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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Aug 09. 2023

대면

재건 10


23.08.09



융 읽기의 진행률은 50% 정도. '연금술'을 기점으로 잠시 쉼표를 찍으려고 한다. 읽기만 앞서가기 보다, 단계에 맞춰 의식 작업도 발을 맞춰야 한다는 직감이다. 현 상황도 이에 맞물려 있다. 나는 먼저, 투사와 대면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지금 단계는 '동굴'에 들어가기다. 그 앞에는 팻말이 서 있고, '인식을 갖기 위해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나는 이 말의 뜻을 부분적으로만 깨닫고 있다. 보는 걸 의심하기 위해 '보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보기 위해서는 결국 보지 않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걸 실제 삶에서 계속 확인하고 시도하는 일이다. 얼렁뚱땅 넘어가 다음 단계로 가는 건 퇴행보다 못한 일이 되리라. 


 이 일은 꽤 집요한 노력이 필요할 거 같다. 어떠한 의식적 노력도 없이 가만히 있으면서 자연스레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정적인 투사를 계속 마주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이 투사를 콤플렉스로 자율화시켜서 독립시킬 것인지, 융의 말마따나 '분화'를 시킬 것인지가 과제다. 그냥 가만히 앉아 고민을 빙자한 상상을 하는 것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을 거 같다. 붙들고 스스로를 포로 삼아 하지 않으면 고착된 균형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불균형에서 다시 균형을 맞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구체적인 현상, 사실, 대상이 필요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여러 투사된 대상이고, 한꺼번에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 먼저 세상의 '외향성'이다. 외향성을 향한 나의 투사는 '혐오와 냉소'로 재반응된다. 투사가 이뤄지는 외향성의 특징을 파악하는 건 현재 쉽지 않다. 모든 외향성이 아닌, 어떤 외향성이다. 이 외향성을 마주했을 때 나는 혐오하거나 냉소적으로 반응한다. 융의 말에 따르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는 외향성에서 내향성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알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안에서 내향성을 훼손하고, 부정하는 걸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난다. 


 정신은 자신의 불가능을 결코 '가정'하지 못한다. 이 금기를 깨뜨리기 위해선 균형을 깨뜨릴, 질서를 망가뜨릴, 어떤 절단하는 힘이 필요하다. 끊어내는 힘이 필요하다. 나의 투사는 대체로 '나에게 없는 것'을 향한 투사로 이뤄진다. 나에게 무엇이 없는가? 그것은 '대상에게 없음'으로 전이된다. 즉, 외향적 대상들에게서 '없는 것'을 혐오하고 냉소한다. 그것은 돌려 말해 '나에게 없는 것'을 향한 공격이다. 투사가 다루기 까다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전환 논리가 순식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대상에게 없는 게 왜 나한테 없는 것인가? 단순한 논리로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동일시' 작용이 개입되면 이는 타당성을 확보한다. '대상'과 '나'는 분리된 객체가 아닌, 서로 동일한 객체로 투사된다. 즉, 대상이 곧 나이기 때문에 대상에게 없는 건 곧 나한테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은 바깥에 있는 대상이다. 나는 바깥으로 나를 투사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바깥이 나에게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시'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이라기보다 수동적 작용에 가깝다.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이런 투사는 발생하지 않는다. 정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대상에게 그만한 자리PlaceHolder를 부여한다. 그 자리는 정신 안으로 '들어온', '침입'한 이물에 대한 검역소다. 이것이 나에게 해로운지 이로운지 알아봐야 한다. 그 판단은 정신이 늘상 해오던 방식으로다. 즉, 외향적 대상을 향한 투사가 나에게 없는 것을 향한 공격이라는 건, 바깥에서 들어온 그 대상들이 나에게서 부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왜 부정하는가? 왜 나는 어떤 외향성을 부정하는가? 여기서부터 문제는 까다로워진다. 그 심리적 동기, 사건, 감정 체험 등을 의식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층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 문제가 단순히 '의식화'의 차원으로 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적부터 '나서는 걸' 두려워한 소심한 성격의 학생이었다고 하자(당연히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남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말하고, 여러 사람과 교류하는 경험에 대한 발달이 더디게 된다. 또, 창피를 당하는 체험도 한다. 남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더 이상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 층위는 정확히 '자아'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의식화다. 내 자아는 이런 일련의 트라우마, 유년기의 흐름 등을 이미 간직하고 있고 또 이를 엮어서 기억과 감정으로 교호시키고 있다. 하지만 투사가 발생하는 층위는 '자아'라기보다 '자기'에 가깝다.


