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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Dec 19. 2023

네 가지 보석

내면 작업 5

23.12.19




순서는 정확하지 않다. 한 꿈은 희미하게 기억나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났다. 희미한 꿈부터.


나는 어떤 무리와 함께 학원 같은 곳으로 간다. 꿈 속에서 여자친구인 것 같은 여자에게 나는 노트를 주려고 한다. 노트를 전해줬던 거 같다. 어딘가로 가야 하는데 도착하지는 못한다.


꿈에서 나는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간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나온다. 예비군 훈련장에 도착한 나는 주변에서 무리지어 사격 비슷한 훈련을 받는 걸 본다. 실제 예비군 훈련장의 풍경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사격 훈련 같은 느낌이었으나, 돌을 던져 무언가를 맞춰 돌이 산산히 부서지는 훈련이다. 익숙한 한 친구가 돌을 던져 깨뜨리며 이렇게 하면 된다고 수행한다. (수행? 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근접한 느낌...) 그리고 그 훈련은 어떤 방 같은 공간에서 이뤄졌다. 친구가 돌을 던지는 동안 바닥에 무수히 떨어진 돌 파편(이는 마치 전쟁 난 도시의 잔해물과도 같은 파편물 같다)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발견한다. 루비다. 그리고 바로 옆에 또 다른 보석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건빵주머니(군복 바지의 허벅지 옆으로 달린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옆 방으로 가서 또 다른 보석을 찾는다. 총 4개의 방에서 각각 2개의 보석들을 줍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개의 보석은 루비, 토파즈, 사파이어, 에메랄드 총 4종류다. 크기는 손바닥만했는데, 모양은 각기 달랐다. 한 루비는 팔각형이었고, 한 토파즈는 고드름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건빵주머니에 두둑히 보석을 넣었다. 양쪽 다 볼록해진 걸 느끼고, 아직 예비군 훈련이 끝나지 않았는데 괜히 훈련에 방해될까 봐, 혹은 왜이렇게 주머니가 두둑하냐며 시비가 걸릴까 염려를 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도착한 나는 방 한구석에 이 보석들을 꺼내 놓는다. (팔면 비싸겠지? 하는 이익을 기대하는 기분이 있었던 거 같다. 보석을 취하는 마음이 분명하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돌아가야한다고 느낀다. 전철을 타고 가고 있는데, 옆자리에 어떤 10대의 남자애가 왜인지 신경쓰인다. (꿈에서 뭔가 액션이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난다) 그 남자애는 춤과 관련된? 느낌을 준다. 내가 약간 눈치를 보는 기분? 쫄리는 눈치는 아니었고 약간 부담? 거슬리게 하는? (이전에 꿨던 흑인 친구와의 관계랑은 정반대의 느낌?) 그러자 전철이 성수역에 도착한다. 다음 역이 연신내일거라 확신한다. 그러나 전철은 반대로 간다. 옆에 있는 남자애가 '거 봐'하는 느낌의 말을 걸었던 거 같다. 나는 서둘러 내리며 반대편으로 환승하기 위해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러다 꿈에서 깼다. 





토요일 새벽에 몸이 이상했다. 담배 한 대를 피더니 순간 어지럽다가 갑자기 메스꺼움이 올라와 토를 했다. 체했다면 소화가 안 돼 음식물이 나왔어야 했는데 물만 토했다. 토를 하고 엄청난 오한을 느꼈다. 언제 이랬나 싶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몸의 이상증세였다. 


