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2
23.12.10
꿈
여러 꿈을 꾼 거 같은데, 마지막 꿈과 그 전의 꿈만 기억난다. 그 전의 꿈은 희미하게 기억나는데, 어머니와 누나가 나왔다. 나는 헬스장에 다니려고 하는데 차로 112km 떨어진 곳까지 다녀야 한다. 지도를 통해서 해당 위치를 확인하는데, 이전에 이미 오고갔던 기억이 난다. 겨울이다. 눈이 하얗게 내렸던 거 같고, 왜인지 꿈에서 엄마는 히스테릭했던 거 같다. 음식 관련 얘기가 나왔던 거 같다.
이후의 꿈은 꽤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깨자마자 기록을 하지 않고 꿈을 들여다보느라 몇 가지 장면이 날아갔다. 무대는 대학교, 나는 남자 친구들과 같이 있다. 정류소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는 그 무리에서 중재자 역할이다. 그중 나의 친구? 사촌형?으로 뒤섞인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친구이자 사촌형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내 이름이 대화에 나오게 되었다.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 사촌형이, 친구가 내 이름을 듣자마자 기억이 돌아올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OOO?' 하면서 단번에 기억을 되찾고 이제는 친구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편안해졌다. 나는 그 친구가 좋아하는 카페를 기억해낸다. (이 카페는 내가 예전에 어느 꿈에서 꿨던 그 카페라는 걸 깨고 나서 확실히 안다, 꿈에서는 '이전에도 좋아했던 기억'으로 연상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그 카페에 가볼래? 라고 얘기를 했을 때 몹시 좋아했다. 우리는 학교 앞 번화가에 갔다. 여기서 꿈이 좀 뒤범벅되어 있는데, 이전에 기억 상실일 때도 같이 갔던 장면이 있던 거 같다. 어쨌든 그 친구와 거리를 돌아다니며 좌판 위에 놓인 물건들을 구경했는데, 그중 형광색 인형이 유독 눈에 자꾸 들어왔다. 연두색 형광이었는데, 나인지 그 친구인지 그 인형을 마치 공처럼 눌렀다 주무르는 탄력을 유희처럼 다뤘다. 우리가 학교 앞 거리로 나온 이유는 카페에 가기 위해 내가 차를 주차한 곳으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 아 아까 기억상실에 걸렸을 때 여기서 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서 학교에다 주차했었지, 하는 기억이 난다. 다시 우리는 학교로 돌아가는데, 학교 앞 정문 길은 돌다리로 된 강이다. 물은 깊지 않고 돌도 넉넉했는데, 나는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돌 틈 사이로 발이 빠진다. 신발을 신은 채로 물에 흠뻑 젖는 그 순간, 뒤에서 오는 사람 무리들에게서 눈초리를 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 친구와 함께 있기에 모든 게 편안했다. 나는 양 발이 발목까지 물에 흠뻑 젖는 걸 시원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연결되는 장면인지는 모르겠는데, 최초의 무리일 때, 친구가 기억상실에 걸렸던 시점에서 다른 친구가 흑인이자 키가 큰 인물로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가게에 들러 그 친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한다. 그는 6평 남짓의 하얗게 도색된 방에서 옷을 팔고 있는 거 같다. 그는 천진난만하다. 나에게 매출을 자랑한다. 5억 2164만 원이고, 나는 이걸 얼핏 봤지만 꿈에서 깨고 나서 떠오르는 숫자로 나머지 숫자를 마저 적어두었다. 꿈 속에서 나의 상태는 너무나 명백했다. 중재자이자, 돈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없고, 그저 각자가 '잘 하고 있구나'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흑인 친구는 나에게 꽤 혐오스럽거나 추잡한 기분을 자아냈다. 괴상한 춤을 추면서 옷이 흘러내려가고, 속옷만 걸친 어떤 이미지들로 나에게 장난스럽게 다가왔는데, 나는 부담스러워서 그와 똑같이 굴지는 못하고 애써 그를 받아줬다. 그러고 꿈에서 깼다.
