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24.12.18
*독서 트렌드에 어울리지도 않고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올라오는 글의 포멧과도 어울리지 않는 글이니 미리 양해바란다. 글을 읽는 사람들의 (정신)다양성을 충분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책과 함께 한 삶이 결코 가볍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많이'가 아니라 '필요한 한 명'을 겨냥한 글이 세상엔 있어야 하고, 나 또한 그런 독서를 하며 살았다. 다만 불가피하게 낯선 용어, 개념, 논리, 추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다룬다는 점, 각 개인의 일반 일상과 접점이 그렇게 폭넓지 않다는 점은 미리 밝힌다.
*이번 글은 그간 썼던 Wauchope-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에 대한 내용들을 종합-정리한 글이다. 개념은 필요에 따라 개인적인 어휘를 사용할 예정이지만, 가급적 원문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추후에 다룰 예정이지만, '일반 팬텀 공간' 사용자라 부를 수 있는 우리네 일반 사람들이 있고, 조현병-분열병-통합실조증으로 진단되는 (결코 적지 않은) 소수자들과 그들의 가족, 간호인에게는 '특수 팬텀 공간' 사용자라는 구분이 불가피하다. 글의 목적은 이 구분에 따른 예상 독자에게 향한다. 일반 팬텀 공간 사용자에게는 21세기에 필요한 정신의 자명성을 어떻게 자생력으로 의식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로, 일반적으로 말해 '철학의 위기'로부터 이 시대에 요청되는 '철학'을 갖추는 그 기초 체력 증진에 있다. 특수 팬텀 공간 사용자에게는 무엇보다 비정상적인 인간의 면모를 어떻게 존중하면서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데 있다. 나는 다만 소개하는 메신저 역할에 충실할 예정이므로, 전달의 차이나 오해의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가능하다면 원서를 구해 읽는 걸 추천한다. 하지만 쉽게 유통되는 상황이 아니므로, 일단 이것을 정리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고 용기를 내 본다.
**핵심 문헌은 다음과 같다.
安永浩著作集1(ファントム空間論), 安永浩, 1992, 金剛出版
ファントム空間論の発展, 安永浩, 2018, 金剛出版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Deviation into Sense, O.S.Wauchope, 1948, Faber&Faber
몇 년 전, 어느 초여름 아침에 나는 정원에 나갔다가 눈부신—매우 눈부신 빛의 화살에 눈이 찔렸다. 그것은 몇 미터 떨어진 덤불 위에 맺힌 이슬 방울이, 이웃집 지붕 너머로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눈부신 것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그것이 발광체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양 자체를 본다면 그 눈부심은 ‘면’처럼 넓게 퍼져서, 방어 자세나 대비 효과 등으로 인해, 이슬 방울의 눈부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레이저 광선도 물리적 강도는 더 강할지 모르지만, 그 직진성 때문에 아마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산란시키는 이슬 방울의 효과와는 다를 것이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태양보다 강한 원광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워쵸프의 미학 이론과 그 속에 나오는 물방울의 비유를 떠올렸다.
우리는 한 방울의 이슬 방울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때로는 우주에서 신, 즉 태양의 빛을 반사할 수 있다. 그것도 때로는 태양 자체보다 더 눈부시게…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140p
22년 3월 3일, 봄은 오고 있었다. 한때 계절에 끝은 없다며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보낸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도 봄이었다. 당시의 나는 타인들의 몰상식함과 뻔뻔함, 공격성과 폭력성으로부터 도무지 자유롭지 못해 나 자신을 밀어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으로 내몰렸다. 내가 가진 인간을 향한 공감 능력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이었는지를 절박한 심정으로 느꼈다. 나의 발치에는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것을 줍다 자상을 입는 일상이 이어졌다. 결국 '살고 싶지 않다'고 적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의심들과 정신적 동요를 낳는 불안들이 계속해서 도착하는 현실 속에서, 항상 그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계속해서, 그만. 그만. 그만. 그러니까 나는 비겁한 인간이 됐고 회피하는 인간이 됐다. 그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 절망할 때 귀를 기울이고 몸을 기울인 게 패착일까? 