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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어도 선명한 잔상

안개 낀 날의 새벽

by 그리여

촥.. 촥.. 촥..

일정하게 들리는 스산한 소리

자다가 정체 모를 희미한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서 무슨 일인가 잠시 멍하다가 다시 그 소리에 흠칫 소름이 돋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소리가 주는 공포감이 섬뜩섬뜩하게 느껴진다.

나는 어려서도 별로 겁이 없었지만 이 소리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뿌옇게 어슴프레 밝기는 했어도 아직은 이른 새벽이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바깥은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있었고 앞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4개의 기둥에 지붕만 있는 건물에서 뭔가가 아른거려서 다가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기다란 뭔가가 천장에 매달려 있고 아저씨가 가죽끈 같은 것으로 일정하게 때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걸까? 호기심에 다가가다 깜짝 놀라 멈췄다.

뱀이닷

커다란 뱀을 묶어서 치고 계신 아저씨의 모습이 기괴스러워 뒤로 안 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체로 잘 잊고 그러는데 이 기억만은 어쩐지 깊이 새겨져서 사라지지 않는 건 왜일까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징그러운 뱀이라도 저렇게 죽이는 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새겨진 죽음에 관한 공평과 불공평이 처음 자리 잡은 일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아. 안개가 시나브로 동네를 덮으며 자욱하게 깔렸고 희끗희끗한 그 사이로 기다란 실루엣이 흔들리는 새벽 풍경이 선명해"


내편이 그 이야기를 듣다가 어린 시절 겪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내편 : 어렸을 때 아버지가 구렁이 한 마리를 잡아서 감나무에 매달아 뒀다가 작두로 듬성듬성 썰어서 감기 걸린 소에게 먹였어

나 : 소는 초식동물인데 뱀을 먹어?

내편 : 억지로 손으로 욱여넣어서 먹였지. 근데 구렁이를 매달아 두었던 감나무가 죽었어

나 : 감나무가 죽었어? 왜 죽었지 구렁이를 잡아서 묶어서 걸어놔서 그런가

두리 : 구렁이가 영물인가

나 : 근데 감나무가 왜 그렇게 쉽게 죽었지! 내가 감나무가 많은 동네에서 살아서 아는데 감나무는 잘 안 죽는데

내편 :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거 아닌가 중부지방이라 좀 춥잖아

나 : 계속 잘 살다가 뱀을 걸어놓고 난 뒤에 죽은 건 이상하지

내편 : 그렇긴 하지. 그래서 아버지가 나무 밑동만 남기고 잘랐는데 그 이후에 다시 살아났어

두리 : 신기하다 아빠


나 : 집 뱀 같은 거는 함부로 안 죽인다고 들었는데 집 뱀이었나? 근데 뱀을 먹은 소는 감기가 나았어?

내편 : 응 다 나았어

나 : 풀만 먹는 애들에게 보약을 먹인 건가. 사람이나 동물이나 단백질을 먹어야 하나. 어찌 되었든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내편 : 동내 야산아래 있는 우리 밭 뒤에 작은 산이 옛날에는 뱀굴 산이었어. 겨울에는 십리 안에 있는 모든 뱀들이 다 모인대. 서로 잡아먹지도 않고 모여서 겨울을 난다는 곳이야

나 : 맞아 거기에 뱀굴이 있었다며. 예전에 주말농사 지을 때 고구마 캐려고 비닐 벗기면 뱀이 한 마리씩 나오고 그랬잖아


내편 : 옛날에는 큰 뱀이 많았어!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 새참을 가져다주려면 그 밭을 지나가야 하거든. 막걸리를 들고 거길 지나가려고 하는데 커다란 뱀이 길게 일자로 누워 있는 거야! 큰 놈이 그러고 누워 있으니 지나갈 수가 없잖아 어렸을 때니까

두리 : 으 무서웠겠다 아빠!

