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3
꿈
애인과 나는 우리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고 있고, 애인은 같은 방 침대에서 잠을 청하려는 거 같다. 같이 있지만,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나도 이제는 자야겠다 싶어 양치를 하는데, 그때 갑자기 우리 가족이 집에 도착하고 말았다. 엄마와 누나 그리고 아빠와 기르던 개도 있었다. 가족은 외갓집에 다녀와서 이제 막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순간 현관 앞에 애인의 신발이 놓여 있는 걸 곁눈질로 보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가족이 없는 틈을 타 애인을 몰래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현관문 앞이 바로 화장실이었고, 그 앞에서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러다가 엄마가 내 방에 들어가서 무언갈 확인하려고 할 때, 나는 조금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며 방에 못들어가게 하려고 막는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이실직고를 한다. '사실 애인이 와 있어'라고. 엄마와 가족은 딱히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혼자 눈치를 봤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애인이 듣고 있나 걱정하지만(가족이 온 걸 알면 놀랄 게 뻔했기 때문에), 왜인지 자는 척을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후 가족이 집에 들어오고 거실로 이동하고 이런저런 일을 할 때, 애인이 갑자기 방에서 나와 서성거리더니 안방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나는 그 방이 엄마와 아빠가 자는 방이자 침대라는 걸 알리려고 넌지시 알린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는 최대한 가족과 애인 사이를 조율하려고 신경을 쓴다. 이후 거실 의자에 앉아 엄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엄마가 갑자기 투명한 플라스틱에 담긴 커피우유를 꺼내더니 나에게 '뭐 할 거 있지 않아?'라며 건넸다. 나에게 커피우유를 주고, 엄마는 초코우유를 먹었다. 그때 시간이 새벽 5시였다. 나는 이제 막 자려고 했는데, 속으로 생각한다. 그때 아빠는 부엌에서 분주하다. 누나는 피곤해 하는 인색이다. 모든 장면이 실제 가족처럼 생생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커피우유를 마신다. 맛은 있다. 그때 기르던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보니 아직 목줄에 매여 몸을 엎드린 채 답답하다는 걸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더러 풀어주라고 한다. 근데 아빠가 장난인지 무슨 오븐기? 같은 선반장에 개를 넣었다. 그리곤 문을 닫았다. 나는 아빠한테 '그러다 안에 기스날 걸?'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개가 무서워서 문을 발로 긁을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 말을 듣고 문을 열어준다. 근데 개는 안에서 편하다는 듯 웅크리고 있었다. 아빠는 개를 다시 꺼내줬다.
이후 곧장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다. 외갓집 문제다. 핸드폰으로 은행 관련? 어플 화면을 이것저것 보여주며, 이런저런 필요한 게 1억 원이라고 말한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땐 이런저런 일을 했었는데...라고도 말한다. 뭔지는 몰라도 대여비가 1년에 1억 원이 필요하다는 거 같았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방금 전 커피우유를 주면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냐'고 한 말이 마치 이 1억 원을 충당하는 데 가담해야 한다는 암시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일상으로 복귀하려던 바로 다음 날부터 몸이 안좋았다. 감기 증상을 동반한 약간의 몸살 기운이 나타났다. 긴장이 풀려서 몸이 아프기 시작하나 싶었다. 아직도 살짝 남아 있다. 또 한두 달 전에 했던 외주 업체에서 일을 추가로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아직 본격적인 '내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위에 적은 꿈은 어제 밤에 꿨던 꿈이다. 엄마와 병원가는 날 꿨던 꿈 이후로 기록할 수 있을 만큼의 생생한 꿈은 꾸지 못했다. 저번 주말에 무슨 '빨간 코끼리'가 나왔고, 그걸 내가 '꼬맴마'라고 불렀던 희미한 기억이 난다. 뭔지 잘 모르겠다. 꿈 속에서 동물이 나오는 건 무척 드물다. 근데 요근래 실제 길렀던 개가 꽤 자주 나타난다. 수명을 다 해서 지금은 죽고 없는데, 그때가 아마 19년도였으니 벌써 5년이 됐는데 그동안 잘 안나타나다가 왜 근래에 나타나는 걸까? 아, 기록을 하진 못했지만 근래에 한 꿈에서 아픈 여자애가 나오기도 했다. 아니마와 관계 좋다고 믿었더니 곧 이런 꿈을 꾸는구나 싶었다. 꿈에서 '병'이나 '아픈 상태' 등은 정말 잘 안나타나는 편인데, 그래서 좀 더 강렬했다. 그때 기르던 개도 같이 나왔는데, 개도 아파했다. 어제 나온 꿈에서는 늙은 상태의 모습과 닮았었다. 태어나 젖 떼고 바로 데려왔던 개였기에 보면 얼추 어떤 연령대인지 안다. 나는 개가 죽기 몇 주 전부터 누나한테 맨날 '곧 갈지도 모르는데 맛있는 거나 먹이자, 스테이크 어때' 하고 말했지만 누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안된다고 그랬다. 이 얘기는 개 얘기가 나올 때 가끔 꺼내는 이야기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인데, 나는 아직도 이 아쉬움이 있다. 먹고 환장하는 거 원없이 먹일 걸, 하는. 죽음을 직감해서 더 그랬던 걸 수도 있다. 정말 그러다 며칠 뒤 갔다.
