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라는 시간 2
22.09.28
지금 쓰는 글은 오직 나를 위한 글이다. 만약 연상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객관성의 실마리일 뿐, 그 외의 별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말을 대접하는 걸 평생토록 할 사람이다. 그런데 내 삶의 궤적에 있어서 나의 욕망 중 하나는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다'에 너무 고착화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말에 의해 나의 인격이 '있는 그대로'가 아닌 훼손되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감정이 자극되고 괴로웠다. 이 고통이 결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자리한 이상, 나는 나를 위해서라도 이 자폐 구조를 고쳐 써야만 했다. 이것이 왜 자폐 구조이고, 또 그런 자폐 구조를 알아볼 수 없었는지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어 하는 자, 말을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욕망과 책임의 현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내면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어 하는 자'로부터 출발된다. 말에 의한 상처라는 그 균열의 발생 지점은 인격적 소통이라 표현할 수 있는 상황 안에서다. 그 상황은 늘 유일한 선택지를 남기는 타자의 말로 출현하는데, '넌 이런 사람이야, 넌 이래서 안 돼, 넌 ~~하지 못해'라는 말들로 도착한다. 이런 말들은 그 이면에 담긴 의도나 마음과는 별개다. 기표가 가진 강력한 힘은, 주체가 그 기표에 어떠한 마음을 담으려 한다 해도 다 담길 수도 없을 뿐더러 늘 불충분의 여지로 하여금 끊임없이 확장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이는 우리네 일상에 있어서 무척 익숙하고도 거진 모두가 겪는 소통 불능의 이미지다. 저 말이 담고 있는 이미지는 '너'라는 나의 인격이 상대에게서 불가능의 기표로 포획되어 그 바깥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나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도 확정지을 수 없다. 타자의 말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이 최선인 것이다. 그는 타자의 말을 결코 거스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실재에 출현한 상징이며, 그것에 접근 불가 명령이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때 말에 의해 대접받지 못하는 자는, 그 말에 의해 모욕감과 모독을 느낀다. 자신의 인격이 상대에게 그렇게 포획된 데에 따른 어떤 '빼앗김'의 이미지다. 이 부당함이 유발되었을 때 그는 이 말을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인격에 걸맞는 말로 바꾸려고 하거나, 타자의 말을 거부하고 부정하거나. 그러나 이 몸부림은 일시적일 뿐이다. 타자는, 어쨌든 주체다. 그의 말은 반복될 것이며, 결코 그렇게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욕감으로부터 온전한 충족감으로 나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바로 타자의 말을 통과하는 일뿐이다. 말의 통과란, 타자의 말에 오롯이 자기 자신을 맞춤으로써 무수히 많은(맞지 않은) 부위들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수반한다. 억울하고, 부당하고, 또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다. 하지만 그렇게 맞춰진 말과 인격의 일체에 자신이 그렇게 하기 위해 버려두고 가야 할 자신의 일부를 마주한다. 타자의 말은 일종의 관이요, 테세우스의 침대다. 거기에 들어가려는 자는 필히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상황은 왜 나타나는 걸까? 이 끔찍한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왜 출현하는 걸까? 타자가 주체라는 점에서, 그는 왜 자신이 '말을 대접하지' 않고 도리어 상대의 인격을 말로서 맞추도록 요청하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 끔찍한 고통의 정체는 자신이 타자의 말에 맞춰지는 고통에 있다기보다, 타자가 어떠한 책임도 수행하지 않으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말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꺼낼 뿐이다.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는 오직 그 말에 상대를 넣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 그 말이 '있는 그대로'로 어떻게 자리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기준이 이동되어야 한다. '넌 이런 사람이야, 넌 이래서 안 돼, 넌 ~~하지 못해'라는 말이 늘 그런 고통의 효격을 발생시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 말이, 인격에게 있어서 '그래 분명 내가 잘못했네,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로 옮겨갈 때의 상황을 떠올려 보자. 그는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책임'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런 말들에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자는, 저 기표가 지닌 인격 모독이 늘 '모욕'이 아니라 자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자신도 타자에게 건넬 수 있다는 걸 학습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상황에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치명적인 말로 다가오기도, 어느 상황에서는 모욕적일지라도 성장의 근거로 다가온다는 걸 체험한다. 이 상황에서 늘 나를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특정 상황은, 본인의 무책임함이 결합된 인격 모욕적 말에 있어 자신은 말을 대접할 마음이 없으면서 도리어 나로 하여금 그런 상황을 전가시키는 사건이었다.
