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8
24.01.01
환상 이미지
노인이자 동시에 아이인 한 사람이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고 있다. 주변에 초록 식물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현자'라는 걸 직감한다. 그는 나에게 몹시 생생하면서도 친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몇 가지 꿈
한 꿈에서 여자가 나에게 2가지 부탁을 한다. 나는 그녀가 부탁하는 2가지를 전화? 채팅?으로 듣는데, 하나는 Muspelis라는 브랜드에서 나오는 잉크 펜 리필용을 사다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깨고 나서 잊어먹는다. 난생 처음 듣는 브랜드명이라 그걸 어디서 구해와야 하나 막막한 느낌을 받는다. 머릿속으로 번거롭지만 어떤 매장에서 사오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조금 안도감을 느낀다. 이후 꿈에서 깼다.
또 다시 반복되는 꿈, 차를 타고 어딘가로 도착해야 하지만 도착하지 못한다. 옆자리에는 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를 데려다주는 꿈이었던 거 같다. 처음에는 여러 차량과 함께 이동하다가 어느덧 도로에 나만 뒤쳐진 느낌으로 주행을 한다. 달리다가 머리 위로 전깃줄이 걸리는 걸 직감하고 이를 피하려 한다(일반적인 차량이지만 이상하게 머리에 뭐가 걸릴 거 같은 순간에는 천장이 없었다). 이후 꿈에서 깨고 많은 걸 잊었다.
다른 꿈들은 기록하지 않아 잊어먹었다.
목표로 삼았던 융 읽기가 거진 끝났다. 처음 융을 읽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한 번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쓴다. 만약 누군가가 융을 읽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의도로 써보려고 한다.
13권,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융의 책 중 필요해 보이는 것만 추려 읽었다. 처음 융을 읽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의 책 목록을 전체적으로 살피며 순서를 정했었다. 처음에는 그의 자서전인 [기억, 꿈, 사상]과 [성격유형론]을 읽고, 이후에는 낯선 개념들을 차근차근 이해할 수 있도록 전집과 함께 필요한 부분을 섞어 읽었다. 13권의 융 책을 읽고서 달라진 점을 상기해 보자면, 이전과는 달리 무의식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부여한 융 읽기 커리큘럼은 다음과 같다.
1. 성격 유형 - C. G. 융
2.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 C. G. 융
3. 정신 요법의 기본 문제 - C. G. 융
4. 원형과 무의식 - C. G. 융
5. 인격과 전이 - C. G. 융 (2부 개성화까지)
6. 심리학과 연금술 - C. G. 융 (2부까지)
7. 분석 심리학 강의 - C. G. 융
8. 상징과 리비도 - C. G. 융
9. 내면작업 - 로버트 A. 존슨 (적극적 명상에 대한 대중적 서술)
10. 칼 융 분석 심리학 - C. G. 융
11. 인간과 상징 - C. G. 융 외 (융과 프란츠 챕터)
12. 융합의 신비 - C. G. 융
13. 전환시대의 문명 - C. G. 융
14. 인간과 문화 - C. G. 융
읽기에 소요된 기간은 약 3달이다. 그의 책에서 아직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건 [레드북]과 각종 신화, 연금술 상징에 대한 내용이다. 특히 융의 마지막 책이라고 하는 [융합의 신비]는 정말 읽는 데 애를 먹었다. 내재적으로 동기화가 전혀 될 리 만무한 중세 연금술사의 텍스트가 쉴새없이 인용되고, 또 융은 이를 떠먹기 좋게 해설해주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빈 껍데기에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역꾸역 읽어가며 그래도 입문자가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두도 나지 않던 과목에 이제는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된 기분이랄까. 쉽게 말하면 한 학기를 수강한 기분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정신을 배우는 행위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수록 이 행위는 더욱 값진 것이 되고, 또 그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헛되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것 중에 책 만한 것은 21세기에 아직 없다. 또 무수히 범람하는 책 중에서도 책 본연의 의의에 가장 부합되는 건 이런 읽기가 가능한 책뿐이다. 이는 책이 하찮아지고, 또 시원찮아지고, 너도나도 쉽게 이력 한 줄처럼 출간을 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과 무관하다. 특히 '종이 책'이 아무리 비천해진다 해도 그렇다. 이건 책 읽기를 어떤 신성한 행위로, 혹은 고귀한 행위로 부상하려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책이라는 매체를 어떻게 하나의 행위로 간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다. 책의 기본은 정신과의 만남이다.