 일요일 내내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책을 읽으려고 해도 읽고싶지 않았다. 월요일도 얼추 그렇게 흘렀다. 어제 자기 전에 융 책을 조금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꿨던 꿈들이다. 꿈을 계속 곱씹어보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잘못되었구나,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무의식 작업에 나도 모르게 조급함이 달라붙는 모양이다. 보다 선명히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 쉽게 깨달으려는 마음 같은 삿된 마음이 섞여 있다. 지금 내가 단단히 잘못하고 있는 게 뭐가 있는데, 잘 모르겠는 답답한 마음이 조급하게 만드는 거 같다. 오늘 꿈을 꾸고 나서 느낀 점은, 자꾸 나도 모르게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닌데,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꿈을 들여다보면서 도착한 나의 느낌은 어디서부터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의 정체가 '내향화' 시간을 훼손시켰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희미하지만 첫 번째 꿈에서 나타난 노트는 지금 내가 느끼기에 '내면의 시간'이다. 꿈에서 나타난 여자친구는 실제로 사겼던 과거 사람으로 나타난다. 당시는 20대 초중반으로, 전역 후에 휘몰아치듯 내면 생활을 해나갈 때였다. 당시 나는 처음으로 노트에 글을 쓰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아무도 보여줄 마음이 없는 듯이 내밀한 나의 속사정을 배설하기 위한 '공간'으로 의미화를 했었다. 그때 당시의 여자친구가 나 몰래 그 노트를 본 적이 있었고, 그녀는 나에게 이실직고를 했었다. 나는 수치심과 배신감을 살짝 느꼈지만, '그럴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했었다. 돌려 말해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어도, 왠지 내가 쓰는 내밀한 노트를 누군가 볼 수도 있다는 일종의 '초자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초자아를 투사해 언젠가는 노트에다가 남이 보면 '뜨끔'할 만한 내용을 적었던 적도 있다. 아마 15년도 한 친구와 룸메로 지낼 때였던 거 같다.


 무의식이 꿈을 통해 갑자기 나에게 그런 장면을 보여준 건 왜일까. 꿈에서 나는 내가 직접 '노트'를 전해주려고 한다. 그 노트가 어떤 노트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선물로 노트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실제 사람의 얼굴로 인격화되었지만, 나의 직감으로 그녀는 아니마 같았다. 꿈에서 나는 아니마에게 나의 '내면'을 선물하려고 한다. 어딘가로 도착해야 하는 와중에 그녀를 만나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학원'같은 도착지의 이미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 여자친구였던 사람의 얼굴이 나타난 건 그때 당시의 시절을 상기할 효과적인 이미지라는 게, 내가 느끼기로 거의 확실하다. 무의식은 꿈 속에서 나로 하여금 '당시의 시절'을 상기하라고 말해준 것이다.


 두 번째 꿈은 군대 꿈이다. 나는 한때 다시 입대를 해야 하는 엄청난 악몽에 시달린 적이 있다. 매우 강력한 꿈이었고, 꽤 연속되는 꿈으로 기억한다. 나는 분명 제대를 했는데, 시발 다시 입대를 하게 됐다. 너무 억울하고,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부대 안에서 그 누구도 내가 여기를 한 번 왔다 간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한다. 나는 무척이나 나약하고도 처참한 기분으로 이 받아들일 수 없는 구속을 느끼며 어떻게 여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정말로 '다시' 제대할 때까지 여기 꼼짝없이 갇혀야 하나, 그런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에 시달렸다. 그 상황이 너무 생생하고 또 강력해서, 나는 간혹 '현실 의식'이 희미해질 때마다 '군대에 가야 한다'는 기이한 압박에 시달린다. 의식이 몽롱해졌을 때 나의 자아 중 하나가 그런 기분에 시달리는 것이다. '군대 가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는 그런 시름으로 괴로워할 때가 종종 있다. 현실에 돌아오면 모든 게 자명하고 확실해지지만, 몽롱한 상태일 때는 꼼짝없이 그런 압박에 사로잡혀 당하고만 있다.(이와 비슷한 꿈으로 고등학교 재입학하는 꿈이 있다)


