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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Dec 13. 2023

무의식

내면 작업 4

23.12.13



적극적 명상(?)


자기 전 적극적 명상에 임한다. 이번에는 두어 번 꿈에서 나왔던 하얀 대리석 성으로 가려고 한다. 준비 작업으로 나체가 된 나를 떠올리며 하얀 공간으로 간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뭐가 있는지, '누구 없어?'라고 말도 걸어 본다. 조금 있다가 앞에 거대한 탑이 하나 나타난다. 그 위에는 동상이 새겨져 있다. 한 남자가 두 손을 바닥에 내린 채 엉거주춤한 동상이다. 왜인지 새 한 마리가 동상의 왼쪽 위에 덩달아 굳어 있다. 나는 시선을 내려 입구를 본다. 탑의 입구에서 갈색 거죽을 걸친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있고, 거죽을 망토처럼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왠지 털이 삐져나온 거 같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오른손은 짐승의 손같다. 나는 그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지팡이로 나의 뒤를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그때 빨간 용이 나타난다. 왠지 뜨겁다. 화기가 피부에 느껴지는지 감각해 본다. 나는 용에게 다가간다. 용은 무척 거대하다. 나는 용에게 말을 걸다가 의인화를 부탁한다. 빨간 용은 작아지다가 어떤 형체가 된다(까먹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가라고 손으로 가리킨다. 왼쪽으로 가 보니 이번에는 진한 녹색의, 푸르른 초원이자 밀림이 나타난다. 거기서 나는 평온함을 느끼며 실제로 심호흡을 한다. 그때 수풀 뒤에서 검은 표범 한 마리가 나타난다. 나는 그 표범이 나의 강력한 콤플렉스와 같다는 걸 느낀다. 그 표범은 실제 나의 콤플렉스를 건드렸던 사람으로 변하고, 이내 나를 공격한다. 나는 내 팔을 내어준다. 내 팔을 물어뜯은 표범은 그제서야 말을 한다. 우리는 대화를 하고, 화해를 한다(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나는 다시 탑으로 돌아간다. 갈색 거죽을 걸친 그는 나를 들여보내준다. 나는 나선형 계단을 계속 올라간다. (왜인지 빨간 용이 형체화된 작은 동물로, 나와 같이 이동했던 거 같은데 가물가물하다) 정상에 오르니 보라색 방석 위에 구슬 하나가 있다. 점성술 구슬같이 영롱하고 크다. 곁에 있던 작은 동물이 그 구슬을 먹는다. 자기가 용이기 때문에 먹고, 나는 그런가보다 가만히 있는다. 보라색 방석을 무끄럼히 보다가 빨간 용과 합체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용과 합체한다. 그러자 삼켰던 구슬이 느껴지고, 검은 공간 안에 마치 오로라처럼 영롱한 빛이 흐르는 구슬을 들여다보다 이내 빛의 흐름이 물의 흐름으로 변하며 물이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구슬은 갑자기 우물이 된다. 우물 위로 물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나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밑바닥에 있는 황금 열쇠 하나를 발견한다. 잠수를 해 황금 열쇠 하나를 갖고 올라온다. 물이 넘치는 이 공간을 벗어나려면 황금 열쇠 4개를 찾아 각기 다른 구멍에 꽂아야 한다는 걸 직감한다. 열쇠 하나를 꽂는다. 다른 하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서둘러 2개째를 꽂는다. 나머지 2개는 나의 주머니에 있었다. 모든 열쇠를 다 꽂았더니, 공간 가득 물이 찬다. 그러자 어떤 인어 형체를 한 알록달록한 비늘을 갖춘 형체가 나타난다. 나는 이번에도 의인화를 부탁한다. 그러자 그 인어 괴물은 점점 사람이 되더니 약간 고양이 상인 여자가 된다. 나는 단번에 그녀가 아니마라는 걸 알고 달려가 안긴다. 아니마는 나를 안아준다. 이후 어떤 전개가 있었던 거 같은데, 까무룩 잠들었던 거 같다.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이라 일찍 일어났다. 전날 했던 적극적 명상은 왜인지 '완전히 체험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뭐랄까... 융 책을 읽으면서 봤던 여러 상징이 너무 차례차례 나타나준 느낌이 들어서 의심이 일렁였다. 이게 정말 나의 무의식일까? 그래도 일단은, 계속 하는 게 맞다는 걸 믿었다. 출근길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서서히 차가 막혔다. 그때부터 나는 운전을 하면서 무의식 세계로 갔다. 어제 책을 보면서 운전을 무의식에게 맡기고 자기 의식은 무의식으로 떠난 이야기를 봤는데, 나도 그러고 있었다. 체증 속에서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나는 전날밤 적극적 명상 속 이미지들을 곱씹고 있었다. 의식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분명 어제 책에서 그랬다. 한번 무의식 세계에 들어가면, 그 영향으로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만약 너무 강한 무의식의 영향을 받았을 때를 대비해 반드시 주변 사람에게 연락할 장치나, 자신이 현실이라는 걸 붙잡아줄 장치를 마련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조금 건성으로 읽었던 내용이었는데, 오늘 하루를 보내보니 알겠다. 잘은 모르겠어도, 참 강력하다.