이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 만약 타자 또한 말을 대접하는 노력을 하면서 일견 타당한 기표로 인격에 대한 말에의 대접을 요구했다면 이는 전혀 문제될 게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폐 구조, 본인의 언행에 대해서는 최소화하고 상대의 언행을 과잉 확대시키는 그 나르시시즘의 심리. 바로 그것이 '말'에 결합될 때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로 다가왔던 것이다.
저 구조를 취하는 자들은 자신의 노력과 책임에 집중하기보다 상황 개선이나 상대의 능력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은 놀랍도록 협소하지만, 상대의 말에 대한 책임은 인격으로까지 확장된다. 무엇보다 결코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달콤한 우월감으로부터 벗어나기엔 그들의 유아성이 숨겨지고 드러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을 지닌 타자의 언어 습관 중 하나는 상대의 언행에는 부과세를 높게 치고, 자신의 언행에는 면제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인식 구조 안에서 상대의 노력과 책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설정된 최대치 너머가 인식되지 않는다. 이는 결국 그들에게 던지는 노력과 책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불가항력이며,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상대의 인격을 절하하고 부정하고 자기 가치관 안에서 맞지 않는다는 편리한 방식으로만 끌고 갈 뿐이다.
여기서부터 주의하자. 오늘날 우리 모두는, 사실, 이 구조를 많게든 적게든 취하고 있다는 진실을. 나르시시즘의 구조가 잘 포획되기 어려운 건 늘 자신에게는 유리하고 상대에게 불리한 방식으로만 포착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 구조를 대입시키려고 할 때는 늘 '타자'이지 '자기 자신'은 빗겨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자기를 구분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된다. 자폐란, 분명 벗어나야지만 자폐인 걸 안다. 만약 그렇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애초에 자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하려는 작업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나에게 있는 자기 도취의 구조, 나르시시즘적 언어 관계를 분간해내기가 쉽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고통도 내 안에서 맴돌았으며, 저 구조의 특징인 상대의 언행에 대한 민감한(과도한) 포착이 '현실'로 제공되는 이상 결코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 저 구조의 양상을 달리하면서 '나는 아니야'라고 했다간, 결코 이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저번 글에서도 적었듯, 아무리 부당하고 아무리 딱 들어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일단은 뒤집어 써야 할 누명이어야 비로소 분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재, 이 방법 말고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모른다.
이 구도에서 나의 문제로 들어와 보자.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어 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 관계의 소통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는 일이라는 우리가 깊게 충족할 수 있는 의미와 가치를 왜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에 과도하게 몰입했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도취가 달라붙었다. 나는 상대에게도 '말에 의해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만큼, 말을 대접해야 한다'고 요청했으며, 이에 상대가 따라오지 못하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일견 합리적으로 둔갑되기에 적절한 논리로 기생하고 있어서 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끊임없이 '말을 있는 그대로 대접하기를' 요구하고, 그것이 안 될 때마다, 안 되는 과정 속에서 나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자폐적 말에의 요구-인격 모독은 나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 나는 이 압착된 관계를, 꽁꽁 얼키고 만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의 자기 도취란, 내가 오랜 시간 쌓아온 '말을 대접하기'가 압축될 수 있다고, 상대에게 요청하면 상대가 응당 할 수 있을 거라는 그 과도함의 작동 구조다. 나조차도 13년도부터 수백 번을 곱씹으며 하나씩 해나가 늘 과정 중에 있었음을 객관적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이에 대해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 대뜸 그걸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모양새란. 나의 시간을 상대에게 '말'로 전달함으로써 그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날 거라는 도취적 태도. 바로 이 부분이, 나에게 있어서 언어에 달라붙은 자기 도취였다.
그리고 이는 늘 고통받을 때, 감정이 자극될 때에 발생했으므로 더욱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고통은 나의 현실이므로, 나는 내가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고, 서로 존중한다는 원칙을 깨지 않는 이상에야 관계 타자는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합리적인 구조 안에서 나의 자기 도취를 감췄던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 고통스럽지 않고, 감정이 자극되지 않으면 전혀 나타날 일도 없고 드러날 일도 없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문제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이 고통에 직면해야 했다. 늘 이 문제를 상대의 부족함으로, 무지로, 모자람으로 대체함으로써 내가 이 구조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없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현실이다. 말을 대접할 줄 알고, 상대가 고통스럽다는 그 감수성이, 역지사지가, 도덕적 감수성이 발달된 사람과의 관계는 빛 그 자체였다. 내가 원하던 신뢰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기에, 나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상대에 비추어 보는 자기 도취의 버릇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나에게 있어 언어와의 관계에도 고착화되었기에 더 중요한 문제였다.
