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소적 체계
24.12.20
한참의 고민이 있었다. 과연 이 내용을 지금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역부족을 크게 느낀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간 어차피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 할 수 없다는 심리적 부하가 도전으로 느껴지기에 합리화를 좀 했다. 이에 따라 먼저 고백해야 할 것들이 있다.
1. 일본어를 (인공지능)번역 도움으로 읽은 것이기에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2. 용어를 그대로 채택한다 해도 잘못된 용어일 수 있다.
3. 나의 이해도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의 '팬텀 공간론'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이 많다. 가능하면 필요한 사람들에게 '원문을 직접 보는 걸 권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외국어의 한계도 있거니와 절판된 책도 있다. 또 이 글을 쓰려는 목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이론 소개'도 예상 독자를 어떻게 가정해야 하는지에 따라 어렵다. 논리나 이해, 학술 용어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사람을 가정하고 써야 하나? 정신 전문의의 기준으로 써야 하나? 그 중간 스펙트럼은?... 이 고민을 굳이 꺼내놓는 이유는, 애초에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론]은 정신병리학의 전문 논문이기에 그렇다. 일반인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가 눈높이를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21세기 리터러시 능력을 감안하면 분명 일반인에게 허들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처음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어쨌든 필요한 한 명에게라도 전달될 수 있으면 될 것이다. 다만 나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가급적 글이 증식되는 건 피하고 싶다. [팬텀 공간론]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책은 총 3권이다. [정신의 기하학] 1부 'Wauchope 해제' 빼고는 모두 전문적인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걸 풀어내려면 각 문단마다 해제를 붙이는 식이 기술적으로는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분량은 증식될 것이고, 나는 이걸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도하게 압축-요약한다면 과연 이해로 전달될 수 있을까? 심히 우려스럽다(나의 패턴 감각이 거부권 행사한다...). 따라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타협할 수 없는 입장 논리만큼은 글을 좀 할당하기로 했다. 그것은 '도식', '가설 체계'에 대한 것으로, Wauchope의 '패턴'이 어떻게 '팬텀 공간의 도식화-기구-가설화'가 되는지에 대한 논리다. 사실 이건 보다 합리를 사용하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 필요할 뿐,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필요한 '당장의 감각'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 뼈는 있지만 살과 피가 부족한 실체 없는 것이 될 우려를 나는 갖고 있다...
- [安永浩著作集1(ファントム空間論)], 安永浩, 1992, 金剛出版, p4
이론은 단지 병적 경험 형식의 본질적인 부분, 핵심적인 부분만을 정확히 지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뼈’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살이나 피부는 별도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뼈’를 빼면, 전인적 형상은 매우 일그러진 형태가 될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190
결국 여기서 허들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이는 어쩔 수 없다. '전인적 형상'이 우리 눈앞에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생명을 함부로 다룰 수 없으며, 무엇보다 신중하고도 치열하게, 그러나 경직되지 않게 섬세히 다루기 위해 결국 우리는 정신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처와 낙인은 이미 현실에 있으니 못 본 척할 수도 없다, 하고 싶지도 않다.
* 들어가기에 앞서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의 [팬텀 공간론]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먼저 소개해드린다.
금강출판사에서 나온 [야스나가 히로시 저작집1~4]는 현재 절판되었고, 중고 되팔이들의 높은 가격으로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다. 국내에서도 과거 차학경의 [딕테]가 수십만 원에 다다르는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 재출간을 해줘서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처럼, 결국 재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해당 출판사에 문의했지만 아쉽게도 계획은 없다고 한다.
[팬텀 공간론]은 1960년에 처음 논문으로 소개되었다. 그 후 일본 정신병리학회 모임(여기에는 기무라 빈, 나카이 히사오, 도이 다케오 등 국내에 조금이라도 알려진 분들이 참석하는 2~30명의 소수 모임이었다)을 통해 주기적으로 연구회가 진행되었고, 도쿄대학출판을 통해 '분열병의 정신병리'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그 시리즈에 논문 한 편씩 수록되던 게 모여 야스나가 선생의 이름으로 금강출판사에서 출간된 게 [팬텀 공간론]이다. 이후 1987년까지 이어진 논문들이 모여 [팬텀 공간론의 발전]으로 출간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팬텀 공간론]은 발전되고 촘촘해졌으며, 1987년 [정신의 기하학]이란 책으로 종합되어 출간된 바 있다.
