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15
23.08.21
꿈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이동하고, 때로는 선두로 간다. 하지만 여기가 아닌 걸 느낀다. 여기는 사실 내가 살았던 상도동이었다. 비가 오고 있었고, 비를 피하려고 어떤 저택 현관문 앞으로 갔는데 비를 막아줄 지붕이 없었다. 내가 도착하니 하나둘 비를 피하려 몰려든다. 한 아저씨가 나의 왼쪽에 몹시 가까이 다가온다. 오른쪽에서는 어떤 여자가 연초를 피우며 비를 피하고 있다. 정확히 어디에 참석해야 하는지 찾는 와중에 꿈은 깬다.
나는 실제 지인인 누군가를 도와주는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나로 느끼기보다 타인 같다. 나인 것은 맞지만, 오히려 도와주는 지인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들에게 조언을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게 도운다.
오늘 아침에 꾼 꿈은 선명했으나, 다시 잠들면서 완전히 잊고 말았다.
1년 전, 나는 스스로 '재건'이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단념했다. 나에게 종합이란 불가능하고, 누적 또한 가능하지 않다고 말이다. 마음은 하고 싶어도 나의 정신이 그런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차근차근 누적시켜 종합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나눠 선형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일이 버거웠다. 그런 시도들은 늘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런 작업을 잘 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철학자들이다. 체계적인 글 쓰기를 매우 긴 호흡으로 수행할 줄 아는 사람들. 나는 흉내도 낼 수 없었다. 나의 아킬레스건. 그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경험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문화인류학 강의를 수강할 때, 다른 한 번은 헤겔 철학. 둘 다 마지막 레포트로 그간 배운 걸 이해하고 요약, 종합해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몹시 싫었다. 나는 나만의 관점, 내가 풀어낼 수 있는 감각이 없으면 그 무엇도 집중해서 할 수 없었다. 암기해서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적어 제출하는 또래 인간들이 몹시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저런 기계적인 활동으로 남는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몹시 열등하게 보였다. 지금에야 융을 읽고서 전형적인 '내향적 사고 인간'이라고 안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상대성을 도무지 알아보지 못했다. 왜 저게 싫고, 불편하고, 버겁다 못해 결국 포기하게 되는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지향성은 오랫동안 유효했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에서 구별되지 않고 다른 이를 모방하고 흉내내고 따라하는 것들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글에 있어서는 거의 얄짤없이 그렇다. 본인들이 자신의 개성을 어디다 부여하든, 내 눈에는 편협함과 어떤 불완전함이 더욱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즘 유행하는 Chat GPT보다 열등하면 열등했지 절대 우월하지 못하다. 그들이 정보와 관점을 구분짓지 못하는 한, 그들은 인공지능 학습 모델에서 출력된 산물에 투영해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스스로로 하여금 매우 깊은 불감증에 도달하게 만든다. 새로운 것은, 같은 현실이지만 완전히 다른 현실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 외의 모든 시도들은 하찮고, 여전히 모방하고 흉내내는 것으로, 따라서 멍청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불감증의 시기에 나의 감수성은 몹시 메마르고, 그래서 고갈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결코 알아볼 수 없었다. '자기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 눈 앞의 어떤 원본을 두고서 충실히 묘사하는 모방을 거부하고 혐오한다는 것, 그런 활동을 편협하게만 발달시켰다는 것. 이런 일련의 선택들이 한데 모여 굴러온 방황이었다. 내가 스스로 재건을 할 수 없다고 느낀 절망은, 나에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어 흩날리고 마는 처지에 따른 비명이었다.