이 부분에서 내가 언어를 놓아주기, 침묵으로 우회하기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 불가능 했던 부분은 바로 이 도취 바깥의 '타자'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부족이었고, 결정적으로는 포용 부족이었다. 내 삶에 있어서 강력한 공포와 두려움, 불안으로 자리한 '인간'이 최초로 자리한 이상,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려 준비가 되었을 때 그 기회마저 뺏겨버린 이상, 결국 나에게는 단 한 번도 그런 구원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첫 연애 때,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나 스스로를 투신하며 한계를 넘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도 그저 어린 애였을 뿐더러 우울증과 불안,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로 인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픔에 괴로운 사람이었거늘. 혼자를 도무지 견뎌할 수 없는 다른 양상의 나르시스트는 그 외로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며 그 시간을 쾌락과 충동으로 덮으려고 하는데, 첫 연인이 그랬다. 당시 내가 책임의 영역, 사랑에 대한 마음의 책임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었는지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어쩌면 당시의 타자였던 그녀지만, 그녀는 자기 문제만으로도 너무 벅찼기에 나의 기회는 또 다시 물거품이 되어 돌아갔다.
이런 실패의 경험들이 누적되며 나에게 고착화된 건 결국 '침묵이라는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 도취를 끊어내고 포기하기 위해, 언어를 놓아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불가능했던 그런 사람-말에의 태도. 말을 대접하지 않으면서 나로 하여금 말의 대접을 인격적으로 덧씌우는 그런 타자의 포용 불능. 나는 이 불능을 가능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것만이 도취를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이고, 위선과 기만으로 자기 도취의 우월감을 둔갑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지금의 최선.
말에의 대접에서 꽤 일반적인 우회 접근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동일시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볼 때 그 사이에 거울을 놓고서 자기 자신을 본다. 그래서 상대의 못난 점이나 부족한 부분이 나타날 때 그걸 타인의 부족함에 따른 자신의 우월감으로 둔갑시킨다. 통용되는 말로는 '나니까 너 만나주지'다. 이 위선과 기만이 잘 작동되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건 가능한 현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폐의 연장일 뿐이고, 그 위선과 기만이 아닌 마음과 표현의 일체가 주는 의미와 가치의 깊이를 훼손하는 짓에 불과하다. 이를 하지 않는 친구는 앞서 빛이라고 말한 친구뿐이었다. 그래도 살면서 그런 친구를 만났던 게 참 의미가 컸다.
나에게 필요한 건 유아적 동일시가 아니라 침묵이라는 시간을 확장시키는 일이다. 이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아직 제대로 하고 있다는 분명한 느낌은 아니다. 끊임없는 추체험을 통해, 계속해서 여러 상황, 여러 사람, 내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 너머의 것을 상상하는 훈련을 계속 할 뿐이다. 이 작업은 일견 자폐적으로 보일지라도, 이렇게 해야 현실 대처에 숙련도가 생긴다. 중요한 건 현실에 있어서는 이 이미지들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못하는 건 감정 이입이나 감수성마저 자폐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진다.
침묵에 말이 스러지는 걸, 이윽고 다른 말로 재생하는 걸 지켜봐주는 일. 그것은 변화를 같이 할 수 있는 자세이자 도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다. 이 자세가 자리잡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건 역시 자기 도취적 말에의 대접이다. 나는 늘 이런 자세를 취하려고 애써도 상대에의 도취적 언어 공격을 당하면 자세고 나발이고 평정을 잃고 말았다. 이 취약함, 약점, 빠지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주춧돌. 나는 이 구멍을 너무 소홀히 했고, 이제서야 이 구멍에, 심연의 아가리에, 침묵에 눈을 맞추고 있다.
내일부터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나는 바다보다 숲에서 기운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이다. 산 속에 있는 절에서 펼쳐지는 뽕맛을 마음 편히 즐기다 올 예정이다. 예부터 침묵의 위대한 스승은 늘 자연이었다. 내가 인공물로 도착하려면 그에 합당한 수속을 차례차례 밟아야 한다는 걸 인정한다. 간만에 아빠도 보고 오려고 한다. 나는 늘 아빠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되물었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 '그렇게 말도 없이 가서 속 편하냐고'. 이제는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침묵이라는 다른 말을. 아빠를 그리며 썼던 시의 마지막 시구는 이랬다.
삶은 나에게 이런 걸 가르쳤다
죽어지지 않고 입만 다물어진다는 걸
아예 몰랐던 게 아닌 모양이다. 결국 변화라고 하는 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통합적 충동이라는 걸, 침묵은 시간이라는 걸, 공굴리는 모양새다. 동그라미들. 던지고 싶은데, 아무도 맞아주지 않는, 나의 동그라미들.
https://www.youtube.com/watch?v=sovVYInjH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