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부인과 딸, 사위 손잡고 여행 가요

여행이 주는 친밀함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by 그리여

소꿉놀이하듯 살던 딸이 어느 날 내게 제안하였다.

"엄마 시어머님이랑 우리랑 같이 여행 가자"

"엉?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지도 못했는데"

"엄마 내 친구도 그렇게 여행을 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대. 우리도 가보자"

"생각해 볼게"


놀라운 제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사돈이란 세상 불편하고 어려운 사이로 여기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할 때는 사돈끼리 한자리에 앉으면 좌불안석(坐不安席)이셨고, 나의 친인척들은 앉았다가도 시아버님이 보이면 벌떡 일어나셨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님 또한 사돈끼리 결혼식 이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우리를 통해서 그저 안부만 전해주라고 할 뿐이었고,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와 시아버님의 두 번째 만남이 다였기 때문에 변한 시대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내향성이 강한 성격의 나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딸이 원하기도 하고 변한 시대에 맞추어 여행을 같이 가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이 하기로 했다.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 일정으로 사부인과 만나는 날.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사부인은 성격이 밝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하게 대해 주셨다.

우리는 여행 내내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 재미있게 잘 다녔다.

언니가 없던 나는 사부인이 때로는 언니처럼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니 참 묘한 감정이었다.


사부인은 외손주를 돌봐주고 계신데 여행 내내 걱정을 하시면서도 홀가분한 여행에 만족해하셨고, 내가 식구들 식사걱정을 하시는 걸 보며 '얼른 벗어나야지 고생이시네요!' 하면서 언니처럼 챙겨주시고, 가는 곳마다 사부인은 며느리를 딸처럼 챙겨주시며 연신 사진을 찍으시고, 저기 서라 이리 와서 서봐라 하고 말하시면, 딸은 또 그 앞에서 아이처럼 즐기고 포즈를 잡는 걸 보면서 나는 생각도 못할 일에 놀라웠고 기쁘기도 한 신비한 감정이 일었다.

사부인이 딸에게 다정하게 대하시면서 챙기는 걸 보니 어려운 사돈이란 관계는 저 하늘에 뜬구름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차 안에서 딸이 시아버님과 통화를 한다.

"아버님 너무 감사해요 아버님이 예약해 주신곳에서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호텔도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통화 내용을 듣고 있다 보니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통화하지? 나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애교라곤 눈 씻고 찾아도 없는 내가 더군다나 시아버님이랑 저렇게 통화한다?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내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예쁜 딸이 나왔지! 하고 생각하면서 듣고 있는데

"서운하시죠"라고 사부인이 묻는다.

"아니요 너무 좋아요"

딸을 뺏긴 거라 생각할까 봐 그렇게 물어보신 듯하다.


나는 한 번도 시부모님과 저런 다정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물론 부모님과도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나와는 다른 성격의 딸이 고맙고 좋았다.


"어머님 저기 서 보세요 인생사진 찍어 들릴게요"

딸이 시어머니 손을 잡고 이끄는 걸 보면서 흐뭇했다.

"어머 예쁘다"사부인은 내내 감탄을 하면서 풍경을 즐기시고 딸과 사위는 우리를 챙기느라 바쁘다.

그런 애들이 고생한다고 걱정하면서도 사부인과 나는 예쁜 애들을 사진으로 담으며 이 시간을 박제한다.


애들이 어렸을 때는 우리가 챙기며 다녔는데 어느새 자라서 이렇게 우리를 챙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호텔에서 사부인과 사위가 한방을 쓰고 나와 딸이 한방을 쓰게 되면서 큰딸이 나와 이렇게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처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을 일찍 봐서 늘 꿋꿋하게 엄마옆에서 응석 없이 지내던 딸이었다.

그러면서 딸은 사위에게 어머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라고 미션을 주기도 하였다.


딸은 양가어머니를 챙기느라 힘이 들었을 텐데도 여행 내내 밝게 여행을 리드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이런 시간을 마련하여 준 딸과 사위가 너무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감수성이 풍부하신 사부인은 가는 곳마다 활기로 채워주셨고 우린 100% 여행의 묘미를 느끼며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할 만큼 신이 났었다.