융의 말마따나 꿈에서 '물'은 무의식을 의미하고, 나는 이전에 아니마를 만났을 때 물을 피했으나 이제는 물을 받아들이는 진전을 보였다. 하지만 '흑인 친구'는 나의 감각 영역, 나에게 있어 가장 열등한, 가장 원시적인 상태인데 그를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기억상실과 내 이름을 듣자마자 다시 '나'로 돌아온 건, 어제 글을 쓰며 있었던 일이 반영된 듯하다. 또 대학교나 그 앞 '카페'는 분명 어떤 무의식의 원형을 의미하는 걸 직감한다. 나는 아직 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이끌린다는 걸 여태 일상 속 의식의 흐름을 통해 유추해내는 데 무리는 없다.
여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오직 남자만 나온 꿈이다. 즉, 나의 인격들이 나왔다고 나는 받아들이고 있는데, '중재자'라는 걸 보다 선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의 운명일까. 나의 본능일까. mbti로 따지면 명실공히 INFP다. 그 역할을 맡을 때 나는 제일 편안하고, 안전하다. 꿈에서 펼쳐진 건 내가 나와의 중재 역할을 하는 상황, 즉 실제로 지금 '내면 작업'을 하는 것과 유사한 구도다. 자기 작업은 자기 자신을 두고 맞물리는 재귀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자기 자신이 대상이자 관찰자인, 서로가 서로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다. 내가 이 신화적 원형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끌리고, 포착해 온 건 나에게 있어 너무나 자명하다. 또 군대에서 꿨던 참으로 괴상한 꿈, 아니 남들이 말하듯 '가위를 눌리는' 그 체험 속에서 겪었던 것. 그걸 나는 시구로 쓰기도 했었는데 어제 융의 책 [상징과 리비도]를 읽으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꼬집어 말해준 걸 발견했다. 융에 따르면 그건 반인반수의 신을 소환하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이후에 진전된 건 없었지만, 몇 가지를 돌이켜보면 내가 무의식과 어떻게 만날 수 있었는지, 혹은 만나는지의 감각에 도움되는 정보였다.
어제 잠들기 전에 썼던 기록이다.
23.12.09
혼자라는 게 위험한 줄은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악순환의 고리를 물고 쫓는지 거리를 두고 알아볼 수 없다는 것쯤은. 지난 기억들이 하나둘 올라온다.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던, 비겁한 선택의 순간. 무의식과 조우하며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던 순간. 명치께가 답답하다. 분명, 잘 살아가고 있었던 거 같은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핏줄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영향 관계에 비추어 본다면, 나의 아비는 분명 이 '정신의 위기'에서 패배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실패하지 않겠다고 살아왔음이 무색하게도, 어느새 같은 처지가 된 모양이다.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나도 똑같이 죽고 싶지 않아.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다면.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나는 무얼 해야 할까.
