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눈꽃이 끝없이 내려오면
6시 30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비에이/ 후라노 투어를 하는 날이라 7시 40분까지는 삿포로역 북광장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삿포로역 북광장은 이른 시간임에도 한국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은 하얀 설렘을 안고 버스에 탔고, 그렇게 버스는 눈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에 잠시 정차했는데, 파란 빛깔의 휴게소 건물과 소복하게 쌓인 눈이 어우러져 동화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1층 화장실이 붐벼서 2층으로 올라갔는데 나오는 길에 사람들이 없는 눈길을 걷는 호사도 누렸다. 엄마와 나는 신나서 서로를 찍어주기 시작했고, 짐벌 사용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엄마는 잔뜩 신이 난 채로 내 영상을 찍어줬다. 휴게소도 이렇게 예쁜데 앞으로 투어를 할 곳은 얼마나 더 예쁠까, 하는 기대로 마음이 들떴다.
첫 번째 관광지는 흰 수염 폭포였다. 사실 나는 청의 호수를 정말 보고 싶었는데 청의 호수는 지금은 다 얼어 투어 일정에서 빠졌다고 했다. 흰 수염 폭포는 영하 10도에서 20도까지 내려가는 홋카이도의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데, 그 이유는 대설산에서 흐르는 온천수의 열기 때문이다.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어는 모습이 할아버지의 흰 수염과 닮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흰 수염 폭포는 투명한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인스타그램에 종종 뜨는 홋카이도의 빨간 자판기도 여기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이미 그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겨우 자판기일 뿐인데도 하얀 눈이 쌓였다는 이유만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다니, 정말이지 눈은 하얀 마법이 맞는 것 같다.
그다음으로 내린 곳은 켄과 메리의 나무였다. 옛날 닛산 자동차 광고의 켄과 메리가 바라보았던 거대한 포플러 나무인데 원래는 밭끼리의 경계를 구분 지으려고 심은 나무였다고 한다. 사실 켄과 메리의 나무도 그렇고 크리스마스 나무도 그렇고 그냥 밭 한가운데 심어져 있는 나무가 만드는 풍경이 아름다워 관광지가 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곳에는 밭에 들어가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주의 문구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아무튼 켄과 메리의 나무에서 눈밭에 앉았다가, 눈을 머리 위로 뿌리기도 했다가, 하늘을 보는 척을 하다가, 눈을 다소곳이 내리깔다가 하면서 사진 놀이를 실컷 했다. 함께 오는 여행의 묘미는 사진 찍어주기니까!
일본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한다는 비에이는 아이누 어로 '기름지고 탁한 강'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화산재 덕분에 땅이 비옥해졌다고. 가이드 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홋카이도는 16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땅이 아니었다고 한다. 원래는 일본인들과는 상당히 다른 특성을 가진 아이누 족이 사는 땅이었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에 러시아가 홋카이도를 점령하여 열도로 내려올까 봐 일본에서 먼저 침략해서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다. 심한 탄압과 강제 혼혈화 등으로 인해 당시 60만에 달했던 아이누 족들은 현재 2~3만 명밖에 남아있지 않는다고 한다. 새하얀 눈, 기모노, 온천이 어울리는 홋카이도는 막연하게 생각하기에 가장 일본다운 곳인 줄 알았는데 탄압의 역사 위에 세워진 땅이라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서 비에이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비에이는 카레 우동 협회가 있을 정도로 카레 우동이 유명하다. 비에이 지역에서 난 채소와 우유를 사용해야 하는 등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고, 그만큼 자부심도 있다고 한다. 새우튀김 덮밥으로 유명한 '쥰페이'도 비에이에 있지만, 우리는 현지에서 유명한 음식을 조금 덜 붐비는 곳에서 즐기고 싶어서 카레 우동과 새우튀김이 모두 있는 '코에루'로 향했다. 코에루로 마음을 정하고 버스가 정차하기를 기다리는데, 여기저기서 카레 우동, 코에루, 이런 말이 들리더니 가이드님도 코에루는 약간 경쟁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런 게 있으면 무조건 뛰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좀비 떼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처럼 코에루로 뛰어갔다. 아, 우리만 뛴 것은 아니었다. 코에루를 노리는 열댓 명이 좀비처럼 뒤를 쫓았다.