많은 것들을 바로잡기 시작한 지금은 어떨까? 딱히 뭐가 달라지진 않았다. 조금 더 유연해지고, 조금 더 원만해졌을 뿐이다. 독창적이지도 못하고 관점도 설계하지 못하는 외향적 학자들의 글은 몹시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들은 바깥 현상을 기술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재미를 느끼지, 정작 본인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똑똑하지 못하다. 오늘 읽기 시작한 Z 세대 책이 그랬다. 왜 기성 인간들은 자꾸 젋은 세대들을 이해한답시고 관찰 대상으로 삼을까? 4-60대들이 주요 범인들이다. 툭하면 세대, 툭하면 ~년생. 내용들이 하나같이 멍청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투사의 발작 버튼은 그들이 자신들의 관점과 가치관,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초등학생과 별 다를 바 없이 무지한 채로 젊은 세대에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기 위해 세대를 호출한다. 인터뷰를 한다. 질문을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는 '이해와 공감'이지만, 이미 구별짓기는 적용되어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 현실과 가상의 구분.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구분. 나에게 가장 발작 버튼으로 눌리는 '자아-정체성'의 단일과 복수의 구분. 진짜 왜들 저럴까.
이 투사는 기성 세대의 정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 작동하는 초보적인 투사 반응이다. 냉소와 혐오. 그들은 그런 구별이 중요하다. 자신들에게 없는 걸 알아보기 위해 있는 걸 기반으로 삼는다. 또 통념에 기댄다. 단순한 이분법이 편리하다. 대중으로 갈수록 이 경향은 더욱 적나라해진다. 그들은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무지의 정체를 손쉽게 묘사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의 불안을 덮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런 진정제를 제공해주는 기성 세대의 인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어차피 자신들의 진영이 기성인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젊은 세대를 해석한다. 어차피 젊은 세대가 자신을 직접 공격하고 비판할 일이 크게 없을 거라는 안도감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건 기성까지 유효한 활동이기도 하니.
반대로 젊은 세대 측에서 자신들의 '시대 정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얘기가 좀 다를지 모르겠다. 빠르면 이제 30대, 평균적으로는 1-20대이므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맞서야 하는 건 기성의 산물, '선형적 글 쓰기'이므로, 그들이 원하는 형태로 나타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거기에 뿌리 내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바꾸기보다 세상 사람들이 거기에 맞춰서 나타나길 바랄 것이다. 그게 안맞으면 늘 하던 그 방식대로 아니꼽게 볼 것이다. 지금 기성 세대가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그 방식으로.
내가 매달려 확장시킨 인식은 이런 투사들의 넘나들기다. 기성의 정신에 맞춰 젊은 세대의 정신을 난도질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도 가능하다. 젊은 세대 인간들에게 계속 이해한답시고 개념을 적용시키는 난도질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에 반응하는 젊은 세대 인간도 기성 세대 인간에게 동일한 난도질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은 확실히 과도기다. 나는 이런 일련의 갈등들이, 세대 뿐 아니라 여러 갈등들이, 서로의 정신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모델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다는 걸 작년에 배웠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지금 나는 재건을 할 수 있다고, 몸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예시로 든 세대 차이뿐 아니라 '자기 감각'에 기반한 관점, 불감증, 종합 불가능 등등 여러 정신의 약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아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년 전부터 만난 한 문장, '기획'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단어는 꽤 신뢰할 만한 기성 학자 몇 명에게서 부분부분 확인되는, 그래서 연결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들은 어쨌든 기성이지만, 그럼에도 신뢰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자신들의 관점에 있어서 충분히 성숙하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의 시대는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하는데, 그건 기성 인간들이 못나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들이 어른이 될 수 없는 환경 세계에서 자라기 시작한 게 우리 세대다. 우리는 각종 디지털 장치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또 어떻게 다뤄야할지 알려줄 수 있는 어른이 전무한 환경에서 출발한 1세대다. 기성들은 겁을 먹고 그저 한발짝 물러났을 뿐이었다.
