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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Aug 04. 2022

만회 일지 1


22.07.29


서울역 KTX 승강장은 사람이 붐볐다. 가는 길에 흘겨봤던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 누군가를 만나려는 사람, 목적을 지닌 사람,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분명해 보였다. 도시에서 사람을 관찰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고프만의 용어를 빌리면 '예의바른 무관심', 눈이 마주칠 때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선 돌리기의 순발력과 무관심을 시선에 담아야 한다. 도시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일상적 신뢰를 몸짓으로 소통해야 한다. 이 소통에 실패하면 눈으로 불쾌와 경멸을 받는다. 흘겨보기는 나름 테크닉이 요구된다.


 나는 천안에 있는 정신병원에 가기 위해 승객으로 합류한다. 이 여정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지 분명하지 않았다. 치료를 희망한다는 것. 나아지고 싶다는 것. 회복되고 싶다는 것. 이런 단순한 마음들이 내 안에서 쉽게 자라나지 못했다. 고통에 관심이 많은 나는 틈만 나면 아픈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이상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싶은 기대로 여러 사람을 쳐다보는데, 사람을 알아보려는 마음은 곧 나를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닮아가고 있었다. 고통을 중심으로 둔다면, 사람들과 나는 별반 다를 바 없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아픔을 자백하는 그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당사자는 그 아픔을 수도없이 자신에의 위협으로 맞춰나간다. 갑작스레 나타난 질병이든, 찬찬히 잠식하는 질병이든 '아픈 사람'은 희망을 갖기까지 꽤나 방대한 자기 관찰과 자기 설득과 일종의 포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천안행, 서울에 즐비한 병원들을 제치고 천안에 있는 정신병원에 가는 건 순전히 치료비 때문이었다. 정신병과 가난은 둘 다 증명하기 버거운 소재다. 정신병을 진단받는 일, 가난을 증빙하는 일은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무언가 결핍된 자로 위치지우게 된다. 제도들은 이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드러내 행정과 법적 보호로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 수반되는 감정들은 오롯이 당사자의 책임 관할로 성찰화된다. 


 승차권을 구매해 승객이 되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곳에서 불분명해지는 신원을 붙들 필요는 21세기에 살며 수도없이 겪는 신원 증명인데, 가속도의 공간 속에 정주하는 그 순간을 정체화하는 만큼 쓸모 자체가 한시적이다. 승무원의 승차권 체크로 핸드폰을 내밀어 모바일 티켓을 보여주는 나의 손바닥이 스티커의 단면 같다. 20개 남짓의 객차에 담긴 수많은 사람 중 나는 10D(창가석)에 앉아 있는 승객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38분이면 천안에 도착한다. KTX에 탄 무리에 합류한 나는 다시 개별로 소산한다. 정신병원은 시외에 위치해 있었다. 치솟는 기온은 35도에 다다르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탔다. 강렬하게 조이는 햇빛에 땀이 죄다 뽑히며 걷는 동안, 나는 과연 나아질 수 있을까 기대를 잃지 않았다. 병원에 직접 찾아가기 전까지, 의사를 만나기 전까지 나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알아낼 수 없다는 것. 환자가 되면 필수적으로 거치게 되는 전문화된 관료 시스템의 작용이다. 병원들은 자신들이 어떤 병원이고, 어떤 전문적인 의사들을 데리고 있으며, 어떤 치료를 하는지 홈페이지에 기재해 놓는다. 의사들은 자신이 어떤 전문 분야를 이수했고, 어떤 병원에서 근무했는지를 약력으로 적어 놓는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직접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껏 얼마나 많은 병원에 들락거렸는지 굳이 새어보지는 않았다. 특히 서울은 병원 선택지가 많아서 어느 병원에 가야 하는지, 어느 의사를 만나야 하는지 선택의 어려움에 자주 노출된다. 의사들과 환자의 관계는 꽤 기이하고 이상하지만, '나을 수 있다'는 강력한 동기 하나가 이 이상한 관계를 납득시킨다. 환자는 자신을 낫게 해줄 '한 명'의 의사를 찾고, 의사는 자신의 환자(돈)가 되어줄 '다수'를 구한다. 환자가 의사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돈을 내는 것뿐이고, 의사가 환자한테 해주는 건 돈으로 매길 수 없다고 여겨지는 가치이기 때문에 늘상 불리할 뿐이다. 환자가 자신의 건강을 하나의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상에야, 의사라는 존재는 환자 당사자의 감정적 층위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반면 의사는 그럴 필요가 없고,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환자의 개별성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이 구도는 '비급여 진료'에 더욱 도드라진다. 특히 성형/미용의 경우 '비급여' 의미는 상품에 가깝다. 환자가 아니라 고객에 가까워지고, 자신이 원하는 게 회복이 아니라 개선과 향상에 있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인 채 나타난다. 


