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4
23.07.20
융의 전집 읽기를 시작했다. 1권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는 정신 치료에 대한 접근, 꿈에의 접근, 무의식에의 접근 들에 정신적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그간 씨름했던 여러 문제들, 갈등들, 헤어나올 수 없는 늪 같던 고통과 괴로움. 그 시름 속에 빠져 있던 나에게 드디어 위로 힘껏 올라올 수 있도록 디딤돌을 주는 기분이다. 홀로 자처했던 여러 시도들, 자기 작업이라 이름붙인 나의 발버둥이 헛된 짓이 아니었다고. 믿음을 더 가져도 괜찮다고 힘을 받았다. 20대의 나 같았으면 분명 이런 상황일 때 몹시 격앙된 기쁨을 느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왜인지 차분하다. 투사하던 자아가 성장했다는 의미로 가져가기에 충분하다.
투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오늘은 미루지만, 조만간 좀 더 깊게 다뤄야 한다. 자기 전에 고민을 하고자 하는 대목은 지금껏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스스로의 굴레에 갇혔던 심리 상황에 대해서다. 아래는 위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만약 우리가 이 투사를 의식화한다면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기 쉽다. 왜냐하면 사랑과 미움을 그렇게 편하게 흘려버리는 환상의 다리, 다른 사람을 '높이고' '개선' 하겠다는 이른바 미덕을 그토록 쉽고도 만족스럽게 그 사람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환상의 다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대인 관계의 어려움의 결과로서 리비도의 정체가 생기며 이를 통해 무익한 투사가 의식된다. 그런 다음에 주체의 과제가 시작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다른 사람에게 부과했고, 거기에 관해 사람들이 평생을 분노한 모든 비열하고 극악무도한 것들을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여 짜증내게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이 그렇게 하면 인생이 상당히 참을 만한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원리를 자기 자신에게, 그것도 진지하게 적용하려는 시도에 반해서 일어나는 세찬 저항의 지각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것을 했더라면 사람들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일이냐 하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C. G. 융, 솔, 2021, p. 194
나는 정확히, 이 내용대로 고통스러워했다. 왜 사람들은 하지 않는 자기 수정을 내가 떠맡아야 하는가, 그들의 무책임을 왜 나의 책임으로 오롯이 받아내야만 하는가. 나의 삶에 있어서 이 시름을, 소위 말해 좆같음을 맞닥뜨린 첫경험은 21살이었다. 그때 나의 결정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질 않은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고립된 상황 속에서의 결정은, 불행히도 '내가 변해야지'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한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고, 악마로 만들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만드는 걸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투사를 뛰어넘기 위해, 아니, 나의 투사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변하는 걸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이 '목적'에 대해 어떠한 자기 실현도 해내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명분이나 혹은 운명 같은 맹목을 담보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고통은 늘 새로웠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콤플렉스에게 모든 걸 내어줘야만 했다. 지옥과도 같은 정신 속에서 이런 짓거리를 매번 한다고 뭐가 더 나아지거나 발전한다고 느낄 수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런 짓거리를 해야만 했다. 도대체 왜 그래야만 했을까.
'의식화'가 나를 이끌었다는 건, 지금 보기에 적절하다. 나는 나의 정신을 의식할 수 있다. 마음, 감정, 생각, 판단, 행동, 의지, 욕망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갖게 하고, 또 그걸 위해 '사실은' 이런 거였다며 속이는 걸 의식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이건 진실과 거짓의 문제다. 나는 스스로에게 거짓된 정신의 지평을 줄이도록 주문했다. 의식화라는 건, 늘 자기 자신에의 관찰에 정확도와 정밀도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따져묻게 한다. 오차를 줄이고, 오류를 바로잡게 만든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고, 책임이고, 삶이라고.
