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가라, 물러가라
‘태초의 세계가 시작될 때부터 인간은 공포에 가득 찬 우주적인 암흑에서 살아남기 위해 먼저 말을 필요로 하였다. 혼돈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것에 말을 주고 이름을 붙여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들이는 것. 원래 그 태초의 세계가 아직 말을 받지 못하고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암흑과 인간이 말을 주고 이름을 붙인 빛의 영역으로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하는 말을 압도하는 혼돈의 말은 있었다. 그것과 싸워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말을 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전 세계의 사물에 말을 주고 이름을 붙임에 따라 공포에서 평안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은 인간이 새롭게 경험하게 될 불안으로 밀어 넣기도 하는 것이었다. 말은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수단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말은 인간을 그 다음 차원의 위기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 오에 겐자부로, 『소설의 방법』, 소화, “방법으로서의 소설” p.201
과거 철학 모임을 같이 하던 친구는 나에게 어울린다며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르니에와 로맹가리, 현대 철학이라는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들 중 니체와 베르그손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그르니에에게서는 쥰이치로에게서 엿볼 수 있는 '침묵'을, 로맹가리의 그로칼랭에서는 '되기'를, 니체와 베르그손에서는 '반복-시간성'을 발견한 때였다. 무엇이 되기는 고사하고 정작 자기 자신도 되지 못하는 처지에 어떠한 감정의 발로도 꺼낼 수 없던 표현과 결핍 사이에 허덕인 당시의 나는 그래서 '말할 수 없음'에 매달리고 있었다. 침묵의 얼굴은 이후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속 우화를 통해 해소되었지만,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피카르트를 읽지 않고 있다.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같이 읽었을 때, 친구는 그 도착 지점인 '불가지론'에 매료되었었다. 나는 거기서 반복을 다시 읽었다. 논고를 읽은 건 시간 상으로 이후지만, 사실 그 전부터 반복이 무한과 어떠한 모종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인식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내가 수학에서 매력을 느낀 부분은 오직 무한에 관해서였고, 현수는 나의 욕심과 결이 맞아 같이 수학 공부를 하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당시 읽은 미적분과 칸토어 논문들은 사실 지금도 미루고 있는 숙제처럼 남아 있지만, 아집으로만 살아온 나의 지향성이라고는 늘상 그랬듯 떠오른 착상과 직관을 다른 데서 확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지금도 이에 대해서는 개진을 못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나에게 반복은 늘 이중 결속Double-Bind으로 나타났다. 일상의 무수한 편집 영상 속에서 순간은 나에게 두 가지를 권한다, 반복反覆이냐, 반복反復이냐. 사느냐 죽느냐의 현대 자본주의형 패러디 사느냐buy 죽느냐die처럼 반복은 두 가지 시간 결속 사이에 끼이도록 만든다. 기계의 자동화가 본뜬 우리의 동일화의 시간성과 전기 장치의 전원이 본뜬 우리의 차이의 시간성 사이에. 14년도에 한 번, 15년도에 한 번 나는 이 시간성에서 어떤 구조를 구축해 보려고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나의 관찰은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무엇이 되기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되지 못했지만. 로맹가리에 푹 빠져 읽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로칼랭(비단 뱀)이 우리 집에서 첫 탈피를 시작했음을 적어둔다. 물론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자신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로칼랭은 용감하게 시도해서 완전히 허물을 벗었다. 변신은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 로맹가리, 『그로칼랭』 , 문학동네, 2010, p.47
베이트슨은 1956년에 동료 학자들과 함께 정신분열증 이론으로 다가가기 위해 이중 결속Double-Bind 개념을 포착하고 정리해 발표했다. 찌라시처럼 겉도는 (한국)인터넷 검색 자료로는 (늘상 느끼지만) 어딘가 먹고 싶은 부위만 남겨 놓은 음식물 같아서 결국 원문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후 베이트슨의 지적 여정과 결을 같이 봤을 때 보이는 맥락 속에서 이중 구속은 사실 구속이 아니라 결속에 가까워 보였다. 일단, 여러 찌라시들에 묻은 오해를 몇 가지 덜어내고자 원문의 주장을 추리면,
1. 가정 내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이중 구속은 애정 결핍의 '어머니'가 자녀에게 구사하는 '해서는 안 될 짓'이 아닐 뿐더러, 애초에 '어머니'라고 확정짓지도 않는다. 아버지, 가족 등 아이 관점에서 깊은 관계를 맺는 당사자일 뿐이다.
