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1
23.12.08
다시 융 읽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분석 심리학 강의]. 강연 녹취록이라 그런지 디테일한 설명들이 많았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1~2장의 토론 부분은 나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부분이었다. 강의 내용에 대한 토론에서 융에게 질문을 던져대는 박사들이 3장부터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읽으면서 다시금 확인한 건 이성 작업과 성찰은 별개의 기능이라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콤플렉스가 있다.
국내 융 번역서는 크게 솔 출판사의 '전집'과 부글북스 출판사의 번역서들로 나뉜다. 솔의 전집 번역은 문체가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 반면 부글북스의 번역은 상대적으로 쉽게 풀어 쓰는 느낌을 준다. 둘 다 장단이 있는데, 나는 이 둘을 섞어서 보고 있다. 번역이라는 한계 때문에 작가로서의 융을 그려내는 데 다소 선입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이라는 사람이 어떤 태도로 글을 쓰는지를 유추했을 땐 솔의 전집보다는 부글북스의 번역물이 좀 더 어울려 보인다. 물론 오탈자도 많고, 검수를 안 한 게 티나는 건 눈감고 봐야 한다.
이번에는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또 다시 자기 작업을 시작한다. 이전까지 해오던 것들 위에 다시 쌓는 느낌이라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결국 모든 게 과정이긴 하다. 성찰도 하나의 능력이자 재능이라고 봤을 때, 누군가는 분명 타고난 성찰력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수월히 성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오래 헤매고 허탕을 치기 일쑤다. 융을 만나기 전의 '자기 만의 시간'과 융을 만나고 난 후의 시간은 확연히 다르다고 느껴진다. 융을 추종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지금 나에게 너무 필요한 존재다. 나도 알고 그도 알고 다른 누군가도 알겠지만, 어떤 기질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같은 누군가를 만나는 강한 동질감은 감사한 일이다. 그가 말해주는 사실과 경험은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들이다.
이번 내면 작업을 통해 이 지난한 방황의 시절을 어디까지 개선시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 융의 말마따나 '종합적인 인격', 그러니까 개성화 작업의 마무리로 단번에 가려는 과도한 목표는 삼가고 있다. 그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앞으로 한동안은 여전히 나의 열등함에 시달릴 것이고, 사로잡힐 것이고, 그래서 고통받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그럴 수도 있다. 콤플렉스들을 해소하고, 불필요하게 사로잡히는 신경들을 한데 모아 나의 의지와 합체시키는 그런 균형 잡힌 정신을 꿈꾸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자기 세계를 굳건히 하는 일과 확장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건 내게 꿈만 같다. 둘 중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하나라도 가능하다고 믿는 건 오만처럼 느껴진다. 그런 과오를 여전히 범하고 있는 게 나다.
이번 작업의 단 한 가지 목표는 의식을 내려놓고, 이제는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난도가 높다는 것도 알고, 쉽게 되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불가피하게 너무 많은 걸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인식의 확장에도 균형은 필요하다. 이성을 주로 쓰는 인식 확장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게 어리석게 보이고, 반대로 그런 인식 확장에'만' 너무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 또한 어리석게 보인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돌려 말해 '나와 잘 맞는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끄집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다스리지 못하는 여러 조급함, 열등감, 무지와 어리석음 등등의 콤플렉스들로부터 '인정'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내가 융에게 의탁할 수 있는 건, 그가 세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자랑하려 들지 않으며, 누군가의 삶 속에서 인정과 명예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이끌어주려는 마음이 그에겐 없다. 알려주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가 보여주는 건 기만과 편협, 위선이 아니라 정직함이기 때문이다.