이 문제에서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이차적인 것들은 이런 내면의 의미화가 외부로 연결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 누구도 이런 의미에 대해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절하하고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끊임없이 세상과 조율해야만 하는 '생명 활동'에 있어 이런 부조화는 도리어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 언제나 늘 그랬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게 더 현실적인 법이다. 좋은 쪽으로든, 안좋은 쪽으로든. 자기 자신을 바꾸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건 비현실적이라기보다 끔찍한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으려면, 그런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려면 그들은 투사에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 실용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고, 자기 자신을 대하고, 또 살아가는 데 있어 상대주의적 거리두기 말고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로 포장된 이기적 존중은 무차별적 난사로, 공리성으로 포장되기 일쑤다. 사람이 한 사람을 이해하고 의견과 입장을 존중한다는 말이 투사 없이 가능한 일일까? 나는 이 부분에서 콤플렉스가 작동되고 있는 걸 느낀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성적 접근'이다. 내가 이 방식에 얼마나 미숙한지는 이미 방황의 세월이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과감히 내던져야 할 때인 거 같다.
융은 균형과 원만함을 수시로 말한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하나의 전체적인 과정으로 본다면, 배율을 조절해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볼수록 균형이 점점 맞춰지는 걸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과제'. 그렇다, 내가 스스로의 조정을 통해 '먼저' 책임을 지고 변한다면, 이에 따라 상대 또한 영향을 받고 균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흐름을 멀리서 보면 균형이 맞춰지니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시간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감각, 늘 언제나 바로 지금인 감각이다. 만약 고통 속에서 균형과 원만함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고통이 완화되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 선택지는 당장 환상으로 고통을 덧칠하는 것이리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투사된 대상을 처벌하는 쪽으로 덧칠해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킬 것이다. 고통은 줄어들다 점차 자극되지 않기에 목적을 달성한다. 균형은,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는 문제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반대 의미에서 목적을 달성한다. 우리 삶에 있어서 이런 방식은 자연스럽고, 모두에게 익숙하다. 이는 각자의 자아에게 어울리는 방식, 오늘날의 개인주의에 부합되는 방식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복잡하고 어렵고 오래 걸리는 방식은 쉽게 말해 '민주적'이지 않다. 달리 말하면 '집단적'이지 않다. 그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압축될 수밖에 없다. 확산되어야 할 층위와 압축되어야 할 층위를 혼동하거나 서로 섞는 건 정신의 측면에서 자연스럽고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전까지 나의 최선은, 의식적으로 이를 구분해 다른 처신을 하는 거였다. 단순하고 적나라한 자아로 살기보다 스펙트럼을 넓혀 사람들이 느낄 나의 인상을 조절했다. 어떻게든 사람들과 섞여 살기 위한 외향적 처신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게, 스스로를 훈련시켰다. 20대에는 당면한 나의 문제, 진지하고도 무거운 것들을 당장 꺼내지 못해 안달이었다면 이제는 꺼내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가 유의미로 바뀌진 않았다. 내향적 인간이 외향적으로 노력해도 외향 인간들이 아무렇지 않게 충족하는 그 방식으로 충족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투사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투사하면 되지 않나? 외향 인간들을 봐, 정말 아무렇지 않게 휙 날려버리잖아, 하면서. 저 가벼움, 저 피상성, 저 뻔뻔함, 도대체 저러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라고 도무지 외향의 차원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족쇄 채워져 있는 게 바로 내향이다. 아마, 의식화가 정교하지 못하기에 이를 알아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싶다. 내향의 투사와 외향의 투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아보지 못해서. 내가 '나의 책임'으로 과감히 떠안지 못하는 건, 그 과정이 불보듯 뻔한 고통이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융의 '사실'은 객관적 힘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경감될 리 만무하다. 용기가 가상해져도, 고난은 고난이다. 내가 외향성을 통해 투사하는 내용은 내 안에서 그것들을 부정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매우 단순하고 기초적인 투사 표현이다. 반대의 경우도 단순하다. 그렇기에 의식화의 차원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이 서로를 왜곡한다는 걸 알아도 이 왜곡을 교정할 수 있을 거란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나의 책임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원만하게 만들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식의 변덕쟁이가 되어야 할까. 하나의 신념을 고수해야 할까. 이 둘 다 거부하고 있는 지금 이 실정이 방황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문제는 나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 심층은 늘 어둡다. 잘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는 게 최선이다. 만져지는 것도 더 희박하다. 그래서 오래 걸린다. 내가 이곳에서 조급함을 부리는 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의미일 터. 나는 좀 더 인내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시간을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는 붙드는 연습이자, '나이를 먹는' 연습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왜 그렇게 빨리 늙는 걸, 빨리 감는 걸 자처했을까. 조숙하다는 건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 일흔을 앞두고 계신 선생님이 나에게 그런 인상을 보고 건네주는 걸 불편하게만 받았었고, 거기에서 나는 아무런 의미도 읽어내지 못했었다. 나이에 걸맞든, 걸맞지 않든 나에게 필요한 건 '나에게 걸맞는' 자기 확신이었다.
