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다급한 듯한 메시지에 잠이 깼다.
“무슨 일이야?”
“눈이 심하게 충혈됐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봤다. 그런데 오늘은 하필 광복절. 웬만한 약국과 병원은 문을 닫을 터였다. 휴일 지킴이 약국이 있다는 것도 A를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런데 휴일 지킴이 약국은 몇 개 없는 데다 이런 상태의 그에게 모르는 장소를 찾아가라고 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당시 망원역 근처에 살았고 그는 상수역 근처에서 머무른다고 했으니 전철로 한 정거장 거리였다. 고민 끝에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제안을 했다.
“집에 인공눈물이 몇 개 있는데 그거라도 갖다 줄까?”
“정말? 너무 고마운데 너가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
“괜찮아, 너 숙소 주소 알려주면 주변에 도착해서 연락할게.”
충혈된 눈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인공눈물 몇 개를 주자고 아침부터 모르는 사람 집에 찾아간다고 하다니. 전날의 감동이 크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무모한 결정이었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이 오프라인에서는 어떨 줄 알고!
“에어비앤비 바로 아래에 있는 CU 앞이야”
“내려갈게!”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쌓은 내적 친밀감과 달리 막상 현실에서 마주하자니 긴장되기만 했다. 잠깐 숙소에 들렀다 가라고 하는데 문을 열어주는 그의 눈빛도 어딘가 긴장돼 보였고 낯선 문으로 내딛으려는 내 발걸음에도 망설임이 잔뜩 실렸다.
“혹시 아침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러더니 그는 냉장고에서 요거트, 빵, 잼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Help yourself, please”라고 권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우리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한 와중에도 빨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유심히, 긴장한 듯이 쳐다보는 그가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와 주기까지 해서 고마워. 사실 이렇게까지 부탁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너에게 메시지를 보냈어. 근데 너가 현실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이상한 사람일까 봐 많이 걱정하긴 했어.”
“아냐, 나도 오면서도 같은 걱정을 많이 하면서 망설였어. 그런데 확실히 어제 대화했던 게 컸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리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즐겁고 풍성한 대화를 했던 것처럼. 휴일인데 일정도 없었고, 어제 그런 일도 겪은 상태에서 약속 없이 혼자 집에 있기 싫어 두 번째 도발을 했다.
“혹시 오늘 일정 있어?”
“아니! 한국 여행하는 동안 북한산이나 남산을 가볼까 생각은 했는데 구체적인 일정은 없어.”
“그럼 오늘 나랑 같이 돌아다닐래? 내가 서울 구경시켜 줄게.”
그도 조금 마음을 놓았는지 “그럴까? 좋아!”라고 답했다. 구경시켜 줄 만한 곳을 물색하다가 다시 ‘광복절’, 그리고 ‘월요일’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문화재 중에 월요일이 정기 휴일인 곳이 많은 데다 다른 서울의 색이 잘 살아있는 장소들도 광복절이라 문을 닫는 곳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덕수궁까지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그렇다면 입장하지 않아도 되는 곳 중 ‘이게 서울이야!’라고 보여줄 만한 곳이 어디 있지? 고민 끝에 DDP를 시작으로 종로구에서 내가 좋아하는 곳, 관광객이 가보면 좋을만한 곳, 그리고 내가 가보고 싶던 곳을 적절히 조합해서 코스를 짰다. 지금 생각해 보면 A에게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을 빙자해서 내 사심을 채우고 싶었던 코스가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둘 다 마음에 들어 했지만!
어렸을 때 가봤던 기억으로는 DDP가 건물 자체만으로 가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내부에서 열리는 전시나 행사가 별로 없어 생각보다 휑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하게 됐다. 다음 장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네 중 하나인 삼청동! 작은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삼청동 특유의 분위기도 있고 북촌까지 걸어 다니며 한옥도 구경할 수 있으니 관광객이 가기에도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한옥에서 빙수를 먹을 수 있는 <삼청빙수>에서 빙수를 먹을 생각이었다. 한옥의 분위기도 느껴보고 한국의 디저트도 맛보고!
DDP에서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데 A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한국 전철 좋다.”
“어떤 게?”
“에어컨이 있잖아.”
“파리 지하철은 에어컨 없어?”
“응.”
