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2
23.07.07
융 읽기를 시작했다. 오래 걸릴 거 같다. 중간에 멈추거나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도 든다. 최대한 추려서 6권을 샀다. 오늘 [성격 유형]을 다 읽고 끝까지 가봐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지금 나의 정신 상태를 어떻게 견인해야 할지 오리무중이다. 유형론을 빌려 스스로를 우겨넣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유형을 빌려 작업을 진행하진 않았다. 애초에 나는 나의 정신이 의심스럽다.
유형의 이분법으로 접근했을 때, 지금 나의 상태는 총체적 난국이다. 차라리 극단적인 유형이면 단순하고 쉽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른 책에서 어떻게 말하는지 앞으로 차차 확인해야겠지만, [성격 유형] 안에서 융은 서로를 배척하는 이분법의 틀을 아무렇지 않게 채용한다. 가령 내향과 외향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건, 뭐랄까 융이 다른 이들을 비판할 때 쓰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른 이들이 개념을 만들어 거기에 우겨넣기 위해 과도한 재단을 하는 것처럼, '대립'이 맹목적으로 전제된 이분법으로써의 양 극단은 작용과 반작용이 마술처럼 매끄럽다. 더욱이, 이성의 기능을 '구분 짓기'라고 말할 때 각 인간의 기질을 어떤 '유형'으로 포착하려는 그 구분은 역시 융의 말마따나 편향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논리와 관점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부분에 대해서 아무 말도 남겨놓지 않았다. 다른 책에서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할 뿐이다. 쇼펜하우어를 경유하며 '언어 표현의 문제'에 대한 관점이 없을 리 만무한 그가, 중국 고대 사상, 인도 철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그가, 정반합이나 중용 같은 언어 효과와 정신 작용의 함정을 몰랐을 리 없다고.
21세기 MBTI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성격 유형론'은 자기 작업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 같다. 오늘날 이런 유형론이 유행하는 분위기는 도시 인간들이 '개성화'를 강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기보다, 심리에서 정체화를 꾀하려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어떤 유형이기 때문에 이런 유형과 궁합이 어떻고, 이런 유형은 이런 일에 능하고 등등은 가십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혈액형론에서 발달된 것이라고 볼 때, 한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으로 성격을 읽어내려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서 이제 심리학적 특징으로 성격을 읽어내려는 19~20세기로 나름 진보했달까.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마케팅 코드로 다룬다면, 인간을 속여먹을 아이디어가 포착되기도 한다. 문제는 '유형'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의 해석이 연결되고 대응된다는 것.
융의 성격 유형에 따르면 나는 내향적 사고 유형에 좀 더 특화되어 있다. 이를 기반으로 외향성과, 사고가 억압하는 감정 기능, 그리고 직관과 감각 기능을 발달시킨 게 나의 20대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여러 '부작용'들, 그러니까 의식적 활동으로 인해 무의식으로 밀려난 여러 유형들의 '반발'이 일종의 콤플렉스로, 나의 취약함으로, 갈등으로, 삶의 문제로 부상했다. 이 프레임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지금 나의 처지는 자기 자신의 타고난 기질을 긍정하지 않고 억압한 대가로 신경 쇠약에 걸린 것뿐이다.
어떤 사람이더라도 오직 하나의 유형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다는 신신당부를 하는 융. 그러나 정식화를 위해서는 각 유형별에 걸맞는 '인간 묘사'를 자행한다. 즉, 묘사된 그는 한 유형을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놀랍게도 성별도 일반화로 고정되어 있다. 내향적 사고 유형은 남자. 내향적 감정 유형은 여자. 이런 식이다. 융은 이런 일련의 스케치를 자기 경험을 근거로 삼고 있다. '직접 만나본 사람이 그랬다'가, 그 유형 대표의 자격 조건이다. 한 사람의 복잡한 정신을 유형으로 분류하여 다시 종합된 상태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은 구조적으로 '회로 방식'을 띠게 된다.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불이 켜지는 상태는 어떤 유형의 우선권이다. 그러면 불이 꺼진 상태는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미발달된 상태'로써 에너지가 운용된다. On이 있기에 Off가 있고, 이 둘은 결코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 가령 합리적 판단에 해당되는 사고와 감정 유형이 전면에 나타나면 비합리적 판단들은 배후에 남아 있다. 이 모든 게 '동시에' 나타나는 건, 융의 유형론에서 망상조차 되지 못하는 거 같다.
