 힘은 누군가의 온정이 모여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야근하느라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든 막내가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함께 잠실 쇼핑몰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기 빨려서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길을 물어본다.
"10번 출구가 어디예요?"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지가 않는다.
"잘 모르겠네요. 어디를 가시려고 하시는데요? 우린 쇼핑몰 안에서 나왔는데 번호는 못 봐서요."
"친구들을 10번 출구에서 보기로 했어요."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쇼핑몰 쪽으로 가신다. 할머니가 가는 쪽을 근심스레 보다가 지하철로 향하여 발길을 돌리는데 가게 간판에 가려진 10번 출구가 보여 황급히 그 할머니를 쫓아갔다.
"엄마 이렇게까지?"
"저 안에 들어가면 복잡하잖아 알려줘야지 힘들잖아."
"하긴 나도 복잡하다고 느끼니까."
"할머니 걸음이 빠르시네 따라잡을 수 있을 거 같아 뛰었는데 인파에 가려지면서 갑자기 사라졌어. 잘 찾으시려나."
"어쩔 수 없어 가자! 엄마는 오늘 본 중에 가장 빨리 움직였어."
"그래 가자 다시 나와서 잘 찾아야 할 텐데."
"알아서 하시겠지. 덥다. 엄마, 나 요즘 예민해져서 사람이 앞에 막아서면 짜증부터 나는데, 엄마를 보고 오늘 또 하나 배웠어. 세상은 살만하구나!"
"네가 직장에서 힘이 들어 그렇겠지."
"얼마 전 친구가 놀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데 기사님이 친구를 보고 지쳐 보이고 피곤해 보였다고 하면서 사탕을 줬대. 그래서 난 그걸 먹었어?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요즘 그런 거 먹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라잖아. 내가 그랬더니 친구는 난 사탕 받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아직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낭만을 깨버렸네! 하는 거야.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잖아. '마음만 감사하게 받고 먹는 거는 조심해야지'라고 말했어."
"에고 우리 딸 어쩌다 이런 맘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이런 세상을 만든 게 어른들 잘못 같아서 짠하네. 그래도 조심해야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
뭔지 모르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가 애들에게 사람 조심하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걸까. 친절을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덫에 걸리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교육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을까. 기성세대로서 아이들에게 괜히 부끄러운 어른이 된 듯 마음이 불편하다.
뉴스에서 험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한숨이 나오는 건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 사람을 무조건 믿었었다. 하지만 살면서 그러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맘 같지 않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되면서 어른이 되어 같다.
길 가다 보면 사람들이 나에게 길을 잘 물어보는데 옛날에는 나이 드신 분이면 근처까지 같이 가면서 알려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어서 되도록이면 외면하고 걷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다 이렇게 사람을 못 믿는 세상이 되었을까. 나도 애들에게 항상 '사람이 제일 무섭고 경계해야 돼'라고 말하지만 씁쓸하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졌을까."
"딸!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려고 애써봐."
"출퇴근할 때 바쁜데 누군가 천천히 걸으며 앞을 막으면 괜히 조급해지고 짜증이 나."
"네가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동료일까지 하다 보니 피곤해서 그런 걸 꺼야.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도 저렇게 힘없이 걷겠지'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니. 그러면 마음이 덜 뾰족해지지 않을까."
"그게 잘 안돼."
"알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려 해 봐. 엄마도 피곤하면 걸음이 처지고 누군가의 앞에서 걸리적거릴 수도 있잖아. 언젠가 나이가 더 들면 그때는 의도와 상관없이 느려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을 거고."
"알았어. 엄마, 근데 엄마 나이 더 먹지 마."
엄마와 딸! 우리의 쇼핑은 짧게 끝났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막내와 오랜만에 나왔는데 가는 곳마다 엄마부터 챙기길래 훌쩍 커버린 딸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엄마, 업어줘" 하면서 팔을 벌리고 앞에서 길을 막던 예쁜 아기가 생각났다. 너무 이뻐서 늘 업어 주었던 막내가 이제는 어엿하고 듬직하게 내가 사람들에게 밀려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에도 손을 잡고 길을 터준다. 세상이 이렇게 맞잡고 끌어주는 딸의 손처럼 좀 더 따뜻해지길 바라본다. 이타심.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나로부터 혹은 내 옆의 이웃으로부터 비롯되고 또 누군가에게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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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하는 마음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기성세대가 되기를 아울러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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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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