[팬텀 공간론ファントム空間論]은 [야스나가 히로시 저작집1安永浩著作集1]과 동일하며(서문이 추가되었을 뿐), [팬텀 공간론의 발전ファントム空間論の発展]은 [야스나가 히로시 저작집2安永浩著作集2]와 동일하다. 저작집3~4권에 수록된 내용은 몇몇 논문의 추후 논의가 다뤄지는 걸로 알고 있으며, 증상론, 치료론 등 다른 논문들도 수록되어 있다. 다만 금강출판사에서 저작집3~4권에 해당되는 내용을 재출간하고 있진 않으므로, 현재 구해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작집1~2에 해당되는 본 책 [팬텀 공간론]과 [팬텀 공간론의 발전]은 OD(주문 제작)판으로 재출간하여 구매할 수 있으므로 yes24에서 구매 가능하다(팬텀 공간론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걸 확인했다, 이건 내가 추후 등록 문의를 해 두겠다).
사상적 흐름으로 보면 책이 출간된 순서를 따라가면 되고, 가장 최신 버전을 본다면 [정신의 기하학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1992, 岩波書店] 3부를 보면 된다. 다만 그렇다고 이전 논문들이 무의미한 건 절대 절대 아니며, 도식이 발전되고 확장된 흐름과 별개로 통찰과 연결 논리 등은 어쩔 수 없이 이전 논문들에 할당되어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건 도식 모델은 최신의 것을 중심으로, 그 논리가 어디서 출발되고 나아가지는지는 이전 논문들을 참조하여 부분적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또한 '일반 팬텀 공간' 사용자로서, '팬텀 공간론'의 활용 가능성을 초점으로 두면(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목표다) '경계 영역'이라 불린 [팬텀 공간론의 발전]에 수록된 논문을 참조하면 좋다. 의식 장애, 신비 체험, 강박증, 비현실감, 편집증 등 아마 21세기 한국인이라면 '혹시 나도...?' 혹하게 되는 자신의 정신 상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내용들이다. 다만 이런 접근은 그다지 권장하지는 않는 게 나의 주의며, 어쨌든 나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정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에 보다 '성장과 발전'이 있길 바라는 데에 있다.
-팬텀 공간
가소적 체계란 내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도 그렇고 야스나가 히로시 선생도 그렇지만 존경할 만한 전문가들이고, 통찰이 무척 뛰어나다. 오늘날 뇌과학 발 '신경 가소성'이 일반 대중에게도 소개되어 당대의 미덕인 '뇌 능력 증대'와 만나 관심이 뜨겁다. 이 '가소성'을 정신 양상에서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단 흔적을, 두 전문가의 책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중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은 바로 이 '가소성'의 체계를 지시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좀 더 쉽다.
(역시 눈 앞에 없는 표상-타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건 내 정신에 너무 취약하다. 노파심으로 몇 자 적는다. 앞으로 전개할 내용들의 순서,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어디서 어떻게 이해를 출발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상대성이 내 정신에 너무나 다양해서 섣불리 하나로 붙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편의상 나한테 기준을 삼는 것도 나의 타자지향성에 걸맞지 않다. 따라서 나는 기준을 삼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공통 교육 과정을 거친 일반인, 또 우리네 일반 상식적인 '논리-합리력'을 최대한 상상해 그에 맞춰 기준을 삼고자 한다. 이런 소위 '평균-정상' 범주를 가정하는 데 먼저 양해를 구한다. 근데 상상한다고 기준이 잡힐 리 없다... 그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세라고만 가정해주길 바란다. 실제 타자가 있었다면 나는 그의 정신에 최대한 감응해 눈높이를 할 자신이 있는데, 눈 앞에 없으면 나는 멍청이가 된다.)
앞서 Wauchope의 '패턴'을 말한 바 있다. 거기에 담긴 철학의 정수를, 야스나가 선생은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내 안의 Wauchope가 눈을 떴다. 때가 온 것이다'라는 말과 더불어 [팬텀 공간론]의 시발탄이 터졌다. 보다 긴 인용이지만, 당사자의 생생한 이야기이므로 발췌한다.