“그럼 더우면 어떻게 해?”
“음… 그냥 땀 흘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던 순간이었다.
삼청동 골목길은 그날도 예뻤다. 울창한 나무도, 미소가 지어지는 벽화도,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좋았다. A도 두리번두리번 구경을 하며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우선 휴일 지킴이 약국에 들러 그의 안약을 사고 <삼청빙수>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유명한 집이란 건 알았지만 웨이팅이 이렇게 길게 늘어서 있다니… 8월의 한낮에도 불굴의 의지로 웨이팅을 하는 사람들에게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면서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바깥과 내부의 온도차를 느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창가 측 명당자리가 눈에 띄었다. 안쪽에 있어서 카운터에서 거리가 있으면서도 창 밖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명당! 명당을 차지하고 있던 일행이 주섬주섬 정리를 하는 게 5분만 기다리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A도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유심히 지켜보았고, 이미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말할 것도 없이 명당자리를 노리기로 합심했다. 음, 이런 면에서도 잘 맞는데?
A는 가장 기본적인 걸 맛보고 싶다며 팥빙수를 시켰다. 빙수와 음료가 나오자 A는 뭔가를 꺼내서 내게 선물이라고 내밀었다. 오늘 아침부터 와준 게 너무 고맙다면서. 더운 날씨에 조금 녹았지만 파리에서 온 초콜릿이었다! “Noisette”, 그러니까 헤이즐넛이 든 초콜릿 었는데 나 같은 초콜릿 귀신에게 딱 맞는 선물이었다. 하나를 입에 넣어보니 헤이즐넛의 고소한 풍미와 부드러운 밀크 초콜릿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호주로 떠날 때까지 이 초콜릿을 냉동실에 보관하며 두고두고 아껴먹었고 상자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빙수를 먹으며 더위를 식히다가 갑자기 이상형 얘기가 나왔다. A는 대화가 잘 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대화가 잘 통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특히 가벼운 얘기뿐만 아니라 지적인 대화, 심오한 대화도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것 말고도 이상형과 연애관에서 겹치는 게 이것저것 많아 둘 다 “나도!”를 연신 외쳤다.
그날의 마지막 코스는 혜화! 혜화는 언제 가도 편안하고 정감 있는 곳인데 아직 가보지 않은 낙산 공원에 가고 싶어서 코스에 슬쩍 끼워 넣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 메뉴를 고르는데, 이번에도 한국에서 먹어볼 만한 음식 중에 매운 것을 못 먹는 그의 입맛에 맞을 만한 메뉴를 찾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샤브샤브! 한국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호불호를 탈 것 같지 않았고, 사실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나온 샤브샤브는 야채가 산더미 같았다.
“이거 완전 vegetable mountain인데? 프랑스어로는 뭐라고 해?”
“Montagne de lagume?”
실없는 말에도 웃으며 고기를 한 점 한 점 넣어서 익히는데, 샤브샤브를 먹으면서 월남쌈을 안 먹어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이거 라이스페이퍼에 싸 먹으면 진짜 맛있어!”
라이스페이퍼를 샤브샤브 국물에 적셔서 야채와 고기를 올리고, 소스까지 넣어 싸 먹는 법을 알려줬지만 역시 너무 고난도였다. 하긴 라이스페이퍼는 젓가락으로 조심조심 여며도 찢어지기 일쑤고, 숟가락에 안착시킨 후에도 생각보다 너무 크게 만들어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터지기도 하니까. 그래서 평소라면 안 할 짓을 또 했다.
“너가 괜찮다면 먹는 방법 한 번 보여줄게”라고 말하고 월남쌈을 하나 싸줬다. 다행히 그는 샤브 월남쌈의 맛에 감동한 듯했다.
오늘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 인생네컷도 찍으러 갔다. 인생네컷까지 찍었으니 한국 문화 체험 제대로 시켜줬네.
사진을 찍고 골목을 쭉 따라 올라가는 길은 낙산공원. 후텁지근한 공기와 싸우며 힘겹게 올라갔다. 어느 순간 성벽이 보이고, 성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웠다. 둘 다 올라오기까지의 수고를 잊은 채로 야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나 12시간 넘게 함께한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아름다운 밤이야’.
A와 함께한 월요일은 아름다운 야경을 남긴 채로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