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7
23.12.24
꿈
며칠간 반복적인 꿈과 강력한 꿈을 하나 꿨다. 이 꿈 속에서 나는 현실의 내가 할법한 판단과 행위를 보여준다. 특히 강력한 꿈은 또 다시 나로 하여금 '말 없는, 견딜 수 없는 감정 상태'를 보여준다. 나는 찢어질 듯한 가슴 고통과 비참함, 절망을 느낀다. 꿈 속에서 나는 핸드폰 연락처를 뒤적거리다 누군가에게 잘못 전화를 건다. '재연'이다. 꿈 속에서 이는 고등학교 친구다. 이 친구와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나의 행동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당황했으나 행동하는, 정확히 무의식적인 모습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와 같이 있었고, 그 친구가 전화에 끼어들어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같은 느낌을 막 건넸다. '재연'이라는 친구가 전화를 다시 받고, 대화를 하다가 나는 문득 내가 이 친구에게 '보험을 파는 것 같이 보일까 봐' 하는 걱정을 느낀다. 이후에 꿈에서 깬다.
적극적 명상
나는 며칠 전 무의식의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이전에는 컴컴한 공간에서 추락하는 느낌으로 무의식 세계에 들어갔다면, 이제는 끈적거리는 액체 속에 담겨져 있는 어떤 늪 같은 공간이다. 그 안에서 나는 나체로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액체를 느낀다. 컴컴한 공간. 온몸을 휘감고 있으면서도 부드럽다. 축축한 공간. 이 공간은 분홍빛 동굴로 변한다. 나는 이 공간이 질 내부라는 걸 느낀다. 살갗의 피부 표면 위로 물이 맺혀 바닥으로 떨어진다. 끈적거리는 액체. 나는 동굴 같은 이 공간 앞으로 나아간다. 점점 좁아진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밀착된 축축한 살갗을 느낀다. 몸을 움직여보려고 한다. 휘감고 있는 느낌. 나는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뺀다. 그러다 서서히 동화되는 게 느껴진다. 하얀 몸의 여자다. 눈을 감고 있지만, 뱀의 눈을 갖고 있다는 걸 느낀다. 단발 머리를 하고 있다. 나와 여자는 한 몸이다. 차분히 누워 있다. 눈을 뜬다. 노란 뱀의 눈이 반짝인다. 여자와 나는 하나다. 손가락을 확인한다. 움직여 본다. 그리곤 자궁 위로 두 손을 모아 올린 뒤 다시 눈을 감는다. 질 안에 태아처럼 담긴 내가 있다. 손으로 피부를 눌러보기도, 몸을 뒤척여보기도 한다. 왠지 빠져나올 것만 같다. 하얗게 표백되는 느낌으로 빠져나와진다. 온몸에 끈적거리는 액체를 뒤집어쓰고 있다. 바깥 온 세상이 하얗다. 질 입구에 기대어 앞의 풍경을 본다. 세상에 나온 기분이 든다.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진다. 끈적해진 몸으로 나는 눈을 감고, 척박한 나의 땅으로 온다. 습기가 나의 몸에 가득하다. 나는 그대로 땅을 안는다. 축축한 액체가 척박한 흙과 만나 축축해지는 걸 느낀다. 나는 흙에 얼굴을 파묻고 점차 땅과 하나가 된다. 스며들듯, 땅은 나를 잠식한다. 시간이 흘러 나는 검게 식는다. 내 밑에는 구더기 같은 벌레들이 나의 시체를 먹이 삼아 꼼지락거린다. 땅에 숨결이 생긴다. 나는 죽은 것처럼 있으나, 혼으로 느낀다. 무엇인가 움틀 것만 같다. 서서히, 식물이... 초록이, 생명이 돋아난다. 피부를 뚫고서, 내 몸을 감싸듯.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한복판에서 생명이 돋아난다. 나를 양분삼아야지만 자라날 수 있는 생명. 나는 그런 풍경을 지켜본다. 초록은 시체가 있는 곳 밖으로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다. 