일반 대중들의 관점에서 심리학이 매력적인 이유는 어떤 해석과 설명이 자기 심리와 대응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대신 표현해주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동일시 작용인데, 이전에는 문학과 종교가 담당했음은 분명하다. 인간에게 '동일시, 동화'가 왜 필요한가, 혹은 그 너머의 '기본적인 기능'은 정신의 한계인가는 밝혀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정신, 그러니까 뇌의 활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그렇게 셋팅되었다는 게 최선이랄까. 외부의 대상이든, 내면의 자기든 동일시는 모든 유형의 근간이라고 보는 게 당연시된다. 이걸로 시작해야 외향이든 내향이든 구분할 수 있고, 칸트 이후로 분화된 (것처럼 보이는) 여러 기능들이 물질성을 띤다. 사고는 감정과 대립되고, 직관은 감각과 대립되는 식으로. 고전이라 불리며 여전히 써먹히는 이 대립 프레임은 늘상 어떤 대상들의 '인간적인' 관계를 필요로 한다. 물과 불이라든지, 빛과 어둠이라든지. 오행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균형 있게 구분된 방식이라든지. 추상적인 차원에서 '공'의 각종다양한 풀이라든지. 융의 유형론은, 이런 일련의 인식 프레임이 각 기질에 따라 보다 친화적인 것들로 채택된다는 걸 알아볼 수 있게 돕지만 저런 인식 프레임 자체에 포함된 결함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식도 얻어갈 수 없어 보인다.
나의 한계는 곧 이딴 식의 인간의 한계에의 동일시다.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내가 이해한 철학함의 기본 원칙, '당연시 되는 걸 의심하기'가 너무 멀리 가고 만 걸까? 회의주의라는 이름으로 재단될 수준이라면 방황보다는 극단적인 유형으로 거듭났을 텐데. 확실히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걸 비관과 회의로 몰아세우는 습관이 있다. 합리성을 내려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믿었던 게 16년도였다. 융의 말마따나 '방법'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합리적 태도를 전부인냥 고수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세상, 인간과의 '갈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중력이 없는 세계에서 질량을 인식하는 것만큼이나 망상의 지옥으로 자진 입장하는 게 혼자만의 완벽 추구다. 나는 사고 유형을 고수했다간 반드시 망한다고 믿고 있다. 이는 한쪽으로 치우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그랬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나의 친구는 요즘 나에게 연락을 자주한다. 그 친구는 융이 유형 대표로 써먹을 만한 꽤 극단적인 케이스다. 친구와의 대화는 늘 그의 '자기'로 채워진다. 친구는 대화의 내용 99%가 모두 자기와 관련된 내용임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다. 나는 내향적 사고 유형임에도 외향성을 발달시켜서인지 친구에게 맞춰 대화를 한다. 내가 그의 '내면'에 대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진행될 수 있다. 그 친구는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벌어지는 온갖 상황들을 죄다 '자신의 내적 영역'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대응한다. 융이 아무리 '유형'에 대한 자가당착에 혐의가 있다고 해도, 현실은 이런 것이다. 너무 딱 들어맞는 인간들이 바깥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언어로 대응시킬 수 있다고.
나는 나를 알아볼 수 없다. 내가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고의 횡포'에 내가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전형적인 내향적 사고 유형답게 남들의 시선에 나를 대응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 기준에서 그들의 인식은 편협하고, 유치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다.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자행한 고통스러운 수행의 결과는 안타깝게도 '변함없음'이다. 문제의 근본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타인의 언어 능력에 주관적인 기준과 객관적인 기준 모두를 강하게 적용시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래서 타인의 표현에 의해 나는 어떤 영향도 받질 못한다. 가령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한다. 이런 걸 숨쉬듯이 하는 외향성 인간들처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불가능을 알아보기 시작한 건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균형 있게 잡힐지 못 찾고 있다. 내가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킨 건 고작해야 '외향성 속에서 내향성을 대입시키지 않기'이지, 구조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친구를 보면서, 차라리 친구처럼 내 기질과 특성을 유일함으로 긍정하는 게 나을까, 라는 생각 따위는 추호도 들지 않는다. 내 정신은 이미 그 길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엄청난 각오로 자진해서 모든 걸 반대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히는 것도 상상 가능한 방법이긴 하다. 나의 모든 인식, 판단, 사고 하나하나 뜯어 고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철저히 외향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살아보는 것이다. 솔직히,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열정'이다. 구조의 문제가 불가능으로 다뤄지는 이유 중 하나는, 억지로 건드렸다가는 순환되지 않기에 결국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을 다른 성향으로 바꾼다고 해도, 나는 그 과정에서 구조화를 할 만족도와 충족감, 쉽게 말해 보상을 맛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질의 구조를 바꾼다는 건 그냥 다시 태어나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다.