2. 이중 구속으로'만' 정신분열증을 설명하려는 주장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메타 의사 소통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로써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 기록하려는 접근이며, 정신분열증은 분명 의사 소통-언어의 균열로 접근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증언 중 하나다.
3. '구속'이 아니라 '결속'이다. 어머니로 자주 설명되는 대상자는 애초에 그 결속으로부터 이미 어긋나 있는 상태의 발화자일 뿐이고, 아이로 자주 설명되는 '피해자'는 그 어긋난 상태의 발화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지움에 난항을 겪는 수신자일 뿐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결속이 관계적 차원에서의 결속과 맞물리는 참으로 복잡한 상황으로 연계된다.
굳이 이중 구속 이론을 문제 삼는다면, 일단 희생자, 피해자를 설정해야 이중 결속이 설명된다는 점인데, 막상 원문을 읽다 보면 이중 결속을 시전하는 발화자도 결국 피해자인 셈이다. 피해의 가해가 피해를 낳는 맞물림은 사실 정서 관계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참으로 좆같은 족쇄 감정이라 강조로써 구속이라는 표현을 채택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이 이론의 핵심은 그 구조 자체가 품고 있는 은유와의 동질성,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다수의 환자들이 게슈탈트적 언어 붕괴를 겪거나 횡설수설을 겪을 때 그들의 화법 속에서 상대적으로(사회적으로) 문법이 공통 감각으로 공유되어 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은유'로 느껴진다는 바로 그 상황에 핵심이 있다. 17년도 쯤에 이르러 나는 한 가지 상태에 천착하고 긍정하게 되는데, 현실의 다른 현실에 대한 확신 지반으로써 '은유'를 채택한 점, 즉 시만이 그 가능성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 입이 트고,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고, 나아가서 언어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성인이 되고 나서였는데, 분명 그런 변화의 과정을 구조적으로 흐르게 만드는 일련의 경험들이 있었음을 이후에 자각하게 된다. '말할 수 없음'에 천착하던 시기를 비유하자면, 불가지론에 절규하는 뭉크의 표정과 이를 굳이 피규어로 만들어 키치하게 만든 나의 애장품 사이를 오고가는 상태였다. 세상은 고사하고 눈앞의 현실과 사물들에 감히 말을 붙일 수 없는 경악스러움의 체험 기원은 9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이중 결속을 어머니가 아닌 제 3자의 남자 어른에게서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처벌받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표현하면 나는 처벌받는다 /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다. 베이트슨은 어머니의 배배 꼬인 감정으로 인해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진짜 직관'을 거짓으로 만들고야 마는 상황을 이중 결속으로 설명했다. 사실은 모성애 따위 있지도 않고, 혹은 있어도 어떠한 이유로 어떤 상황 속에서는 아이를 향한 사랑보다 그 사랑을 연기해야 하는 '인간'이 있지만 사회적 종교적 가정적 이유와 맞물려 당사자는 늘상 친절하고 사랑하는 역할을 부여받았기에 '사랑 문법'을 만들어 자신이 믿는 '사랑하는 상황'을 연출하려 한다. 이 연출에 아이가 동조하지 않으면 아이를 참여시키려고 하는데, 아이는, 다 큰 인간들이 늘상 저지르는 실수인 '아이는 모를 거야'에 보란듯이 배반하듯 단번에 알아차린다 거짓 감정을. 하지만 아이는 이 거짓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 수 없다. 심지어 이 결속에 묶인 아이를 지지해줄 다른 어른이 불행히도, 무능력하다. 이 상태가 굴러가면 (원문에서는 정신분열증으로의 발현으로 포커싱을 두고 있지만) 여하간 의사 소통에 '다른 현실'이 구축되기 시작한다.