이 얘기는 내가 융을 어떤 자세로 읽었는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나는 원래 융 읽기를 거부했던 사람이다. 16년도에 처음 융을 만났을 때, 그의 전집 한 권을 대뜸 사놓고 읽으려고 펼치니 머리가 새하얘져서는 안되겠다 싶어 책 더미 어딘가에 꽂아두고 한참을 잊고 살았다. 정말이지, 그의 글은 도무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원형이니 상징이니 심상이니,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지금에서야 명백히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내 안에서 그런 이미지를 부정하고 외면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쉽게 말해, 당시의 나는 융을 읽기에 너무 '의식화된' 인간이었다. 오직 의식만이, 제정신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걸 붙들고 그렇게 아등바등 몸서리치며 살았던 나도 참, 열정이 대단했다.
어쩌다 융을 읽게 되었는지는 특별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이끌림으로 성사되었다. 나는 15년도부터 일본 정신병리학자의 책을 추적하는 개인 작업을 간간이 이어오고 있는데, 마침 관련 책 한 권을 발견해 읽는 도중 융에 대한 인상을 고백하는 내용을 읽게 된다. 간략하게 추리면, '융'은 내가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한 일본 정신의학자의 입에서 '오늘날 누구든 융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일종의 추천을 접한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덧대야 할 내용은, 융은 추종되어야 할 사람이라기보다 일종의 지팡이같은 사람이라는 것. 필요하다면, 그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 독해는 2023년 2월쯤 이뤄졌고, 7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읽기가 시작되었다.
당시의 나는 꽤 오랫동안 방황에 시달리며 말그대로 인간으로서 시들어간 지 한참이 흐른 상태였다. 나의 정신 증세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겠으나, 내가 진단할 수 있는 건 다음과 같다. 실존적 무기력증, 이 상태는 어떤 일이든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다. 만약 이 상태가 우울증을 야기할 정도로 신체적이거나 '기본'적이었다면 나는 당장 정신과로 달려가 도움을 받거나 여러 요법에 몸을 던져 어떻게든 스스로를 쇄신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우울증이 어떤 상태인지 직접 체험해 보았고, 또 말끔히 나았었기에 이를 분간할 기준이 있었다. 정상이니, 기본이니 하는 정의내릴 수 없는 표현으로 일단 말하는 게 한계이지만, 정상적인 우울증은 정상적인 대인 관계만으로도 말끔히 치료된다. 약물도 필요 없고, 또 특별한 요법도 필요 없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막힌 감정이 잠깐이라도 흐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런 정상적인 '관계'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일반 사람들이 시들어져 있는 게 현대 사회이긴 하다. 나는 운이 좋아 3개월 만에 그런 정상적인 사람을 기적처럼 만나 치료되었던 것이고, 사실 그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그런 '간단한' 관계조차 맺어주지 못했다. 여하간, 이런 우울증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력증을 나는 실존적 무기력증이라고 지칭한다. 이 무기력증에 빠지면 겉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고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다소 버겁긴 해도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자살 말고는 답이 없을 정도로 무의미의 늪이 아주 치열하다.