매일 러닝을 한 덕분일까,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창가 바로 앞의 명당자리를 잡았다. 새우튀김은 바삭했고 카레는 정성이 담긴 맛이었다. 식당 분위기도 아늑한 게 마치 일본 시골 할머니집에 와서 할머니가 해주는 가정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서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빙을 하길래 워킹 홀리데이를 하나 싶었다. どの国から来ましたか(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ワーキングホリデーをしていますか(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냥 엄마와 둘이 함께하는 평온한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혼자서 아는 일본어는 다 뱉어보며 쫑알쫑알 거리는 나를 보며 엄마는 내게 "넌 어디를 여행가도 잘 다니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음으로는 너무나도 유명한 크리스마스 트리로 향했다. 비에이/ 후라노 투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지만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는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맞닿아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밭 한가운데 자란 나무일뿐인데, 사진을 찍어보니 기가 막히게 나와서 사람들이 자꾸 몰려드는 거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고 밭을 침범해서 밭이 망가지기도 하고, 자동차도 많이 지나다니면서 매연에도 많이 노출되어 밭주인 입장에서는 나무가 고와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년 12월부터 이놈의 나무를 베어버린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트리는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슬픈 운명에 처했다. 이렇게나 유명해졌으면 여행사로부터 일정 금액을 지급받거나 하는 식으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면 좋을 텐데! 아무튼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수와 건승을 빈다.
해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할 무렵, 자작나무 숲에 도착했다. 자작나무 숲의 시작은 '탁신관'이라는 사진 갤러리였다. 도쿄 출신의 사진작가인 마에다 신조는 홋카이도로 옮겨온 후, 홋카이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 유명해진 사진작가이다. 겨울에 더 하얘 보이는 자작나무 사이를 걸으니 번잡한 도쿄를 떠나 자작나무 숲을 산책하기를 택한 사진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몇몇 자작나무에는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와 같이 눈으로 만든 귀여운 조형물이 붙어 있어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시간이 조금 남아 특별한 기대 없이 탁신관에 들어갔는데, 홋카이도의 풍경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나 싶었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고요와, 생명력과, 절제미를 만끽하며 갤러리를 거닐었다.
해가 저물어가고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한 닝구르 테라스의 '닝구르'는 아이누 어로 특이한 사람들, 그러니까 요정들이라는 뜻이다. 15채의 오두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오두막은 공방으로 사용된다. 동화작가인 쿠라모토 소우의 작품에서 나온 '닝구르'에서 유래된 닝구르 테라스는 아기자기한 오두막에 따스한 빛깔의 조명까지 반짝여서 더욱 사랑스럽다. 하지만 다른 블로그에서 누군가 언급한 것처럼, 요정들이 살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바글바글하다. 실제로 오늘 여러 군데의 관광 스팟에 가 보았지만 닝구르 테라스처럼 관광객으로 소란스러운 곳은 없었다. 그래서 사진 찍기도 꽤나 어려웠다. 어쩌면 요정들은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깊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그들만의 불을 밝힐지도!
가는 길에서는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12시간에 가까운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핫팩을 꼭 쥔 채로 곯아떨어졌다. 삿포로역에 도착했는데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었다. 길치에 기억력마저 나쁜 나지만 궁지에 몰리니 생존 본능이 깨어나 아침에 왔던 길을 톺아보며 돌아갈 수 있었다. 거의 눈보라가 불던 후라노와 달리 삿포로의 저녁은 평온했다. 눈이 온 후라 하늘은 뿌옇고 땅은 하얀 탓에 날이 칠흑같이 어둡지도 않았고. 우리는 설국으로의 여행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하늘에서는 다시 눈이 내린다. 여기는 설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