다른 현실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악스러운 현실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가닿은 언어 교정이다. 원문에서 잠시 소개되는 문구 중 이런 게 있다. '남자는 죽는다' '잔디는 죽는다' '남자는 풀이다'. 논리에 의하면 이는 오류다. 하지만 유희에 의하면 이는 유머다. 만약, 정말로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구원이다. 이 차이가 소통되지 않는 건 바로 '상황'의 부재, 때때로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무시하고 내팽개치는 '대화에 대한 대화'를 하지 않아서다. 베이트슨은 바로 이 지점이 '일상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논문의 결론에 적어 놓았다.
나의 침묵은 어릴 적 함묵증으로 귀결되는데, 17년도부터 겪어 온 '말할 수 없음'의 기원이라는 걸 이제서야 알아본다. 헤럴드 블룸을 다시 살피며 그가 제시한 여섯 가지 수정률(블룸은 이보다 더 다채롭고 다양할 거라 말하지만 그도 역시 언어 창안에 낭만성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과감히 제시했음을 밝힌다) 중 나의 상태를 견주며 살풀이를 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이 직감을 직면할 수 없어 서부 시대의 무법자로 도망쳤던 요즘, 초기화에 대한 강박이 모종의 증후군으로 자리잡았음을 직면할 뿐이라는 건 지겹도록 뻔(뻔)한 나의 상태다. 어휘 창안, 은유는 본래 이중 결속의 결과다. 사실의 서술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의혹은, 사실에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 사랑에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길 수 없고, 도망칠 수 없고, 꼼짝없이 붙들린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실의 다른 사실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걸 알려주지 않는다. 불행히도, 타자는 이를 지지하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블룸의 표현대로라면, 이 결속 상태 속에서 어휘 창안으로 가닿으려는 힘이 어떠냐에 따라 여러 상태(이를 범주화할 수-학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를 거친다. 자백으로는 그저 벗어나 있는, 이탈의 상태일 뿐이지만, 어쩐지 다시 처음으로 귀환한 믿음의 문턱 앞에 있다. 희망일까? 지금은 알 수 없다.
17년도의 나는 참으로 알끈해서 벌써 몇 년을 정박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되돌리고 싶은가? 벗어나고 싶은가? 무엇인가 되었다고 믿고 싶은가? 나는 자주 잊는다와 잃는다를 동일하게 쓰는 버릇이 있는데, 잊는 것은 곧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태, 시간성, 의식, 기억, 언어 등등으로 구축된 현실이기에, 잊는 것은 곧 잃는 것일 수밖에 없다.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결속을 풀 만한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면 분명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고, 아마 영원히 안 될 사람이다. 과거 시간성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고 싶었던 건, 나의 의식 상태에 대한 해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일종의 꿈이었다. 1차적으로는 반복과 무한에 대한 의식 상태의 수렴-확산의 양립불가능성, 2차적으로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적 시간관의 전복으로 시간성이라고 하는 낱말의 함의가 '언어'로부터의 개념을 벗어난, 피부와 함께할 수 있는 성질로써 과거-현재-미래의 도식이 아닌 이입 가능성과 이입 불가능성, '지금-여기'와 '지금 아닌-저기'의 상태 전환을 '시간'이라고 여기는 관점. 물리적 시간인 기계 시간은 우리에게 다양한 시간 질병-신경쇠약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깨나 고집스럽게 기계 시간으로부터 도망치며 사는 나는 21세기 도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현실'로 살아가기가 가능하다는 걸 포기할 수 없다.
