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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y for Player One 2

1. 타인의 나무가 된다는 것

by 사과와 돌멩이


24.12.19



앞선 서문은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의 '팬텀 공간론'을 다루기 전 Wauchope의 '패턴'을 소개하는 데 할당됐다. 본격적으로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론'을 개진시키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상상해 봤을 때, 그 상황을 가장 생생하게 그려보면 당장의 실천이 우선이지 아닐까 싶다. 즉 '이론'은 합리의 내용으로, 가장 뒤늦게 다뤄도 괜찮은 것이다. 무엇보다 급선무인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정신적 괴로움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현실은, 삶은, 일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일단 나는 이에 체험적 경험을 충분히 제공해드릴 수 없다는 점에 먼저 양해를 구한다. 다만 내가 아는 바로 무엇이 도움이 될지는 전달해드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은 '실천'에 대한 글, 달리 말해 일상에서 우린 어떤 인식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마치 노하우나 메뉴얼같은 행동법 따위는 아니다. 그런 것들로 우리 인간이 어떤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다급하고 여유가 없더라도 혹하는 게 더 시간 낭비다. 실천이란 기본적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그 '중심'의 감각을 지녀야 한다)





Ready for Player One



*이 글을 구상하기에 앞서 떠올랐던 이미지는 먼저 '소나무'였다. 다만 조현병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 글은 전달될 수 있으므로, 아래의 영상을 한 번 시청해보길 바란다. 영상에 출현하는 '나무 씨'의 '나무'는 나의 이미지와 우연히 겹친 것이다. '우연'이라는 걸 분명히 밝혀 둔다. 그리고 먼저 밝히지만 나는 야스나가 선생이 말한 문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 이런 글을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조현병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조금의 우려를 덧붙이자면, 동정이나 연민, '나도 언젠가 정신질환을 앓을 수 있다'는 피해 반사 의식 등으로 '질환'에 이입하는 건 무해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제해주길 바란다. 야스나가 선생의 주요한 동기 하나를 공유하자면, '조현병'이든 '정상'이든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룰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현병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고 책임을 진다.


씨리얼- 어느 날 엄마가 가짜로 보였다



1. 타인의 나무가 된다는 것



정신병리의 현장에는 임상 사례로 나타나는 '실제 사람'이 있다. 그를 만나 소위 '정신치료'의 길로 동행해주는 게 '정신과 의사'의 역할일 것이다. 내가 참조한 책들 속에서 정신병리-조현병에 대해 논하는 의사-학자들은 대체로 일본 사람들이었다(한국인의 책은 아쉽게도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쟁여두고만 있을 뿐이다). 그들 중에서도 '실천가', 그러니까 실제로 환자들을 만나 치료자로서의 동행 과정에 존경할 만한 전문가적 면모를 내비추는 이들을 내가 아는 선에서 소개하자면 '나카이 히사오中井 久夫', '야스나가 히로시安永浩' 두 명이다. 영상에서 나무 씨의 어머니가 얘기하듯 조현병을 환우 가족에게 설명할 때 정형외과적 비유를 드는 건 야스나가 선생이 자발적으로 실천하던 일종의 노하우다. 그에 대한 디테일한 내용은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92~ (여담으로 야스나가 선생의 책 중 현재 일본의 금강출판사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은 국내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게 yes24에 상품 등록 문의를 모두 해두었고, 구매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당신에게 조현병 증상이 나타났고, 주변인으로 인해 그런 '진단'이 가능해졌으며, 무엇보다 사태의 심각성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아직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야스나가 선생의 말을 소개해드린다.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말하자면, 치료를 해주는 것은 단연코 "약"이다'. 이건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약'을 먹는다는 것,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형성된 편견들에 따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주시감 등이 장애로 다가올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일반인'에게 적극적으로 권고되어야 하는 '상식'이다. 돌려 말해 우리에게 있어 '정신병에 대한 상식' 제고提高가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약을 복용해야 할 주체 입장에서 복용 행위는 영상 속 나무 씨가 실천하듯 '비타민을 먹는 것'과 비슷한 인식 자세여야 하고, 충분히 권장할 만하다. 그러나 적당한 규율은 필요하므로(비타민을 안 먹는다고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통념이므로) 그 강도는 당뇨병의 인슐린 주사나 천식 환자의 흡입기, 항암 환자의 각종 약과 유사한 수준일 것이다. 반면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정신병 약'을 먹는다는 인식은 어쩔 수 없이 무지를 정보-이해로 발달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갖고 있는 무지를 그들의 책임으로 무작정 뒤집어 씌울 수는 없겠지만(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책임 소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무지-이해는 결국 일반적인 상식 선에 두루 자리한 '설명의 자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화를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배울 수 있다. 또 배워둬서 나쁠 게 없다. 여기서부터는 나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화라 했을 때 그저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대화는 맞겠지만 배우기는 그 너머에 있다. 일단 설명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해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짚어 보자. 해당 글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당장의 요청을 고려하고 있으므로, 일단 야스나가 선생의 노하우를 따라가며 설명을 보태보고자 한다. 아마 가장 시급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당장 와닿지 않는 내용이겠지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중요한 내용이다.