나의 방황은 곧 이 실존적 무기력증의 악화와 함께였다. 가장 절정은 18년도였고, 결국 나는 나가 떨어져서 마치 심호흡 장치로 연명하는 식물 인간처럼 살아왔다. 문제는 이 무기력증이 '실존'이라는 참으로 좆같은 개념으로밖에 지칭할 수 없는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공감되고 설명된다는 것이다. 일반 인간들은 이를 알아봐주지도 못하고, 그래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지도 못한다. 그나마 여러 작가들이 이 차원에서 안식처가 되어주기는 해도, 그들은 그저 생판 모르는 남일 뿐이다. 이 구도에서부터 이미 더욱 악랄한 함정이 작동되는 건 덤이다. 현실 인간들로 하여금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할 때, 하필 책 속의 인간에게서 위안과 안위를 얻는다? 그의 '세계'는 분열될 수밖에 없으며, 그가 운 나쁘게도 이성적 의식과 더불어 성찰 능력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는 영락없이 그 저자를 추종하는 추종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고, 결국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저지르고 만다. 나의 방황이 더욱 치열했던 건, 이 '돌이킬 수 없음'으로부터 도망치고자 이중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책 속의 저자는 저자일 뿐이라고, 그들의 세계를 현실과 분열시키면서 동시에 실제 현실의 사람들과의 분열도 해소되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겉으로 멀쩡히 살아간다는 게 어떤 고통인지.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나는 참으로 오만하게도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미친다는 게 무엇인지 나름 편견없는 의식을 갖췄다는 자부심은 덤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자부심 때문일까? 그게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오만함. 이 오만함이 정말로 나를 지켜주기는 했다. 그렇다고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괜찮은 건 아니다. 내가 의식을 고양시키고, 확장시킨 대가로 의식적으로 어디까지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갈등을 나는 실존적 무기력증에 수반된 '견딜 수 없는 인격 상태'라고 일단 지칭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설명을 읽고서 스스로로 하여금 무언가 알아차려지는 게 있다면, 당신은 분명 융이라는 지팡이를 빌릴 자격을 갖춘 셈이다. 물론 나의 설명은 몹시 부적합한 것이기도 하니, 로널드 랭의 [분열된 자기]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괴테의 파우스트, 헤세의 데미안, 카뮈의 이방인,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오사무의 [인간 실격], 이상, 쇼펜하우어 등등 여러 작가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이런 표현상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실존의 문제는 정식화가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타인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인격적 성숙함을 어느 정도 갖췄다면, 이 개인의 문제가 누구한테는 그런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체험이기도 하지만, 본인도 그런 실존의 문제를 껴안고 있으면서 타인의 실존 문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가열찬, 지옥과도 같은 노력을 통한 값진 것인지를 나는 충분히 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삶을 남모르게 살고 있다면, 내가 받은 것처럼 나 또한 되돌려줘야만 한다. 그 고통을 알아볼 수 있는 용기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융이 말하듯이 '소수'에 해당될 뿐이다. 이 소수를 잠시 제외하고서, 융을 읽는다는 건 이런 특수한 경우에 처한 개인에게만 주어져 있지 않다. 이 내용은 융의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접하는 내용이 되겠지만, 앞서 말해줄 수 있는 건 융 읽기가 결코 즐거운 읽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융은 이에 대해 낙관론을 펼치지 않는다. 융이 말하는 현대 사회는 20세기 초중반에 해당되지만,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융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책을 썼다. 하지만 그 '진실'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결국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다다라 명상이니 요가니 '자기 돌봄'이니 슬로우 라이프니 하는 식으로 그 방향성 만큼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돌려 말해 오늘날 '영성 산업'으로 묶을 수 있는 여러 '자기 보살핌' 프로그램들이 융 때문에 만들어졌나? 하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은 이성적으로 저급할 뿐 아니라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임을 당사자도 알 것이다. 방점이 찍혀야 할 건 그런 미신적인 영향 관계로부터 어떤 의미 효과를 도출하느냐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진실로 '삶의 의미'가 느껴지느냐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오늘날 만큼 융을 받아들이는 데 여건이 좋았던 문명 사회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융이 한탄하던 현대인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변함이 없는 건, 융이 말하듯 사람들이 달가워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융의 책이라고 하는 건 결국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도모하는 책에 가깝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특정 소수에게만 국한된 읽기가 아닌 오늘날 다수의 사람에게 필요한 읽기인 것이다. 