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사랑 9

침묵이라는 시간 1

by 사과와 돌멩이


22.09.28



https://www.youtube.com/watch?v=YQ6886SwJdk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미뤘던 작업을 끝냈다. 기다려준 선생님은 늘 빠짐없이 '고생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선생님과의 나이 차는 약 35년 정도인데, 나는 늘 선생님의 마음을 알아내주고 대변해주고 또 얼굴은 몰라도 동년배인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글을 전달한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어느덧 1년이 훌쩍 넘었는데, 선생님이 나와 컨택할 때는 도박을 하셨다고 했다. 사진으로 보면 왠지 어린 날라리 같은데 그래도 얘기라도 나눠보자고 시험하셨다고. 선생님과 사모님은 늘 나에게 '어린 나이에도'라는 말을 칭찬과 격려로 건네신다. 늘상 느껴오던 삶의 격차라 익숙한 외로움이었지만,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신 선생님과 사모님은 진정 어린 마음을 표현하시는 데 노련하셨기에 나도 마음 그대로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과의 굵직한 작업이 끝나고 21세기 젊은 인간답게 관계를 흐지부지 만드려고 했으나, 선생님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전부터 기성 세대의 '관계 지속력'에 대해서는 알아보는 바가 있었고, 또 우리 세대에 거의 멸종위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워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이건 사실 한국에서만 보이는 일도 아니고 옆나라 일본에서도 비일비재한 젊은 인간 특징이긴 하다. 글로벌에 영향 받는 타국도 마찬가지라고 감히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에 대한 체력이 급격히 와해된 게 오늘날 우리 세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배우는 건, 나의 아버지도 모범적으로 보여줬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에의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제때 표현하는 것. 단지 이것뿐이었다. 이걸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저 성격 차이로 보호되지만, 그렇다고 관계를 통해 얻어갈 수 있는 의미와 가치가 대등해지는 건 절대 아니다. 못 하면 못 하는 만큼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을 비롯해 선산으로 가는 전남 순천까지 사람이 줄지 않았다. 죽기 전 근 7~8년 동안 은둔자, 알콜중독자, 빚쟁이로 산 이력이 있음을 감안해도 아버지를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는 건 내가 모르던 무언가였다. 작은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었다. 나에게는 엄격하다 못해 점차 사탄이 된 사람이 누군가한텐 잊을 수 없어 슬픔의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할 사람이었나 보다. 아빠의 묫자리 옆에 아빠의 친구들이 히히덕거리면서 꽃을 한 송이 심었었다. 그리고는 이 꽃이 필 때마다 자식들이 보러 올 거라고, 외로워하지 말라고 했다.


사실 나의 아버지와 선생님은 또래 세대다. 고향도 비슷하여 왠지 모르게 나에게 든든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빠가 죽고 난 뒤 나는 시골 집을 뒤지며 아빠의 흔적을 모조리 훔쳐왔다. 나는 그의 생애를 이해하고 싶었고, 내가 모르던 조각을 하나라도 찾고 싶었고, 나의 괴로움과 절망을 씻어내고 싶었다. 당시 아빠를 보내고 군대에 들어가(이등병 때 돌아가셨다) 우울증을 앓고 난 뒤 전역하고 수 년이 흘러 쓰게 된 시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데,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시다. 그때 나는 이런 시구를 썼었다. '비가 오던 그날에 아비의 죄를 씻은 물은 / 세 달 동안 내 눈에서 흘렀고'. 관을 묻을 때는 왜 비가 오는 걸까?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왔었다.


나는 그의 선택과 그의 마음과 그의 진심을, 그리고 도대체 왜 스스로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말았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른 접근이 아니었다. 이해라느니 설명이라느니 감정이라느니. 그런 게 아닌 말, 오직 '말'이 필요했다. 그는 정말 집요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는지 그 침묵의 너머를 헤아리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그저 책임이라느니 가장의 무게라느니 자존심이라느니 따위의 사람이 마땅히 짊어지게 될 수 있는 그런 중압감에 입이 짓눌렸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게 나의 최선이자 한계였다. 아무리 부탁하고 요청하고, 수 년간 매달려도 도통 입을 열지 않는 그 침묵에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더 있었을까.


그때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자리한 '말'에의 상처는, 그 침묵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며, 말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그 무책임이 주변 사람, 특히나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집요하게라도 보려고 하지 않는 그 자폐성에 과도한 민감성이 생기고 말았다. 당시 나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마땅히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자라기 시작한 경험이었고, 그렇지 못하고 안 하는 사람들을 거리두는 데 급급했다. 그런 인간과 관계를 맺는 건 나에게 있어 또 다시 재생되는 트라우마이자 불이 뜨겁다는 걸 꼭 데여 봐야 아는 무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무지가 싫었다. 아프고, 상처받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들어 놓고 수습조차 하지 못하면서 방치하는, 그런 사람의 못남이 나에게 강력한 상처였으니까.