 천안에 있는 정신병원에 가 보자, 결심을 갖기까지 이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적어도 드러나지 않는 나의 고통과 그에 따른 치료에 대한 이해를 갖췄으면 좋겠다는 기대심, 그리고 그런 치료에 있어서 의사 자신도 환자를 마루타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대심. 병원에 도착하니 한적했다. 접수를 받는 직원이 처음 오신 거냐고, 뭐 때문에 오셨냐고 물었다. 정신건강 쪽이다, 하고 나의 증상들을 나열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직원은 파악했다는 듯 대답을 하고 나로 하여금 인적 사항을 적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나는 여러 증상을 말하며 특정 치료를 받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왜 이런 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지 배경을 꺼내야 한다는 나의 조바심으로 최대한 간추려 말을 잇는다. 한 책을 통해 이런 치료법이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알아보니 시도해 볼 만한 결심이 들어 한 병원에 가서 이미 검사를 받았었다, 뇌파와 부교감이 이렇게 균형이 맞지 않더라, 등등.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이 병원에 도착했는지를 말하던 중 의사는 책의 저자 이름에 일본어가 들어가 있는 걸 보고서는 '원래 일본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한다'고 살짝의 비소와 함께 툭 내뱉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대심이 꺾이고, 결국 헛걸음을 했구나, 예감하게 된다.


 약 1시간 남짓 의사와의 대화(?)는 급여 항목의 면담으로 처리되었고, 나는 그렇게 정신병원에서 빠져나왔다. 정신병원에 가서 의사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는 늘 울고 만다. 처음 정신병원에 갔을 때는 군병원 정신과였고, 이후에는 상담사, 이후에는 정신과의원 등 한 번도 안 울고 나온 적이 없다. 평소에는 꺼낼 수 없던, 수많은 시간 동안 쌓이고 쌓인 고통들을 압축해서 그 짧은 대면의 시간 동안 꺼내야 한다는 게 눈물 없이는 안 되는 일인 걸까. 의사들은 이런 시간을 모두 돈으로 매길 뿐이다. 상담이면 상담 시간, 약물 처방이면 처방. 자신의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은 1차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는 의사를, 어떻게 미리 알아볼 수 있을까? 결국 시간과 돈을 들여 만나야지만 알아볼 수 있는데, 상처만 받고 병원에 나오게 되었다. 시간과 돈을 내고 받은 건 상처였다.


 의사는 나에게 여러 말을 했다. '믿는 종교가 있는지' '제가 면담 받는 것 같네요(웃음)' '(웃으면서)말하는 게 영화 캐릭터 같아요'. 정신과 의사가 맞는지 모르겠다. 29일 당일에는 분노가 치솟았는데, 뚫린 입이라고 쳐지껄이는 게 '아유 먼길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로 기만하는 걸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어떻게든 좋은 말과 스트레스 완화를 명분으로 미사여구를 나에게 주입시키려는 노력이 참 안타까워 보였다. 의사는 혹시 이런 걸 상담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의사는 나더러 일단 상담을 먼저 받으라고 했다. 서울에 좋은 상담사가 있을 거라고. 그걸 내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참 버겁다, 환자는 의사와 병원에 대해 정보를 얻기가 힘들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래요?' 하고 말을 아끼는 의사. 직함은 원장이다. 의사는 내가 상담에 대해 이미 생각을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방어적이기 때문에 까다롭다고 말했다. 대화가 끝날 무렵 나는 '대화를 하고 나니 내가 까다로운 사람이 된 거 같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면서 어떻게든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분노로 맡기면 병신 새끼라고 욕하고 싶고, 이성에 맡기면 그 사람의 노력을 건조하게 느낄 뿐이었다.