 오전 내내 이상하게 졸렸다. 병원에서도 계속 무의식에 한 발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오후 쯤 잠깐 짬이 나 한숨 자려고 했는데,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어제 했던 적극적 명상은 왠지 반 어거지로, 그러니까 무의식적 의도로 진행된 거 같아 좀 찝찝했다. 오늘 융을 간간히 읽으며, 나의 정신적 균형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졸려 죽겠는데 적극적 명상의 기록은 빼먹지 말아야겠다는 의지로 이 글을 남긴다. 내가 나를 정말 구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제는 불현듯, 내가 정말로 원하는 관계가 곧 무의식과의 관계라는 걸 생각했다. 무의식은 인간과 다르게 정직하고, 표현할 줄 알며, 무엇보다 진실되다. 내가 노력한 만큼 맞춰줄 줄 알며, 내가 놓치거나 어리석게 굴어도 날 위해줄 줄 안다. 인간에게선 기대할 수 없는 '동반'을 무의식은 기본으로 갖고 있다. 내가 관계에 대해 너무 이상화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걸, 이번에 무의식은 알려줘야 한다.


 오늘 병원에 있는 동안 무의식이 투사된 히스테릭한 인간들이 떠올랐다. 모두 실제 겪었던 인간들이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인간의 '무의식적 언행'에 몹시 상처받고, 분개하는 사람이었다. 20대가 되어서는 그런 인간을 최대한 멀리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인간들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런 언행을 지적하면 나만 가해자가 되고 되려 손해만 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인간들을 피해 살았지만... 그런 무의식을 서비스직이나 모임, 지인이라는 상황에서 만나는 건 피해도 그런 상황일 때 자신의 무의식을 꽁꽁 감췄다가 사적 관계인 연인 관계가 되었을 때 꺼내는 인간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만나야지만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걸 정말로 믿고 싶었지만, 20대 때에는 믿기 힘들었다. 특히 내 또래 인간 중에서 정신이 멀쩡한 인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내 또래 중에 자신의 무의식과 잘 살아가는 인간을 만나본 적이 없다. 나는 여기에 콤플렉스가 있는데, 이번 무의식과 자주 만나며 균형을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 어차피 살아갈 것이라면, 자신의 무의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투사하는 인간들을 아예 안 만날 수는 없다. 그들은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기분이라는 이름으로, 뭐가 됐든 그런 무의식을 소위 '남 탓'하는 데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다. 나는 인간들의 무의식에 대한 직감과 징후에 민감하기를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추악하고 역겨운 무의식 냄새에 대한 비위를 키우는 것과 더불어, '의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다. 살면서 무의식에 맞서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펼쳐진다. 내가 균형을 맞추지 못했던 건, 무의식이 의식에 편입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어쩌지 못한다. 또 그래야 맞다. 자신의 무의식과 사이가 안 좋은 건, 내가 어떻게 할 일이 아니다. 거기서 풍겨오는 썩은 내를 내가 맡을지언정, 그 책임을 상대의 의식에 전가하기엔... 그런 게 가능했으면 세상은 지금 모습이 아니었겠지. 우리가 이렇지 않았겠지. 


 현실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진다. 오늘은 적극적 명상은 거르고 무의식이 건네주는 것만 받다 잠에 들어야겠다. 그리고 한번씩 드는 생각이지만... 엄마랑 나는 정말 안맞는 거 같다. 돌려 말하면, 엄마라는 사람과 자식으로서 관계를 맺는 데 너무 불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딱히 사건은 없었지만, 엄마와 있으면 나는 안그래도 척박한 가슴에 가뭄나는 것처럼 쩍쩍 벌어진다. 그걸 견디는 게 지금 내 몫이다. 엄마 같은 유형의 사람과 평생 살라고 하면 살기는 하겠다만, 내 삶은 얼마나 황폐해질까 생각하곤 한다. 엄마는 어떤 관계에선 좀 더 좋은 관계를 가져갈 수는 있겠지만, 내가 자식인 이상 엄마와 맺는 관계는 늘 내 피만 말라간다. 당연히 엄마는 아무 관심도 없다. 이럴 땐 엄마가 어쩌다 나에게 이런 사람이 됐을까를 곱씹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적체된 시간 뒤로 굳어진 뭔가가 손에 닿을듯 말듯 간지럽다. 만약 내가 무의식 작업을 통해 점차 고도해진다면, 엄마의 무의식을 인식할 날이 올까? 그러면 이 황폐화가 조금은 진정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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