수 년간 책을 읽으며 존중할 만한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은 꽤 드물다. 그만큼 '인간'의 완성도는 정말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자 중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건 나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제는 나도 극복할 때가 된 거 같다. 융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미 자신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20대의 융을 유일한 융으로 만났다면, 나는 그를 꽤 안타깝게 생각하는 친구라고 여겼을 것이다. 30대의 융이었다면,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렇다'며 동료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읽는 융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40대 이후의 융이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걸 극복할 수 있다고 삶으로 보여주는 정직한 사람이며, 내 일이 아닌 남 일이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짓거리를 안한다고 믿을 수 있는 세상에서 희박한 사람이다. 인간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좆같아 보여도 어느 한 구석에서는 '세상은 이대로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당연히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온갖 혐오와 냉소, 부정적인 콤플렉스들에 사로잡혀 고통받던 사람이었다. 이런 게 일종의 등대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겐 희망이라는 낱말이 아닌 삶이라는 '사실'이 필요한 법이다.
이전에 성격유형론을 읽었을 때 건져올린 정신의 기능들로 반추했을 때 내가 어떤 기능을 주로 우월하게 사용하는지는 분명했다. 다만 응용과 해석, 나아가서는 콤플렉스와의 연관성을 알아보고 인정하기까지에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현재 내가 마땅히 극복했다고 여기는 콤플렉스는 없는 거 같다. 언어의 과도함, 사람에의 과도함 등으로 여전히 거칠게 표현될 뿐이다. 융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무엇에의 보상 작용으로 특정 이미지들에 투사-전이되어 사로잡히는지,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고통받는다'는 사실에의 여러 해석과 관점은 몇몇 발견해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자기 인식'이다.
이번 강연 녹취록을 읽으면서 차이를 느낀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 혹은 '가치관'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이 최대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하는 일이었다. 그랬을 때 나에게 남는 건 공허감이었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상대적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눈높이를 하려는 나의 발버둥은 곧 소진이었고 늘상 신경쇠약을 겪어야만 했다. 이 문제가 극복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품지만 늘 쉽지 않았다. 인간들은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날 성찰력이 늘 부족했고, 눈높이를 하려는 상대방의 '입장'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갖지 않아 보였다. 소통 불가능에 노출된 사람은 보통 2가지 선택에 놓인다. 하나는 포기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하다 고통 속에서 지친 나머지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후자다. 여기에서 달리 무얼 깨달아야 했을까. 늘 고민하고 늘 이런저런 시도를 해도 실패뿐이었다. 이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소통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니거늘, 상대가 아무것도 하질 않는데 혼자 뭘 한다고 되는 일일까. 그런 판단을 하고서도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이 안 하면 내가 하면 된다고.
[분석 심리학 강의] 1, 2장 토론 부분에서 이런 문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융에게 질문을 던져대는 여러 박사들은 멍청하다 못해 안타깝다. 그들은 질문이란 걸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사'이자 '의사'다. 융은 자기 나름의 설명으로 최선을 다하는 데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융의 다른 저서들 속에서도 나타나듯 융은 자신과 다른 유형의 인간, 자신과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진 인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올곧게 보여준다. 이 태도는 결코 단번에 만들어질 수 있는 태도가 아니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끈질긴 투쟁 끝에 얻어낸 것이기에 결코 가벼운 것도 아니다. 내가 느낀 차이라고 하는 건, 나는 나 자신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그런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이 심리의 비밀은 정말이지 혼자서 알아차리기 힘들다. 내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어떤 부정적인 이미지에 맞서야 하는 구도로 흘러가는 이상, 나는 그런 노력을 할 때 스스로를 그 부정적인 이미지로 결속시킬 수밖에 없다. 공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부정적인 투사로부터 벗어난 게 아니라 애꿎은 것들을 억압하려 했으니 말이다. 아마 17년도였을까. 내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마음 가짐을 갖게 되었을 때,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걸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에도 무리한 노력을 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은 나의 열등 기능을 몹시 자극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내가 지쳐 나가 떨어질 때가 되서야 그런 관계가 끝나고 말았지만,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내가 곪기만 하고 스스로를 보살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믿었던 건 강인한 의지로 나를 시련으로 우겨넣는 일이었다. 그 대가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융에게서 읽는 건 투사나 전이, 콤플렉스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지가 참으로 미묘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억압과 내려놓기는 정말 한끗 차이다. 돌려 말하면 이 작은 차이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여전히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분화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융이 말하는 '원시적인 상태'에 대해서 다시금 해석을 해낼 수 있었다. 이전 융 읽기에서 융이 말하는 '원시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사실 잡히는 게 없었다. 그러나 이번 강연 녹취록에서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 건, 원시적인 상태란 곧 사로잡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 상태는 당사자로 하여금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사로잡힌다는 건 자신이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고, 그것이 생각이라면 다른 생각에의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사고 기능이 우월한 유형인데, 특정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한 적이 거의 없는 편이다. 나는 늘 '다르게' 생각하기를 즐기며, 또 그렇게 생각해야만 비로소 옳다고 느낀다. 반면에 사고 기능이 열등한 유형의 사람이라면, 그는 특정 생각에 사로잡혀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거나, 특정 가치관에 과도하게 매달리거나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본인을 내몰게 된다.