 따라서 자아를 조진다고 뭐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이미 나는 이런 일련의 외상으로부터 벗어난 지 오래다. 자아의 발달은 진작에 이뤄졌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할 정도로 유년의 상처는 극복되었다. 이는 당연히, 투사가 자아의 문제로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보여준다. 트라우마나 자아의 발달로는 상관 없다. 투사는, 자아의 그림자와 동조하는 자기의 캐릭터라고 보는 게 좀 더 맞는 방향 같다. 다시 돌아가 내가 왜 외향성을 부정하는가? 따져 물으면 그건 나의 '의식'이 추구하는 것들, 정신적 특질과 결합된 '음(그늘)'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내가 외향성을 부정하는 건, 나의 그늘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준다. 혐오하고 냉소하는 것. 그것이 그늘인 이유는, 빛을 받는 대상 뒤에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입장에서 말하면, 세상(빛)을 마주하기 위해 앞세운 대상(의식)이기에 '뒤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앞을 보기 위해선 뒤를 보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실제로 정신이 채택하는 의미와 가치의 논리는 늘 양자택일의 문제로 작동한다. 이게 너무 뿌리깊게 느껴지는 나머지 마치 인간 정신의 본질이 그렇다고 믿을 정도다. 이걸 꿰뚫는 철학자는 찾기 힘들다. 다들 자기 정신에 갇혀 그 정신에 걸맞는 작업을 수행한 결과물이 우리에게 도착한다. 반대로 이런 '비밀'을 안다한들, 세상과 관계맺기 위해선 결국 동시대의 문법에 따라야 한다는 걸 수긍한,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태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독창성'을 추구할수록 자신의 예상 독자 풀이 극소수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다. 언어라는 도구적 한계를 초월해 정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환상이다. 당연히 환상은 이를 쉽게 보여준다. 그런 환상을 목도한 이들은 하나같이 숭고함, 경외심을 표현하더라. 


 우리가 정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정신은 '표현되기 위해 표현할 뭔가가 필요하다'는 현실을 결코 거스르지 않는다. 돌려 말하면, 우리가 자기 정신이 아닌 남의 정신을 왜 그렇게 궁금해 하는가? 물었을 때 '표현'에 대한 기본이 드러난다. 그건, '동일시'와 함께 작동되는, 정신의 외재화다. 정신은 바깥의 대상과 맞물리는 만큼 바깥의 대상 또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표현이란 정신의 표출이자, 대상의 호출이다. 이 상호성이 정신 입장에서 너무 강력한 연결이기 때문에 '뒤'도 곧 '앞'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본다. 정신은 늘 앞과 뒤를 하나인 걸로 나타내지만, 의식은 그걸 구분하고 분화시킨다. 정신이 한 몸으로 보여주면, 의식은 그것의 앞뒤를 나눠 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가른다. 전자는 이로운 것, 후자는 해로운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나의 경우에는 자아의 층위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게 아니라면 질문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나는 왜 어떤 외향성을 부정하는가?가 아니라 '바깥의 외향성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로 말이다. 나는 이게 좋은 의미의 투사 전환, 역전이의 응용이라고 생각한다. 주객전도는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전도되는 걸 의미한다. 이를 풀면, 대상을 바라보는 입장이 먼저 선행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며 이를 기준으로 주체와 객체가 배치되었을 때 이 자리를 바꾼다는 걸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되는 건 전제, 그러니까 '대상을 바라보는 입장'이 과연 유지되는가 파훼되는가 대체되는가에 있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자아의 층위에서 사용되는 건 거의 모든 경우에 해롭다.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념으로 사용되는 '주객전도'는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뀐다'는 뜻으로, 주인의 위치가 고수되어야 함을 비꼬는 말로 사용된다. 정확히 자아의 층위에서만 사용된다.