변화. 하나. 위에서 아래를 지켜보던 나는 가뭄을 맞은 땅의 쩍쩍 벌어진 틈새 사이로 하얀 물질이 서로 거미줄처럼 얽힌 걸 발견한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끈적하게 뭉칠 거 같다. 황무지의 모든 땅이, 그렇게 서서히 하얀 물질로 뭉쳐질 것만 같다. 이윽고, 이 땅은 숨결을 품은 땅으로 변한다. 진한 고동색. 하얀 이물질. 들썩거리는 느낌. 무수히 작은 생명의 활발함이 땅 안에 구축되고 있다. 한 켠에서 물이 고여온다. 웅덩이가 된다. 이윽고 싹이, 웅덩이 주변에서 돋는다. 자라나는 줄기와 잎, 태양의 타들어가는 열기. 그러나 노랗고 음습하고 어두운 하늘. 붉은 갈색. 나는 이제 하얗게 되어 있다. 물도 탁하고 검다. 이 어둠 속에서 어떤 편안함이 느껴진다. 어떤 징조. 검은 어둠의 황혼의 창조. 곳곳에 웅덩이가 생기고, 이번엔 노란 풀이, 갈색 풀이 곳곳에, 부분들로 틔워온다. 나는 한 마리 이리가 된다. 땅의 냄새를 맡고, 네 발로 거닌다. 이 고요한, 그러나 무언가 벌어지고 있는 신비한 고독. 습하고 탁한 냄새가 난다. 이 정적을 향해 나는 늑대처럼 울어 본다. 온 세상에 이 울부짖음이 퍼진다. 나는 검은 물 웅덩이로 가서 그 물을 마신다. 수은 같은 느낌이 떠오른다. 금속성의 맛. 은색 물질.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털이 빠진다. 사람 형체가 되는 거 같다. 아담이 떠오른다. 힘이 느껴진다. 웅덩이에서 기포가 솟아오른다. 거품. 붉은 색 물. 피의 웅덩이. 그 안에서 살갗의 웅크린 덩어리가 떠오른다. 살덩이. 나는 그걸 건져낸다. 차가우면서도, 조금의 온기가 느껴진다. 머리카락이 없다. 태아다. 눈을 뜬다. 푸른 눈. 카랑카랑한 울음 소리를 낸다. 귀를 때리듯, 우렁찬 감정. 세상을 찢어내듯. 나는 이 울음이 개벽의 울음같다고 느낀다. 그 안에서, 이 정적을 몰아내는, 그러나 감싸듯 서로 어울리는 공명을 느낀다. 세상이 변했다. 눈을 부릅뜬 그 아이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살집이 있다. 이윽고 앉는다. '안녕?' 서로 눈을 본다. 왠지 웃을 것 같다. 나는 같이 이동하자고 손을 내민다. 그 애는 내 손을 잡는다. 같이 숨 쉬는 땅을 걸어다닌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습하다. 우리는 둘이다.
내면 작업은 현실 문제를 푸는 것처럼 친절하지도, 또 단순하지도 않은 거 같다. 실제 나의 의식은 이런 '문제'를 하나씩 다루고 싶지만, 나의 무의식은 그런 순차성 따위 이성의 오만함이 아니냐는 느낌으로 아랑곳않는다.
며칠 전 콤플렉스의 매듭을 느슨하게 푼 이후, 나에게 2번의 실전 시험이 주어졌다. 하나는 안경을 맞추러 안경점에 갔다가 지하 주차장에서 봤던 모습이다. 한 엄마가 남자 애와 걸어오고 있었는데, 엄마는 남자 애를 거칠게 내동댕이친다. 애는 격앙되어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며 뭐라고 한다. 엄마의 태도는(나는 차 안에서 이를 지켜보았으므로 구체적인 워딩은 듣지 못했다) 명백히 애를 '버리겠다'는 태도다. 주차된 차로 내달리기 위해 애를 확 밀치고는 자기 혼자 차에 탄다. 그리고는 거칠게 액셀을 밟는다. 남자 애가 치일 뻔한다. 어린 애는 엄마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운전석 문을 연다. 문이 순간 열리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엄마는 애를 거칠게 밀어낸다. 그러자 애는 달려들며 바로 뒤 좌석 문을 연다. 그 순간 차는 이미 또 액셀을 거칠게 밟으며 이미 몇 미터를 간다. 다시 급브레이크. 애는 이미 차 뒤로 뒤쳐져 있다. 엄마는 황급히 내려 뒤 좌석 문을 제대로 닫고, 운전석에 앉아 문을 쾅 닫고 또 거친 액셀을 밟으며 가버린다. 애는 울며불며 엄마를 따라간다.