첫 번째 모토를 말하자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라는 것이다. 이건 지난 강연에서도 "유연성"이라고 말했었는데, 이 말만으로는 너무 모호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고 싶은 뉘앙스를 전달하려면 여러 가지로 바꿔 말하거나 추가 설명을 해야 한다. "적절하게"란, 그 상황에 대해 가능한 한 자연스럽고 솔직하게—라는 뉘앙스가 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치료자가 약간 화를 내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 종종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약간 화를 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라는 게 아니다. 반드시 더 큰 관점에서, 그것이 상대에게도 괜찮은지? 어느 정도로 표현해야 적당한지? 상황이나 상대의 강약에 맞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건 순간적인 판단이지만, 내 경우에는 2~3초에서 몇 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 판단이 OK라면 약간 화를 표현해도 좋고(혹은 하는 게 낫다), 예를 들어 표정이나 어조가 엄격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공격을 받고 있는데 헛웃음을 짓는 건 오히려 적절하지 않고, 상대에게도 좋지 않다). "내가 조금 화가 났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적절하게"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황 전체를 큰 시각으로 판단한 후의 적절함을 의미하며, 단순히 본능적이거나 상대의 기대에 맞춰주는 그런 수준의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것을 상대가 기쁘게 느낄지, 의외로 느낄지는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이성적이고, 중용을 지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있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93


먼저 일반 상황을 가정해 보자. 우리는 언제나 늘 '타인'과 심심찮게 대화를 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대화를 할 때는 직접적으로 오고가는 '말의 내용'뿐 아니라 비언어로 지시되는 표정, 몸짓, 어투, 상대의 기분, 분위기 등 '표기'되지 않는 정보량이 상당한 게 현실이다. 이 속에서 각자는 시시각각 서로의 저의를 캐치하고 다시 보내는 가십-캐치 볼을 수행한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모든 대화 상황에 두루 깔려 있다고 할 때, 때로는 심각한 이야기가, 때로는 짜증섞인 불쾌감, 분노, 기분 상함 등 우리네 감정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진행된다. 이 부분에 있어 탁월한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 바로 정신 전문의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주하는 '타자'는 야스나가 선생의 비유대로 정형외과적 문제처럼 대상화시켜 다룰 수 없는 주체가 자신의 증상을 '(비)언어'로만 나타내기 때문이다. 팔이 부러지면 X-ray를 찍어 확인한 뒤 자연 치유되기 위해 안정을 취하면 될 일이다(때로 접합을 수술할 수도 있다). 신체 어딘가가 아프다고 해서 그것을 그 사람의 '인격'으로 확장시키지 않는 게 우리네 상식이다. 그런데 정신이 만약 문제라면, 왜 우리는 그걸 그 사람의 '인격'으로 섣불리 확장시킬까? 그것을 조심스럽게,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바짝 긴장한 채로 - 그러나 어색하지 않게! - 수행하는 게 '대화의 기술'이다.


