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사랑 8

도르래 앞에서

by 사과와 돌멩이


22.09.26 낮 일기



산문은 훌륭한 진정제다. 카페에 와서 나를 보듬고 그동안 미뤄왔던 오웰의 에세이를 읽었다. 세상에 무슨 작가 커리큘럼이라도 있는 듯, 각자의 체험에는 희안한 공통 감각이 있어서 작가들은 이를 알아볼 수 있다. 책을 살갗처럼 다룰 때는 늘 책에다 메모를 하는 버릇이 있는데, 오웰 에세이의 경우에는 'ㅋㅋㅋ'밖에 달리지 않았다. 낄낄거리면서 읽기 좋은 읽을거리였다.


몇 년만에 시집을 펼쳤다. 김중일 선생님 신간인데, 예전에 강의를 들었을 때 수학 선생님 같다는 인상을 더러 받곤 했었다. 따로 기록을 해놓진 않았는데, 당시 말하던 이야기들 몇몇이 시로 쓰여 있는 걸 보고 반가웠다. 읽다보니 나도 내 시를 보살펴야지 하는 마음이 자꾸 커져서 늘 완성하지 못했던 애정하는 시를 불러왔다. 미안한 마음, 문장을 그렇게 욱여넣은 조급함, 평생을 버리지 못한 언어에의 태도가 오롯이 반영되어 있는 게 보였다.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시들은 그저 말없이 보여줄 뿐이었다. 그래, 내가 시를 대하는 태도가 이런 거였지. 아직 언어로 잘 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시는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오히려 시가 나에게 보여줄 거라 믿는 마음으로 시에게 다가간다. 시와의 관계가 나에겐 이렇다. 내가 보고싶은 세계, 내가 숨 쉴 수 있는 세계, 그 안에서 나도 한 명이 될 수 있는 세계를 시가 보여줄 거라 믿는다. 나는 그런 시를 쓰려고 했다.


아무렴, 이 역설을 어떻게 기존 문법으로 바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때 언어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참 많이 했더랬다. 언어의 문법 구조가 선형적인 이상 우리의 정신도 그 구조 안에서 수긍해야만 한다고. 나는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면서 디지털의 가능성을 믿었고, 언젠가 텍스트 중심의 시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를 디지털로 구현할 꿈을 갖고 있다. 갈 길이 멀어서 실현될 수 없을지 몰라도, 이 꿈을 갖고 안 갖고의 차이가 나에겐 언어의 닻이다.


시를 보듬으려고 매달리다보니 익숙한 그 긴장이 엄습했다. 팽팽히 당긴 줄에 파장을 일으켜 내파시키려는 듯한 느낌, 공명 현상을 일으켜 유리창을 깨뜨리려는 듯한 느낌, 물이 든 용기의 기반을 흔들어서 물결이 어디까지 과도해질 수 있는지의 느낌. 나는 시를 쓸 때마다 이런 살기들을 느끼는데, 이걸 얼마나 견뎌내는지가 나에겐 숙명처럼 다가왔다. 결국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잠시 숨을 고르려고 이렇게 줄글을 적는다. 시를 쓸 때마다 몸이 반응한다. 그래서 정말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이 과정을 어떻게 단련으로 만들지가 나의 수행 과제다. 쉽지 않다. 발을 잘못 들인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 가야한다. 다른 현실을 보려는 대가이므로.






밤 일기



전에 썼던 시를 다듬었다. 쓸 때의 상태와 쓰고 난 후 까맣게 잊었다 다시 보는 상태는 너무 멀어서 매번 난감하다. 그만큼 흩날릴 언어라는 의미인지, 쓰는 내가 명멸하는 의미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시를 다 쓰고 비로소 [침묵의 세계]를 읽기 시작했다.


예전 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과거 철학 모임을 하던 무렵 친구 녀석이 나랑 어울릴 거 같다며 선물로 줬던 책이다. 여즉 읽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침묵 앞에 섰다. 이 침묵을 매만지던 감각이 의식 한 켠에서 먼지가 켜켜이 내려 앉아 있었다. 한동안 길들여야 비로소 쓸 수 있겠다는 느낌.


그래도 공백 기간이 완전 헛된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피카르트가 포함시키지 못한 존재들에까지 침묵의 자리를 찾아주고 싶다. 그의 관점대로라면, 분명 도박을 걸어볼 만하다는 직감이다, 이러다 패가망신 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침묵의 대가답게, 문장마다 메모가 쏟아지더라. 그가 얼마나 침묵을 섬세히 다루는지 나도 모르게 침묵에 빨려들어간다. 오늘 청계천을 걸으면서 - 또 과식하고 말았다,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는 강박은 언제쯤 사라질까? - 침묵의 세계를 더듬거렸다. 그는 말했다.