이는 융의 유형론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삶의 체험이 보여준다. 내가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체험들을 반추해 보면 늘상 나의 열등한 기능들과 연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융을 읽기 전부터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가장 끔찍이도 견딜 수 없어 하는 상황은 바로 '감정적인 인간'이었다. 예를 들어 술을 먹고 감정적으로 된다거나, 술을 먹지 않아도 감정에 못이겨 과격해지는 인간들을 보면 나는 치를 떨었다. 인간 이하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이 될 자격이 없으며, 매번 말로만 자기 기만을 부릴 뿐 자각과 본인에의 변화는 평생 이뤄낼 수 없는 인간이겠구나라고 단정했다. 자기 자신이 의식적으로 동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인간을, 나는 몹시도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걸 나는 하나의 가치관으로, 나의 유년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행태와 맞물린 일종의 트라우마로 해석했다. 아비는 매일 술만 쳐먹고 감정적으로 변했으며, 안 마신다고 말했던 순간은 수천 번이었으며, 결국 술만 쳐먹다 자기 자신을 파괴해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련의 체험은 정말이지 한 사람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다. 내가 나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세우면서도 발버둥을 쳤던 건 이런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선 안돼, 혹여나 나의 자식에게는 절대 이런 상처를 줘선 안돼라면서 말이다. 이게 곧 나의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사람에의 기준과 자격 요건에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이 지배적인 콤플렉스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어쩌면 평생 이렇게 속으로 벌벌 떨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자기 개발 프로그램이 아닌 나 자신과 같이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이성이 월등히 발달되는 만큼, 나의 감정은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 채로 적응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15년도부터 시작된 나의 '방황'들은 모두 이런 것들과 연루되어 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알아보지 못했으나, 이런 것들은 사실 내가 나의 열등함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감정적인 걸 과도한 고통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건 곧 나의 감정이 열등하기 때문에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방어 체계는 곧 '낭만주의에의 비판'으로 이끌린다. 사람들이 왜 주구장창 자연물에만 공감을 일삼으며, 추상적 존재들에게는 '공감'하지 못하는지 비판하는 데 흥미와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이성 작업이고, 결국 나는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을 또 다시 억압하기 위해 나에게 편리한 쪽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그 결과, 일그러진 나의 정신 균형은 이내 여러 '보상 작용'을 내뿜기 시작하고 그것의 분수령이 지금껏 더욱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난 체험들 속에서 나는 징후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는 처지다. 공감하지 못하니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가치 생산' 담당인 기능을 분화시키기는 커녕 억압했으니 '무의미한 세계'로 인격이 내동댕이 쳐져 자살 충동에 이끌렸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오만했다. 문학 속에서 남들보다 민감한 감정선을 느끼고 향유하던 시절 때문에, 20대 초반부터 굴러간 '문학 활동' 속에서 나는 나의 감정이 열등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아직 이성-감정이라는 이분법적 개념 구도를 갖고 있을 적부터 감정 위에 이성이 작동한다고 느끼며 믿었다. 스피노자처럼 생각하는 출발로 인해 어쩌면 당연히 '생 철학'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에게 '너는 사실 감정이 몹시 열등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지인은 없었다. 남들보다 민감하고 차이에 예민하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감정이 열등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늘 이성도 감정도 발달된 사람이라고 했다.