이건 상대에게 인정받거나 알아봐지길 바라는 욕망과 무관하다. 오히려 모르는 편이 맞다. 즉, 의도하지만 의도가 전달되는 건 인위성이 아닌 자연스러움이다. 쉽게 말해 자연스러움을 의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명할 때 우리는 아무런 불쾌감도, 어긋남도, 이상함도 느끼지 않지만 상황이 '자명하지 않기에' 우리의 자연스러움이 불쾌감으로, 어긋남으로, 이상함으로 반사되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는 기예가 필요하다. 위에 말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면서도 정신병 앞에서 쉽게 경직되는(의도치 않게 침투하고 만 '편견'에 대한 두려움, 불안, 공포에 스스로 잠식되어) 일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건 전적으로 모든 타자로 확장시켜도 좋은 것이다. 더욱이 잘 알고 있다고 당연하게 깔아버린 연인, 가족, 부모에게는 더욱더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기술의 '가치'가 없어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무수히 많다. 어머니가 암에 걸려 옆에서 간병할 때 나는 그런 가족들을 쉴새없이 많이 봤다.


저기서 강조되는 건 '상대의 감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중용을 지키는' 태도다. 당신이 타자라는 주체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바로 그 '지키는 태도'에서 읽힌다. 당신이 안정적이면 상대도 그에 따라 안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타자와의 대화든 만남이든 그 어떤 '마주침'이든 모든 건 상호-작용이다. 패턴이다. 이 전개를 상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해 당사자로서 스스로가 그렇게 변해야만 한다면 결국은 해야만 할 것이고 해낼 수 있다. 이에 대한 인생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섣부른 마음은 '상대는 안 하는데 내가?'일 것이다. 그 상대가 정신병이 있든 없든, 남이든 가족이든, 그 어떤 상대여도 '무관하게(그러나 상대에 맞춰)' 자신이 먼저 할 수 있어야 하는 방향이 권장하는 자세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국은 해낼 것이고, 해낸다면 많은 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정신분열증 환자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 내 화는 최소화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과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반대가 아니고 응용이자 조정이다. 특히 병원에 수용된 환자일 경우, 그쪽이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 경우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많은 환자들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적인 일이다. 이렇게 내 말은 때로 정반대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말하는 "적절함"의 의미는 그런 식이다.

...

병원의 문을 들어설 때는 마치 "모든 걱정을 내려놓으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도 하나의 요령일 것이고,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환자를 마주할 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리고 몸의 일부에서도 전투 전 떨림 같은 것을 느낀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워밍업 과정이다. 지금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동작이지만, 이것이 전혀 없으면 오히려 나태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미야모토 무사시의 말 중에 "팽팽한 실을 너무 당기지도 않고, 느슨하게 하지도 않는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기억해두면 유용하다. 무사시는 목숨을 건 진검승부에서 마음가짐과 의식의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그 말의 무게는 상당하다. 우리의 직업이 목숨을 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 영역에서도 한 마디 말이 너무 많거나 부족해서 자살이나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진지한 싸움이기도 하다. 너무 익숙해져서 방심하거나, 나태해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경직되어서도 안 된다. 좀 더 일상적인 비유로 말하자면, 자동차 운전에서 요구되는 "평정심"과 "주의력"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94~95


야스나가 선생의 '역지사지' 능력이 돋보이는 문구가 있다. '그쪽이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적인 일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남'의 일이기에 잘 보이지 않는 '배경'이다. 또 자기 자신의 일이더라도 경황이 없어서, 판단이 안 서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도 자신이 어떠한 처지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일상만 보더라도 그런 일은 얼마나 수두룩한가. 대부분의 일반인들도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잘 모른 채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반응에 연쇄 작용처럼 반응에 대한 당황이 유발되기도 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입장의 '기본'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선입견이 되지 않기 위해선 합리가 필요하다.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가 자격을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훈련해야 할 '역전이에 대한 자성' 능력이 있다. 이 개념이 지시하는 정신의 상태를 기술하면 '자신이 지금 어떤 정신으로 타자를 인식하는가'에 대한 중심 찾기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감정 전이를 일으키든 사고 전이를 일으키든 그 상황은 그저 일련의 일상 순간이자 기억의 몸에 새겨지는 추억이 될 것이다(하지만 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남'인 사람에게, 무엇보다 난데없이 정신 내밀한 곳으로 들어가려 할 때 당신 또한 '고작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한 수양, 겸양의 자세로 야스나가 선생은 자신만의 요령과 방법을 찾아내 수행하는 것이다.