 이번에 꾼 꿈은 예비군 상태다. 4가지 보석을 건빵주머니에 두둑히 넣는 것은, 실제 내가 군생활 할 때 했던 행동을 암시해주는 거 같다. 나는 군대에서 도덕경과 장자, 노자, 맹자, 법구경을 틈나는대로 읽어대며 나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당시 이등병들은 모두 손바닥만한 수첩을 들고 다녀야 했고, 나 또한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이등병으로 페르소나화 하기 위해 나의 자아를 억지로 끼워맞추려 노력했었다. 그래서 건빵주머니에 항상 수첩이 있었고, 거기에 여러 메모를 적고 수시로 확인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수첩에다 앞서 말한 고전들의 글귀를 적어두고 틈나는대로 꺼내 읽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군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정보를 적어두고 수시로 확인하는 A급 행세로, 하지만 남몰래 이 좆같은 새끼들과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 정신을 다스리려는 글귀를 보는 저항 행위였다. 글귀의 내용은 대개 고통과 괴로움, 시름으로부터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글귀였다. 나는 군대 안에서 나의 내면 생활을 수호하기 위해 남몰래 이런 짓거리를 발악하며 했던 거 같다. 훈련병 때부터 어머니에게 편지로 책을 타이핑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화장실에서 몰래 책을 읽었다. '책'과 '글'은 내 마음의 안식처요, 내가 유일하게 편안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꿈에서 보석을 건빵주머니에 넣었던 건, 당시 내가 키워 온 여러 내면 성취들이 늘 건빵주머니에 담겨 있었던 걸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걸 누군가에게 들킬까 늘 남몰래 했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것도 군대라는 집단 무의식 현장 뒤에 남겨진 곳에서 발견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거 같다. 꿈에서 돌을 던지던 친구는... 나에게 좀 심란한 느낌을 준다. 그 친구는 가장 오래된 친구다. 그는 홀로 남아 돌을 던져대지만, 내가 보석을 발견할 때 그는 없었다. 만약 정말로 융 말마따나 '돌'이 '자기의 상징'이라면, 그 친구는 왜인지 몹시 힘들 거 같다. 그런 동시성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나는 그 친구를 간혹 떠올리며 '어떻게 지낼까?' 상상하다 힘들게 지낼 거 같은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의식이 보여주는 꿈, 그러면 그 친구는 내가 투영한 무의식의 인격화다. 가장 유년 때부터 나와 함께 내향 활동 취미를 공유했던 친구. 돌려 말해 돌을 던지는 그 인격은 곧 내면 활동을 하던 나다. 


 한편으로는 보석 꿈이 나에게 어떤 경고를 주는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보석을 너무 쉽게 취한다. 또 취하려는 마음이 그저 반짝거리고 비싸 보이기 때문에, 마치 홀린듯이 이끌리는 마음 같다. 그리고 그걸 대하는 태도도. 내가 꿈에서 보석 4종류를 각 2개씩, 총 8개를 취한 건 사실대로 보면 그저 4개가 분화된 8개의 보석을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꿈 속에서 나의 인격적 태도는 존나 욕심 그득한 파밍 욕구 같았다. 여기서 말하는 욕심은 '저장 욕구'다. 뭐든지 눈에 보이면 '일단 줍고' 보는 게이머 스타일처럼, 나에게는 그런 강박증이 있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보석을 취하긴 했어도 써먹질 못하고, 또 써먹을 깜냥도 되지 않음에도 일단 취한다. 그러니까 감당할 수 있는 상태, 지금 내가 그걸 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에도 '선취'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석을 발견해도 그 다음이 없고 다시 구석에 저장해 둔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추듯. 나의 인격 모양새가 딱 그 정도 느낌이다.


 또 '사회적 인격'과 '내적 자아' 간 불화도 느껴진다. 예전 다른 꿈들에서도 그렇지만, 내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함과 더불어 나의 내적 자아의 발달도 진행되지 못하고 여전히 퇴행 상태에 머물러 있다. 꿈에서 보석을 발견했으면 예비군이고 나발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무언가 하지 못하고 늘 내 마음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조건을 우선시한다. 그러니까 늘 쫓기고, 뒤따라가야 하고, 그래서 뒷전으로 미룬다. 처음으로 꿨던 아니마도 그랬다. 아니마는 나에게 푸른 나비를 줬는데, 나는 그녀를 뒷전으로 하고 그 여정을 되돌아갔다. 내가 이토록 기나긴 방황을 하는 게 대체 이유가 뭘까, 계속 곱씹어도 잘 알아내기 힘들었다. 아까 꿈에서 깨고 꿈을 곱씹으면서 하나 알게 된 건, 다시금 내가 '내면 활동'을 잃었다는 데 방황의 정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꿈에서 다시 예비군 훈련장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반대로 노선을 타는 것. 서둘러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 이런 장면은 나에게 몹시 익숙하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내가 어느새부터 '노트'를 포기하게 되었는지, 마음이 가지 않게 되었는지도. 