어쩜 이렇게 멋진 가족이 생겼을까! 어려운 사돈 사이가 아니라 가족이란 생각이 드니까 한결 더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바위틈으로 도망치는 꽃게를 잡으시고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바위가 까매서 그런가 꽃게도 까맣게 보호색을 입었네

전시회를 즐기고 산책도 하고 검고 구멍이 슝슝 뚫린 돌들이 즐비한 바다도 보고 알뜰하게 남은 시간을 할애하고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러 애들이 예약한 곳으로 갔다.

예쁜 풍경과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사진도 찍고 음식도 나누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식당마당이 예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에 있던 세프가 언제 나왔는지

"제가 사진 찍어 드릴까요"한다.

"네 너무 고마워요" 딸이 핸드폰을 넘겼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무슨 관계이신가요?"

아마도 그게 궁금하여 따라 나온 듯싶었다.

"시어머님이랑 엄마예요"

하고 딸이 답하니

"와 불편하겠다 불편하겠어"

하면서 싱글싱글 웃으며 사진을 찍어준다.

"하나도 안 불편해요"

우리의 대답에 여전히 불편하겠다 불편해!라고 말하는 세프를 보면서 우린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아 더 있고 싶다 남이 해주는 밥 더 먹고 싶다"

"저도 너무 아쉬워요 남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지내니 너무 좋아요"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즐겼고 아쉬워했다.

손주들을 걱정하면서도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는 사부인을 보면서 아직도 소녀 같은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결혼의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딸을 결혼시키면서 알게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결혼을 하는 연령대보다 좀 일찍 결혼한 딸 덕분에 나는 일찍 사위를 맞았다.

딸은 우리 집에서 맏이였고 사위는 그 집에서 막내였다. 사돈과 나이 차이가 있었기도 하고 처음 치르게 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였던지라 다소 긴장하였지만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는 기쁨이 앞섰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바빠도 결혼준비를 자기들이 주도적으로 알아서 다 했다.

내가 도움을 줄 것이 뭐가 있나 물어봐도 괜찮다고 다 알아서 한다고 하니 별로 할 것도 없었고 딸을 결혼시킨다는 기분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결혼을 할 때는 직장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고 그 시절 결혼 문화에 따라 결혼 준비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면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른들이 가자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러면서 혼수를 마련하고 반지를 사고 그랬더랬다.

그러면서 결혼한다는 실감을 느꼈는데, 딸이 혼자서 알아서 하니 결혼시킨다는 실감을 하지 못하다가 결혼식을 치를 때가 되어서야 '아 이제 결혼을 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그 옛날 내가 결혼할 때 엄마는 많이 우셨지만, 나는 눈물 많은 딸이 울까 봐 울지 않았다. 다행히 결혼을 하고도 멀지 않은 곳에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축제같이 즐기며 식을 치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던 딸이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집 앞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딸이 오나? 왜 안 들어오지! 하는 착각에 빠졌고, 거실을 보면 뭔가 휑하니 빠진 자리가 크게 보였으며, 시시때때로 딸의 목소리와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 우리 식구들은 큰딸의 빈자리를 오랫동안 느껴야 했다.


차 한잔의 여유

제주의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할 만큼 화창하고 좋았다. 사부인과 아이들과 같이 걷던 검은 돌들이 즐비한 바다. 잊지 못할 멋진 여행지와 맛있는 식사. 한잔의 커피와 시원한 차를 음미하며 나누던 다정스러운 대화가 앞으로 나의 인생 노트에 소중한 기억으로 기록될 것이다.


여행 내내 아이들이 주도하여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편하기도 하였고,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남이 해주는 청소로 편안한 곳에서 잠을 자다 보니 걱정 없이 여행의 재미에 푹 빠졌더랬다.

물론 딸은 양가엄마들 챙기느라 힘이 들었겠지만 나는 여행을 온전히 즐긴 시간이었다.


여행은 어디를 갔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같은 곳이라도 누구와 동행했느냐가 더 뜻깊은 여행이 된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여행

#사돈 #사부인 #딸 #사위

#가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간이 흘렀어도 선명한 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