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첫 만남

by pomme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탄뎀(Tandem)에서였다. 휴학 후 한창 워킹 홀리데이와 외국인 친구 사귀기의 꿈을 꾸며 탄뎀을 기웃거렸는데, A는 어느 날 탄뎀의 친구 추천 리스트에 뜬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수염도 기르고 남성미가 풀풀 풍기는 흑백 셀카와 대조적으로 프로필 멘트는 상당히 귀여웠다. "8월에 한국으로 여행을 가요! 길을 알려줄 친구가 필요해�"라고 이모티콘까지 붙인 한국어 프로필 멘트였다. 아마 번역기를 썼겠지? 지금까지 탄뎀에서의 대화는 취미, 좋아하는 노래, 여행 가본 곳 등 뻔한 주제로 시작해서 소재가 고갈될 때쯤 어느 한쪽이 잠수를 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었다.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인스타그램을 공유하는 정도? 그러나 주로 인스타그램을 맞팔하는 동시에 탄뎀에서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렇다고 DM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 곧 온다고 해서 그런가, 한국 홍보대사가 된 것 마냥 서울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 한국에서 경험하면 좋을 것들을 잔뜩 알려주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추천하며 대화에는 자연스레 나의 결이 묻어났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나 삶의 방식까지 대화가 이어지면서 A와 나는 좀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탄뎀은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메시지를 보내서 하루에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가 수십 통씩 쌓이기 때문에 나는 알림을 꺼뒀고, A도 같은 이유로 알림을 꺼둔 듯했다. 그래서 종종 2-3일이 지나고 나서야 답을 할 때가 있었다. 어느 날 A가 이틀 후에 답장을 하고 답이 늦은 걸 미안해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 혹시, 네가 싫지 않다면 인스타그램에서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을래?"




인스타그램으로 넘어와 대화를 한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A는 한국에 왔다. 마침 그때 전 남자친구도 한국에 와 있던 참이었다. 나랑 사귀고 있을 때 전 여자친구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으면서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욕심을 부려서 최악의 결과를 만든 나쁜 놈이었는데, 어쨌거나 마지막으로 결판을 내기 위해 한 번 만나기로 했다. 이 악연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작 지난 몇 달간 대화가 잘 통했던 A가 한국에 왔는데도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었다.


일요일 오후, 안국. 가장 좋아하는 카페인 <onion>에 앉아 있었다. 마주하고 있던 사람은 전 남자친구. 신뢰가 깨질대로 깨져버린 탓에 더 이상 어떤 관계도 기대할 것이 없었지만 대화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Joke"를 그렇게나 좋아하던 전 남자친구는 그날도 joke를 남발하며 처지려는 분위기를 아주 가볍게 날려버렸다. 그래서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을 강렬하게 증명하기 전까지는.




카페에서 나오니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렇게 맛있다는 맛집이라 해서 따라가 보니 광장시장 육회 비빔밥 집이었다. 외국인한테 육회 비빔밥 맛집을 소개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계속 농담 따먹기를 시전 하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서 청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그건 최악이 아니었다.


을지로 3가 역 라커에 두고 온 짐이 있었는데 주변에 노숙인들이 많아 을지로 3가 역까지만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런데 그놈은 지금 친구들과 클럽을 가기로 약속했다면서 가까운 을지로 4가 역으로 쏙 들어가더니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가는 걸 보고 가 달라는 게 아니겠는가? 담담하게 마무리를 지으려던 내 마음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어떻게 저런 놈을 좋아했을 수 있지? 왜 저런 놈한테 내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쓰고, 힘들어했지? 내 마음은 그놈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나의 시간에 대한 허무함으로 무너졌다.


당시 코로나가 심할 때라 막차도 빨리 끊겨서 을지로 3가 역에 도착하니 막차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막차를 놓친 것은 놓친 것대로 일이지만 역사 운영 시간이 종료되면 다음 날 새벽까지 라커의 짐도 찾을 수 없기에 조급해졌다. 행인은 없고 노숙인들 몇 명만 있는 역사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패닉이 왔다. 역사 직원분들은 당황한 나를 발견하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어주시며 라커에서 짐을 찾는 것을 도와주셨다.




심야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온갖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러다 다른 사람도 아닌 A가 생각나서 DM을 보냈다.


"오늘 조금 속상한 일이 있었어."


A는 시차 적응이 아직 안 되었는지 늦은 시간에도 빠르게 답을 했다. 구구절절 전 남자친구 얘기를 하진 않고 '오늘 만난 어떤 친구와 이런 일이 있었어' 정도만 이야기를 했다.


"많이 속상했겠다. 내가 그 사람한테 화가 다 나네. 밤이 늦어서 걱정되는데 네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연락하자"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 반이었다. 전철을 놓치지 않았으면 이미 한 시간 전에 도착했을 텐데. 도착했다고, 너무 고맙다고 DM을 보내니 꽤 긴 메시지가 하나 왔다.


"이제 네가 안전하게 도착한 걸 알았으니 나도 잘 수 있겠다. 근데 그전에, 절대 너를 깎아내리거나 네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마. 누구도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니까. 너무 많은 생각하지 말고. 내일은 새로운 날이니까!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면서 마음 좀 가라앉히고 잘 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줄이야. 따뜻한 그의 마음으로 아픈 내 마음을 덮고 잤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그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말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