추후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론을 이해한다면 '조현병 정신'이 어떤 세계관-가치관을 가지게 되는지 이해의 단초를 세울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단순히 '일반 팬텀 공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에 그동안 조현병 증상을 둘러싸고 섣불리 '이해'를 세울 수 없었다. 만약 말 못할 짐승이라면 그저 최소한의 생리 욕구만 보충해주는 걸 일반인들은 '보살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하지만 그 말 자체가 '일반적인 언어 사용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보살필 수 있을까? 전적으로 나의 의견이자 책임이지만, 우리에게 정신병이란 게 과연 있는가? 의심을 해볼 수 있다. 오히려 '정상'이라 부르는 일반 상식의 기준을 수정한다면, 당연히 딸려오는 온갖 현실 논리(법, 규범, 가치관, 이념, 논리 등등...)도 전부 수정되어야 할 테지만, 분명 '기준'의 공통분모는 변하지 않았음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정신의 장점을 믿어도 좋다, 우리는 이걸 '가설적으로' 해낼 수 있다. 쉽게 말해 현실을 바꾸지 않아도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할 수 있다.


상대가 조현병이 있든 없든, 우리는 '타자'에 대해 '자동차 운전'하듯 자기 자신을 운전할 수 있다. 처음엔 두렵고 장롱에 면허증 넣고 쓸 일이 없을 수 있지만, 이미 당신이 태어난 순간 자격은 발급되었고, 하다 보면 익혀지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생길 것이다. 실제로 도로로 나가면 아무리 차의 형태라 할지라도 '스타일'이 보인다. 이게 우리 인간 정신의 의미 부여 능력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표현이지 않는가. 고작 '간다-멈춘다' 두 기능으로만 전개되는 고철 덩어리의 공간에서 말이다. 처음은 에너지가 많이 요구되겠지만, 숙달되면 어느새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며, 때로는 딴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운전을 하고 있듯 하게 될 것이다. 이게 숙달된 것이 자연스러움을 의도하는 것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는 다채로움과 그때그때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아시다시피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에는 한때 두려움과 음산한 뉘앙스가 따라붙었다.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직접적인 인상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전병이라면 가족, 특히 어머니는 그를 낳은 체질적 책임을 져야 한다. 또 그 원인이 정신분석학파(일부)의 주장처럼 유년기 양육에 있다고 하면, 부모는 양육 실패라는 더욱 강렬한 죄책감을 짊어지게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설이 옳을까? 유전적 체질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100% 발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그런 사례가 있다고 해도 적다고 본다). 발병은 체질과 당시의 스트레스가 합쳐져 발생한다고 본다면, "부상"이라는 비유는 이 점에서만 봐도 상당히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정신분석학설은 어떤가? 나도 한때 정신분석의 문을 두드리고 정신의학에 입문한 사람이다. 그 일반적인 공헌과 가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40년 가까운 경험을 지나고 나서, 적어도 정신분열증에 관한 한, 정신분석학적 심인설은 불필요하며,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해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왜 유해하냐 하면, 이러한 이론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모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혹은 최소한 본인의 성장 실패로 인해 발병 전부터 정상인과는 다른 약한 인간이었다고 하여 일종의 '변질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정신분열증 환자 중에는 이른바 분열성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자체는 거의 정상 범위에 속하는 것이다. 그 외의 성격이 어떻든 상관없고, 사전에 성격 결함을 가정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전적으로 자유롭고 낙관적이다. 각 개인의 성격적 편차에 대해서는 그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고, 물론 치료 과정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필요에 따라 적절히 다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당신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자주 말해주기도 한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01~102


