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가 처음으로 떠난 느린 여행

하고 싶은 거 다 해

by 그리여

우리 여행 갈까

어디로?

남쪽으로 가자


애들이 여행 가자는데 동의하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첫째가 ktx예약을 하고 멋진 에어비앤비를 잡았다.

역시 행동파

그림으로 그린듯한 예쁜 숙소에서 바라보는 멋진 풍경에 여행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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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바람은 서울보다는 차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입김이 나왔는데, 역시 남쪽은 추워도 남쪽이었다.


첫째 특. 어디갈때 앞장서서

둘째 특. 빨리 오라고 하면 괜찮아 그러면서 천천히 가

니 언니는 성질 급해서 첫째로 나왔나 봐

언니를 보면 깜짝 놀라. 말만 하면 바로 다 대답해. 고민할 필요 없이 따라만 가면 돼.

맞아 그래서 우린 너무나 편안하게 다니는 거지. 언니는 고생하는데, 우린 행복여행을 하게 되는 거야

엄마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언니가 없었으면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언니가 고마워

그러게 너랑 한 살 차이인데... 맏이는 하늘이 내린다지. 니 언니가 딱 그런 사람이야

맞아 엄마. 언니는 어렸을 때도 우리 데리고 지하철 타고 할아버지 집에 데리고 가고 그랬어.

그랬지. 니가 언니 나이에 지하철을 혼자 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엄청 걱정했잖아

그랬어? 여하튼 언니는 대단해. 그래서 언니가 또 고마워

엄마도 그래. 언니는 엄마가 뭐 하기도 전에 알아봐 주니까 너무 편해. 그래서 고맙지


바람을 타고 내려온 햇살들이 물결 위에서 하늘에 뜬 별보다 더 찬란하게 반짝인다. 해변가에 오면 꼭 러닝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아지들이 주인을 끌어당기며 유유히 산책을 한다. 이런 것들이 언제부턴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듯한 사람들의 여유로운 걸음이 평화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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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셔

선글라스 없니?

응 안 갖고 왔어

어차피 넌 눈이 나빠 잘 안 보이니 눈감고 걸어. 엄마가 팔짱 껴줄게


그렇게 둘째를 데리고 걸어갔다. 큰애는 여전히 앞장서서 다음 일정을 찾으며 걸어간다.

앞장서가는 첫째에게 나와 둘째는 이구동성으로


고마워~~

뭐가? 그냥 난 할 수 있는 걸 할 뿐인걸


성큼성큼 앞서가는 첫째와, 걸음이 느린 둘째 사이에서, 앞을 봐도 든든하고, 뒤를 봐도 든든해서 흐뭇하게 미소 짓는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애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여행을 즐겼다.


애들이 어렸을 때는 내가 컴퓨터도 가리키고 어디 찾을 게 있으면 검색하고 챙겼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너무 편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벅차게 가슴에 차오른다. 훗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풀 겸 둘이 연차를 맞춰서 세 모녀가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막내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자기가 아빠 지킬 테니 걱정 말라고 하였다.

맛난 걸 먹을 때, 좋은 풍경을 볼 때, 두고 온 가족이 계속 생각났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에 맞게 애들이 하고 싶다는 건 다 하게 하면서 제대로 휴식을 했다. 야경을 보고 해변가에서 밤산책을 하고, 숙소에서 족욕을 하며 밤바다를 바라보며 빛멍을 했다.

첫째가 갑자기 MBTI를 하라고 해서 했는데 저번과 다르게 나왔다. T였는데 F로 바뀌었다.

무계획 속에 계획이 있어서 즐거웠다. 그 계획을 생각한 둘째와 행동으로 옮긴 첫째가 고마웠다.


물을 받고 족욕을 하고, 와인잔을 기울이며 생에 처음으로 세 모녀가 여행지에서 마주 앉았다.