 객체에의 관심은 현대 철학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는 동시대가 '의식'의 시련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객체는 주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주체가 외부 객체에게 '의식'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이 바깥의 '의식'에 대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의 함정이기도 한데, 의식은 늘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자기 폐쇄성 구조다. 돌려 말하면 의식은 어디서나 늘 의식을 찾고, 의식이 없는 곳에서도 의식을 찾으려고 한다. 이는 때로 강박적으로, 집착적으로, 고집스럽게 이뤄진다. 인간 정신은 과거에 비해 의식 분화를 매우 발달시켰고, 그만큼 의식의 권한이 무척 강화되었다. 기술 철학의 다음 단계는 의식의 자기 폐쇄성을 '기계 작동의 원리'와 대치시켜 또 다른 투사를 발견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의식 자체를 더욱 강화시키고 고집하려 할 때, 주객전도는 겉만 번지르르한 기만을 만들 것이다. 주체의 방식으로 객체의 입장을 바꾼다 한들, 그건 객체가 주체를 위하는 게 아니다. 이 태도에 대한 경고는 고전 우화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과거 인류 중 몇몇은 이를 '자연'으로 말하고자 했다. 즉, 자연물을 모델로 삼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델'이 의식에 인식될 때 이 자기 폐쇄 구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투사의 좋은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정신이 온전히 투사될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개인 스스로가 느끼기에 자신의 정신 전체가 마치 바깥에 온전히 존재한다고 파악될 때 비로소 자신을 벗어날 수 있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여러 불완전한 모델들은 여전히 부정적인 투사를 작동시킬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 자체는 빠짐없이 필요하다.


 따라서 대상을 바라보는 입장을 고수한 채 객체와 자리를 바꿔 객체가 주체를 바라보는 입장을 헤아리는 건 시작 단계일 수는 있어도 끝까지 가져갈 원칙은 아니다. 나의 경우에는 객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러니까 바깥의 외향성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다. 이를 작업으로 진행시키려고 할 때 나는 먼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낀다. 즉, 바깥의 외향성이 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어 몸의 감각에만 의존한 채 예상할 온갖 시뮬레이션의 기능을 작동시킬 수 없다. 내 몸에 도착하면 그것이 곧 당장 일어난 일이 된다. 그러기 전까지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도무지 파악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일련의 정신 작업을 수행하는 이들이 보기에 이런 서술이 뭘 의미하는지 단번에 눈치챘을 것이다. 정확히 '무의식'이다. 빛이 없는 동굴에서 움직인다는 건, 무의식 속에서 의식을 느끼려는 일과 같다.


 당연히 외향적 대상이니, 외부의 대상이니, 객체, 세상의 현실 등등은 훨씬 쉬운 구도다. 그것들은 많은 힌트와 조건을 갖고 있다. 정체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나의 기능을 독립시킨 채 그대로 둔다. 그러나 무의식은 다르다. 무의식은 나로 하여금 의식을 포기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의 작업의 난이도가 변하는 건 아니다. 나는 무의식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로, 외향적 대상들을 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투사 작업은, 그러니까 '대면'은 결코 진행되지 않을 것만 같다.