그들의 절실함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는 심연으로 몸을 던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자살에는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라 희망의 중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할 수 있을 때는, 희망의 중단이라는 좌절이 보다 더 큰 의지와 분노로 '삶의 의미'를 한 입에 씹어먹을 수 있을 만큼 커졌을 때다. 특히 생의 활력이 가장 절정에 다다른 청춘일 때는 더욱 그렇다. 22년 3월 3일 밤 12시, 나는 관악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나 자신을 소진시킬대로 소진시키다 우연히 만난 불상 앞 촛불에서, 사방이 어둠인 공간에 둘러싸여 제 자신을 겨누지 못하는 작은 불빛 하나에서, 자생력을 읽었다. 자신을 태워 빛을 낸다는 의미가 촛불 하나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살아 왔다. 우리는 살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마주할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고, 사회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스스로를 비참하게 느낄 때가 있다. 인간들이 하찮게 여기고 보이는 즉시 죽여버리는 바퀴벌레도 생명 있는 존재다. 아우슈비츠 참사 때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바퀴벌레로 부른 건 그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게 아닌 무참히 짓밟기 위해서였다. 나로서는 이것이 감당해야 할 현실 문제였다. 사람들에게 '다른 생명'을 함부로 여길 능력이 왜 있는가라는 현실이. 나의 공감 능력은 그런 다른 생명들을 존중해야 마땅한데, 다른 인간들은 그렇질 않다. 그들은 편파적이고 선별적이다. 자신에게 이입되거나 공감되는, 동일시되는 대상에게는 '사랑'을 느끼지만 불쾌를 유발하거나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가린 선입견으로 다른 대상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가한다. 이 모순이 한 인간에게, 그것도 집단에게서 포착될 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너무 괴로웠다.
모순은 논리의 문제다. 그러나 논리의 문제에 논리 아닌 문제가 뒤섞여 있을 때, 논리는 그 문제를 논리로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빗겨갈 것인가? 내가 20대 때부터 줄곧 추구했던 건 그 균형, 조화가 가능한지였다. 사람들의 폭력성은 사람들의 사랑과 하나다. 이 하나가 분열된 것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실은 하나였다고 알아보기 어렵다. 차라리 그 하나를 부정하며 폭력성을 문제 삼아 사랑이 뒷전으로 밀려나가는 게, 논리를 발휘하는 합리성에게 좀 더 적절했다. 시대는 합리를 미덕으로 삼고 있기에 그 누구도 안 좋게 여기지 않다는 점도 주요했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옳은 것이고, GDP 상승세는 진리인 것이 오늘날 일반 가치관이다. 물질적 풍요와 죽음으로부터의 안전이 가치가 된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이 '옳게 느껴질 때' 그에 수반되는 '옳지 않은 걸' 폭력적으로 다뤄도 된다는 일종의 허락을 느낀다. 나는 이 시대적 분위기가 괴로웠다. 옳지 않은 걸 옳다고 포장한 정신에 왜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지. 고민을 중단한 채 그저 '내맡긴(슬로터다이크)' 삶을 사는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떤 이론이나 진리, 말씀에 의존할 수 없는 기질자로, 결국 늘 나 자신을 근거삼아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이렇게나 작고 하찮은 고작 시민 1명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쩌면 정신에 짓눌려 죽음으로 걸어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한 방울의 이슬 방울 같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때로는 우주에서 신, 즉 태양의 빛을 반사할 수 있다. 그것도 때로는 태양 자체보다 더 눈부시게…'
눈부신 빛이 분노의 유리막을 부순다. 통과하는 것만으로, 그 어떤 상처도 없이 뚫고 들어와 무언가를 부순다. 그 순간이 있기에 살 수 있다. 그 우연은 사실 가장 하찮고 비천한 것에서 나타난다. 의심했던 것이다. 이 우연을 논리로 다루려고 하는 이상, 우연은 죽고 만다. Wauchope의 말을 빌리면 '시체'나 다름없다. 합리성이 과도해진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합리의 (보다 올바른) 사용법이다. 진정성이 과도해진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보다 올바른) 살아있음의 표현이다. 두 양단에 끼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생명으로서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분노"뿐이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분노가 있는지를 느낀다면, 또 사람들이 분노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느낀다면, 당신은 차라리 그 분노에 의미 부여를 하거나 맞대응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걸로 다루는 게 편할 것이다. 그리고 분노는 자본주의와 만나 상품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감정은 재화가 된다. 