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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Dec 20. 2023

용해

내면 작업 6


23.12.20



드디어 7년에 걸친 콤플렉스 매듭을 느슨하게 만든 거 같다. 투사는 정말, 무시무시하다. 이만한 강력함이면 일생 전반에 걸쳐 어쩌지 못해도 무방할 만큼. 오늘 융의 책을 읽으며 문득, 이제는 화해할 수 있겠다는, 융합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시달렸던 콤플렉스 하나는 바로 나의 아니마 투사와 관련된 콤플렉스였다.


 아직 상징 이미지들에 대해 아는 바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최대한 활용을 자제했다. 하지만, 이미 내 정신은 무수히 많은 원형적 심상을 보여주고 있다. 난데없이 점성술을 취미로 하는 친구에게서 받은 이미지가 나의 꿈과 적극적 명상을 통해 나타났던 이미지와 동일하다거나, 꿈과 명상을 통해 마주한 이미지가 융의 책에서 서술되는 식으로 '연결'이 될 때마다 최대한 분석하려 들지 않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나의 무의식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무의식은 나에게 이미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직 이 '관계'만으로도 지금 나에겐 충분하다.


 융이 연금술사의 텍스트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용해'가 실지로 어떤 정신 작용인지 그려지는 바는 없다. 지금 내가 느끼기로 용해는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는 상반된 두 비물질이 포월包越되는 게 용해라는 것이다. 상반된 것들을 하나로 뒤섞기 위해서는 먼저 그 안에서 '나와야 하며(넘을 월)', 이후 다시금 '끌어안아야(감쌀 포)' 한다. 이 작용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 한국 철학에서 포월包越이라고 한다. 나는 이 개념을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해했는데, 아마 14년도였던 거 같다. 융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정신 기능인 초월적 기능으로 말미암아 융합에 다다르는 걸 의미한다.


 나는 콤플렉스라는 걸 매듭이라고 형상화한다. 매듭은 얽히고 설켜 있다.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풀어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매듭은 매듭이어야 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매듭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꽉 조여진 매듭이란 양 쪽으로 난 줄을 서로의 편으로 끌어당기기에 유지되는 것이다. 느슨한 매듭으로 있기 위해선 '힘'으로는 안 된다. 이 기술이 일종의 심리 노하우이자 비밀이라는 걸, 남몰래 전승되는 하나의 '비의秘儀'라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이건 동서고금 막론하고 결코 '말과 글'로는 전달될 수 없는 깨달음이라는 게 현실이다. 이런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답답할 따름이겠다.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수 있다고 말은 해주지만 방법을 안알려주니 말이다. 비의도 그렇고 모든 비밀은 모두 이런 구조를 띠고 있다. 하나의 징후처럼, 정체는 나타나지 않지만 있다는 걸 말함으로써 그 존재(무의식)를 실제로 있게 함과 동시에, 만약 정말로 그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누군가는 불가피하게 본인의 힘으로 그걸 밝혀내야 한다는 걸. 비밀이 비밀인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건 늘 '자신 만의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 또한 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결국 내가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7년. 나는 이 콤플렉스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7년이 걸렸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냈어야 했나, 억울함과 원망, 부당함이 드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래서 매듭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 그 고통을 지탱하는 한 축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는 걸 몰라 한다. 마치 무거운 돌을 두 팔로 들고 있으면서 그 무게로 인해 호소하는 모양새다. 내려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군가 들어주지도 않는다. 이 '시련'이 형상화된 게 시시포스의 형벌이기도 하다. 이 둘을 읽으려면 실로 상징 분석이 불가피하다. 핵심을 간추리면 이렇다. 인간은 자신의 분수에 걸맞지 않은 무언가를 바란 대가로 벌을 받는다. 내가 아니마 투사라고 말한 부분이 딱 이렇다. 7년, 정말이지 알아차리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어야 했나 싶을 정도의 7년 동안 내가 무얼 투사하고 있었기에 이토록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지가 오늘 드러났다. 


 내밀한 체험이기도 하거니와, 나의 심리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아주 강력한 아니마 투사이자 콤플렉스이기에 쉬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노트에다 글을 쓰며 도달한 나의 '되돌아감'은, 내가 왜 아니마 투사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혹은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에 대한 걸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줬다.




 나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한 인간의 면모는 바로 감정적인 변덕스러움이다. 여기에 공격성까지 더해지면,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괴로움을 느낀다. 내가 느낀 강력한 콤플렉스란, 이런 공격적인 감정 기복에 더해 내가 나도 모르게 아니마 투사까지 더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왜 이렇게 강력한지 못알아차리는 게 멍청할 정도로... 그리고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단순한 아니마 투사가 아닌, 융의 상징 말마따나 솔(태양)의 그림자인 루나(달)에게 투사가 이뤄진 것이었다. 검은 태양. 솔직히 7년이면 싸게 먹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7년 동안 무너진 게 아니라 수행의 시련이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었으니까.