이에 대한 세상과의 조율은 희박하고, 저 멀리에 있어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나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자체로 빛나는 존재가, 나는 아니다.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빛을 낸다라.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작년 3월, 야밤에 관악산에 올랐던 날, 내가 만났던 '빛'은 자기 자신을 서서히 태워 내는 빛이었다. 나는 그런 빛에서 안위를 느꼈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수행이 걸맞는 삶의 방식이라고, 여러 사람이 말해주고 보여주지만 받아들이는 건 우연의 몫이지 않을까.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주체의 과정은 결국 자기 수련의 과정이자, 끊임없이 수행하는 불구不拘의 삶이다. 어쩌면 이 방황의 관짝을 닫기 위해서 불구의 긍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는 망설이고 있다. 두렵고, 겁이 난다. 결단을 내리기 전에, 너무나 막대한 결정의 무게 앞에 짐짓 짓눌려 있다. 너무나 많은 걸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바쳐야 하기 때문에 허투루 내리지 못한다. 긍정을 해도 튕겨져 나온다. 그 마음가짐이 아니야, 라고 나의 정신은 여전히 저항한다. 나는 계속 찾는다. 무엇을 긍정해야 할까.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 나의 무의식은 현재 나를 마비시킨 상태다. 나의 의식은, 곧 꺼져버릴 불꽃처럼 힘없이 살랑인다. 일상에 있어서 반복된 나의 노력은 삿된 것으로 판정난다. 그것은 나의 정신 자체에 삿된 것이라고. 전혀 날 위하지 않고 있다.
며칠 전, 나의 무의식에게 주문을 하나 넣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려줘'. 나의 무의식은 아직 보여주지 않고 있다. 아니, 내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융을 읽고 있기에 이 내용에 대해서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할까 덧붙이자면, 의식의 유아적인 태도로 무의식을 대하는 건 자제해야 할 어리석은 짓이다. 위에 말한 주문은, 무지와 무능의 자연적 인식 위에서 표현된 것이지 이기적인 자아의 투사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정신의학자도 아니고 수련을 받은 상담사도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교육할 의무는 없다. 오해를 하든, 오류를 범하든 알 바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오해는 거짓의 핑계가 되기도 한다. 융을 읽는다는 건 이런 것이다. 분석 심리로 아마추어식 자기 분석을 행하는 것과 별개로, 융을 읽는다는 건 곧 '진정성'을 단련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오해로 떠돌아다니는 '무의식'에의 편견에는 늘 저항해야 한다. 무의식은, 의식의 친구다. 싸우더라도 친하게 지내길. 프로이트나 아들러에게서 파생된 태도로 대하는 건, 소위 말해 일진 놀이다. 권력으로, 힘으로 무의식이라는 존재를 대하는 건 불특정 다수에게 권장할 만한 '도덕'이 아니다. 전체를 염두에 둔다는 건, 적어도 소수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명분이니까.