내편 : 돌을 던져도 꿈쩍을 안 해요 이 놈이. 그래서 어떡하지 막걸리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생각하고 있는데 저 언덕 뒤에서 소가 달구지를 끌고 오니까 뱀이 스윽 산으로 사라지는 거야

두리 : 뱀이 소가 끄는 달구지가 굴러가는 땅의 울림을 느낀 거 아닐까?

나 : 애는 겁이 안 나는데 달구지 소리가 무서웠나?


내편 : 내가 조그만 돌을 계속 던졌지 무서워서. 그런데 안 가는 거야

나 : 그런데 소는 무서웠나

두리 : 아빠 내가 찾아봤는데 뱀은 귀가 안쪽에 있어서 발달되지 않았고 청력이 약해서 이런 진동이나 그런 걸 느낀대. 그래서 달구지 진동을 느끼고 도망간 거 같아

나 : 일리 있어

내편 : 꽤 멀리서 달구지가 오고 있었는데

두리 : 동물들은 느끼는 거지 아빠

내편 : 내 걸음 소리는 못 느꼈나

나 : 애가 걸어봐야 얼마나 울리겠어 그저 타박타박하는 정도겠지

두리 : 돌로 뱀을 맞혔어?

나 : 맞혔으면 덤비지 않았을까


두리 : 뱀들이 뭔가를 먹으면 소화시키느라 가만히 있는대. 아마도 뱀이 배가 부르지 않았을까

나 : 쉬고 있는데 어린 아빠가 와서 깔짝대니까 뱀이 그랬겠다 '아 자식 쉬고 있는데 왜 귀찮게 그러지'라고.

두리 : 아빠 그래도 다행이야 뱀이 배가 불러서 아빠를 공격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내편 : 그랬을까 너무 커서 지금도 생각하면 징그럽고 무서워

두리 : 돌 던지지 말고 피했어야지 아빠

나 : 그러게 애가 겁이 없었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머리가 빨갛고 몸통이 초록색인 뱀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내편 : 꽃뱀이겠지 약간 불그스름해. 피하는 게 상책이지


나 : 옛날에 할머니 친구가 어렸을 때 뱀을 만나적이 있었는데 피하려고 했는데 눈을 마주쳐서 들켰나 봐 근데 뱀이 배가 고팠나?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고 쫓아와서 무서워서 도망을 가는데, 지나가던 어르신이 옆으로 꺾어서 도망가라는데 좁은 길이라 꺾을 수가 없어서 나 살려라! 하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내편 : 독사만 머리를 치켜드는 게 아니야! 사람과 눈을 안 마주치면 도망가는데 눈을 마주치면 공격태세를 취한대. 싸리나무를 잘라서 쳐야지

나 : 왜 싸리나무지

내편 : 얇고 여러 겹이고 가늘어서 한번 치면 더 효과가 있겠지


나 : 옛날에는 물뱀도 많았어. 물 위를 샤샤삭 헤엄쳐서 다니고, 근데 요새는 천적도 없는데 뱀이 많아 사라졌어. 아닌가? 최대의 천적은 인간인가! 사람들이 많이 잡아서 그런가

내편 : 잡아먹을 개구리가 많이 없어서 그럴지도

나 : 먹이 부족이네

두리 : 나 동물에 대해서 이것저것 보는 거 좋아해서 깊이는 아니라도 얕게 조금씩 많이 아는 잡학다식이거든.

나 : 맞아 너 은근 관심이 많더라. 동물 관련 영상도 많이 보고 아는 것도 많더라

두리 : 그래도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 책에도 없어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후식 먹다가 어쩌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뱀 이야기로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징그러운 뱀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었고 그러다가 스리슬쩍 소화가 다 되었다.


내가 몰랐던 내편의 어린 시절을 살짝 엿본 거 같아서 더 재미졌나 보다



#뱀

#동물 #소달구지 #뱀굴

#고구마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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