 어제 명상을 통해 보았던 '두려움', 안에 있는 불은 오늘 융의 책에서 본 바대로 나에게 '용해'를 이끌어주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나. 나는 아니마 투사와 별개로 '무의식에 사로잡히는 걸' 두려워 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을 직접적으로 겪게 하는 게 바로 공격적인 감정 기복이다. 이건 내가 이성 기능을 우월하게 갖고 가는 1하우스 염소자리 몰빵 캐릭터라는 게 상징적으로 얽혀 있다. 사람마다 무의식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뿐더러, 또 무엇을 '무의식적 존재'로 느끼는지도 다르다. 특히 나같이 '자기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토성-염소자리 1하우스, INTP-ENFP 인간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 치열함이 배가된다. 문제는 내가 이성-태양-로고스의 발달을 너무 과하게 추구했던 것도 한몫한다. 달리 말해 나의 '아니마 투사'가 어떻게 현실로 반영되었나? 하면 '인간은 무의식에 사로잡혀 제정신을 놓아선 안 된다'는 엄격한 투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니마 투사다 보니 인간은 '여자'에게 더욱 엄격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여성적 정신 활동의 성질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할 뿐더러(여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와 더불어 인간의 다양성 속에서 한 성별로 국한할 수 없는 문제가 더해져), 나의 주 기능에 상반된 열등 기능-감정에 대한 원시적 태도가 맞물린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조건은 인간 모두에게 각기 상황에 맞춰 똑같이 적용 가능하다. 자신에게 편리하고 익숙한 건 잘 알 수 있어도, 자신이 겪어볼 수 없는 '미지의 정신'이나 상대적으로 열등하고 원시적인 기능에 대한 태도에 대해선 모두가 마찬가지로 알아볼 수 없다. 실제로 내가 아니마 투사로 인해 가로막혀진 부분이 분명 있다고 해도, 그게 전체 인격에게 덧씌워질 정도로 원시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로 세상 인간들은 자기 투사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면서 만약 내가 나의 투사에 대해 인정하려 들면 가차없이 돌을 던져대는 게 한낱 인간이라는 걸 끊임없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인간의 진실 중 일부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투사가 건드려지는 어떤 대상이 나타나면 거기다 온갖 사악한 것들을 투영하려 든다. 내가 아니마 투사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이런 실정이 한몫한다. 내가 만날 수 있는 또래 사람 중에 나보다 무의식의 의식화에 대해 민감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또 그렇기 때문에 도움을 받기 보다는 늘 덤탱이 씌우는 걸 당하기 일쑤였다.


 내가 여자들에게서 정말이지 제일 끔찍하게 느끼는 건 여자들의 아니무스 투사다. 이것 또한 엄청난 나의 발작 버튼인데, 융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 썩은내가 진동하는 것과 같은 혐오감을 느낀다. 융도 직업 특성상 여자들의 아니무스 투사에 노출이 잦았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뭔가 짠하면서도 이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반갑고 그렇다. 실제로 나를 아니무스 환상으로 투사하는 여자들이 꽤 있었다. 한 명은 나를 아버지로, 한 명은 환상 속 고독자(그놈의 BL...)로, 그리고 나의 강력한 콤플렉스와 연루되었던 그 사람도 그랬다. 내가 이 콤플렉스를 7년이나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나는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열등하게, 수준 낮게, 유아적으로 여기고 있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행동들을 그녀는 했던 것이다. 이는 내가 그녀에게 투사하고자 하는 '아니마'와는 너무나 괴리감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하늘과 땅처럼, 태양과 그림자였다. 바로 이 구도가 내가 극복해야 하는 상반된 것들의 통합이었던 것이다.


 만약 태양이라는 나의 아니마 투사 기제가 적용되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그늘진 사람과 절대 관계를 맺지 않았을 거라는 '내적 진실'이 바로 나에게 강력한 모욕감으로 보상되었다. 이것은 다시 되돌아와 나의 잘못으로, 나의 미련함으로, 후회와 어리석음으로 퇴행되었다. 그녀와 헤어질 때 살면서 그토록 강력한 분노를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첫 연애와 동등한 수준의 분노였다. 하지만... 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드려면 이런 방식으로는 도무지 답이 없다는 걸 깨우쳐야 한다. 그걸 못 깨우치면 7년도 짧다. 거진 평생 가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오늘 용해를 수행하며 받아들였던 건 바로 여자들의 '아니무스 투사'와 나의 '아니마 투사'의 적절한 분화, 그리고 투사 이면에 있는 '실제 사람'으로서의, 또 내가 여지껏 받아들이지 못했던 '공격적인 감정 기복'에 대한 정신의 포용이었다. 내가 여지껏 이 수용을 해내지 못했던 건, 나의 이기심 때문이다. '왜 매번 나만 괴롭고 근데도 나 혼자 이걸 짊어져야 해?'가 부당함으로 제일 앞장 서 있었던 것이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배우자의 외도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이 억까하는 것처럼 온갖 좌절과 실패만 맛볼 때, 엎친 데 덮쳐졌을 때 등등. 우리는 그럴 때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나만 고통받아야 하나'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자각하기론, 이런 모든 '공격'은 모두 외부로부터 온다. 상대의 언행, 세상의 차별, 불행 따위가 그렇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자아'가 겪는다는 걸, 비유컨데 내가 지금 무거운 돌을 들고 있다는 걸 결코 알아차리지 못함으로써 시련은 강화된다. 이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또 정당한 반응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런 '실패와 실망'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너무 불필요할 정도로 모든 문제를 '자기 책임'으로만 환원시키려 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초적인 수준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의 원인을 바깥에서 일단 찾고 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게 먼저고, 우선이고, 지켜져야 할 질서이자 도덕, 법이다.


