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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ul 15. 2023

침잠하는 아침의 살

재건 3


23.07.15



융을 읽으며, 잃어버린 지난 마음들을 떠올린다. 체험으로 스스로를 내밀었던 마음. 삶의 의미와 나의 의미를 갈구하던 마음. 계속 이어지는 이 방황의 정체를 분간해내지 못함에 따른 자책의 마음. 적어도, 내면을 향할 줄 알았던 어린 나. 소중하게 여겼어야 할 그 마음을 언제부터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 채.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나의 방황을 알아볼 만큼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단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연의 힘, 운명의 열쇠, 번뜩이는 직관적 상과의 조우. 그런 내면의 선물들과 친하게 지내던 나는 지금, 시체처럼 무덤에 누워 있나. 내 정신은 망가져 있다. 이 망가짐은,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참하다. 


 이런 실패한 인간은 동정도 받질 못한다. 융의 지독한 외로움, 그 뼈저린 시간 속에서 잃지 않았던 빛을, 나도 붙들고 싶었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와야 한다는 걸. 하지만 인정한다. 나는 그럴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나는 부족하다. 턱없이 몸부림만 친다. 내가 내면과의 동거를 포기했던 건, 스스로의 힘으로 이에 맞설 힘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실패의 증거다. 여러 변명과 핑계가 있다. 이는, 나에게 있어 진실이다. 혹은 사회에 속한 여러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만한 진실이다. 고집에 빠진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 고집스러운 신념을 둠으로써 스스로 망가지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자만심. 그걸 스스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몸부림.


 천천히, 더듬어 본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분명히 그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의 콤플렉스를 그려본다. 나는 늘 어른을 갈구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나를 대신해 어른에게 의탁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어른은 나타나지 않았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내 곁에 있어줄 어른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시기하고 질투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른을 얻어 의존하고 의탁하는데, 왜 나는 그럴 수 없는가 하고. 저 뻔뻔함이 미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원받는 저 무책임이 미웠다. 못나도 응원받고 곁에서 늘 지켜주는 든든한 힘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다니. 나는 그럴 수 없는데.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데.


 오히려 쫓겨난 기분이었다. 나도 껴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부당했다. 나는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이 나약함, 연약함, 남들에게 눈총을 받는 유아적인 면모. 나는 꽤 필사적으로 나를 감춰야만 했다. 바깥 사람들은 냉정하고, 언제든지 잡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 노려봄이 무서웠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걸 싫어하고, 유치한 걸 싫어하고, 미성숙한 걸 죽일듯이 대한다. 무관심 이면에 자애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언어로라도 표현해낸 적이 없었다. 그런 걸 무상으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지원받는 다 큰 인간들이 미웠다.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른 행세를 하는 것도.


 이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혹여나 1명이라도 좋게 본다면, 나머지가 욕을 하면서 모든 걸 씻겨낸다. 위안과 용기와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를 소용없게 만든다. 나의 죄라면, 이런 '나'를 관짝에 넣어 못을 박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기를 감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몰라도, 그 정신의 힘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충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기만은 그래서 기만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도무지 방법을 알아낼 수 없었다. 적어도, 정답은 안다. 그러나 어떻게 풀어내야 할 것인가, 이 난제를.


 보살핌을 받고 싶었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충족되는 경험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이 불충분을 '남'에게서 기댈 수 없는 것임에도 그것이 현실이었다. 내가 동경했던 선생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걸 해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의 콤플렉스가 완성되었다. 내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혐오했던, 자신의 동일시 이미지로 타인을 바라보는, 그 방식으로 나의 콤플렉스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몸부림치면서 주장했고, 뒤에서는 남몰래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누군가를 이상화했다. 이는 내면에 불꽃을 일으켰다. 망망대해 같던 의식의 지평 저 멀리 등불이 하나둘 켜졌고, 나는 열심히 노를 저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거대한 아귀의 초롱불이었다. 한 입에 집어삼켜진 나는 괴물의 뱃속에서 점점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시들시들해지고, 죽어가고 있었다.


 괴물의 뱃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안간힘을 부려도, 괴물이 내보내주지 않는 한 소용없다. 힘을 점점 빼앗길 뿐이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허덕이다 죽어가는 존재가 되는 운명이었다. 나는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여러 시도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지옥이라는 걸. '자살'은 꽤 합리적인 선택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을 때 결단을 내리는 건 지극히 합리적이다. 나는 이 책임을 부모에게 돌릴 수 있다. 한 아이의 정신적, 정서적 보살핌으로부터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어떻게 부모에게 그런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럴 수 없어. 