무엇이 힘들었나. 좋았던 것은 무엇인가. 넘실대는 물결과 떼로 날아오르다 점처럼 앉아있는 갈매기무더기에 눈을 꽂고, 우리의 이야기는 함박꽃처럼 피어났다. 어렸을 때 했던 생각과 어른이 된 후의 생각들. 알지 못했던 힘든 순간들을 끄집어내었고, 세대를 막론하고 직장의 스토리는 왜 그렇게 변하지 않고 똑같은 것인지. 직장에서의 힘듦을 말로 풀어내며 공감해 주고 다독여주며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 만들어버린다.

딸들은 시간이 없어 제대로 못 본 드라마도 챙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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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지고 참으로 오랜만에 늦은 밤까지 버텼다. 속에 쌓인 감정들을 쏟아내니 허기져서 야식으로 첫째가 꼬들꼬들 맛나게 끓인 매운 라면을 먹는 것 또한 빠질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평소 마시지도 못하는 와인을 세잔이나 마셨는데도 정신은 잠들지 못하고, 흐르는 시간의 아쉬움에 자꾸만 밤하늘에 있는 별을 헤었다. 아마도 딸들이 "엄마가 항상 바쁘게 사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라고 하는 말이 설레어서 더 잠을 못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밝은 빛을 뚫고 빛보다 더 반짝이는 세 개의 별이 마치 나의 예쁜 아이들처럼 유난히 더 초롱초롱하다는 생각을 하며 꿈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밤에 켜진 조명의 밝음을 뚫고 빛나는 별을 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신비한 경험이란 생각이 들게 하는 게 여행의 묘미인가 보다.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고 밥을 먹으며 다음 끼니를 의논한다.

모든 건 그 순간에 마음 가는 대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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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게임방으로 들어갔다. 포인트에 불이 켜지는 조끼를 입고 미로 같은 방 안에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레이저총으로 가차 없이 상대를 쏜다. 물론 게임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있으면 같이 진행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있다. 20살 남자애들이 여러 명 있어서 뜻하지 않게 더 재미있게 게임이 진행되었다. 나는 상대의 점수를 올려주는 모두의 희생양이 되었다. 발 빠른 아이들은 어느새 나의 뒤에서 공격한다.

깨꼬닥.. 조끼의 불이 꺼진다.

레이저총도 제대로 못 쏴보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물론 불사조가 되어 잠시 후에 다시 살아나지만 금방 또 공격당한다. 그래도 적중율은 아주 좋은 점수를 받았다. 비록 몇 번 못 쏴봤지만... 아이들과 이리저리 탐색하며 어쩌다 마주치면 서로 놀라 깜짝 놀라서 총을 쏘는데, 이미 죽어있어서 레이저가 쏴지지 않아서 깔깔거리고 웃으며 다시 숨어서 애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요령을 익히며 살아나기를 기다린다. 점수판을 확인하던 딸들은 상대의 실력에 놀라고, 그 와중에도 엄마가 꼴등은 면해서 그게 더 재미있다고 깔깔깔 웃었다.


아이들 덕분에 어렸을 때도 하지 않았던 일을 반백이 넘어 생각지도 못했던 게임을 했다. 여행은 불확실함과 뜻하지 않았던 일이 우후죽순처럼 툭툭 나와줘야 제맛이지


밥 먹은 게 다 소화되었다. 간식을 먹으며 다음 끼니를 또 의논한다. 먹으면서 먹는 걸 찾는 게 국룰이지. 여행은 계획 없이 후다닥 이루어졌지만 모든 순간, 모든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추억을 저축하며 다녔다.


막내와 빠진 내편과 사위의 빈자리에 아쉬움을 한껏 토해내며, 온 가족이 다 같이 여행을 하자며 훗날을 기약했다.


일단 우리는 뭘 많이 안 해서 재미있기는 했어. 여유롭고 좋았어. 상당히 T적 발언으로 소감을 담담히 나눈다.

분명 F였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T로 바뀐 게 신기하다는 말을 나누다가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별 걸 다 닮는다고 서로 바라보며 웃는다.


엄마 우리 너무 좋았잖아. 다음에는 어디가?



#세모녀 #즉흥적 #여행

#공감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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