그렇다, 요근래 시작해 계속 공굴리고 있는 이 작업은 바로 언어와의 관계에서 내가 갖고 가는 자기 도취적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함이다. 나에게 자리한 불안과 상처, 괴로움이 나의 잘못으로, 인격의 부적합으로, 나의 문제로밖에 표현할 줄 몰랐던 연인들은 내가 왜 괴로운지를 보려고 하기 보다 자신의 느낌과 판단이 맞다는 걸 나의 인격을 걸고 요구할 뿐이었다. 이는 그들이 나르시시즘적 언어 관계를 알아볼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어서 생긴 일일 뿐, 전적으로 나에게 큰 상처가 될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지금은 억지처럼 보이는) 가능성을 그리고자 한다. 친구들은 나에게 대개 침묵으로 대응했는데, 그래도 나는 그 침묵의 편안함을 긍정했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인격의 맞닿음이라는 사건 관계가 발생되기 때문에, 이를 알아보고 섬세하게 다루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늘 공감의 부재, 이해의 결핍, 감수성의 협소함으로 느껴졌고, 이를 확인할 때는 그들의 표현 방식에 있어서 나라는 인격이 얼마나 함부로 다뤄지는지를 느낄 때였다. 이 문제를 다룬다는 건, 언어와의 관계 그 자체이며, 결국 나에게는 시와 연결되는 징검다리 중 하나다.


13년도부터 수백 번은 곱씹었던 정현종 선생님의 문장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은 만큼, 말을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국 내 삶을 관통하는 언어와의 관계 주춧돌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말을 요청했고,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바로 몇 주 전, 나는 이등병으로 지독한 병영 생활(부조리)를 견디면서 차츰 무너지는 자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자대 배치를 받고 처음으로 가족과 만나는 면회 외박 때 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울었고, 그때 일산 호수 공원에서 나는 처음으로 생긴 나의 꿈을 아빠 앞에서 털어놨다. 참 이상하게도 아빠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뛰어난 작가가 되라고 말했다. 그는 늘 술에 찌들어 있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술을 먹고 왔으나 술을 먹지 못해 모텔에서도 술을 마셨지만, 다음 날 복귀 시간이 되기도 전에 출근을 해야 한다며 역시 술에 취한 상태로 먼저 헤어졌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헤어지고 나서 내 안에 이상한 감정이 몽글몽글 자라났다. 머리가 어렸던 나는 그 메커니즘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 자리한 강력한 감정은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망가진 아버지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게 노력하고 싶다고, 이제는 내가 그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마음이 자리잡기가 무섭게, 그는 죽고 말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현실을 배웠다.


만약 불과 몇 년 전, 아니 몇 달 전에 죽었으면 분명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죽길 간절히 기도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죽여서 소년원에 갈 결심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가족 관계를 망치는 정도가 아니라 뉴스에서 나올 법한 가족 살인 비극을 연출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지고 이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엄마와 누나를 지켜야만 한다는 나의 각오가, 아버지를 죽여야만 한다면 죽여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늘 칼을 품고 잠에 들었다. 수 년간 결코 집이 집이 아님에도, 아닌 밤중에 엄마의 비명이 들린다면 바로 뛰쳐나갈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기적처럼 달라졌고, 용서와 사랑이라는 그 아득한 감정에 이제 막 첫걸음을 떼려고 할 때, 그는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에게 원망과 저주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싹틀 때 자신의 죽음을 완성한 나의 아버지. 나는 이 망가진 관계를, 훼손된 관계를 어떻게든 복구하고 재건하고 싶었다. 그것은 틀어져버린 현실이었고, 나를 살게 하지 않는 현실이었고, 나의 목을 조르는 언어에의 용서와 사랑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21살이 된 나에게 있어서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라고 하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이 괴로움이 동반 배분된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통에도 정도가 있고, 그래서 마치 등급이 있는 것처럼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구분될 수 있을까? 어렸을 때의 나는 이걸 믿었다. 내가 겪은 고통, 끝끝내 버텼던 고통, 고통을 받아들이는 인내가 인정받거나 이해받거나 그런 욕구가 아니더라도 오롯이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건 결국 책 속이었다. 현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선에서만 나를 이해하려고, 인정하려고, 공감하려고 할 뿐 나를 있는 그대로로 봐주지 않았다. 나는 이 차이를 설명하다 지쳐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들 자신의 인식과 판단이 거부당하는 게 부당하다고만 느낄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있는 그대로'를 강조해도, 이에 대한 감각은 결코 공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있는 그대로'의 감각은 결국 언어에의 태도였다. 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하고, 자기 방식으로만 쓰고, 그렇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런 방식으로 나라는 사람 자체를 모양내려고 하는 그런 태도.