그저 비유로써의 '부상'이 아닌 정신이지만 실체적인 부상으로 여겨도 좋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인격으로 확장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우리네 현 주소인 '정신병에의 일반 상식'이 머물고 있는 수준을 고려한다면, 뒷받침되어야 할 설명-이해는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 정신에 있어 어떤 상식이 자리잡는 데에는 분명 시간이 필요하다. 이해 당사자들에게 그 시간은 가속화된 것뿐이다. 그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이론이다. 경험과 기술의 조합이라 여겨도 좋다. 또한 특정 이론이라고 해서(정신분석이나 심리학적 입장 등등) 그것을 실제 사람에게 곧장 적용시키는 우는 범하지 말길 당부한다. '팬텀 공간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분열증-조현병에 직접 관련이 없는 철학자, 학자, 일반 전문가 등이 심심찮게 그런 '개념'을 입에 올리며 이런저런 언어 놀음을 하기도 하는데, 문화자본주의의 흐름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현실적인 실천이다. 야스나가 선생도 밝히고 있지만, 특히 들뢰즈-가타리에서 다뤄지는 '분열증'은 그 오남용이 분명 있다. 또 20세기 중후반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행 하에 '분열', '도주', '노마드' 등으로 언급되는 분열도 마찬가지다. 이는 전문가인 학자들의 의무에 할당되므로 일반 시민들은 크게 힘을 쏟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거나 배워야 할 일이다.


'정신분열증 환자 중에는 이른바 분열성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은 부연을 붙일 필요가 있다. 기질-심인성 등 소위 '성격유형론'은 크레펠린을 중심으로 정신병리적 인생사를 다루는 '병적학'에서 주로 다루는 개념이다. 프로이트도 한때 예술가를 갖고서 그런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미 죽은 고인의 사적 자료를 샅샅히 뒤져 정신 해부를 하는 행위는 사실 그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기에 조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앞서 '역전이에 대한 자성' 능력처럼 표상으로 다루는 '가상적 인물'의 주체성을 얼마나 '생명'으로 다룰 수 있는지의 훈련 없이는 가치를 인정하기 힘들다. 단순 호기심으로 그런 일을 연구라는 명목 하에 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있으니 지적 호기심의 중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아가 '기질'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유행하는 MBTI-융의 유형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성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야스나가 선생도 스스로 밝히지만 '분열기질자'다. 나 또한 분열기질자에 해당된다. 이 내용에 대핸 추후 다룰 수 있으면 다루겠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도 스스로 밝히는데 그도 '분열친화자'다. ㅋㅋ.. 그러한 정신적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이론을 보면 재밌는 요소가 많다.)


여튼 말년의 야스나가 선생은 '자세 감각'이란 것에 관심을 두며 생각을 개진시킨 것으로 안다. 이 자세 감각을 다루는 논문은 아직 구하지 못해 읽질 못했으나, 섣불리 추론하자면(단편적으로 소개되고는 있으니) 그건 '기질'과 관련된 우리네 정신 운용 방식이다. 즉 어떤 이는 자기 정신을 이런 방식의 자세로 운용한다, 저런 방식으로 운용한다 따위의 차이를 의식하는 데 도움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빌헬름 보링거는 인간에게 '공감 충동'과 '추상 충동'이 있다고 말한다. 공감 충동은 사물-대상에 이입하거나 공감하는 데 능하고, 추상 충동은 사물-대상을 추상화하는 데 능하다. 전자의 자세 감각은 대상의 '질적 요소'와 자신의 감정 간 '거리'에 친화적이기에 일을 구할 때도 '자신에게 맞는 느낌'에 기준을 더 둘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자세 감각은 반대로 감정이 멀어져야 하므로 보다 추상화된 영역에서 친화성을 느끼기 쉬울 것이다. 뉴턴이 수학과 물리학에 능하지만 그건 '바깥으로 보여지는 창구'였을 뿐, 자신의 정신 안에서는 '점성술, 이교도학'에 심취한 것으로 이해 가능하다. 한 일본 정신 전문의의 책에 소개된 사례를 빌리자면, 조현병을 앓았던 한 사람은 대학 전공으로 '고생물학'을 골랐다. 야스나가 선생의 개념을 빌리면 추상 충동의 자세 감각은 F형 사람으로, 대상 친화적이며 기계, 논리, 합리, 조립, 분해, 현실과 거리가 확보된(거리가 너무 멀어 오히려 안전한) 시공간 등에서 긍정성을 느끼기 쉽다.


