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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Aug 16. 2023

적극적 명상

재건 13


23.08.16



환상(적극적 명상 연습)


나는 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해 명상을 한다. 올바른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시도를 한다. 나는 주로 의식을 꺾어 떨어뜨리는 이미지로 의식을 약화시킨다. 아래로 추락하는, 빨려 들어가는 감각. 하지만 쉽지 않다. 내가 의식을 얼마나 힘 있게 붙들고 있는지, '의식을 놓아야지' 하는 '의식'조차 내려놓아야 함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나는 다시 동굴에 도착한다. 눈 앞에 목재 토템 같은 덩치가 나타난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한다. 의식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음습하고 축축한 동굴을 떠올린다. 박쥐가 나의 뒷덜미를 문다. 나는 순간 움찔하지만, 받아들인다. 명상은 이어진다. 갑자기 눈 앞에서 매우 사악한 악마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나를 한입에 물기 위해 달려든다. 나는 겁을 먹는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다. 마음을 추스리고, 일어서서 악마를 직면한다. 악마에게 손을 내민다. 악마는 손을 잡지 않고 원을 그리며 돈다. 자꾸 사악한 얼굴들이 사방에서 나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는 다시 마음을 붙들고 악마를 뒤따라 걷는다. 꼬리가 보인다. 꽤 투박한 악어 꼬리 같다(공룡 꼬리?). 난 그의 '뒷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게 악마를 따라다니며 계속 자신을 붙든다. 그러다 악마는 어느새 사라지고, 가운데 땅에서 원 하나가 나타난다. 내가 그것을 열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자 환한 빛이 마구 솟구친다. 나는 그걸 다시 닫는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아직도 적극적 명상으로 돌입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낀다. 즉, '온전한 체험'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의식이 날 붙들고 있는 게 느껴진다. 다시 연습한다. 나는 나의 가장 약한 부분, 내가 결여로, 결핍으로 느끼는 부분을 포착한다. 그것을 감싸 안으려고 했더니 갑자기 나에게 나무 뿌리 같은, 시체 같은 두 덩어리가 던져진다. 그것은 더럽고, 흙이 묻어 있고, 나의 상체 만한 길이다. 나는 그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 끔찍한 것임을 안다. 나는 그것들을 끌어안고 어디론가 향하려고 한다.



거의 기억나질 않는다. 아주 막연한, 정확하다는 감각이 한 1% 정도 느껴지는 이미지로, 역시 나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명상과 기도는 내 삶에 무척 거리가 먼 어떤 이질적인 행위였다. 나는 이를 '묵념'이라는 행위로 먼저 접했었는데, 어릴 때 다닌 검도 학원에서였다. 검도 학원에 가면 준비 운동을 하고 정해진 루틴 운동을 하고, 열심히 대련을 하다 끝날 시간이 오면 사부가 우리를 앉힌 뒤 묵념을 시켰다. 무릎을 꿇고 손을 가운데에 모아 엄지를 맞닿게 한 다음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행위였다. 호구 뒤집어 쓰고 열심히 땀 흘리다 벗고 두건을 풀었을 때의 상쾌함이 맞물려 묵념은 나에게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정적인 활동'에 있어 최초의 좋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게 뭘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냥 몸을 따르게 하는 것만으로 좋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기도'나 '명상' 따위를 할 기회가 왔을 때 그에 대해 도무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도통 몰랐다. 특히 기독교인들을 만나거나 교회에 갔을 때 수행해야 할 '기도'는 꽤나 난처했다. 내가 스스로 기도에 대한 눈을 뜬 것, 자발적으로 '종교'를 가져볼까 시도했던 건 20년도다. 그때 나의 절망, 좌절, 심정적 불안 등등이 당시 알고 지냈던 한 누나를 통해 주기도문으로 옮아갔었다. 그 누나가 보내준 기독교 앱으로 주기도문을 외우며 나는 정화되는 눈물을 흘렸었다. 물론 그 누나는 내 기준에서 사이비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에는 사이비 종교가 많고, 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 누나의 꿈은 이스라엘의 성전에 가는 것이었다. 그 누나는 나더러 맨날 '귀신' 탓하며 나의 아버지를 기리는 제사도 아니꼽게 봤다. 그렇지만, 그 누나가 사이비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어떤 기도 자세, 신을 향한 겸손의 마음은 18년도에 싹텄다. 그때 나는 종교를 이해할 입문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어떠한 종교도 갖고 있질 않다. 사이비 종교인인 그 누나는 나더러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 누나의 근거는 내가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난 나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꽤 오래 전부터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나고 싶은 건 '신'이 아니라 '시'였다. 당연히 신적인 것과 시적인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건 무척이나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미학'이라는 접근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더더욱 어렵게 여겨지는 작업이긴 하지만.