이 불만이 유년기부터 쌓였고, 10대 때 불거졌으며, 아빠의 죽음 이후로 거의 완벽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만난 저 문구,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만큼, 말을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과 책임을 '말을 대접하는' 데에 쏟았고, 무의식적으로 그리하면 응당 '말에 의해 대접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말을 대접하는 데에는 하등 관심이 없으면서,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문제삼는 사람은 애초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에게 부족한 건 언어와 마음의 관계에 대한 감각이라고, 자신이 보지 못하는 걸 나에게 강요하는 거라고, 자신의 무지를 앎으로 기만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를 논리로, 이론으로, 개념으로 지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철학자들이 있었고, 여러 고인들도 그런 현실 삶 속에서 괴로움을 느끼며 이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기 위해 철학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연대감은 죽은 사람들 뿐이었고, 살아있는 사람과 연대를 맺을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어만 갔다.


이번에 이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도취적 구조를 알아보게 되고 또 이를 재구성하려고 작업에 임할 수 있었던 건, 과거에 늘 있어 온 지긋지긋한 저 경험의 중첩과 함께 놀랍게도 이런 언어에의 고통으로부터 일종의 해방과 자유,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줬던 관계의 경험 덕분이다. 이제서야, 나는 나를 한층 더 깊이 파고들 수 있게 되었고, 수 년간 할 수 없었던 그 한계 너머를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 관찰이라느니 자기 성찰, 자기 분석의 용어들이 심리학과 상담으로부터 파생되어(물론 그 기원은 더 오래되긴 했다, 오늘날에는 과도하게 세속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남용되지만) 마치 삶의 가치관처럼 자리잡은 건 얼마 안 된 유행이다. 이것들은 나에게 자폐에의 몰두에 다름 아닌데, 실제로 저런 작업에 매달리면 사람의 공감 능력이나 고통에의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만다. 자폐는 벗어나야지만 자신이 자폐적이었다는 걸 안다, 진실의 효과와 동일하다. 내가 관계의 실패를 맛보면서, 언어와의 관계에서도 실패를 맛보면서 늘 희망으로 부쳤던 이미지는 뛰어난 이해나 명석한 두뇌, 예민한 감정이 아니었다. 무지와 앎의 스펙트럼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인가. 마음과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인가.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야 불가능한 현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배웠던 건 바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찌들대로 찌든 상태였고, 상대방은 안정적인 신뢰 관계로부터 삶을 이어온 지극히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치유는 아니었다. 서로의 노력과 서로의 표현이 맞닿아 다채널로 통신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대단한 그런 관계였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 이미 그 전부터 놓치고 있었고, 그 시작은 16년의 끔찍한 파국이었고, 이후로 나는 스스로를 돌본다는 감각 자체를 놓쳤던 것이다. 그때 당시 처절하게 매달렸던 나의 문제 속에서 읽어냈던 나의 최선은 역시나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만큼'이었다. 본인이 받고 싶어 하는 만큼, 본인이 해야되는데 하기는커녕 도리어 나의 노력을 있는 그대로로 안 보고 왜곡하고 오도하여 나를 공격하는,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란. 결국 내 삶을 지탱했던 문제의 아주 강력한 적을 만났던 것이다. 나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그래서 나의 약점 깊숙히 파고들어 나를 완전히 쓰러트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마주했던 건 내가 포용할 수 없는 '타자'였고, 나는 이에 실패한 대가로 그 후유증을 몇 년이나 겪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빛과 어둠은 순서대로 온다는 진리(?)가 하나씩 나타났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둠은 나를 꼼짝없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고, 겁에 질려 괴로움의 자폐로 빠져들도록 만들며,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다 못해 도취 구조에 고착화되도록 만들었다면 빛은 나에게 삶에의 기쁨과 환희를, 순간의 행복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헤아리는 자폐 아닌 관계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양면은 결국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자'로서 나에게 도착한 나의 현실,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그런 사람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걸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자기 도취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붙어 있는 객관성으로 출현한다.


빛을 쬐면서 비로소 일어날 힘이 자리잡았고, 그 빛이 가고 그늘이 졌을 때 비로소 일어난 것이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말의 대접'으로부터 한 단계 나아가고자 한다. 언어를 놓아주는 일, 침묵이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내가 그토록 재건하고 싶었고, 죽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얻은 교훈들을 통해 수렴시킨 나의 가치관, 혼자서 할 수 없는 한계를 함께는 넘을 수 있다는 걸 지켜내기 위해, 현실로 도착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나는 늘 혼자였고, 혼자인 게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함께가 낫다는 주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희망 중 최전선이 언어 창작이라면, 관계는 이 언어 창작의 토양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강압이 들어와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고르는 게 나라고. 이런 맥락 속에서 언어와의 관계는 반드시 개진시켜야 할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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