 따라서 이는 자아의 층위일 수 없다. 의식을 내려놓는 것부터가 이미 그 층위로부터 벗어난 태도로 임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최대한 자아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일이다. 먼저 이것부터 익혀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20대 때부터 시를 쓰면서도 느꼈지만, '언어'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 '무의식'을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를 있는 그대로 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에 달라붙은 동일시를 떼어내야 한다. 이건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는 일이다. 특히 언어는, 자신의 감정이든 기분이든 생각이든 간에 그런 걸 꺼내놓기 위해 사용된 언어는 더욱 동일시가 작용되어 있다. 그리고 이성적 표현보다는 자신의 정서와 관련된 표현일수록 더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했을 때 그 언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지키고 부정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날을 세우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 언어에 자신의 감정을 덧씌우는, 투사하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유명한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이런 것이기도 하다. 독자는 작가의 언어에서 자신의 미지를 발견하길 바라고, 자신의 뭔가가 해소되길 바라고, 투사할 수 있게 동일시할 수 있게 맞춰지길 바란다. 그걸 거부하거나 충족시키지 않는 작가는 무관심으로 밀려나거나 때로 투사가 작동되어 욕을 오지게 쳐먹는다. 어쨌든 세상에 뭔가를 내놓으려는 자, 그는 저 집단 의식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결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더욱더 '외향화'가 되고 있다. 이를 한탄하던 20세기 학자들의 호소가 시답잖게 느껴질 정도로. 그때도 집단 인간들에게서 그런 걸 봤는데, 지금 양상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융은 '집단 의식'을 철저히 개성의 적으로 고정한다. 그가 균형을 포기한 채 일방적인 편향을 고수하는 건 발견하기 어려운 면모지만, 그래서 집단 의식에 대해서도 나름 그 균형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분명 모델은 필요해 보인다. 집단 의식은 소비자의 덩어리고, 여행객의 무리고, SNS의 군상이고, 인터넷의 ID들, 도시에서 나돌아다니는 익명 군중, 각종 기관에게 민원을 투하하는 시민, 유행하는 책의 독자, 인기 있는 영화의 '천만 관객' 등등이다. 죄다 혐오스럽고, 부정하고 싶고, 세상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꼴사납고 폭력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나는 이제서야 이 투사의 정체를 조금 알아본다. 왜 도시에 사는 인간은 자신도 '대중'의 일부이면서, '대중'을 그렇게 욕할까? 반대로 '대중'은 어째서 늘 혐오스럽게 나타날까? 이런 현상을 알아보지 못하면, 나의 투사 작업도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여태 작업했던 여러 시도들은 이런 일련의 투사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제공해주고 있다. 문제는 나의 노력이다. 융의 말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나쁜 투사, 사람들을 욕하고 아니꼽게 보고 냉소했던 그 투사 때문에 '도시'를 공부하고 '대중'을 공부했다. 사회학 저서를 뒤적거리며 도대체 이게 왜 이런지의 지식을 쌓았다. 당연히 그런다고 투사가 사라지진 않는다. 이제 내가 해야 하는 건 이 나쁜 투사를 통해 얻은 걸로 좋은 투사를 하는 일이 남았다. 나는 우리의 인식이 모든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면서도, 분명 '알아 볼 수 있으면' 나쁜 투사가 멈출 수 있다는 걸 믿는다. 융은 이를 꿈의 보상성-반응성을 설명할 때 보여준다. 나는 나의 나쁜 투사를 반복하고 재생시킬 '외부 대상'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특징이 '모든 외향성'이 아닌 '어떤 외향성'을 의미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특정된' 어떤 면모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나타날 수 있게 동조하고 방관하는 집단 무리가 있기에, 그들은 쉬이 그들을 대표하는 성격을 띤다. 이것이 투사를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쉬이 전환할 수 없게 막고 있는 이유다.


 사람들은 살면서 꼴보기 싫은, 욕하고 싶은, 혐오하는 '인간'을 만난다. 우리는 그들을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편견을 만들어낸다. 사람들도 그런 걸 같이 느낀다. 우리가 그렇게 선입견을 만들어갈 때 개개인이 없는 집단에 대한 의식은 이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의 투사는 누굴 향하는가? 이 문제가 이성적 접근으로는 해소될 리 없는 이유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걸 의식은 자꾸 끊어서 인과를 확인하려고 하고, 알아보기 쉽게, 그래서 편리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몇몇 철학자들처럼 그 '불특정 다수' '익명' '대중'에게 '개인'을 부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감히 그럴 수 없다. 과연 얼마나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평범한 보통 사람 한 명이 그려낼 수 있는 '타자'가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애초에 이를 개인이 모인 집단으로 파악하는 것부터가 문제의 발단이다. 우리는 '익명'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지, 그것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서 괴로운 게 아니다. 이는 나의 투사에 이렇게 적용된다. '나의 혐오를 자극하는 이들은 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가?' 내가 이 작업에 대면하면서 수정해야 할 질문은,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은가?'다. 그리고 외향성으로도 확대된다. '외향적 대상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이 전환된 질문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게 뭘 의미하겠는가. 내가 외향적 대상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매우 존재감없이 느낀다는 투사가 아닌가. 이런 면모들을 하나둘 받아들이는 대면의 시간이 시작됐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혐오와 냉소를 다스리려 해도 바깥에서 침입하는 온갖 무의식적 투사에 과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도 없다. 그래도 쉬운 것부터 하나둘 시작하다 사활을 걸 정도로 진심으로 매달려야만 이 단계를 완수할 것이다. 내향인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과의 균형이 맞질 않으면 바깥에 어떠한 것도 쉬이 꺼내질 못한다. 자신이 못하니, 그런 걸 쉽게 가볍게 하는 외향인을 보면 꼴사나울 수밖에. 끝도 없이 맞물리는 꼬리물기, 우로보로스의 굴레는 끊어내거나 벗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 정화, 순환 의식은 먼저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부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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