 간만에 겪는 느낌이었다. 의사한테도 중간에 말했던 바, '그렇게 말하는 거 자주 겪어 왔다'. 나는 사람을 멀리하고, 혼자 지내려고 꽤나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같이 어울릴 사람을 만나지 못해 실패한 생활을 할 뿐이다. 처음에는 사람들한테 이런 피상성과 조심성 없는(소위 감수성 없는) 말들을 듣는 건 나의 잘못일까, 그들의 부족함일까 고민했다. 대중없어 하는 나에게 제공되는 건, 한 쪽에서는 성찰적 접근으로 각종 소설이나 철학, 심리, 자기계발 책들이 1차적으로는 '나의 문제'로, 퉁쳐서 '생각하기 나름으로'로 유도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회적 도덕적 접근으로 그들의 교육 부재, 제도적 결함, 대중화의 문제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둘을 치우쳐서 가져가지 않는 게 처음 선택한 방법이지만, 문제가 극복되는 건 아니고 그저 견뎌낼 정신 체력의 증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에의 노력에만 개선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정신병리 쪽 텍스트들을 접하면서 문제 자체를 개별화하지 않고 외재화할 수 있는 사고 방식의 전환을 기대할 수 있었던 건 아직 몇 년 되지 않은 희망이다.




 내가 받는 고통과 언어에의 괴로움 때문에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에게 1차적으로 책임을 물었던 건 20대 전반에 걸친 나의 태도였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으며 또 어떤 메커니즘으로 그런 심리들을 작동시키는지 구조적으로 이해하면 외재화가 되기 때문에 심리나 감정으로 결부시키지 않고 대처가 가능하다. 또한 나는 왜 다른 말이 아니라 '이 말'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예민해지고 결국 스트레스가 증폭되고 마는지 나 스스로에 대한 관찰과 구조를 파헤침으로써 완충 장치들을 학습하는 게 가능하다. 전자는 종합에의 노력으로, 여러 철학자와 사회학자, 작가들이 도움이 되고 후자는 성찰에의 노력으로(나카이 하사오 선생의 용어를 빌리자면 미분 회로적 인지의 강화로) 동일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또 '고통' 그 자체를 실존적으로 다루는 것도 가능한 접근이기도 하다. 알퐁스 도데가 매독에 걸려 말년에 적은 수기, 라 둘루La Doulou에는 이에 대한 몸부림이 적혀 있다.


 ... 통증(혹은 열정, 드물긴 하지만)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말은 오직 기억에만 의지하며, 무력하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

 ... 고통에 대한 일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환자는 자신만의 고통을 발견하는 법이며, 고통의 성질은 공연장의 음향 효과에 따라 달라지는 가수의 목소리처럼 다양하다.

 ... 통증에는 그 자체의 생명이 있다. 살아남기 위한 질병의 기발한 노력.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고 말하지만, 죽음 또한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생존과 파괴의 힘은 우리 몸속에서 막상막하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나는 질병이 교활한 방법으로 퍼져나가는 인상적인 예를 여럿 목격하였다. 사랑에 빠진 결핵환자 두 명 : 얼마나 열정적으로 서로에게 매달리는지. 질병이 혼잣말하는 소리가 거의 들릴 지경이다. ‘완벽한 한 쌍이로구나!’ 이 결합이 앞으로 탄생시킬 질병률을 상상해보라.

... 가엾은 인류 -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견디고 있다고 해도, 이 고통스럽고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 삶의 끝이라는 짐을 그들에게도 지워서는 안 된다. 마치 그들이 병자인 양 다루어야 한다 ; 이는 적절한 배려라는 균형을 맞추는 문제이다. 사람들이 잔인한 도살자 역을 맡는 대신 의사를 사랑하도록 만들자.

 