눈물이 난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게. 미치지 않고서는 도무지 제정신을 붙들 수 없겠다는 그 치열한 절박함이. 무슨 용기로 이 모든 걸 맞설 수 있을 거라 자신했나 나는. 고작 한 인간일 뿐이면서. 늘 혼자면서. 버틸 수 없는 걸 버티겠다고 자만했나. 나의 아비도 이런 순간이 있었겠지. 자기 자신을 놓기 전에, 분명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겠지. 감당하지 못할 바에야 모든 걸 끌어안고 죽겠다는 파괴로 흐를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인지 모르겠다. 심정이 그렇다. 나는 나를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
나는 분수도 모르고 무작정 내지르는 인간이다. 만들어진 인간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우습게 봤다. 철학이니 문학이니. 이 지경이 되도록 내 목을 졸라 왔다. 도대체 이런 끔찍한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어떻게 그리도 쉬이 '고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좋은 말만을 할 수 있는 걸까. 이런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융이 처음이다. 대중 상대로 책 팔아먹는 인간들이 종용하는 '혼자의 시간'은 이해할 수도 없고 공감되지도 않는다. 이 고통을 잘 포장된 고독으로 말할 수 있는 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런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타인에게 권했을 리가 없다. 자기 삶을 쓰는 작가 중에 자신이 겪은 고통을 타인에게 권하는 이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한 번도 혼자여 본 적이 없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이런 사실을 누군가는 옳게 말해야 한다. 인간은, 고독을 겪지 않는 게 낫다고. 그럴 수 있다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오늘 [상징과 리비도]를 다 읽고, 몇 개의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나는 퇴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퇴행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나 돌이켜봤고, 지금 알 수 있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걸 감당하려고 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단 것이다. 이는 나의 유년에까지 뻗친 뿌리다.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뿌리, 더 내려가 깊숙히 자리한 뿌리의 기억까지. 나에게 늘 부재했던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 감각할 수 있는 '자기 감각'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잠에 들었고, 꿈에서 '기억상실'에 걸린 내가 나의 이름을 듣자마자 다시 기억이 돌아온 건 어제 글을 쓰면서 다시금 '나'를 호명했던 경험과 맞물려 있다. 나는 현재 리비도의 퇴행적 정체를 겪고 있다. 내가 나의 정신 에너지를 순환시키지 못하고 억압하고 있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진정'으로 깨닫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융의 유형을 빌린다면, 나의 4가지 기능 중 가장 열등한 기능은 바로 '감각 기능'이다. 그리고 나는 늘 희미한 어떤 이끌림을 받아 왔다. 그것은 바로 춤의 세계다. 내가 고태적 원형을 만날 수 있다면, 가장 자극적으로 받을 수 있는 영역이 춤이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해 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발달시켜본 적 없는 기능이라고 볼 수 있기에, 몹시 원시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제 계속 돌이켜보면서, 여러 상황들을 다시금 알아볼 수 있었다. 혼자 분석하고 혼자 판단하기에는 역시나 너무 위험하고, 또 오만이나 자만, 정신의 환상-보상 왜곡으로 휘말릴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결국 시도는 해 봐야 한다. 정신 에너지의 순환을 위해 나는 우선 '내향화'를 더욱 확장시켜야 한다. 내가 이것을 잃어버린 건 그릇된 판단 때문이었는데, 분화되지 않았던 의식 상태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선택이었다. 이전에 내향화를 저버리는 여러 판단을 했을 때는 충동에게 우선권을 주려고 했었다. 이끌림, 즉흥적인, 충동적인, 내키는 대로 삶의 어떤 선택들을 했던 것인데 이 속에서 내가 알아볼 수 없었던 건 바로 '감당할 수 있는가'와 '미리 결과를 예측하려는 합리화' 사이의 분화였다. 어떤 선택을 할 때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지를 미리 생각하려는 버릇 자체를 아예 포기하려고 했기에, 나는 꽤 충동적으로 사는 사람, 그러니까 개처럼 살았던 것이다.
아마 리비도의 퇴행적 정체가 이뤄지기 시작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적용될 수 있을 거 같다. 지금 하나 의심스럽게 포착되는 건 바로 '직관'이다. 신기하게도 융은 [분석 심리학 강의]에서 직관 기능을 '시간'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나는 시간 의식에 대한 단상을 수 년간 가져오고 있는데, 직관과 시간이 서로 대체될 수 있다는 건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통찰이다. 나의 특질이라고 판단되는 여러 흔적 속에서 나는 늘 시간적 어휘로 표현되는 직관을 발견했다. 돌려 말하면 직관은 늘 현재를 벗어나는 기능이다. 실존의 처분 불가능한 '소외'가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기능인 것이다. 내가 직관 기능에 너무 과도해진 나머지 여러 기능의 균형을 도외시해 정체가 발생된 것으로도 파악 가능하다. 직관에 매달리게 되면 현실을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계속 현실에의 콤플렉스를 티내면서도 알아차릴 수 없는 이런 '자기 자신'이라니.