 지금 내가 배우고 싶은 건 융의 '적극적 명상'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정신 안에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듣더라도 그걸 적대적인 걸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건 떠오른 어떤 표상, 심상, 언어, 정동 같은 느낌으로, 나의 정신이 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일종의 환대로 느꼈던 것이다. 돌려 말하면 융처럼 '대화'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의 정신과 대화하는 게 가능하다고? 내가 나 자신과 시간 차를 두고서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받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지만 정말 타인과 대화하듯 실시간으로 대화한 적은 전무했다. 그게 가능할지 아직 그려지지 않는다.


 융을 만나기 전부터 수행한 나와 무의식의 관계는 대체로 글 쓰기를 통해서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작가들의 교본들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라든지, 쟝 그르니에라든지, 블랑쇼라든지, 페소아라든지, 피카르트라든지. 그들은 '쓰기'가 어떤 행위인지를 실로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쓰기를 한다. 나의 것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완성되기에는 한참 멀었지만 그들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본다. 왜냐하면 나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쓰기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고, 또 어디까지 수행될 수 있는지 그 지평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아볼 수 있다. 정확히는, 알아볼 자신이 있다. 하지만 명상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상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연인 한 장년 부부가 계시다. 그 부부는 신실한 기독교인이고, 그 집안 모두가 기독교를 믿는다. 그 집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태 신앙을 갖는다. 아저씨는 호시탐탐 나를 교회에 입석시키려고 노리고 계시다.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아저씨를 따라 교회에도 가고, 같이 밥을 먹을 때면 늘 기도를 덩달아 한다. 또 여러 '신앙 체험'에 대한 일화들을 듣게 된다. 나는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기도'가 어떤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이제 알고 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무의식과 마주하는 적극적 명상은... 틈나는 대로 좀 연습을 해 봐야겠다. 아마 어제는 간만에 불안이 자극되어서 더 어려웠던 거 같다. 그래서 평소보다 잠도 잘 못잤다. 불안이 자극되면 정신이 확실히 자극을 좇게 된다. 이런 사소한 시련도 연습의 일환이겠지.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그런 집중 상태를 깨어 있는 하루 종일 가져가려고 할 때는 늘 9살의 나를 떠올린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체험이 내 삶에 있어 가장 충만했던 체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시간도 없고, 마음은 자꾸 조급해지지만 이럴 때에도 할 수 있어야 연습이 되고 실전이라는 걸 안다. 이제 나는 거의 몇 년만에 수행자 모드로 들어가고 있다. 이전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때처럼 이성과 합리적 세계에만 닻을 내리지 않을 것이니까. 융과 플루서를 제대로 배우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만 같다. 이미 지금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여태 내가 배운 모든 지식들이 업데이트되어야만 한다는 직감이다. 그렇다고 유지 보수하듯 모두 다 드러내 작업하진 않을 거 같다. 한 번의 걸음을 옮기는 게 이렇게 쉽지 않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의식을 놓으면서도, '적극적'으로 한다는 건 꽤 어려운 기술 같다. 내가 한 쪽만 보고 반대 쪽은 동시에 보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의미이리라. 다음 명상 때는 약화와 함께 '강화'를 한 번 유념해 봐야겠다. 의식을 내려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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