문제는 이 '자기 자신과의 화해'가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그런 상태에 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또 본인 스스로가 그런 갈등에 휘말리고 있는 것인지, 이 모든 게 개인의 판단에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본인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면 그는 융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16년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융 읽기'는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융을 진실로 가치있게 여길 수 있는 건, 융이 이런 '자연적 태도'로부터 매우 수준 높은 균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융은 약팔이들처럼 자기 방법이 먹힌다고 앞서 주장하는 그런 사기꾼이 아니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이런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불안 전략을 써먹는 사기꾼도 아니다. 과거 '현자'라 불리는 여러 수준 높은 인격체들답게 융 또한 '필요하다면 구할 것이니' 하는 태도가 정신 전반에 잘 배여 있는 것이다. 그는 문명인이면서도 '자연'이라는 태도를 문명 안으로 편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내용에 어떠한 이해나 공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저 융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내보이는 태도처럼, 융의 책도 그런 태도를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문제로 돌아오자면, 나는 융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였다. 융과 같은 인격체가 분명 있을 거라고 기다리는 상태였고, 나의 정신 상태로부터 다시금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태였다. 융이 이 둘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느끼기에 융 또한 그런 삶으로부터 가열찬 몸부림을 수행한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20대의 나였다면, 나는 융을 추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융의 인격을 존중하고 또 우러러보면서도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다. 이미 나는 너무나 많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에 더 이상 이전처럼 낭만에 찬 감동으로 그를 사랑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개인 대 개인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향수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것이지, 하는 느낌뿐이다. 살면서 누군가와 대화할 때 필요하다면 나는 가감없이 융을 얘기하고 또 추천하고 할 테지만, 그럴 때 내면의 목소리는 어떤 우려와 걱정을 내비출 것이다. 왜냐하면 융을 읽는다는 건, 또 융을 필요로 한다는 건 그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걸 의미할 테니 말이다. 융의 책은 처방전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가야 할 곳은 돈만 내면 알아서 제조해주는 약국같은 곳이 아니라 당신의 내면이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전에 치뤄본 적 없는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평소에 그것을 '빚'으로 여기지 않았던 만큼, 불이행을 일삼은 세월만큼 말이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달리 인격 발달에 온갖 자원을 끌어다 쓴 생애를 보내면서도 이정도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인류는 괴상하리만치 인격을 비교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융은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융의 사상 안에서 '인격'은 늘 개인의 고유한 것이자 유일한 것으로 나타나면서도 실제 인류 역사가 굴러가는 양상은 고도로 발달한 인격체만을 진정한 것으로 추앙하는 모순된 흐름을 보인다. 즉, 어디에서는 기독교의 '예수'나 붓다, 진정한 현자의 돌을 구축한 연금술사의 인격이 도착 지점인 것처럼 서술되지만, 이는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고행이 아니요 또 허락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즉 이 모순된 흐름이 겉으로 보기엔 꽤나 억지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숨은 몇 가지 인식 중 하나는, '자기 실현'이라고 하는 건 과정의 연속이라는 점, 더욱이 인격은 '투사되는 한'에서 비교할 수 있는 정량화가 시도된다는 점이다. 이런 함정들은 본래 개인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함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개인마다 자기 자신의 문제로 번역되어 다뤄질 수밖에 없다고는 해도, 융이 희망하듯 '심리학적 학습'은 분명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학습 자료화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내가 보기에 융이 말하는 '개성화 작업'은 분명 21세기 사회에 맞춰 재번역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13권 분량의 융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이전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던 '꿈'에 서서히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나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존재' 혹은 '이미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적극적 명상이라 불리는 내면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일련의 변화를 압축하면, 무의식이 더 이상 무엇인지 모르겠는 엉뚱한 게 아니라 분명한 존재처럼 느낄 수 있게 된, 인식의 패러다임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나는 무의식을 그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엇'에 대해서만 사용했었다. 