 계속 융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삿된 마음이 생기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서둘러 내면의 통합을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급함이 일렁인다. 그 조급함을 야기하는 이면에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나는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그럴수록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준다. 이 우회에 대해, 나는 얼마나 깊게 알고 있을까. 참... 견뎌내기 힘든 무게다. 현실은, 그 누구도 내가 수행해야 하는 길에 대해 조력해주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력은 순풍이다. 현실과 사람들은 늘 나에게 역풍 같다. 응원과 기다림, 있는 그대로 두는 건 일종의 무풍이다. 나의 내밀한 인격은 역풍을 맞는 것처럼 늘 부하와 저항을 느끼고 있다. 사회를 거스를려고 하는 것만 같다.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를 거스를려고 하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한다'에 끼워 맞춰져야 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계속 나에게 말해줬던 거 같다. '넌 해야 할 일이 있어'라고. 그건 현실 사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돈 버는 일, 사회적 역할을 취하는 일,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일과 무관한 일이다. 실지로 결과값이나 드러나는 일이 그렇지 않더라도, 나의 마음 가짐은 그렇게 무관해야 한다는 의미다. 돌려 말해 '현실적인 목적'으로 내면 작업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의식은 말하는 거 같다.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바로 '내적 의미', 그 기반이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할 수 있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려내 본다. 나는 이미 무의식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이다. 돌이킬 수도 없고, 또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그간 했던 무수한 선택지에서 내가 항상 우선시했던 건 '나의 무의식'이었다. 나는 늘 무의식을 위해 움직였다. 나는 사회적 현실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거기에 나를 인격화하려고, 페르소나를 훌륭히 장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의미없는 노력에 엄청난 두려움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일관할 수 있다면, 두려워서 하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려움을 느끼는 내밀한 인격이 여전히 발달을 하지 못하고 내 안에 숨어 있다. 내가 아무리 겉으로 그 인격을 '발달된 것처럼' 내보여도, 내 안에서 여전히 퇴행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이제야 알아볼 수 있게 된 거 같다. 나를 아는 그 누구도 내가 유치하고 유아적인 인격이라고 말하지 않음에도, 또 내가 그런 인격이 스스로 아니라고 자부하면서 산다 하더라도 분명 내 안에는 유치하고 유아적인 인격이 있다. 내가 이 인격을 얼마나 외면하고 있기에, 거기에 맞물린 강력한 콤플렉스가 실제 삶을 강타했는지 알지 않은가.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의 직관은... 이 퇴행에 머물러 있는 인격을 그대로 두라고 말한다. 나는 이 인격을 끌어안고 통합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방법?...


 실제로 내가 방치하고 외면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그려진다. 돌려 말하면, 나는 나의 내밀한 인격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방법이지 않을까? 무의식과 시간의 상관관계를 알지 않나. 분명 여기에서도 동일한 효과가 있을 것만 같다. 이번에 꿨던 꿈을 통해 내가 도달한 인식은, 바로 두려움을 느끼는 나, 여전히 나 자신을 발달시키지 못하는 나약한 나다. 이런 나를 발달시킬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여러 리비도의 퇴행적 정체 증세와도 연관지어 설명이 되고, 또 특정 행위들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점차 '집단 무의식'에 전염되어 타락해 버린 상태도 설명이 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선택했던 여러 요인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좀 더 집중력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지금의 나는, 자발적으로 선택해 온 것이다. 이 자발성은 결국 내가 더욱 확장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가 정체와 퇴행, 엄청난 결핍과 공허, 권태라니. 지금 나는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안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현 사태를 정확히 묘사해낼 수 없다. 하지만...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직관은 말해준다. 내가 지금 겪는 방황은, 일부러 황무지에 도착하려고 했던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고. 즉 이끌림을 통해 도착한 황무지에서 나는 다시금 나의 인격을 재건해야 한다고.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고. 만약 이전에 안주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화학 물질을 통해 '개성화 과정'을 거쳤다면, 나는 결국 21세기 버전으로 비인간을 통해 개성화 작업에 시동을 건 셈이다. 반대로 나는 심리는 심리요, 물질은 물질이라는 걸 안다. 그랬기 때문에 취약한 걸 알면서도 물질에 모든 걸 뺏기고 말았다. 지금 겪는 나의 상태는, 결국 혼자 극복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수행자의 상태임을 말해준다. 그저 단순히 심리적인 측면에서 수행하는 '자기화'가 아닌, 비인간의 지평 위에서 수행하는 자기화다.