이 차이는 실로 몹시 중요하다. 자신의 유년을 어떤 환경 토대 위에서 성장시켰느냐가, 평생을 영향끼친다. 기성들은 대다수가 시골에서 태어났고, 적잖은 사람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와 '삶'이 어떤 '기획' 위에서 구축되었는지 몰라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현실'은 하나였으니까. 이 관계가 허물어질 때 기성의 관점은 몹시 위태위태하고 불안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가상 현실은 고작 피상적인 경멸스러운 무언가고, 디지털-게임은 시간 낭비다. 몇몇 기성 학자들은 이런 젊은 세대의 환경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부모들이 그렇다. 자식과 가까워지기 위해 이메일과 SNS를 하려고 노력하는 기성 세대들은 쉬이 무시를 당한다. 가차없이 매몰차게 구는 우리 10대 자녀들한테 말이다. 그들은 도무지 상대의 노력과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가차없이 절하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의미하는 건 별개 아닌 그저 '삶의 과정'일 뿐이다. 이걸 왜 그렇게 편집해서 하나의 현상으로, 사태로, 혹은 문제로 봐야만 할까? 가속화되는 시대 정신에 절여진 건 젊은 세대가 아니라 오히려 기성 세대일 수도 있다. 그들은 카메라 촬영을 하듯 의도적인 장면들을 녹화해 편집한 뒤 그걸 갖고서 '선형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부각시키는 못된 버릇이 있다.
기성 세대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하나의 완결된 흐름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 하나가 나오면 다음이 나와야 한다. 이 사고 틀을 갖고서 새로운 걸 과감히 시도한다. 젊은 세대의 정신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현상'으로, '표면'으로만 노출될 뿐이다. 그건 어떤 산물이자 행위의 흔적이지 원인이 될 수 없지만, 선형적으로 보지 않으면 불안에 떠는 기성들은 이를 자꾸 원인으로 보려고 한다. 애초에 인과성이랑 무관한대도 말이다.
내가 재건해야 하는 건 이런 일련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접근들의 재건이다. 난 어떤 사고 방식, 혹은 정신의 기반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가? 체험하는가? 겪는가? 그동안은 너무 무의미했다. 도무지 어떻게 의미를 느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차라리 편향적으로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자기 정신을 굳건히 믿고서, 그게 본인이 발달시킨 게 아니라 그저 태어나 살다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집단적인 거라 해도, 그 안에서 굴려가며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처럼 말이다. 이는 젊은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기성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본인의 정신 구조를 바꿔야만 했을까? 이것에 명확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재건이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인공성'이었다. 만들어진 모든 것들에서 과연 어떤 유의미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쉬이 가능성과 대안을 읉조리는 인간들에 피로감이 누적되고, 무엇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면서 말뿐인 실천은 당연히 가망없게 누적됐다. 여기에 비판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권력, 불평등, 각종 예속과 착취를 드러낸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이 피로감이 가중되고 더해지는 걸 비판하는 이들은 알까? 그들은 자신들도 그런 피로감에 한술 더한다는 걸 모른 채 비판적이지 않은 대중과 사람들을 꼬집는다. 비판이 정확히 인공의 산물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고 현상에, 사태에, 구조에, 자본에 문제 의식을 덧붙인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전략과 의도를 노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사실은 당신들은 속고 있었다, 기만에 당하고 있었다를 알려주는 고발자 역할을 도맡는다. 그 역할이 뭘 의미할까. 전제주의의 폭압을 예방하기? 더없이 잔인한 학살을 경계하고 견제하기? 역사를 잊은 자는 미래가 없다?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비판과 무관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실을 두고 사실 인공적이었다는 '진실'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게 만든다. 매트릭스의 블루 필과 레드 필처럼, 비판은 이 함정을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비판은 레드 필도 블루 필도 아니지만,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레드 필을 처방할 수 있다는 권위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이 인공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고, 어떻게 해야 속지 않을 수 있는지에 혈안이 된 건 어떤 현상일까? 그런 비판을 해준다면 그나마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물론 이런 무거운 과업을 비판자들에게 전담할 수는 없다. 그들도 당연히 그런 막중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학자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하고 사람들에게 알린다. 무지로 인해 벌어진 참사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플루서 말마따나 근대 이후 세상은 정확히 '더러운 것'들 뿐이다. 우리는 절대 세상을 더럽지 않은 그 무엇으로 볼 마음이 없다.