프로이트는 정말이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발만 살짝 담궜던 라깡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구조주의와 결합해 여러 현대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의식'들도 그렇다. 나는 '무의식'에 대해서 만큼은 오직 융만이 진실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확신해서 말한다. 특히, 이성과 합리성을 즐겨 사용하는 의식화된 인격체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반면 이성을 열등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무의식에 대해 진실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지는 못하기에, 이해의 입장에서 만큼은 융 만한 사람은 없다고 여겨진다. 확실히 융을 읽고 나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에른스트 카프가 기계 기술과 인간 정신의 관계가 무의식적인 '자기 인식'이라고 주장했을 때, 이 말을 무의식에 대한 이해 없이 이해하려고 한다면 의심쩍을 수밖에 없다. 또 오늘날 시집을 내는 시인들도 그렇지만, 여전히 '자연'과 '자연물'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공감과 깊은 정서 체험을 이끌어내면서 도시 속 기계 장치들에 대해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무런 정서 체험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대인의 상태에 대해서도 그렇다. 15년도부터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왜 인간은 산업화된 도시 문명에서 비참한 삶만을 그릴 수밖에 없는가? 왜 오직 자연만이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정신의 전체성을 보장해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째서 종교에 의탁해 영적 체험을 해야만이 의미와 가치를 영위할 수 있는가? 융을 읽기 전에 이런 문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인다. 왜 사람이 자연과 깊은 교감을 나누고, 산업 문명 속 인간성 소외에 절규하면서도 정신없이 돈을 쫓으며 잘 살아가고, 종교에 빠져 그게 사이비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채 집단을 형성하고 전도를 일삼는지. 이런 모든 게 인간 '정신의 문제'라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테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속시원하게 대답해주지는 않았었다. 오늘날의 사회도 이 문제로부터 결코 여유롭지 않다. 거칠게 말해서 사실 모든 문제는 정신의 문제로 환원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문제는 막대하니까 말이다.
이전부터 희미하게 느끼기는 했지만, 글을 쓴다는 것, 시를 쓴다는 건 사실 자기 무의식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른 행위였다. 나는 불행히도, 어긋난 정신 균형을 갖췄기에 감당할 수 없는 걸 선취하려는 태도로 인해 너무 서둘러서 의식화의 욕심을 부렸다. 그래서 남들처럼 시를 쓰지 못하고, 그렇다고 단독성들의 사회인 21세기에서 '자기 자신'이 되라는 구호에 발맞춰 퍼포먼스를 취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시를 쓰려는 공간에 가면 부지불식간에 '자신만 쓸 수 있는 글'을 쓰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는 문학에서만 떠돌아다니는 유령의 불문율이 아닌 모든 예술에 있어 통용되는 유령이다. 왜냐하면 진정성 있는 '고유함'을 창조라는 이름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일한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런 유일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의식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역사가 인류 문명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예술이 뭔지 모르겠다'와 예술가가 되려는 사람이 말하는 '모르겠다'는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실지로 받아들여져서 예술가가 된 이들이 말하고 보이는 태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남들과 달리 운 좋게 자기 무의식과의 관계 맺기를 성공해 표현 도구와 결합시킬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특히 시장의 분위기, 유행, '요즘의 트렌드' 따위로 눈치껏 알 수 있는 집단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권위를 갖췄다고 해도, 그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건 불변의 진실이다. 이런 문제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문화예술 지형도일 뿐, 세상 어디에서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분별 문제는 늘 다른 걸 통해 해소하는 싸움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나 또한 이런 문제로부터 결코 여유롭지 못했고, 나의 투사를 거둬들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저, 나의 욕심에 버금가는 대가를 치뤄야했을 뿐이다. 그래도 나의 욕심을, 나는 사랑한다. 그건 나의 정신에 있어 직관으로 불리는 것이니까. 내가 늘 끌려다니고, 쫓기고, 도착해야만 하고, 당도하지 못하는 꿈의 문제를, 이제는 조금 다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내 삶 전반에 걸친 엄청난 뿌리 중 하나다. 직관이라는 목줄에 꿰여 정신없이 내달린 개같은 삶을,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참 가엾고 고생이 많았다. 목을 잡아 끄는 그 팽팽함으로부터, 적어도 최악을 선택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나에게 남은 내면 작업의 숙제는 몇 가지로 추려진다. 하나는 내면의 불을 되살리는 재생의 문제, 다른 하나는 자아를 더욱 내려놓고 비로소 무의식 존재와 대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비아非我의 문제.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