아빠도 너무 생생해서 꿈이 현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 꿈을 알아보는 게 잘 안 되는 기분이다. 특히, 엄마가 나한테 '커피우유'를 주면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라고 하는 게 너무 강렬하게 들어왔다. 커피우유는 연상으로 떠올릴 만한 게 딱 하나다. 카페인 존나 들어 있는 그 스누피 커피우유. 그건 내가 대학생 때 시험 기간에나 가끔 마셨던 커피우유다. 너무 저급한 느낌이라 그런지 그걸 마시면 무척 불쾌한 두통 같은 게 느껴져서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카페인 퀄리티로 따지면 직접 달인 콜드브루가 최고다. 여튼 커피우유를 준다는 게 나에게는 '잠 잘 시간이 있냐'는 말과 같다. 혹은 정신 차리고 집중해라, 같은. 근래 꿈에서 나타나는 엄마와는 좀 결이 달랐다. 그 전에는 이렇게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존재로 나타나지 않았었다.
특히 '해야 할 일'은...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말이라는 측면에서 꿈 속 엄마가 나에게 되돌린다는 게 참 신비한 체험이다. 근데 왜 엄마일까? 최근까지 왕래도 있었던 탓에 이처럼 실제 교류하는 사람으로 꿈이 보여주면 알아보는 게 잘 안 된다. 아빠는 이제 죽은 사람인데, 꿈에선 그다지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애인은 거의 아니마처럼 나타난 거 같다. 그러면 나의 가족 3명은 곧 나의 다른 인격이 의인화된 걸로 봐야 할까. 이게 분별이 잘 안 간다. 다른 꿈의 경우 이를 연결짓는 데 특징적인 포인트가 있었기에 쉬이 됐지만, 어제의 꿈은 정말 잘 안 보인다. 그럴 땐 그냥 있는 그대로만 보는 게 낫다는 기분이다.
일단 꿈에서 깬 시간이 밤 11시 반 쯤이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고, 2~3시간 정도 잤을 뿐이었다. 사실 깨자마자 '아 꿈이었네' 하는 느낌과 함께 엄마가 너무 강렬하게 '해야 할 일'을 말해서 비몽사몽했는데, 다시 잘까 싶다가도 아 이건 기록해야지 하면서 핸드폰에다 적는 동안 잘 수 있는 상태가 사라지고 말았다. 딱 이 중간 상태가 지금 내가 잘 다루지 못하는 의식 상태다. 이를 뭐로 부르고 다뤄야 할지 난감하다. 대개 이럴 땐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잠을 자기엔 의식이 깨버렸고, 그렇다고 일어나서 책을 읽자니 귀찮음을 느낄 정도로 아직 정신이 활성화가 된 게 아니고. 이 애매한 상태가 한 번 나타나면, 반드시 다음 날에도 영향을 끼친다. 오늘 확실히, 기묘한 불편감으로 인해 집중을 잘 못했다.
처음에는 '해야 할 일' = '가열찬 의식적 자기 작업'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융이 내담자의 꿈을 다루면서 했던 말이 떠오르며, '해야 할 일'은 곧 '꿈 분석', 그러니까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노고의 필요성이다. 즉, 나는 무의식을 전면 미뤄두고 가열찬 의식 상태로만 무언갈 할 게 아니라 무의식에도 그만한 적극성을 내보여야 하는, 사실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뭐가 정답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꿈은 그저 '무언갈 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꿈에서 엄마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냐'고 상기시켰다 하더라도, 그런 순간의 체험 자체가 내 정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 그 말을 하나의 실제처럼 다뤄 '그래서 뭘 해야 하지?' 혹은 빨리 해야 한다는 조바심 따위를 느끼는 건 별개의 상황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내가 '아니마'라고 불렀던 걸 빼더라도, 꿈 속의 '여자'가 나에게 '요청'하는 상황은 이어지고 있다. 어제의 꿈은 단지 엄마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사실... 대충 눈치가 있기는 하다. 확실히 한번 적극적 명상을 체험한 뒤로, 무의식이 의식에 흘러들어오는? 듯한 상태를 느끼는 게 점점 잦아졌다. 이게 참 표현하기가 기묘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줄다리기? 의식이라는 양동이에 무의식이라는 다른 물질이 뒤섞이는? 무의식이라는 어떤 방대한 영토에 문이 열려서 어떤 '장기' 따위가 새어나오는? 의식이 몹시 왜소해져서 무의식이 거세는? 등등.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나는 특히 정신분열증의 피해 망상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적어도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케이크의 작은 흔들림 하나도 거대한 불안이 '교통사고'로 나타날 수 있다. 이걸 의식으로 다루는 연습이, 일상을 보내면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타난 숙제같다.
해야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신 언어의 정신 언어에 대한 재조정이다. 지금 '시집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첫단추를 [앎의 나무]로 잡았다. 오늘 그 책을 9년 만에 다시 읽으며 '재귀성'에 대한 관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순환성을 철저한 의식으로 다룬 적이 없었어서 이번에 좀 에너지를 쏟을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이에 대한 의식화 없이도 유사한 방향성을 가져 왔지만, 새로움으로 다가가기 위해선 결국 내 무기를 십분 활용할 수밖에 없다. '헤르메스'를 거칠지 말지는 조금 고민 중이다. 일단은 전체 시스템이 잘 작동되기 위해 부분 보완을 피드백 장치 수준으로 수정해야 한다. 꿈에서도 그렇고 실제 인격도 그렇고 나는 명실공히 '중재자'다. 내 눈에는 이런 '중재'를 자청해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잘 보인다. 마뚜라나와 바렐라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다. 그들은 다름과 차이를 소통 차원으로 끌어들이는 데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는 아직 애송이라 사적 삶 안에서 전체성-일관성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나마 조직화는 필요하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