14년도에 나는 반복의 의미 중 동일성의 시간성 속에서 자동화의 반복에 '회복'의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했었다. 그 회복은 분명 '상황', '맥락에 대한 맥락' 표현을 의식할 때 열리는 지평이었다. 내용(동일성)과 형식(자기유사성)의 반복이 아닌, 탈피(재생)의 반복으로의 꿈. 하지만 여기서 어떠한 '역량 강화'도 원하지 않았었다. 14년도에 나는 정확히 '후퇴'라고 적었었다. '후퇴는 도망이 아니다, 영원의 도약이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며 앞을 응시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기 되찾으려하기, 재생이다'.
미분회로에 친화적인 나는 선취한 직관의 체험을 실제 겪게 된다고 예감하는 버릇이 있는데, 벗어던진 허물들(언어들)에서 아무 냄새도 안난다는 게 끔찍할 뿐이다. 그것은 때로 자기 자신인 명백한 증거임과 동시에, 어떠한 차이도 확인할 수 없는 좌절의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21세기 젊은 사람들이 리셋을 버릇처럼 하는 걸 자주 발견하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꽤 고여 있다), 이것이 21세기식 [변신]의 패러디임을 덩달아 발견한다.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일찍이 깨닫고 있다. 이것이 무기력의 소산이고, 무능력의 증거라는 자기 계발 신봉자들의 불안으로 해석될 때에야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사실 아무것도 된 적이 없다는 진실의 강화일 뿐이다. 나는 학습으로 인한 변화를 믿고 그 과정을 신뢰하며, 종국에는 관계 자체에 무한한 희망을 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중에 포착되는 스스로가 무엇인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거의 확신하는 편이다. 그것은 반복을 멈춘 죽음이라는 허물, 그로칼랭이 자기 자신이었던 일부를 벗어 던졌을 때 더 이상 그걸 자기 자신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오직 인간만이 허물이 되는 걸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허물虛物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존재가 허물虛物이 아니라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표현과 결핍 사이에 끼인다는 건, 잊음과 잃음이 동일할 수밖에 없다는 건 실물實物일 수 없는 세계관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일 수밖에 없다.
나는 키치를 사랑하는 걸 배울 수 없어서 피상성을 긍정하지 못하지만, 피상이 세상의 표현인 한, 그 좁은 의미 안에서 만큼은 피상이 본질과 앞뒷면을 이루고 있다는 걸 긍정한다. 니체가 어느 문구에서 '의식은 표면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런 문구는 따로 기록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걸 보면 참 뻔하다. 진실된 문장은 읽는 순간 뇌리에 박힌다. 아마 허물이라는 인생 주기로 본다면, 살풀이를 해야 할 정도로 살기가 치열한 무력으로 늘상 목덜미를 노려보던 17년도 이후의 시기는 저 피상의 앞면으로 표현될 거란 직감이 느껴진다. 때는 아니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주언을 읊조리는 게 일단의 최선이지만, 그래서 최근에 쓴 시 5편이 그런 식의 주문으로 채워졌던 것이겠지만, 결국 막다름이라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도망의 소진이다. 때는 아니다, 끝이 오고 있다. 끝이라는 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력해서,
06:19분 서울시립대 근처 카페 2층에서 내다보이는 거리, 형광색 티셔츠를 입은 백발 까까머리 아저씨가 괴상한 춤을 추고 있다. 귀여우니까 집에 가서 무법자 코스프레나 해야지. 이론이 앞서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불안들은 늘 죄짓는 가상이 곁에 있으니까. 아저씨가 이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더 격렬한 춤을 춘다. 차도를 향해 춤을 추는 아저씨는 지나가는 버스와 출근 차량을 향해 응원하는 치어리더 같다. 이래서 도시가 싫을 수 없는 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