 나의 부모는, 세상의 어떤 인간이든 그런 책임으로부터 대가를 달게 받아야만 하는,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의 정신은 알고 있다. 누군가의 삶, 정신, 그때그때의 최선, 그 몸부림을 어떻게 뭉개버릴 수 있을까. 그걸 못 본 척하며 당신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계속 갈구한다. 이 보살핌이 충족되기를, 채워지기를. 반대로 이를 못 본 척하고 뭉개버리면, 나는 겉으로 멀쩡한 척 속이 곪는 인간이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살다가 어느 순간 폭발할 것이다.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누군가를 상처 줄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악순환을 제공할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모르겠지. 수많은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기가 만드는 정신적 고통의 악순환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겠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콤플렉스는 강화되었다. 스스로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리는 방식으로.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무지하게 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먼저 구속을 풀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가하는, 너무 촘촘하고 꼼꼼하게 묶어버린 그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한 가지 슬픔은, 이런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그 무정의 시간 속에서, 동시에 인정 욕구와도 싸워야 한다. 이 일을 혼자 해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강인하지 않다. 분명히, 나는 나약하다. 제대로 해낼 리 없다.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증거가, 지금까지의 삶이다.


 나는 처첨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저주에 당했다. 그럼에도 나의 의식적 이성은 이 모든 걸 무화시키려고 한다. 언어의 교묘함에 속지 말라고 명료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성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 처참한 대가? 저주? 그런 인간의 오만함에, 우월감에, 자신이 뭐라도 되는 듯 신을 빙자하듯 함부로 입을 지껄이는 그런 말에 진실로 속아넘어간다고? 종교에 의탁해야지만 그렇게 타인을 열등하게 바라보는 걸, 속아넘어가 준다고? 자신의 뒷배가 신이라는 걸 이용하는 저 기고만장에? 하지만 억압된 나의 감정은 이런 이성의 등불따위 단번에 꺼버린다. 서로의 싸움이 날마다 벌어진다. 나는 신경쇠약에 괴로워할 뿐이다.


 인간을 이성적으로 꿰뚫기 시작하면, 나는 인간의 오만함과 우월감에 치를 떨기 시작한다. 인간을 감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는 수동적으로 이 모든 사태를 받아내 스스로를 지워내야 한다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콤플렉스가 아니었다면, 꽤 편리한 쪽을 택했을 텐데. 나와 가까운 사람이면 감정적으로, 상관없는 사람이면 이성적으로. 내가 이 문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알지만서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복잡할 따름이다.


 보살핌을 받고 싶다. 그러나 누구도 보살펴주지 않는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 모든 걸 극복해내고 싶다. 그러나 이미 정신은 그런 힘을 발휘해내지 못하고 있다. 진퇴양난, 속수무책의 심리적 상황이 수년째 이어지니,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독, 의존, 거진 모든 인간이 내보이는 '보이지 않는 비상 상태'의 면모가 나한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마 삶에 있어서 이런 절망은 고작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정신적 절망이 찾아올 때 사람이 얼마나 하염없이 무너지는지에 대한 외상이 깊게 박혀 있다. 그때 나는 자발적으로 진정한 타인이 될 준비가 되고 있었는데, 아빠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죽지 말고, 좀만 더 기다려줬으면,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있었는데. 이제 막 성인이 됐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지. 


 내가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보살핌을 충분히 받고 자란 게 아니라는 사적 삶이, 누군가에게 강인한 존재로서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는 걸 가로막는다. 내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이 불쑥 떠올라 내 정신을 공격하고 압박한다. 나는 내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숨어 있는, 나의 어린 나를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사람들은 끔찍이도 싫어하지, 누군가의 유아성을 떠맡는 걸. 나는 내가 해줄 수 있어서 나한테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꽤 오래 견지했다. 하지만, 나한테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매번 나만 한다는 느낌으로, 억압이 자극될 뿐이었다.