당신이 고민과 의심을 계속 품는다면 바깥 현실이 인간을 얼마나, 소위 뼈까지 발라먹으려고 안달이 났는지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근데 그걸 '같지만 다른' 인간들이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사용하고 그 결과가 어떻든 이기적으로 다루는 횡포를 보면 인간 그 자체를 싹다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환멸감에 이른다. 하지만, 알아차려야 한다. 이 '논리의 늪'에 빠지면, 그리고 그 늪에 빠져 자신의 '생명'이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 쳇바퀴는 끝없이 굴러갈 것이다. 논리는 Wauchope의 말마따나 '양적' 인식이다. 수학의 뼈대가 우리 정신의 셀 수 있는Countable 능력에서 출발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논리의 문제는 논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의 문제는 생명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의 보다 올바른 사용법을 Wauchope는 '패턴'으로 부른다. [Deviation into Sense]는 '설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며, 우리가 이성을 사용한다고 말할 때, 합리를 사용한다고 말할 때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철학의 본분은 바로 그러한 데에 있어야 한다. 만약 논리에만 매달린다면 그 뒤에 남는 '공허함'을 아무리 가능성이나 희망으로 포장한다 한들 포장될 수 없는 텅 빈 실체로 남아 있다.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려고 할 때,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논리에만 의존한다면 그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 남는 '무(사르트르)'가 인식될 때 우리는 소위 '죽음 충동(프로이트)'에 마력을 느끼고 결국 '생명 중단'에 가담하는 게 옳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른다(사르트르의 '무' 안에 담긴 그 힘은 인간에게 '마의 공간'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잘못된 흐름이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철학은 이 현실이 어째서 '현실'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명의 본질이란, 우리가 그 설명을 논리로도 이해하고 '자기 자신'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설명'이다. 만약 논리 없이 자기 자신으로만 이해한다면 현실을 지탱하는 온갖 합리성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이 어디에 가담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자기 자신 없이 논리로만 이해한다면 현실을 구성하는 온갖 생명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채 함부로 다룰 것이다. 사랑과 폭력이 어디서 출발되는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각각의 설명을 말할 수 있다.
설명은 무엇보다 '모두가 그렇게 알 수 있다'는 실용적 가치에 부합한다. 다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는 의미만을 갖는 게 아니다. 근대 법의 인권이 모두에게 부여된 자연권이라는 '논리'가 모두의 동의를 요구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권을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는 건 별개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는 걸 유일함으로 삼을 때 이후에 펼쳐질 온갖 합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Wauchope는 말한다. 즉 추론 조작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그것을 문제시 삼는 건 중요하지 않다. 이걸 문제시 삼는다면 여러 철학자들의 맹점인 '비이성, 바보, 멍청이, 어리석은 사람, 인지 장애 진단자, 미친 인간, 비-인간, 다른 생명'에 대해 존중을 갖기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비대칭을 잘못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3비판서를 '윤리서'로 읽어야 비로소 적합한 이유, 들뢰즈의 저서를 윤리서로 읽어야 가치가 있는 이유 등도 여기에 속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제외한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들은 '이성 비판'을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잘못되었다. 윤리서로 읽는다는 건, 우리에게 '자기 자신으로 출발한다'는 기본 전제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며, 쉽게 풀면 '상대의 입장에서' 읽는다는 것이 바로 윤리의 기초다. 이 기초는 역시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서 가능한 능력이다. 이성이나 합리를 기초로 삼으면, 그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혼동하는 꼴이 된다.
