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9
근 7년만에 융을 다시 만났다. 처음 융을 읽으려고 했을 때는 실패였다. 그 당시 정신분석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왜인지 나는 융과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원형적 심상과 상징에 대해 감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모종의 의심 아닌 확신이 있었다. 푸코 세미나에 참가하고 있었고, 여러 심리학과 더불어 프로이트를 읽고 있던 때였다. 융의 글은, 내 안에서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무지'를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쉽게 말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의심-확심을 강화시켰던 경험이 있다. 푸코 세미나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H 씨와의 대화다. 그는 나에게 자신 만의 신화를 비밀스레 이야기해줬고, 길을 걷다 보면 '무늬'가 자신을 덮쳐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최대한 경청하며 '참여 관찰'을 하려고 했지만, 실패였다. 나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내적 경험이었다. 때마침 크레치머와 더불어 병적학 텍스트를 읽고 있었는지 몰라도, 꽤 투박한 이분법이 존재함을 믿고 있었다. 프로이트적인 사람, 융적인 사람이 있고 이 둘은 서로 화해할 수 없다고. 이때 나는 조현병이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스스로 '프로이트적인 사람'에 가깝다고 느꼈다. 프로이트의 개념과 이론은 구조적으로 사적 욕망이 투사되어 쓸 데가 없다는 인상을 받으면서도 그가 가진 특출난 재능인 의식적 언어 구사에 친화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적 욕망을 이론 구조로 강하게 투사시키는 모습에서 열등함을 느끼는 건 내 안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반대로 융에게서는 읽으면 읽으수록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상'이 느껴지지 않고, 언어의 상 또한 감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융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래 읽은 번역된 일본 서적들이 나의 생각을 바로잡게 도왔다. 내가 강하게 이끌렸던 '나카이 히사오'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책 1권과 더불어 의존증 관련된 책, 융에 관한 책이 그것들이다. 뭐랄까. 나는 융을 읽기 위해 이런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던 걸까, 그런 의미가 느껴지는 경험이다. 작년에 수행한 자기 분석은 혼자서 할 수 있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또 타인에 의존하지 못하는 나의 내적 성향이 맞물린 독단적 수행이라고 내심 치부했었는데. 이런 퇴행적 느낌들에 '다음'이 나타난 기분이다.
20대 때부터 나는 줄곧 '나' '나' '나'에 대해서만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된 관심사가 '주체', '주어', '자아', '자기'였다. 그 결과 여러 오해와 비판, 비난과 지적 등을 의식하게 된 건 서순 문제가 아닌 한 덩어리의 당연한 효과다. 애초에 '자기 자신'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만큼, '타인의 시선'에 강하게 휘둘릴 수밖에 없음이 한 몸이라는 뜻이다. 상황이 어떻든 중요한 건 왜 그렇게 이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가였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왜 일단락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림자처럼 뒤따라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융의 수고로움으로 인해 보급된 여러 개념이 대중화된 오늘날, 이에 힘입어 나를 끼워맞추면 내향적 사고-직관 기능이 특화된 인간이다. 나는 자기 실현을 위해 '자아'를 강화시키는 데 몰두했으며, 의식화와 언어화에 지대한 우선권을 할당했다. 그간 내가 공부를 하며 마음이 동한 개념들은 대개 '자기 실현'이라는 완성된 그림에 맞춰지는 퍼즐 조각에 다름 아니었다. 크로노스-카이로스 시간관도 그렇고, 공간에 대한 기억, 징후들, 기무라 빈-나카이 히사오의 인지 모델도 그렇다. 나 스스로를 이렇게 유형-모델로 적확히 파악하려고 하는 건 초기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며 '성격유형론'으로 기조를 닦는 것과 유사한 문제 의식이다. 20대 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나'에 초점이 가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왜 하필 이거일까다. 이는 결국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나'를 자꾸 관찰하고 점검하는 버릇. '다른 게 아니라 왜 이거일까'에 대한 검열과 수정. 이 틈새에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무기력이 강화되는 것도 이어진 맥락이었다.
다시 만난 융은 나에게 '나-자아-자기'로 이어지는 확장-퇴행 운동에 근거를 준다. 나는 여지껏 퇴행을 믿으면서도 퇴행을 믿지 않았다. 미분 인지답게 이 과정을 거시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일상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나의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오늘의 상태와 내일의 상태는 왜 이렇게 천차만별인가. 시를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상태는 또 왜 이렇게 천지차이인가. 나는 이 전환을 '원만하게' 넘나들지 못해 괴로워했다. 강박적인, 기계적인 암기를 할 때도 나에겐 이 전환에 대한 허들이 대단히 높게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신경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드는 것이다. 여기에 점차 부하를 느껴 점점 퇴행할 수밖에 없는 건, 내향적 인간이 정신쇠약에 걸리기 쉽다는 융의 말과 정확히 동일하다. 20대 때는 혈기왕성으로 이 부하를 겪으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그 지칠 줄 모르는 정신 체력,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음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없었다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제는 그런 에너지가 고갈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무언가,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작동을 멈춘 부품들처럼 느껴지는 건 이 시대의 규정 기술 때문이리라. 지금 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 자기 관찰을 하고 있다. 이전의 방식보다 좀 더 발전된 태도로 임하려고 시도 중이다. 나는 어떤 상황일 때 감정 전이가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콤플렉스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성향 구조를 갖고 있나. 무슨 기능들을 주부로 나누고 있는가.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어떠한가. 일단은 융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꿈 분석도 시도할 예정인데, 왜인지 꿈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러다 오늘 기억나는 꿈 하나가 나타났다. 자전거로 사람들을 각각의 목적지에 데려다줘야 하는 상황 속에서 동선을 짜보니 결국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아 흐지부지 무마시키려는 태도 속에서 꿈이 끝났다. 이때 느낀 감정들은 꿈에서 꽤 자주 겪은 감정들이다. 호의를 느껴 일단 도와주려고 선뜻 마음을 가졌지만, 이후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당황함과 난처함을 느끼다 내뱉은 말이 있어 옴싹달싹 못하는 그 감정이다. 너무 현실적인 감정이 반영된 기분이지만, 해석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절대 나를 알 수 없다. 이 의미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 무지의 첫걸음이다. 나는 절대 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 자꾸 읊조린다고. 융을 처음 읽은 시기에 거진 동일한 문장을 썼던 기억이 난다. '나'를 자꾸 쓰는 이유는,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라고. 현재 이 시도에 목표는 설정하지 않으려 한다. 융의 말마따나 '자기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할 수는 있어도, 일단은 맹목적인 게 안전한 기분이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를 본다. 나는 나를 알 수 없다. 이 두 문장만 있어도 행위는 성립한다. 자기 관찰을 아무리 수시로 밥먹듯이 해도 기록으로 남기는 건 조금 낯선 경험인데, 반복이 잘 될지는 모르겠으므로 섣불리 정할 수 있는 건 없다.
요즘 시간대를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리듬으로 설정해 지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관련 책을 읽고 내적 관찰을 어느 정도 한 다음에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 현재 나의 하루는 밤에 시작해 낮에 끝난다. 보편적인 시간대의 전복인데, 이게 어떤 영향으로 자리매길지 관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