나는 이 광경을 차 안에서 지켜보며 가장 먼저 '시발'이라는 말을 했다. 내 안의 분노. 나의 이성은 '애한테 저런 트라우마를 심어서 뭐하려고 저딴 짓거리를 하나'다. 내 안의 감정은 이미 이 사악함에 사로잡혀 온갖 욕설을 퍼부어도 모자를 정도가 된다. 내가 여자에게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면모가 바로 이런 면모다. 공격적인 감정 기복.
나의 인격은, 인간의 이런 면모를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저년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다. 저런 년이랑 도대체 누가 결혼을 했단 말인가. 나의 사로잡힘은 이렇게 순간적으로 가속화되어 외부에서 나타난 이런 부정적인 면모를 철저히 지우려고 발악한다. 이런 면모를 가진 인간을 결코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는, 이런 인간과 절대로, 결단코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장면을 목격할 당시의 나는 며칠 전 콤플렉스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었으므로,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걸 곧장 알아본다. 그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에는 이미 사로잡힘 상태였고, 그렇게 그 모자가 떠나고 차에 앉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시동을 거는 순간 알아차린다. '아 나의 사로잡힘은 여전히 변함이 없구나' 하고. 집으로 오는 동안 곱씹어 보았지만, 어떻게 '그런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에 사로잡힘 이상의 극복된 상태의 내가 될 수 있을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그런 모습을 보면 단번에 사로잡히고 만다. 공격적인 감정 기복은 나에게 너무나 취약하다.
이 일이 있고 2일 뒤, 강력한 꿈을 꾼다. 꿈에서 나는 여자친구가 양다리를 치는 걸 겪는다. 그러나 여자친구의 두 번째 남자에게는 아무런 거부감 없는 '포용'의 상태다. 우리는 셋이 한 자리에 있었다. 나는 결국 참았던 감정을 분출하며, 여자친구에게 너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묵묵부답이다.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에 엄청난 상처를 받고, 이후 일련의 감정과 앞서 서술한 일을 겪는다.
이 꿈은 내가 현실에서 겪은 실제 체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꿈속에서 나의 태도도 어긋난 게 전혀 없다. 지금의 나는 무의식적 인격과 실제 인격 간 괴리가 거의 없다고 느끼는데, 이런 괴리 없음은 20대 때부터 작업을 부지런히 해 온 결과다. 중요한 건, 내가 여전히 '말 없는=감정에 대한 무책임' 앞에 너무나 무력하게 절망을 느낀다는 것이다. 당연히 꿈에서 나타난 여자친구는 나의 아니마다. 아니마는 나에게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나는 아니마에게 여전히 의식적인 태도를 요구했고 이에 상처를 받았다. 나는 이 부분을 의식화해야 한다고 느낀다.
꿈이 무의식의 적극적 표현이라면, 여자친구와의 3자 관계는 곧 내가 상반된 것들을 통합해야 하는 과제의 단편을 의미한다. 내가 포용할 수 있는 아니마의 또 다른 남자는 곧 내가 포용하고 있는 또 다른 나다. 하지만 나는 1:1의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 나의 밖에 있는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꿈의 이런 면모에 대한 투사를 거둬들이지 않고, 실제로 현실에 대입하는 순간 '폴리 아모리' 인간으로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무의식이 꿈을 통해 보여준 면모를 현실과 1:1 대응시키는 건 인식의 나약함에 불과하다.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의 무의식과 얼마나 불화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현실은 윤리와 도덕에 강한 권유를 받고 있다. 무의식은 구별-질서를 넘나드는 통합을 권유한다. 이 둘을 혼동하고 또 자기 투사로부터 기만당하면 어떻게 모양나는지 이미 수많은 인간들이 자기 삶으로 보여준 바 있다. 성 해방이라는 이름 하에 펼쳐진 여러 운동이나, 히피 문화, 각종 인간들이 '정체성'을 빌미로 어떤 해방과 자유를 위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모듈화하는 안쓰러운 노력이 그렇다. 이는 결국 '실제'라는 제약과 제한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한계, 그것은 무의식 앞에서 잠식당하거나 억지로 이겨먹으려는 선택지에 갇힌다는 한계다.