중요한 건 사람마다 자신만의 '자세 감각'이 있다는 걸 우리는 충분히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준삼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인간 상'에 대한 선입견으로 타자를 향해 그물을 던질 수밖에 없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건 무언가를 포착하기 위해 언어 망을 던지기보다, 자신의 인격이 전면에 드러나 타자가 혼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솔직하게, 또 서로의 있는 그대로로 흘러가도록 인위적이지 않게, 서로의 '자세 감각'이 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새롭게 가다듬어져야 할 '배려'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배려'라는 이름으로 한 정신 전문의의 에세이가 있다. 국내 번역본도 있다.)


환자를 치료의 궤도에 올리고, 병에 맞서 함께 싸우고 격려하면서, 짧지 않은 시간을 잘 버티게 하고,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게 하며, 이후에도 돌봐주는 것—이 모든 것이 의료진의 인간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약"은 전쟁에 비유하자면 공습 같은 것이다...매우 강력한 수단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폐허만 남을 수도 있다. 진정한 평화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지상군, 즉 보병이 전진하고, 진흙을 뒤집어쓰고,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한다... 우리는 환자의 마음을 필요 이상으로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궁극적인 평화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06-107


전쟁 비유는 세대인 만큼 양해하고 넘어가자. 메시지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특수한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다수의 생명이 희생되는 정당화가 아니라 보다 국지적인 상황 속에 놓인 각각의 플레이어 간 최선이다. 나카이 선생은 따로 '간호학'에 대해 힘을 쓴 바가 있으므로, '돌봄'에 대한 깊은 배려를 접하고 싶다면 나카이 선생의 책을 추천한다. 여튼 '돌봄'은 대체로 보이지 않는 최선이다. 앞서 의도된 자연스러움이 상대에게 모르는 게 맞다고 말한 문맥과 같다. 나 또한 그런 돌봄, 혼자만의 싸움으로 여겨 간병인으로서의 생활을 완수했다.


이해 당사자에게 필요한 건 감당하기 힘든 현실-정신병이라는 현실에 무력하고도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자신이 그 앞에 선 게 아니라는 '현실 감각'이다. 당신은 그런 법정 앞에 소환된 게 절대, 단연코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독학으로 포착한 건, 우리네 개인 정신이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니며, 분명 거시적인 영향 관계가 미시적인 정신 디테일에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징후'를 발견했다. 따라서 정신병이란 엄밀히 말해 모두가 겪는 '날씨'나 마찬가지다. 그걸 어쩔 것인가, 어쩌자고 뭔가를 할 것인가는 우선순위가 아닐 것이다. 환경에 따라, 처해진 그 순간에 따라, 상태에 따라 같은 날씨여도 누군가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자명하다고 느끼는 '안전 장치'가 세상에 얼마나 무수히 지탱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소위 '미치지 않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가는 게 기적적인 일이라 말하고 싶다. 나카이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조금 긴 인용이지만 나에겐 '올바른' 통찰로 느껴지기에 책임감을 느끼며 전달하고자 한다. 그 안에는 각기 다른 지성인들의 문제 의식 정수가 담겨 있다.


"본론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조현병이 잘 낫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병이 생명과는 관계없다는 점에서 중추 신경계 내에서의 파급 범위는 제한적이다. 조현병으로 사람이 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명과 관련된 뇌간이나 그 이하의 연수 등으로 내려가지 않은 시스템의 불안정이기 때문이다. 도파민 계통이 주로 손상된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이 계통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계통이다. 무수 섬유로 이루어진, 생명적인 관점에서 보면 2류의 계통이지. 인간이 되면서 갑자기 큰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원래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던 시스템을 전용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후발 계통은 선발 계통을 전용한 것이라는 신경계의 법칙에 비추어 보면, 운동의 미분적 분석을 담당하는 대뇌 기저핵 부근이 도파민 구동 계통인 것을 보면, 비슷한 계통이 근처에 있었고 그것을 전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계통은 급격히 발전한 계통이라서 그 위치도 전두엽처럼 타격을 받기 쉬운, 코를 통해 감염되기 쉬운 위험한 급속 형성 지역이고, 효율이 나쁘기 때문에 뇌의 부피도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뇌가 가까운 친족인 유인원과 비교하여 두 배로 커졌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다. 아마도 뇌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고, 이는 마치 서투른 설계자가 크기만 키워버린 것과 같은 상황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가설이지만, 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러면 초창기 컴퓨터가 더 좋은 컴퓨터였다는 말과 같은 소리다. 인간 중심주의는 뼛속까지 뿌리박힌 사고 방식이군."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현병은 사실 잘 치료될 수 있는 병이지만, 정밀 기계가 작은 돌멩이 하나로 움직임이 크게 방해받는 것처럼, 작은 방해 요소도 회복을 방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환자의 집에 왕진을 반복하다 보면,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깨달을 때가 있다. 또 하나는, 조현병에는 유혹성이 있다는 점이다. 마침내 자신이 실현되었다든가, 진정한 자아를 엿보았다는 등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는 히말라야에서 조난당해 산 정상 쪽으로 도망치는 것과 비슷하다."