내가 저항하는 건 곧 나의 투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의 내가 그럴 수 없다면, 분명 나의 정신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노력과 의지가 방해받을 것이다. 나는 이를 인정한다.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니. 의식적인 인간이기에 더욱더 그렇게 느껴지지만, 나에게 있어 '의식을 내려놓기'는 곧 정신의 모든 과도함의 토대와 같아서 도무지 방법을 몰라 한다. 그래서 더욱 나의 투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시간을, 속도를, 그렇기에 실현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가 보다' 하는 식의 내려 놓기는 분명 아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의미가 결합된 내려 놓기다. 이것도 의식의 욕심이라고, 나의 무의식은 목 잘린 여자 머리를 내놓는다. 존나 귀여운 무의식의 장난. 무의식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재치가 있다.
나에게 있어 각인된 '꿈의 내용' 중 하나는 목이 잘리는 것이다. 그때는 내 목이었다. 피가 새어나와 뜨끈한 느낌과 함께 서서히 의식을 잃다 꿈에서 깼다. 군대에서 꿨던 꿈이다. 이 상징을 풀어내기엔 지식이 부족하다. 목이 잘린다는 것. 당장 연상할 수 있는 의미 맥락은, 죽음. 꿈. 평화. 드디어, 비로소, 끝. 어떤 자유다. 아무렴. 나에게 자살은 늘 추락사였으므로, 이 충동의 맥락은 분명 계열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남이다. 내가 이 구속으로부터 스스로 판국을 바꾸기 위해 시도한 '리비도 철수'는 지금의 방황을 야기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방황은 스스로에게 건넨 볼품없는 구원이다. 아무렴... 구원이 천국일 거라 생각하는 건 오만한 인간의 특권이지. 무슨 지상 낙원을 기대했나 싶다. 그런 오만함을 진정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지만, 맹물 같은 상징적 구원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건 쉽지 않지.
자기 전에 목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하는 신체화 증상도 있다. 이 간지러움은, 목이 위협당하는 소름이다. 갑갑함, 견딜 수 없음, 그런 느낌이다. 나의 의식이 태생부터 강하지 못했다면, 나는 분명 모종의 귀신 따위가 내 목을 조르는 환상을 수도없이 봤을 것이다. 분명 알 수 없는 뭔가가 목을 겨냥하는 느낌으로, 어떤 불안이 목으로 발현될 때가 있다. 나이 30살에 접어드니 목 주변에 쥐젖이 돋기 시작한 것도 연관이 있을지도. 혹은 갑상선 암? 같은 뭔가와. 아빠도 그랬다. 목에 쥐젖이 엄청 돋아 있었고, 몇 개는 사마귀처럼 덩치가 컸다. 그리고 늘 붉었다. 기관지 쪽으로 가슴 명치께 주변부가 시뻘갰다. 그래서 늘 잠을 잘 때 가슴을 펼치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양 손으로 옷을 잡고서. 모양새로 보면 감옥 창살을 붙잡고서 벗어나려는 듯. 아마 소설이라면 이런 식의 표현도 가능하겠지.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잠에 들었다.
융 말마따나 참 모르는 게 많다. 이런 의식들을 차곡차곡 해놔야, 상징적 의미를 만났을 때 연결할 수 있다. 나의 저항에 대해 공굴리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대로 썼더니, 자꾸 튕겨져 나가는 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난 잘 보인다. 어디서 튕기는지, 왜 튕기는지, 튕겨서 뭘 실현하고자 하는지.
어쩌면 먼저 봐줘야 할 건 저항이 아닐 수도 있다. 내려 놓는 연습. 리비도 철수를 제대로 완수하는 게 우선인 거 같다. 준비를 위한 준비라고 말하면 역시 초심자 티가 팍팍 난다. 어쩔 수 없다, 모든 게 어설프고 서툴러서. 의식을 위해, 의식에 대항하는 게 필요하다. 내면 생활의 첫단추는 역시 의식의 천정이지. 잘 될 거 같지는 않다. 읽으려고 하는 융의 책은 8권 남았는데, 어디까지 읽을지는 몰라도 내가 그저 내가 되길 바란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아무런, 나도 없이. 매미의 계절. 여름은 나에게 늘 쫓는 계절이었지. 흠뻑 취하지 못해 아쉽지만, 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