 마찬가지, 무지하게 굴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의도성'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아, 이 방식은. 과도함이 나의 억압된 정신 정체였다. 이 방식 속에서 보상을 갈구했다. 겪어보기 전까지는 이게 필패라는 걸 알 수가 없었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만의 방식으로 시도를 하고 부딪힌다. 나는 융의 말마따나, 경험을 앞지르려고 했다. 내가 그렇게나 경계했어도, 이미 경계한다는 것부터가 앞질렀음을 의미했다. 자꾸만 앞지르니, 그렇게 '경험과 체험'에 의미부여를 했던 게 나의 20대다. 이 정신적 틀 안에서는 반드시 패한다. 나는 이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나는 나의 정신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융에게서 많은 평행선을 확인하지만, 확실히 나는 그보다 약하다. 나는 무의식들을 사랑했고, 융이 30대 후반에서 겪었던 일련의 계시들과 같은 체험을 20대에 하고 있었다. 꿈을 통해 정화되는 체험, 계시의 체험, 우연의 동시성, 나를 이끌어주는 직관의 세계. 그러나 나는 포기했다. 융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에게 없지만 융에게서 보이는 것, 그것은 끈기다. 그의 끈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자서전을 통해 본 융에게서 이해될 수 있는 건, 결국 저항이다. 저항만이, 끈기를 만든다. 저항하고 저항하고 또 저항한다. 다른 무엇에의 저항이 아닌, 자기 자신에의 저항이다. 의식을 굴복시키지 않는 것. 자신이 무언가를 물고 늘어지려고 할 때, 그 의식을 다른 데에 뺏기지 않도록 수호할 것. 나는 이를 길러냈음에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융은, 한 번 길러내서 평생을 소중히 여겼다. 나의 나약함은 거진 이 단어로 표현 가능하다. 의지박약.


 맞서고 싶다, 나 또한 강인하게 뚫고 나가고 싶다. 그러나 금세 시든다. 나는 이 작은 마음을 너무 과장하고 있다. 이 작고 연약한, 쉽게 짓밟힐 싹 같은 마음을 너무 거칠게 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의식의 힘을 믿을까? 상징을 믿을까? 자기 정신의 놀라운 계시의 힘을 믿을까? 종교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무리에 소속되지 않아도 영적 체험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믿을까? 그 안에 종교의 구분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믿는다. 내 삶으로써 믿는다. 부족한 건 지적인 인식이고, 정서적 확신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이 무의식적 현상은, 마치 꿈의 계시와도 같은 이 이미지는 불과 7년 전에 썼던 시의 이미지다. 자라야지, 계속 자라야지. 이 시구가 이제서야 의미를 되찾았다. 


 나는 융이 자신의 내밀한 정신 체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알아볼 수 있게 할까'로 자신의 노고를 쏟아부은 데에 어떠한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다. 나도 내가 느낀 감각들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버거워한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리둥절한 수준이 아니라 거부감을 표할 게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융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 문제를 '시대정신'에 돌려 묻는다. 오늘날 인간들이 이런 수준인 건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현상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우월-열등의 무의식적 보상을 걷어내면 여러 가지가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문화와 문명의 의미, 대중과 일반의 의미, '대다수'라는 기묘한 정체. 하지만 이성의 힘을 빌려 이런 인식에 도달한다 해도, 무의식적 반발은 늘, 여전히 작동하기 마련이다. 아마 평생 짊어져야 할 불균형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있지만 융도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가 타인으로서, 사적으로는 잘 모르는 그런 상태로 만날 때는 되도록 성숙한 상태일 때가 최적이다. 특히 '정신'으로 만날 때는 더더욱. 그래야지 '남들 볼 수 있게' 만드는 의미가 있다. 윤리와 도덕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융도 이를 인정했으리라 믿는다. 이런 걸 중요시 여기는 정신 기질에 한해서만, 올바르게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난 정말 애새끼다. 뭔가를 그렇게 아등바등 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하나도 발달된 게 없는 느낌이다. 앞지르는 데에만 혈안이 된 삶이라서 그렇다. 이제야 삶의 속도에 의미가 자라는 거 같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지를 스스로 아는 건 기만이다. 하지만 인간 정신의 놀라운 점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 나는 이 기만의 비밀을 하나 알고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다른 주체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감각을, 나는 그래도 '나'로 어느 정도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꽤 많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에 당황하고, 통합에 실패한 이들의 정신을 '인간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 부분이 나의 힘이라면 힘이랄까. 나는 내가 나 아님을 만들어 진정으로 나 아닌 나로 여기도록 만드는 정신의 방식을 감각으로 알고 있다. 인정 욕구를 걷어내고 말한다면, 우리 인류에게 있어 이 정신적 힘이 있기에 수많은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고, 또 지속될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신중한 '내면 생활'인 거 같다. 갈팡질팡일지, 또 헛다리일지는 모르겠다. 잃어버린 끈기에 물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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