 문제는 사로잡힘에 있다. 만약 그렇게 외부로 돌려 해소가 되었다면 그건 콤플렉스라 부를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순환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보이진 않아도 우리네 문명의 부분이 잘 기능하고 있다고 안심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더 이상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여전히 그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 그건 심리 문제로 전환해 다뤄야 한다. 현실 문제와 심리 문제는 복잡해 보여도 단순하다. 실제로 일어난 일로서 그때 해결되거나 대응되어 남는 게 '현실처럼 바깥에 있는 느낌'이면 그건 현실 문제다. 그러나 심리 문제는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올라오는 불안, 이미지, 어떤 감정이다. 어떤 문제가 현실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심리 문제로 남는다면 우리는 혼란스러워 심리 문제를 현실 문제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대처가 우리 삶에 비일비재하고, 이때 무의식적 투사가 가장 자주 나타난다. 그리고 '현실 문제-심리 문제' 간 시간 길이도 고무줄처럼 탄력적이다. 어떤 경우는 몇 시간, 며칠일 수도 있지만 길게는 수 년, 수십 년에 걸쳐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당연히 현실은 변하고, 그래서 재적용되는 '다음 현실'이 이전 현실과 다를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 꽉 조여지는 매듭을 확인한다. 내가 역겨워하는 '아니무스 투사'는 대체로 나와 무관한, 도대체 나한테 왜이래?라는 느낌으로 현실 관계가 전혀 없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아주 기나긴 얽힘이 반영되었다가 때마침 '나'에게 맞물린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어릴 때부터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역겹게 느껴도 실제 행동으로는 결코 당사자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게, 환상이 위태롭게 거부되지 않게 최대한 부드럽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괴롭더라도, 남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게 어쩔 수 없는 나의 숙명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아니마 투사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수용되거나, 부드럽게 대처되는 경험을 돌려받는 건 아니다. 내가 사회에다 선행을 하더라도, 나는 악행을 받을 확률이 높다. 내가 괴로워했던 건 바로 이런 지점이다. 내가 아니마 투사를 한다는 건, 그만큼 나의 내밀한 인격이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 인격은 몹시 연약하고, 나약하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버린 '투사'에 너무 강력하고 매몰차게 거부당한다. 즉, 나는 상대방의 내밀한 인격을 받아주려고 노력했음에도 되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상처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 용해 작업으로 알아낸 건, 투사를 거둬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또 내가 받을 수 없는 일을 등가교환으로 다루지 않는 균형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나는 내가 무얼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그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 존재에 사로잡히는 걸 두려워하지, 무의식적 존재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두려워하는 정체가 바로 '사로잡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 그 대상 자체에게 투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말로는 쉬워도 실제 자기 사례 속에서 스스로 알아내는 건 꽤나 험난한 일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남들에게 공감받을 순 없어도, 융의 말마따나 연금술사들이나 단테, 여러 예술가들이 묘사한 '지옥'이 무엇인지 나는 충분히 알아본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나의 정신 균형을 '중심'으로 상반된 것들의 통합을 하지 않을 20대에도 이미 어떻게 하면 상반된 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몸서리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 튕겨져나갈 것만 같은 괴로운 순간으로부터 나는 단 한 번도 도망친 적이 없다. 투사를 못알아보거나, 과도함을 못알아보거나, 대처가 능숙하지 못할지언정 그때 당면한 현실로부터 도망친 적은 한사코 없다. 내가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의 무의식과 이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갈등에 직면하는 용기 만큼은 담금질을 멈춘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어둠으로 추락한' 지금의 방황 시기는 좀 다른 얘기다. 나의 기나긴 방황 시절은 융의 표현을 빌리면 개성화 작업의 1단계에서 겪는 지극히 당연한 상태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살다보니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게, 참 그렇다.


 오늘 명상 작업을 통해 도달한 용해는, 이제 실전을 앞두고 있다. 내가 의식 작업으로 이렇게 무언갈 선취하면 반드시 '현실 체험'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 준비해 두는 버릇이 있다. 이건 20대때부터 갖고 있는 버릇이다. 만약, 정말 무의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면 분명 근래에 이를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런 예시를 꽤 자주 느끼는 편이다. 내가 쏜 화살을 내가 맞는 경험. 그래도 걸음을 내딛고 있는 기분이다. 아직 갈 길은 멀다. 내 생애 첫 만다라가 나타날 때까지, 내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로 살아도 괜찮을 수 있게, 내가 괜찮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같은 현실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곱씹는다. 융은 '지금 이대로의 세상도 훌륭하다'고 말했다. 이런 시선이 있기 때문에, 소위 '선함'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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