"내 친구 칸다바시 죠지는 매우 뛰어난 감각을 지닌 치료자인데, 그가 우울증에 대해 말하기를 '가장 자신 있다고 생각한 능력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기 때문에 더 힘든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참고하자면, 조현병은 발병 과정에서 '자신이 늘 원했으나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능력이 저절로 손에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유혹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병이 나을 것 같을 때 '정말로 나아도 괜찮아? 외로울 거야.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경고하고, '그래도 나은 것이 더 좋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병이 나도 오래 가지 않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사례에는 이 병의 교묘한 유혹성이 있다. 현재는 뇌의 활동을 증대시키는 것이 선(善)으로 여겨지는 사회라 그런 것 같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제어봉이 부족한 불안정한 원자로와 같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괜히 뇌의 힘을 높이려는 것은 내가 만든 '정신 건강 이로하 카르타'에서 말하자면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체르노빌'과 같다. 중증이 아닌데도 난치라고 불리는 경우 중에는 고지능자가 있다. 환자가 논리로 지지 않으려는 의사가 논리로 꺾으려다 환자가 기가 죽는 경우도 있고, 의사가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 [徴候・記憶・外傷], 中井久夫, 2004, みすず書房, p10


'뇌가 두 배로 커졌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말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조현병에 대한 이야기가 왜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인에게도 소개될 수 있는지의 기초 중 하나다. 우리 세상은 합리성이 과잉되어 있고, 그로 인해 '소리소문없이-체르노빌 사태와 같이'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다. 이런 미세한 징후에 예민한 인간들이 바로 '분열기질자'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여하간 내용을 따라가는 설명은 이만 줄이기로 한다.


제목을 '나무가 된다는 것'이라 붙인 이유는, 좀 더 가다듬은 언어로 풀어내려고 했는데 역시 하루 종일 '표현 고르기'만 하다 보니 문학적 언어 용량이 고갈되어 무리인 거 같다.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건 이것이다. 이해 당사자, 그러니까 조현병 당사자뿐 아니라(당연히 조현병 환자에게도 '고지능자'는 있다. 내가 실제로 만났던 한 분은 학벌이 우리나라 최고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상에 있었고, 우연히 한 모임에서 나와 만나게 되었다.) 그의 가족, 지인, 간호인 들에게 들이닥치는 '현실의 막막함'은 사실 노고와 헌신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이해'를 높여 고통과 괴로움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희망'이 분명히 '현실'임을 당부하며, 일단 일상을 같이 살아가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타자와의 언어 교환'에 있어 자신이 타인의 나무인 것처럼 연습을 하면 적어도 앞서 말한 기술들을 배우는 데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익숙한 우화 중 '나무' 관련된 무엇을 떠올리든 써먹기 좋은 이미지니, 얼마든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할 수 있다'고 분명히 적어두며 이번 글은 마친다.






*덧붙이는 말이지만, 마지막으로 야스나가 선생이 제안하는 배움에 도움 될 만한 의식 과정을 적어둔다.


① 가끔씩 자각하면서 연습해봐야 한다는 것(내가 오늘 처음부터 말해온 것과 같다).
② 다른 사람을 본받는 것, 즉 모델을 참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중개 조건이다.
③ 단지 머리로만 아는 것은 소용없고, 몸에 익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④ 실제 실행 상황에서는 '거의 잊어버린' 상태가 좋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운동신경과 자세 감각이라는 개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본질적인 요령이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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