시를 쓸 때도 스스로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확실히 시를 쓴다는 건 나의 감정 표현이었다. 여태 500편 남짓 시를 쓰면서 보낸 시간을 보더라도, 나의 감정이 발달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발달과 퇴행은 고정이 아니라는 걸 알아봐야 한다. 발달이 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퇴행할 수 있는 게 바로 정신이다. 나의 감정은 지금 원시적인 상태로 추락한 게 맞다. 더욱이 17년도부터 시에서 '이성' 기능을 접목시키려는 무모한 노력에 박차를 가해버린 이상, 지금의 파국은 이미 예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자꾸 매달린 세월이 벌써 8년이다. 나의 무의식은 융의 말마따나 계속 말해줬다. '너 그러다 좆된다'고. 융이 좆된다고 말한 건 아니고, 무의식의 발현인 꿈 속에서 늘상 쫓기거나, 늦거나, 어딘가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등의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는 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걸 의미한다. 융이 이런 사례를 소개해줄 때, 그 당사자들은 자기 분수를 모른 채 무모하게 굴다가 파국을 맞이한 결론이 잇따랐다. 나도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다.
나의 꿈들 속에서 이런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자기 한계다. 나도 직감적으로는 느끼고 있었다. 늦거나, 매번 도착하지 못하거나, 엇나가거나, 자꾸 발목 잡히는, 빙빙 맴돌기만 하는 꿈을 꿀 때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인식'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내가 왜 지금 이 상태인지. 내가 나 자신에게 무얼 어떻게 하기에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런 디테일한 서사 속에서의 '자기 인식'을 어찌 타인이 대신 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걸 감당하고자 무수한 시련을 겪은 자가 융이기도 하다. 나는 엄두도 낼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작업에 진심을 다해 '자기 분석'이라도 성취해내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혼자 빨빨거리고 있는 모양새라 몹시 위태롭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래서 더 오래 걸리고,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 놓을 수는 없다. 나는 나를 구해야 한다.
다음 책은 융의 [상징과 리비도] 그리고 융이 말하는 '적극적 명상'을 위한 보조 자료로서 책 한 권을 읽으려고 한다. 의식이 너무 이성과 동화된 나의 경우, 적극적 명상은 너무나 어려운 기술로 다가온다. 여태 성공한 적이 없다. 조금씩 연습을 해 보지만, 쉽지 않다. '내려 놓기'란 도대체 뭘까? 알 듯 말 듯하다. 나의 직관은 이미 뭔지 알려주고 있는데, 도무지 어떻게 할 줄 몰라하는 내가 있다. 지금 내가 마주하며 변화를 꾀해야 하는 콤플렉스, 보상 작용들이 꽤나 많다. 오늘 다룬 감정뿐 아니라 실제 일상 속에서 의식의 악순환을 알아보고 어디서부터 고착화되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내가 무언가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게 일종의 보상 작용이라면, 나는 결핍을 메우기 위해 좀 더 편리한 보상을 바라는 것이고, 돌려 말하면 그 결핍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때 나는 이성을 견제해야 한다. 쉽게 말해 '머리로는' 너무 편리하게, 빨리 앞서 가버린다. 당연히 말로는 쉽다, 내가 결핍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 지금 내가 결핍을 느끼고 있는 건 이미 이성이 다 알고 있다. 그건 관계의 의미다. 그러나, 융이 말해주는 사례 속에서도 나오듯, 정신의 한 기능으로만 자기 자신을 오롯이 설명하려고 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나는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생각으로 그걸 알아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 근데 또 직관이 이미 다 알려준다. '이거인 거 알잖아' 하면서. 나는 이런 나의 정신 작용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거 같다. 나의 탁월한 기능들은, 분명 탁월하다. 문제는 균형이다. 억압이 아닌 균형. 진짜 존나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