침묵은 오늘날 아무런 "효용성도 없는" 유일한 현상이다. 침묵은 오늘날의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 침묵은 다만 존재할 뿐 아무런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


'침묵은 이용할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그간 인공물, 기계 장치, 도시 세계 속 자리한 각종 비인간들에게 왜 번번히 소통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가닥을 붙잡았다. 대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김중일 선생님의 시는 역시 좋았고, 침묵이 섬세히 느껴졌다. 좋은 느낌, 좋은 감각. 그동안 왜 시를 못 읽었을까. 그동안 왜 예술이 모래처럼 느껴졌을까. 침묵으로부터 버림받았을까, 아니 왜 침묵을 그렇게 못살게 굴었을까. 수 년간 계속된 절망이 디딜 지반이 되려면, 나는 이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고 할 때, 나에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언어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번에 뇌의 체계에 충격을 주고 건강을 되찾으려 노력하면서 느낀 바, 망가짐이란 서서히 끓는 물처럼 자신이 점점 익고 있다는 걸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는 개구리와 같다. 역치의 고장이 바로 문제다. 아직 일본어가 미숙해 히사오 선생의 글들을 읽지는 못하지만, 그는 분명 이런 나의 정신에 어휘 꾸러미를 제공해준 사람이다. 뇌세포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든, 인간학적 정신병리 관점으로 설명하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객관적 자각이다. 이 자각을 불가하게 만드는 삶의 불행을 우리는 감히 가로막을 수 없을지언정, 사후적으로라도 재구성하는 게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이것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과연 어떤 결과에 영향을 끼칠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개인의 몸부림에 있어서 분명, 유의미한 위로이자 용기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충격이 나의 정신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지 체험을 통해 확인했다면, 나는 당연히 그런 충격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도록 방어를 해야만 한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의 완충 장치를 구비하는 것과 같다. 차를 안 타면 되듯, 나도 살지 않으면 될 텐데.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기에 겪어야 할 수많은 우연의 충돌이 기다리고 있다.


용두역에서 평화시장 가는 청계천 부근에 버려진 교각들이 있다. 밤이 되면 거기다 맵핑을 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 교각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침묵에 닿을랑 말랑하는 아스라한 기분. 어제(무슨 한 달은 된 거 같다) 만난 방학동 은행나무 앞에서 있을 때는 지나가는 중년들이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저게 500년이나 됐다고?' 하는 말이 숱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500년에 감탄하며(최초로 이 보호수를 측정할 때는 884년으로 보았지만 2012년에는 500~600년이라고 추정됐다) 사진을 찍고 가만히 바라보다 갔다. 서울에서 곳곳을 쏘다니다 보면 참으로 희안한 기계 장치, 인공물들이 널부러져 있는데 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청계천 교각도 마찬가지다. 분명 누군가는 이를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겠지만, 방학동 은행나무만큼 거대하고 힘이 있는 존재에 비하면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


답십리 근처에는 쓰레기 처리장도 있고 철도 공사도 있고 폐차장, 차량 정비소, 고미술 시장, 빗물처리장 등 별별 공간들이 많다. 특히 답십리에서 장한평으로 넘어가는 안쪽 골목을 따릉이로 쏘다니다 보면 분해된 차 부위들이 마치 정육점처럼 전시되어 있는 기묘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버려진(옛날에는 활발히 기능하던 자동차 부품 상가라던지 중고차 매매 공간이라던지) 상가는 오래된 을지로 상가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근처 허름한 판잣집 식당들이 침묵을 키워가고 있다. 요근래 특히 좋아하는 길목은 청량리에서 회기로 가는 전철-기차 철로가 내려다 보이는 고가 도로인데, 이 부근 이름이 떡전교다... ㅋㅋㅋ... 꽤 음흉한 생각도 하면서 왜 떡전교일까 누구한테 물어봤는지 검색을 해봤는지 알아보니 조선시대 때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 흥인지문을 앞두고 잠시 쉬어가던 떡집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떡전교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지명만 남아 있는 상태다.


여튼 떡전교 육교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각종 전철과 기차가 오고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할 때 도시의 풍경을 담는 영상 작업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대교와 시멘트 담벼락, 삼각지의 철도 대교 등을 참으로 쏘다닌 적이 있다. 그때 썼던 사운드 중에 참으로 도시와 어울리는 사운드를 발견했는데(사운드 찾기는 지금 생각해도 지옥같다... 알 수 없으나 직감에 딱 맞는 사운드를 찾기 위해 5,000곡이 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고행이란...) 저작권 때문에 공유할 수 없어 아쉽다.


피카르트를 찬찬히 읽으면서, 침묵에 천천히 다가가려고 한다. 도시의 전기는 한 명을 위해 만들지 않으면서 모두가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 회로를 짜고 전기를 직접 변압해야 하는 작업을 하면서 느꼈는데, 나는 확실히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게 당연히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연관'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세상살이 담론도 담론이지만, 침묵이 지하로 끌려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기에 감정이 괜찮지 않다. 오늘 우연히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 대화를 나눴는데, 꽤 여운이 남았다. 침묵과 시간, 의도해낼 수 없고 계획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침묵과 말의 공존. 도르래다. 김수영 시인의 유명한 산문이 안 떠오를래야 안 떠오를 수 없지 않은가?


밤낮 도르래미타불이다, 개똥이다, 좆이다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서 그런가? 절제된 분노가 반갑고도 귀여운 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WjhCxJyzT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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