 이에 대한 호전 중 하나는 2일 전 꿨던 '게임' 꿈이다. 꿈에서 나는 게임적 요소가 어째서 내 또래 남자애들을 홀렸는지, 그 집단 무의식 속 원형과의 상관관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인간 무의식의 어떤 부분과 연결되는지, 비로소 그 보이지 않는 실을 무의식은 인식으로 보여줬다. 내가 만약 비인간의 지평 위에서 우리네 인간이 정동과 정서를 구축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면, 애초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믿었다. 우리 인간은 21세기 '대도시' 안에서 결국 '인간'을 재구축하는 데 성공할 거라고. 그 가없는 여정이 얼마나 기나긴지, 알 수 없었기에 이토록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던 게 아닐까.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시킨 그 '상징 세계'를 고작 나 따위가 몇 천 시간으로? 말도 안 된다. 오만해도 이렇게 오만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끌림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신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고작 한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나는 수행해내고 또 꺼내놔야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다. 현대 사회에 살면서도 인간이 평온에 다다를 수 있다는 걸 거들어야 한다. 이런 막대한 직관에 이끌렸기 때문에 방황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내면 활동을 포기하고 주변에 놓인 각종 도파민 자극제(스크린, 미디어, 소비, 게임적 요소, 세계관 등 소위 문화자본의 외향화 대상들)에 나를 내맡겨야 한다고. 나는 이 선택을 양가적으로 포용해야 하는 숙제에 도달했다. 통합을 해낼 수 있을까?... 상반된 두 요소가 있는 그대로 하나의 용기에 담길 수 있을까? 내가 그 용기가 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도덕경과 장자를 너무 일찍 읽은 게 독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나의 직관은 너무... 날 소외시킨다. 맨날 지 혼자 존나 앞달려가서 날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사라진다. 좀 같이 가주지.






내면 인격을 만나기 위해 간만에 노트에 글을 쓰다 적극적 명상을 했다.


적극적 명상


손으로 글을 쓰면서 진행했다. 두려움을 느끼는 어린 내가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다. 떠는 게 느껴진다. 나는 나를 마주보고 앉아 가만히 있는다. 나를 비워낸다. 그래서 어린 내가 떨고 있는 그 두려움이 공명할 수 있게. 갑자기 추위와 바람이 불어 떨리는 잎이 자연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걸 보면서 공명된 두려움이 어떤 건지 알아보게 된다. 몸의 반응. 세상도 떨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인간적인 감정은 아니다. 그렇게 나를 비우자, 어린 내 안에 뜨거운 불씨가 있다는 게 보인다. 웅크린 몸 안에 빨갛고 노랗고 하얀 불이 하나 있다. 그 안에서 활활 타고 있다. 이게 두려움이구나, 나는 느낀다. 그러자 어린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나는 웃는다. 어린 나는 표정이 없다. 나는 기다린다. 그러자 어린 나는 점점 붉은 색으로 변한다. 불상. 빨간 아이. 붉은 피부. 눈이 마주치고 일어선다. 나는 웃어 보인다.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다. 타닥타닥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눈을 감는다. 그러자 빛이 나기 시작한다. 두 팔을 벌려 살짝 올리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어 올린다. 몸에서 빛이 점점 강하게 난다. 살짝 부유한다. 그러다가 빛이 몸에서 빠져나와 머리 위로 떠오른다. 그 빛은 위로 점점 사라진다. 힘이 빠진 것처럼 다시 내려온다. 어린 나는 이제 초록색이 된다. 나를 보고 웃어준다. 나도 웃는다. 생기가 돋는다. 주변에서 풀이 자라난다. 나는 손으로 풀을 쓸어본다. 바람의 감촉을 느껴본다.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풀에서 옆으로 드러눕는다. 팔을 베고 잠에 들려고 한다. 나는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 나도 눈을 감고, 바람과 풀 소리를 듣는다. 사- 하는 소리. 눈을 떠 보니 초록색 아이는 없다. 잠시 혼자 남겨진다. 편안하면서도 혼자인, 세상에 둘러 싸이면서도 이 소외가 무척 편안한 기분이다. 이대로 순간이 영원인 것 같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기분이 든다. 일어나 옷을 턴다. 앞을 보니 주변은 어두컴컴하지만 바닥에 풀이 자라나 있다. 걸어본다. 풀이 밟힌다. 그러다 서서히 하얀 눈이 나타난다. 앞을 보니 한겨울 눈으로 뒤덮인 공간이 나타난다. 앞에 육각형의 결정체가 둥둥 떠 있다. 만져본다. 깨질 것만 같다. 투명한 유리.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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