 하지만 현대 의학은 뇌 안에서 면역 체계가 어그러졌고, 염증을 증대시키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특정 세포의 폭주가 여러 정신 증상들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정신 활동을 언어로만 다룰 수 있다면, 언어는 결국 뇌의 활동이지만 뇌 자체가 활동을 가로막고 있는데 언어를 통해 이를 개선하는 일종의 역공학이 가능할까? 의사는 나에게 명상과 스트레스 완화를 추천했고, 실제로 21세기 현대인에게 제공되는 각종 요법들이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는 명상과 요가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걸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뇌의 상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는 뇌 안에 염증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간접적으로나마 추론하고 여러 상태들을 종합해 임상 치료를 하는 거 아닌가? 의사는 확증 편향을 경계하라는 식으로 나에게 경고를 날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요법적 치료나 임상 해석 등이 어떤 의사에게는 권유되고, 어떤 의사에게는 회의적인지는 사실 전문성과는 무관하다. 일찍이 엄밀함을 둘러싼 학문사史 속에는 이제 막 태동되는 이론이나 사고 방식에 대해 늘상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간들과 그에 대한 가능성을 취하는 인간들이 대립했다. 특히 환자 입장에서의 치료에 대해서는 저 대립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동기만이 유일해진다. 바로 절박함. 절박한 사람들은 한낱의 희망을 붙들고자 몸을 던진다. 절박함 앞에 망설임이나 회의는 무의미하거나 천박해진다. 소위 보수적인 접근은 하찮아진다. 과거 철학을 공부할 때도 새로운 방식을 이론화해 주장하는 사람에게 비판 때로는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로부터의 피로감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논리화된 언어를 빌미로 삼지만, 사실 그들의 심리와 감정이 작동되어 그런 논리로 귀결되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특히 주장 자체가 개연성을 띨수록 이 현상은 더욱 도드라지는데, 회의와 부정은 특정 심리의 특성 없이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 대립과 구도를 마주할 때마다 '성찰의 부재'를 읽으며 스스로로 하여금 이 성찰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 여력을 다했지만, 이 또한 소위 '성찰이 심화된 사람'에게서나 그 완성 모델을 엿볼 수 있을 뿐, 결코 일반적인 접근은 아니었다. 더욱이 현대 사회의 제도적 영향들이 이런 성찰성과 나르시시즘 모델이 공모하고 있다는 걸 분석하는 사회학자의 텍스트가 더해졌을 때, 나 스스로는 무엇을 긍정하고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조차 복잡해질 뿐이었다. 


 천안에서 서울로 오는 KTX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시달렸다. '왜 나는 이 문제를 평생토록 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앞선 병원에서 받은 검사로는 나에게 '강박 사고'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강박에 대해서 여전히 이해가 얕다. 행위적 반복과 습관 속에는 강박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고적 반복과 습관 속에는 도피성 강박이 만연한 지 몇 년 됐다. 또 괴상하리만치 위생 강박을 보이는 둥 특정 도덕관에 결부된 행위적 반복은 없어도 어떤 일을 수행하거나 처리할 때 패턴화한 반복과 습관은 있다. 일찍이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교육으로 다루고 있는 강박 행위들을 명시한 학자들이 있는 만큼, 강박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를 덜어내고 구조로 본다면 21세기 현대인은 강박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근래 나는 잠을 규칙적으로 자기, 운동하기, 식단 짜기, 명상을 긍정적으로 배워 보기를 일상으로 가져가려는 중이다. 이는 수행을 요구하는 행위들인데, 일상적 단련이나 수행이 피상화되고 구경거리가 된 오늘날 이런 접근들을 도모하는 '이해'들이 궁핍하다는 건 불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20대의 나는 삶을 건 수행, 일생 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삶에 대해 우선권을 주고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이었다. 그것이 마땅히 옳다고 여겼으며, 그런 삶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피해다녔다. 하지만 근래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치관이 대중없어진 기분을 수도없이 느낀다. 17년도, 하도 말해서 미워질 거 같은 17년도부터라고 생각하는 건 고착화된 편향일까? 만약 뇌의 면역 체계로 본다면 지금의 나는 10대의 외상으로부터 (어쩌면?) 예언된 상태로 해석된다. 단지 20대의 내가 분투하며 쌓은 상태들이 순전히 우연이었을 뿐. 


 나는 삶을 만회할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걸고 지금 치료를 받고 있다. 그냥 치료를 받는다고 말해서는 뭔가 어기는 기분이다. 절박하다. 근데 이 절박함이 왜인지 심심하다. 활자를 좋아하고 우선시하면서도, 활자 너머의 이미지가 안 그려지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게 상상이 결핍되어 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혼자인 나는 그저 '감정이 메말랐다', '떠오르지 않는다', '더 이상 글이 읽히지 않는다' 식으로만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공감 능력도, 감수성도 현저히 저하된 걸 내가 이론의 문제로, 상상의 문제로만 여겼더니 이렇게 방치된 것이라면, 차라리 나는 뇌의 상태 문제로, 면역 체계의 문제로 여겨서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시도하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 무언가 위반하는 기분이다. 무엇을 위반하는지를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두려움인데, 이 두려움은 의지의 정체와 연관되어 있는 실존적 불안이라고, 에둘러 말하고 치우고 싶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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