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salty france.
낫 솔티 프랑스
심심해라고 말하면, 그럼 소금 찍어 먹어라고 답하는 것이 어렸을 적 우리 집의 유머였는데 습관이 무섭다고 재희나 태오가 심심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소금 찍어 먹어.라고 대답하고 혼자 히히 웃는다. 남편이 그게 뭐야. 하는 표정으로 아재 개그라 놀려도 나는 이 쿵짝 유머가 좋다.
심심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눈과 귀를 한 번에 사로잡는 강렬하고 화려한 재미보다는 은근하게 웃기고 수수하게 기억에 남는 재미가 좋다. 짜고 맵게 혀를 때리는 것보다 슴슴하고 따뜻해서 오래 질리지 않는 맛이 좋다. 심심하다는 이 두 가지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말.
프랑스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딱 한 가지 수식어를 쓸 수 있다면 심심한 이라고 적고 싶었다. 유명 관광지도 맛집 정보도 없는 조금 심심한 프랑스 여행기. 거기에서 시작해 낫 솔티 프랑스라는 콩글리시 조합의 단어를 만들어 내고는 히히 웃으며 괜히 좋았다.
셰익스피어 서점보다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부부가 서로의 구여친 구남친이던 시절에서 시작해, 우리가 낳은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될 때까지 우리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 해온 영화가 있다.
우리가 스물여섯이던 해의 여름에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주연의 1996년 영화- 를 함께 본 것이 계기가 되어,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은 날이 되면 같이 /비포 Before/시리즈 보는 것이 우리만의 행사가 되었다. 큰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던 날 부부는 잔치를 하는 대신 처음으로 셋만의 여행을 떠났다. 겁도 없이 아이를 띠에 매어 안고 대관령 목장길을 두 시간이나 걷고 녹초가 되었는데 그때는 모든 것이 참 좋았다. 뜨거운 해에 실컷 얼굴을 그을리며 걸어서 만든 땀을 싱싱한 산 바람에 식히는 기분이란.
그날 밤 아이는 마치 오늘을 위해 준비했다는 듯이 처음으로 뒤집기에 성공했고 젊은 부부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호했다. 아이를 토닥여 재우며 손을 꼭 잡고 다시 본 영화가 바로 /비포 선셋 before sunset/ -동 감독 동 배우의 2004년 작- 이다. 신기하게도 둘째 아이가 생긴 해에는 시리즈의 속편인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년 작- 이 (무려 십 년 만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밤 영화를 보았다. 그럴 리 없지만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이 우리와 함께 시간을 걸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은 두 번째 시리즈인 /비포 선셋/에서 제시와 셀린이 재회하게 되는 장소이다. 유명 관광지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유로 셰익스피어 서점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서점은 생각보다 더 작고 더 낡고 많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 정도만 두고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서 책등에 적힌 프랑스어를 내 까막눈으로 더듬어 읽을 정도의 여유도 충분치 않았다. 관광객들은 한 줄 기차처럼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 앞 카운터에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 적힌 에코백을 하나 사서 빠져나갈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꼭 책을 한 권 사겠다는 의지로 짧은 한 줄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요리조리 몸을 돌려 길을 비켜주는 방식으로 책을 둘러보았다. 결국 산 것은 아이들에게 선물할 그림책 두 권이었지만, 그나마도 곤히 잠들어 버린 아이들 때문에 남편과 아이들은 차에 머물러있고 나 혼자서 나섰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계산을 하려고 줄에 서있을 때 막 아이들과 남편이 서점에 들어섰는데 아이들이 그림책을 구경하고 싶어 해서 조금 더 머물렀다. 유일하게 의자가 있는 공간은 그림책 코너인데 어른과 아이 딱 두 사람만 앉을 수 있는 폭의 벤치 하나가 이 그림책 코너 뒤에 마련된 작은 부스 안에 있다. 당연히 자리 경쟁이 치열해서 재희에게 책 한권만 읽어주고는 다시 계산 줄에 합류했다. 태오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꼭 영어로 인사를 하고 싶어 했는데 이번에도 땡큐. 씨유 어게인. 했고 무표정의 점원은 녀석의 인사에 고맙게도 예쁜 미소를 지어주었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목이 마르다는 태오는 오로지 서점을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서점을 나오자마자 징징 거리기 시작했다.
마실거리를 사러 적당한 가게를 찾아 골목을 좀 걷는데 많을 것 같았던 카페테리아 하나가 눈에 띄지않는다. 구글맵을 켜고 걷느라 남편과 나는 정신이 없는데 태오가 문득 걷다 말고 한 곳에 우뚝 멈춰 섰다. 간판도 없는 이 가게의 그 유리창문에 아이스크림 그림이 그려져 있던 것. 구글맵이 다 무슨 소용인가 목마른 자는 스스로 우물을 찾는 법이다. 가게로 들어가 보니 커피도 가능해서 덕분에 모두 즐거워졌다. 태오에게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하나 쥐어주자 곧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 지금 우리의 행복은
셰익스피어 서점보다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이지.
선라이즈
sunrise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세 편의 영화 중에서 무엇이 제일 좋으냐 묻는다면 드라마가 좀 아프고 잔 슬픔이 묻어나도 /비포 미드나잇/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꽃 같았던 젊은 날의 연애가 그리운 것 또한 거짓은 아니지만, 우리 함께한 시간의 가장 좋은 순간은 역시 지금이다. 서로를 반씩 닮은 두 아이의 솜털 이마를 만질 수 있고 무게 없이 짐을 나누어 때 없이 기대고 끌어안을 수 있는 지금. 무엇보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열 배는 많아진 지금이 가장 좋은 것처럼.
2016 <집, 사람> P.168에서 발췌.
이 영화들에 대해 쓴 일이 있어 옮겨둔다.