반면에 극단으로 치닫다 정신병에 걸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회적 제정신을 최대한 유지하되, 내적 고립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하다 결국 주체할 수 없는 상태로 가는 방법도 있다. 이는 아무나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기질이 되는 것보다는 난도가 낮아 보인다. 대충 이런 생각들을 그려낸다는 것만 봐도, 전혀 '현실적으로' 자기 상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뻔히 보일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방법 자체에 매달리기를 포기하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그저 지금의 이 상태를 최대한 긍정하면서 정신 에너지들과의 동화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신경쇠약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는 숟가락으로 강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막연하고 무기력하다. 내가 친구에게 늘상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기질, 성향, 유형의 타고남을 부정하는 순간 인간은 정말이지 나락이다.
하지만 융을 읽는다는 건 이런 식의 자가당착에 빠지는 걸 의미하지 않을 터. 나는 나의 상태를 어떤 정신 기능으로 대하는지, 그 관찰의 관찰을 수행하고 있다. 분명 나는 사고 유형 외의 것으로 나 자신을 관찰하는 걸 익히지 못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본다면, 발달이 되다 말았다. 내가 편협한 동일시에 강한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분명 무언가의 억압된 반발일 수도 있다. 내가 처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나는 일단 눈을 감아야 한다는 직감이 든다. 의심과 회의를 멈추고 일단 믿는 것이다. 그게 아무리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타당하게 '느껴질'지라도 결함이 아닌 균형으로 여기며 믿고 맡기는 것이다. 시인들의 감수성을 인간 중심의 한계로만 볼 게 아니라, 믿고 맡기는 것이다. 이 부분이 정말 포기가 안 되기 때문에, 돌려 말해 나에게 너무나 결정적인 역린이기 때문에 지금껏 이 지경으로 굴러왔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 당장만 해도, 그런 상상을 하는 순간 '그 결함을 어떻게 못 본 척해?'가 된다. 애써 못 본 척한다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없지 않은가. 물을 엎질렀는데 어떻게 닦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닦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닌가.
그만큼 세상 사람들과 동화되는 게 어렵다. 사람들이 감정과 사고를 그런 식으로만 다루는 게, 나한테는 뭔가를 망치는 기분이다.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옆에서 자기 기분에 취해 시끄럽게 떠드는 느낌이고, 자기가 하고싶다는 이유로 공동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리는 느낌이다. 이 이기심을 어쩌면 좋아. 이런 식의 문제가 쉽게 풀릴 거였다면 애초에 유형론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극단적인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형 바깥의 뭔가가 필요하다.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운 뭔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있다면 있다고 말할 거라고...
내가 느끼는 자폐가, 과연 나의 자폐일까, 저 바깥 인간들의 자폐일까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시대가 흐르면 확보될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아니다. 객관성이 확보되면 사람들은 알아보고 어느 편에 서서 깔보고 욕할지 단번에 알겠지만, 그 전에는 다 똑같다. 합리의 시대인 오늘날 사람들은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열등하게 바라보는 데 어떠한 갈등도 느끼지 않지. 열등하게 말하기 위해 조현병을 들먹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인식이 늘 이래왔다. 갈등을 알아볼 수 있게 되면 그제서야 '피해' 운운하며 떠들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문제를 풀어내는 데 성공한 사람도, 다른 이가 동일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이 문제를 겪는 데 어떠한 해답도 주질 못한다. 이건 정말이지, 개좆같은 내향의 디버프다. 왜 이딴 걸 달고 사는 걸까.
무슨 엿먹으라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는 설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내향인들이 '저주와 시련'을 읊조린 건 우연이 아니다. 지옥을 홀로 소환해낼 수 있는 자는 반드시 내향인이다. 이 기능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지랄해도 혼자인 게 자연에서 파생된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맞기는 한지도 의심스럽다. 도대체 왜 이딴 걸로 만들어져서 사는 걸까.
아마 이런 식의 인식들로 어떤 결론에 도착하는 순간, 결국 파멸일 거라는 건 정해진 결말이다. 완전함을 상정하기. 결함을 이성으로 판단하기. 결국 내가 스스로의 상태를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건,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결코 알아볼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 걸지도. 오만하게도. 불쌍하게도.
관찰을 위한 모드는 여기까지. 내일부터 깎기에 들어간다. 대충 감이 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고 다듬을지. 지금 이 상태를 어떤 방식으로 전복시켜야, 현실적으로 균형에 도달할지. 다음 융의 책은 '레드 북'과 '전집 1권,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그리고 '인간과 상징'이다. 나는 융을 조력자로, 선배로, 스승으로, 이웃으로, 하나의 시체로 여길 것이다. 내향성을 최대한 극복한 현 수준이기도 하다. 가장 최신의 수준은 '하나의 시체로 여기기'다. 내향적 사고 유형에는 '미생물'이 적절한 고삐가 될 것이다. 둘 다 '정서 따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어서 인간 중심을 방지할 수 있다. 일단, 분해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