자기 자신으로 출발할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건 '같지만 다른' 감각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를 지시하는 어휘는 수두룩하기에 오늘날 우리는 충분히 '자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감, 동일시, 역지사지, '입장을 헤아리다', 이해, 이입, sympathy, 측은지심 등 자신에게 '우연적으로' '때에 맞게' 연상되는 어휘로 떠올릴 수 있다. 이 능력으로부터 우리는 사랑으로, 폭력으로, 생명으로, 죽음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하나의 개념으로 창안하기보다 그러한 개념들을 의식할 수 있게 돕는 보다 본질적인 잠재력에 가깝다. 따라서 Wauchope 또한 I라는 어휘로 지시할 뿐 그것에 과도한 합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유효한지는 모르겠으나 언어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의 유행과 더불어 분위기처럼 퍼진 폐해에도 유용하다. 기표-기의-지시 대상의 굴레에 빠지면, 합리의 함정에 빠지면 지시 대상의 의미 부여를 '누가' 하는지에 대한 감각Sense 자체를 놓치기 쉽다. 즉 언어 표기는 그저 표기일 뿐이다. 다만 그것의 효용은 '설명'이다. 우리는 늘 두 갈래의 이해 자세를 염두에 두어야, Wauchope가 말하는 '패턴'이 무엇인지를 점차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아마 고도로 훈련된 이성 사용자들도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만, 논리란 전개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끈을 놓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여러 연구와 실험을 통해 밝혀진(지고 있는) '의식의 용량'과 더불어 논리 자체가 갖고 있는 '자폐성'도 연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공리라고 주장하는 Wauchope의 의견에 반론은 없는가? 내가 보기에 이것은 확실히 유용하고도 실용적이면서 '삶의 의미'에 도움이 되지만 문자 그대로 '유일함'은 아니다. 유일함은 우리가 이해할 때 도움되는 표현이지, 그것은 뒤로 밀려나가 어느 순간 의식되지 않아야 하는 기본 자세다. 이제 막 태어나 신체 사용법을 익혀 나가는 유아에게 현실적 난관은 수두룩 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는 점차 발견하고 확인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손을 쓰는 법, 다리를 쓰는 법, 각 신체 부위를 쓰는 법에 정신과의 동기화가 진행되(어 있)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기에 그 다음으로 '목적'에 따른 행위를 의식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자기 몸을 쓰는 법에 대해 '그건 유일한 게 아냐, 다른 가능성도 있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아직 표상 속에서나 가능한 사이보그나 정신 이식이 현실이 된 SF적 세계에서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변함이 없는 건,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 정신의 '동기화' 능력일 것이므로, 그것 자체에 의문을 부가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려 한다면 결국 우리는 '생명 그 자체'를 따져야 할 것이다. 그만큼 근원적이고 거스르기에 '왜 의문이나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현실 감각이 가장 희박해진 지점이 바로 '유일함'의 자리다. 그걸 가정한 뒤, 다시 현실로 내려올 때 하류의 물줄기가 어느 유일한 상류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이해'하면 다른 물줄기들의 다양성을 그때그때 이해할 수 있다 - 이것이 Wauchope가 말하는 '누구나 합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차라리 우리가 문제시 삼아야 하는 건 현실 체험과 연관이 깊은 문제, 즉 '하류'의 문제들이다. 그것에 대한 의문, 반론에 힘을 쓰는 게 좀 더 올바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근본 공리가 그 자체로 오류나 왜곡을 유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리는 '개인'으로 사는 생명이 아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개체'가 아니어야 한다.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우주 외계의 판본이 발견되어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가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나는 게 아닌 이상 공리로 삼아도 좋은 것이다. 그런 세계가 있다면, 우리의 '정신'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고 '개인-개체-생명'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완전히 상상할 수 없는 무엇이 구성된 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그때 새롭게 자세를 익혀나가게 될 것이다. 주어진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아야 한다. 표상의 상상적 활동에 한이 없는 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기에 벌어지는 일종의 만화경 효과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감각을 배우고, 눈앞의 현실, 주어진 세계에 좀 더 몸을 밀착시키기 위해 오늘날 사회가 정신에 영향을 끼친 여러 요청들을 다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류의 문제들이기에 그에 걸맞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이상으로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의 '팬텀 공간'으로 초대하기 위한 초대장이 끝났다. Wauchope의 '패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야스나가 선생은 이를 자신의 '현실'인 정신병리 임상에서 발전시켰다. 특히 조현병이라 불리는(과거 분열병, 정신분열증) 사람들에게서 각기 다른 전문의들(특히 독일쪽 정신의들)의 치료 접근-이해가 여전히 부족하며 너무나 다양한 조현병 증상들을 다 아우를 수 없다는 '합의 불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일개 시민인 나에게도 도착한 유명한 문구가 있다. '우울증의 얼굴은 하나지만 조현병의 얼굴은 그 수만큼 있다'고. 따라서 세셰이예 박사의 '상징의 실현화' 접근, 민코프스키의 '살아있는 감각', 블랑켄부르크의 '자명성의 상실', 야스퍼스의 '이해', 브로일러, 빈스방거, 제임슨, 로널드 랭 등등... 선배라 부를 수 있는 20세기 정신 전문의들의 노고 덕분에 점차 '개념'들은 포착되고 또 치료 접근도 밝혀졌지만 여전히 사례를 다 아우를 수도 없을 뿐더러 실제 임상에서 만나는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근본적 이해 결여가 해소되지 않고 있음이 야스나가 선생에게 주요한 문제였다. 그가 제시한 '팬텀 공간론'은 바로 이 근본적 이해 결여를 해소시킬 이론이다. 다만 이것은 Wauchope의 지대한 영향 하에 있고, 또 그는 탁월한 '패턴 사용자'였기에 이 이론이 단순히 '논리적 이론'은 아니라는 점이 주의 사항이다. 따라서 '이론'이라고만 부르기엔 조금 보완해야 할 어휘 의미가 많다.