일본의 몇몇 정신의학자가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병의 기제에 '시간성'을 포섭시킨 것도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윤회적으로 여기든 직선적으로 여기든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걸 겪는다. 이제는 모든 시계가 디지털화-수치화가 되어 이 '맞는' 감각을 상징으로써 잃게 되었지만, 외부 바깥의 모델은 늘 변형되고 대체될 수 있기에 크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맞는 감각은 바로 엇나간 자기 인식의 합치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그런 관계여야만 문자 그대로 안정적일 수 있다. 아마 몇몇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감각,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정신적 상태들로부터 벗어나고 싶기에 이들을 제거하는 게 '안정적'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맞아 떨어진다는 건 융 말마따나 자신의 모든 정신적 에너지와 그 바깥 간 상호성을 유지하며 순환을 이뤄내는 것이다. 그런 그가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떨거나, 불안에 떨거나, 때로는 분노에 휩싸이더라도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감각 반응이지 균형의 엇나감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아니다. 균형의 엇나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대개 '사로잡혀' 있다. 흐르지 못하고 고이고 만다.
이런 비유는 대체로 자기 자신에게 대입해 생각하기 힘들다. 인간 정신의 흐름을 사물로서의 물처럼 감각할 수도 없거니와, 무엇이 흐르는 것이고 고이는지 인간은 분간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인다는 건 특정 이미지, 상황, 생각, 감정, 징후, 여러 사물들 등등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고정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정해진 방식대로 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른 걸 하고 있더라도, 그걸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그는 해야만 한다. 사로잡힌다는 건 그런 것이다. 삶에 있어 이런 사로잡히는 경험은 본래 자연스러운 일이고, 누구나 겪는 일이다. 사랑과 이별, 기대와 실망, 폭력과 화해 등 정서 체험을 동반하는 여러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이런 에너지 흐름을 겪는다. 문제는 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퇴행적 정체로부터 어떻게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느냐는 것.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덫에 걸려 스스로 목이 졸려 죽음에 이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운명에 걸려 있다.
자승자박으로부터 어떻게 다시금 자기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까. 이 재귀적 사슬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추구해온 여러 많은 것들의 비밀이 풀리게 된다. 한때 어린 나는 이런 '변태'를 여러 번 할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가 강인한 줄 알았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얼마나 '새롭게'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엄청난 역량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환상 뒤에 숨어 있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신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나약한 자아였다.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한지 모른다. 여러 콤플렉스들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이전에 나의 노력들은 몹시 기본적인 것이었다. 지금 하려는 작업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그러나 사실 지금과 뭐가 다를까... 분화는 갈수록 난도를 높인다. 돌려 말하면 늘 제일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다. 늘 자신의 한계를 맞이해 변화하려는 몸부림은, 시간이 지나도 한계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일단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전 노력이나 성취에 대해서 안위를 찾아선 안 된다.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진정으로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의 이 고비가, 어차피 다시는 할 수 없는 도전이라고. 한 번의 인생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인격을 갈아끼울 수 있다는 건 고도화된 자기 자신이거나 완전히 파편화된 자기 자신일 때나 가능하다. 더욱이 '안정'을 추구하는 나의 성향이 조건으로 붙는다면, 내 기준에서 그건 정말이지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음에 반성한다. 내면 작업과 더불어 나는 꾸준히 현실을 만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감당할 수 있다는 걸 다시 배워야 한다. 이제 융 읽기는 약 5권 남았다. 하지만 작업은 읽기가 끝나도 버릇처럼 남겨둘 것이다. 어디까지 살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과연 나의 직관이 안내한 세계까지 살아낼 수 있을까? 아니면 몹시도 열등한 감각이 보상되는 퇴행된 세계에서 머무르고 말까. 지금으로썬 후자의 세계에서 전자의 세계로 다시금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것. 만약 성공한다면, 내 삶에 있어 최초의 '끈'이 완성된다. 순환과 퇴행을 모두 겪어 본, 진정한 인격의 재귀성이 체험된다. 모든 고난은 두 번째가 더욱 고되다. 하지만 두 번째에서 비로소 완성이 된다. 직관은 알지만, 나는 하나만 보낼 수 없어 같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