나는 꿈에서 펼쳐진 3자 관계가, 또 '말 없음'의 감정 콤플렉스가 나로 하여금 무엇에 직면하도록 이끄는지를 더듬거린다. 그것은 여전히 내가 이성화된 의식의 태도로 점철된 인격 상태로부터 세상을 포용하려는 태도의 경고다. 앞서 자기 자식을 유기하려는 엄마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공격적인 감정 기복은 '의식'의 입장에서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죄악이자 사탄이다. 이성은 이런 면모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고, 또 용납할 수도 없다. 그 안에는 사실, '이성'이라는 열등감을 자극하는 어떤 무의식의 강력한 힘이 내포되어 있는데 말이다.
내가 여전히 실제 현실에서 그런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사로잡히고 만다'는 건, 진실된 의미로 이 상반성을 깨우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진실로 내가 안다면, 그렇게 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반만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분은 여전히 이성적 영역에 대부분 할당되어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계는, 이런 면모 앞에서 나의 이성적 인격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이 그런 감정적 힘을 마주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나는 실지로 나의 감정을 열등한 상태로만 머물게 하는 삶을 산 게 아니다. 나는 사실, 감정으로 이런 면모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느낀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엄마의 공격성으로 나는 들어갈 수 있다. 남자 아이의 절망적 몸부림에도. 나는 비애를 느낀다. 그 감정적 에너지에 나를 넣을 수 있음에도, 내가 어떻게 보면 계속 그런 '공감'을 거부하는 건 그만큼 감당하는 데 과도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나의 두려움, 그러니까 내 안에 활활 타오르는 '불'은 사실 이걸 알려주고 있다. 나는 공감할 수 있는데도, 의식적으로 이를 거부하려 든다. 내가 타들어가는 느낌에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앞서 적극적 명상의 내용은 명백히 '신화적 모티프'를 따라 진전되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안전하게' 나의 온갖 기능들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이미지들로 전개되고, 또 개의치 않는다. 현재 나의 적극적 명상이 꾸준히 신화적 모티프로 구성되고 있다는 건, 나의 현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의 나는 신화 속에서 무언가 충분히 이끌어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내밀한 나의 감정 안에서 아이를 매몰차게 유기하려는 엄마의 심정을... 나는 느낀다. 얼마나 괴로울지, 그 몸부림의 오갈데없는 처절함이. 서로가 서로를 향하고 있으나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대한 힘이. 이런 일련의 '순차'는 나로 하여금 내가 이성 기능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되, 여기서 한계를 느끼면 다음 기능으로 이에 응하는 태도를 암시하고 있는 거 같다. 실제 내 체험이 그랬듯.
현실 입장에서 이런 무의식적 영향 관계를 포괄하려면, 나는 꽤 신중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현실은 결코 무의식의 현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무의식이 현실과 무관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또 나는, 원만하게 현실의 법칙이 아닌 무의식의 법칙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건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인격적 반응을 좀 더 섬세하게 다루는 걸 의미한다. 내가 충분히 성숙한 인격이었다면, 공격적인 감정 기복의 면모나 '말 없는' 모습 앞에서 단번에 '두려움'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게 아닌, 공명하는 두려움을 말이다. 나는 이걸 늘 뒤늦게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가장 표면으로 두르고 있는 게 '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괴롭고 상처받고 처참해진 뒤에야, 후작업을 한다. 과연 내가 이 타들어가는 사슬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을까? 적극적 명상의 신화 모티프는 나에게 말해주는 거 같다. 너의 창조력을 가리키는 에너지를 충분히 느끼라고. 나는 잔인함과 폭력을 거부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사실은 그 안에 들어가 공명함으로써 안에 갇힌 무언가를 구해줄 수 있다고 직감한다. 내가 그런 구원을 받아서는 아닌 거 같다. 그런 이끌림을 느낄 뿐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어제 밤, 새로운 인식에 가닿았다. 그건 계속 내가 붙들고 있던 '주어진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풀 수 없는 난제에 대한 것이다. 나의 노력으로 어디까지 21세기 대도시에서 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정체되고 머물러 방황한다 해도 결국 이렇게 하나씩 풀어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제 스스로를 알아봐줘도 되지 않을까. 성실히 구축했던 '자기 확신'을 자발적으로 내팽개치고 포기했던 것처럼, 이제 다시 구축해도 괜찮을 자기 근거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투사도 투사지만, 내가 나를 못알아보고 있는 것도 무척 큰 문제다. 오늘 융의 마지막 책을 마저 읽으며, '나는 도대체 이 개성화 작업을 왜 시도하고 있는가?' 되물었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다. 내가 나를 구해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