불행한 화재가 일어났던 노트르담 성당은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르골 가게
센 강을 따라 길을 걷다가 우연히 오르골 가게를 만났다. 두터운 나무문을 삐그덕 열고 들어간 순간부터 회전목마가 돌고 발레리나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꼬마병정들이 또닥또닥 걷는 그 동화 속이었다. 나도 나였지만 재희가 푹 빠져버린 듯 하나하나 천천히 오르골을 연주하는 모습을 주인 할머니께서 너무나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
재희가 정말 고심 끝에 고른 것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OST,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가 담긴 상자 오르골이다. 나는 오래된 프랑스 영화 /밤의 문/의 추엽 autumn leaves 가 담긴 나무 오르골을 골랐다. 내가 오르골 손잡이를 돌리니 안경을 콧잔등에 내려쓴 할머니께서 라라라로 허밍을 해주셨는데 그 장면이 꼭 영화 같아서 다 같이 행복하게 웃었다. 너무 아름다운 노래이니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 제목으로 꼭 검색해서 들어보아요.라고 하셨다.
남편이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오르골에 푹 빠진 재희를 바라보며 센서티브 sensitive - 라 감탄하던 소녀 같은 할머니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파리의 이 작은 오르골 가게 주인을 하기 위해 태어나신 게 아닐까 싶게 너무너무 잘 어울렸다. 여행 내내 재희는 오르골을 듣고 또 들었다.
아마도 밖에 이런 악단이 있을 것 같아요.
아파트 창밖에서 갑자기 악단의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정말 지척에서 들리는데 아무래도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골목의 일인 것 같다. 보이지 않으면 또 어떤가 그 소리가 너무 흥겹고 좋아서 창을 열어 놓고 다 같이 춤을 추었다. 그 순간 재희가 노트에 무언가를 쓱쓱 그려 내밀었다. 아마도 밖에 이런 악단이 있을 것 같아요.
마레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
에펠탑도 몽생미셸도 다 좋았지만 우리 아이들 입에 맛있는 것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했다. 빵이 너무 좋은 우리 귀여운 때오.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른 비행기를 타려고 곤히 자는 아이들을 깨웠다.
눈은 못 떴지만 와플은 먹고 싶어.
에필로그
낯선 공기와 말속에서 더 많이 걷고 더 많은 것을 유추하고 계획하느라 우리는 예민해졌다. 여행은 익숙지 않은 상황 속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 나를 마주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예상 도착시간보다 2시간쯤 늘어나는 일은 예사인 프랑스 내비게이션과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 함부로 발 밑에 차이던 개똥이나 향이 부딪히던 음식처럼 사소히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그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이유가 되어 평소 서로의 미웠던 부분이 과장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여행 중 우리는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내거나 다투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가 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서로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고 또 좋아하는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창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지척 어디에선가 들려오던 악단의 연주 소리에 신이 났던 아이들의 모습과 메뉴판에서 플레인 오믈렛을 발견했을 때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하던 재희에게 사줄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비를 쫄딱 맞고 몽생미셸 계단을 오백 개쯤 올라왔을 때 환영해주듯 손 닿을 곳에 앉아있던 엄청나게 큰 갈매기. 그 갈매기를 보고 태오가 우아 감탄했을 때. 센 강가의 아코디언 연주자를 만난 순간. 오래 걷다가 맛 본 막 짜낸 오렌지 주스의 달콤함. 작은 상점에서 반한 듯 오르골을 천천히 돌려보면 재희와 그 모습을 나보다 더 흐뭇하게 바라보던 귀여운 주인 할머니. 태오의 쑥스러운 인사를 환한 미소로 받아주던 셰익스피어 서점의 예쁜 점원 누나. 와삭하고 부서지던 막 구워낸 크루아상과 밤잼이 들어있던 마카롱을 맛본 순간. 낮처럼 환한 밤 9시의 마레를 걷다가 어느 골목에서 어린 왕자가 들어있는 워터볼을 발견하고는 남편이 사주었을 때. 아이들을 재우고 서로의 팔다리에 파스를 붙여주고는 슈퍼 아저씨께서 추천해주신 맥주 한 병을 나누어 마시던 순간까지도. 너무 많아 다 못 적겠다.
프랑스로 가져가는 커다란 짐가방에는 우리가 살아온 일상이 그대로 담겼고 가방을 여는 순간순간 낯선 여행지는 곧 일상의 공간이 되었다. 이제 한국 우리 집으로 돌아와 그 가방을 다시 풀어 정리한다. 가방을 열자 곳곳 여행지의 공기가 묻은 옷가지 속에 깨지지 않도록 꼭꼭 말아 넣은 프랑스에서의 우리 일상이 담겨있었다.
공병 수집가의 소박한 기념품들.
안도
잠이 얇아 문득 깨나서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를 속으로 되묻던 시차의 밤. 낯선 언어가 만들어 낸 도시의 소음 속에서 뭔가를 잊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두리번거리며 걸을 때. 트루먼쇼의 거대한 스튜디오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잠깐씩 의심해보게 되는 거짓말 같은 풍경을 앞에 두었을 때. 그 순간 더 선명해지는 것은 나와, 나의 삶을 그리고 있는 원의 중심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수첩 책갈피 속에 고이 넣어온 차이브 꽃가지를 내 작은 주방의 싱크대 맡에 붙였다. 그제야 먼 나라 북쪽 끝 시골마을까지 동그라미를 그렸던 컴퍼스의 날개가 접혔다. 컴퍼스가 무게중심을 꾹 눌러 잡고 있던 내 돌아갈 곳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
우리들의 심심한 프랑스 여행기.
낫 솔티 프랑스
Paris France. 19. juin
글과 사진ㅣpomme soupe. 김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