서문은 이정도로 그친다. 본격적으로 다룰려면 우선 Wauchope의 [Deviation into Sense]를 깊게 다뤄야 한다. 패턴이라 부르는 '이해'가 어떤 의미인지 보다 폭넓게 의식되어야 하고, 생명, 사회, 표상-지각(시공간), 미학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이해'가 우리네 정신 활동에 얼마나 '자명'한지를 이해해야 비로소 21세기를 위한 철학의 기초가 놓인다. 다만 그것은 또 다른 작업이므로, 본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팬텀 공간'을 위한 기초로 최대한 요약한 것이다. 덧붙여 명심하면 좋을 Wauchope의 문구를 소개하며 서문을 마치고자 한다.
“…마주해야 할 때 생명-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나아가야 할 때 죽음-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 [Deviation into Sense], O.S.Wauchope, 1948, Faber&Faber, p68-69
일반 팬텀 공간 사용자, 그러니까 우리네 일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느낄 때는 생명으로 향해야 한다. 그 반대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해야 한다고 느낄 때는 죽음을 회피하는 방향을 이해해야 한다. 그 반대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회피한다는 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은 바로 이 '안전'이 과도해졌기에 가능해진 세계다. 안전은 합리의 가치이자 기본 전제다. 우리는 '리스크'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해한 것을 예측하고 피하려 한다. 이것은 '기본'이 아니라 이것이 무엇으로부터 출발되었는지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으로서 살아 있기 위해서다. 자기 자신으로 출발하고 있기에 죽음을 피하려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그 앞단을 지워버린 채 오직 '안전'만을 추구하는 걸 브레이크 삼을 수 있다. 결국 죽음 회피란 생명을 위한 '논리적 필연성'이고, 생명으로부터 출발된 죽음 회피란 비대칭적 우연일 뿐이다. 당신의 삶은 이 균형과 조화로 '일상'이 영위되고 있으나, 자칫 진정성이란 이름으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의 공허감이나 불안을 느낀다거나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해야만 하는 직업 활동에 따른 무의미함을 느낀다거나 하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의 힌트가 여기에 있다. 융은 이런 방면에서 '의미-상징'을 의식으로 다루는 하나의 처방을 제공하고는 있다. 다만 이는 역시 하류 중 하나의 옵션이므로, 당신에게 적합하다면 활용하되 모두에게 제안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레크비츠가 말하는 [단독성들의 사회]에서 특수의 사회논리라 지칭된 '정서화' 지평에서 의식을 진행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유일한 공리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그 감각에 엄청난 힘을 쏟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오해되기 쉬운 '현상'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소위 '진정성 역설', '정체성 이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 내용은 역시 지금 이 글에서 다루기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만 줄인다. 제안하건데, 21세기는 자율의 과도함을 우리 개인에게 숙제로 떠밀고 있다. 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에 면역되어야 하고(슬로터다이크), 어떤 정신의 액체화를 도모해야 하며(바우만), 무엇보다 의미의 아노미 상태에서 스스로를 영위해야 하는지에 Wauchope의 '패턴'을 제안하는 바이다. 만약 패턴이라는 '이해'가 너무 버거운 것이거나 잘 모르겠는 것이라면, 그래서 아무리 제안이라지만 받을 수 없다 해도 무관하다. 그것과 무관하게, 삶은 스스로의 출발이라는 점만은 굳게 가지길 바란다. 그것만큼은 결코 부정되어선 안 된다. 어떤 생명이든, 비인간 존재든, 타자 전체든, 이 시대의 '기후 위기'든 가장 시급한 요청과 직결되는 것이다. 작금의 현실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미'이고, 그 의미가 자연스레 떠오를 수 있는 원천의 정화다. 그 시도가 여러 방면에 걸쳐 이뤄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신으로부터 출발하라는 것, 이것이 Wauchope가 제안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