이런 인식 속에서 내가 뭘 할 수나 있을까. 각종 정신의 투사도 결국 성향과 맞물린 외부 현실의 내용을 필요로 한다. 현실의 문제를 심리의 문제로 넘나들 수 있는 게 소위 대안이 될까? 내가 융에게서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융을 통해 수행하려는 '개성화 작업'이 의미하는 바, 그것은 현자나 도인이 되는 수행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바로 옆에 있는 익명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를 21세기에 재건하는 일이다. 그 익명은 거의 날마다 뉴스에 나타나는 살인자, 성폭행범, 정신병자, 테러범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익명의 이웃이 '천사'라고 가정하기보다 '악마'로 가정하는 데 익숙하다. 비판자들은 어째서 현대인들이 이런 정신 경향에 노출되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다만, 그들은 한 번도 그러지 않았던 적 없이 늘 사후적이다. 늘 지나고 나서야다.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비판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모델이다.
나의 재건은 1차적으로 나에게 있어 무의미하지 않은 글 쓰기가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한 답변이다. 그러기 위해 종합을 하고, 누적된 걸 연결한다. 나는 이 짓거리가 무의미하다는 걸 애진작 느꼈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다. 그건 플루서 말마따나 몹시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전환은 말로만 되는 게 아닌 정말이지 언어로 결코 표현되지 않는 참으로 기묘한 정신 기술인 거 같다. 도대체 이 전환이 어째서 가능한가? 했을 때 '여력' 말고는 달리 뭐가 표현될 수 있을까? 회복 말고는 뭐가 있을까? 사람이 다시 힘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쉬어야 한다는 게 최선인 거 같다.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에 맞지 않으면 불편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런 사람들을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정신에 입맛좋게 만들려고 한다. 그게 모방이 됐든, 흉내가 됐든, 아무리 키치하더라도. 글 쓰기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의도'를 자극하는 덫이기도 하다. 내가 이걸 알아차리는 데 얼마나 불필요한 혐오와 냉소를 투사해야만 했던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 위해 악마화된 사람을 더욱 눈돌리지 않고 바라봐야만 했는지. 만들어진 세상은 반드시 편리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편리함'이 느껴져야 한다. 이 문장이 너무 하찮고 피상적으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실용주의로도 간파되지 않았었다. 우리 인간이 브뢰클링 말마따나 '다르게 또 다르게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건 소수나 수행할 수 있는 불편한 자기 작업이 아닐 것이다. 이 편리함과 불편함이 고작 감각적인 사용감 속에서만 읽히기 때문에, 오늘날 기술 장치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되지 못하고 현저히 더딘 게 아닐까? 편리함은 정신 체험과 관련되어 있는 꽤 복잡한 감정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이다.
지금 내가 넘어야 할 감각은 바로 구슬이다. 재건을 한다는 건, 결국 여태까지 배운 수많은 정보들을 갖고서 자유롭게 유희할 수 있는 종합을 한다는 의미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이 기나긴 공부의 역사 속에서 첫단추였다. 나의 동경, 나의 이상. 지금은 비로소 현실이다. 나는 나만의 유희를 배우기 위해 그동안 마음 편히 즐겨본 적이 없다. 마냥 즐겁지 않았다. 허무함, 비관, 좌절, 절망, 분노, 혐오, 냉소. 대가리 큰 인간이 마음 편히 놀기 위해 이렇게 까다롭다. 놀이 세계가 확장되었는 데도 여전히 놀 수 있다는 건 환상이다. 정말이지, 창조적인 환상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게 현실에서 가능하려면, 나는 무수한 '악마'들, 무의식들을 마주해야만 했다. 방황에서 본격적인 재건으로 국면이 넘어간다. 다음 페이즈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