워쵸프는 그런 영향을 내 내면에 남기면서도 그 후 9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1960년, 나는 이미 몇 년간 정신과 의사로서 경험을 쌓았고, 정신분열병이라는 난제에 부딪혔다. 알다시피 이 병의 "이해 불가성"은 악명이 높다. 이 병에서 나타나는 환각과 망상, 자기 수정이 불가능한 특성은 일반인의 꿈이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성질을 지닌다. 생각의 기이함은 지능 저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자아"의 위치에 대한 주장도 일반인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정신의 다양한 영역에서 증상이 나타나며,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나면서도 어디에선가 불가사의한 공통점이 느껴졌다. 그것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었고, 그들 나름대로의 내적 논리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학자는 보통 사람의 세계를 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로 비유하고, 분열병 환자의 세계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클리드든 비유클리드든 각자의 공리가 있어서 그것이 체계화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공리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신분열병의 근본적인 장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인지 장애가 근본적인 원인이고 망상이나 사고 장애는 그 파생물인가? 아니면 사고 장애가 근본인가? 혹은 감정 장애가 모든 것의 원인일까? 혹은 인격이라는 차원에서의 장애일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각자 나름의 주장이 있었으나, 논리적으로 성공한 논쟁은 없었고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파는 유년기 경험에서 원인을 찾으려 했고, 이는 일종의 인격 장애설이었다. 그의 현대적 후계자인 라캉에 이르러서는, 거의 영유아기에 생긴 인격 결손이 후년의 발병을 설명한다고 주장했으나, 이것 역시 근거가 빈약해 보였다. 나로서는 이 주장이 이미 편견을 받기 쉬운 정신분열병 환자들에게 새로운 편견을 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분열병에 대한 관점을 권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야스퍼스의 "이해 불가" 이론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겉으로는 이에 복종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이 이론에 대한 불만이 계속 있었다. 위에서 말한 "단죄"는 실제로 매일 분열병 환자들과 마주하며 그들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 노력하던 정신과 의사들에게 그들을 포기하라는 명령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의 생각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이해"라는 방법과 "설명"이라는 방법을 엄격히 구분했다. 전자는 주관적으로 마음에 적용되어야 하고, 후자는 객관적으로 물질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방법론적 자각이 부족한 "비철학적 두뇌"들이 각자 엉뚱한 가짜 이론을 세우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단정은 우리에게 일종의 "금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사들에게는 의사들의, 범인들에게는 범인들의 감각과 변명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일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본능적인 속삭임이 들린다. "이해"와 "설명" 역시 그렇게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런 반론은 이미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다.
때가 무르익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워쵸프가 깨어났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26~127
해당 내용은 [정신과 의사의 사고방식]에 수록된 제8장, [O.S.Wauchope의 차세대에 대한 기여]로 2001년 도쿄대학에서 열린 '인간과학 연구 국제 회의 대회' 기조 강연의 내용이다. 아마 이 에세이(?)가 [팬텀 공간론]을 가장 일반인에게 맞춰 쓴 것으로, 현재는 폐쇄되어 추정만 하지만, 야스나가 선생이 생전 홈페이지를 운영하셨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해당 글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올려두셨던 걸로 안다(그래서 Wauchope와 끊겼던 인연이 그의 친척 손자와 연결될 수 있었다). 해당 책 또한 yes24에서 구매 가능하다.
여하간 이렇게 길게 인용한 이유는, 처음 [팬텀 공간론]을 세상에 내보일 때 '이론적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하는 데서 비롯되는 기존의 방법론들과의 차이를 논하는 내용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현병 이론'이란 무엇인가? 그 '내적 논리는' 무엇인가? '비유클리드적 공리'란 무엇인가? 그것을 세우기 위해 '분열병자의 내면적 이해의 출발점이 되어야'하며(단순 문장은 출처를 굳이 남기지 않으므로 양해 바란다), 무엇보다 그 이론적 설명이 '분열병을 분열병답게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제시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필요한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내가 이해한 바를 덧붙여두고자 한다. 일찍이 20세기 중반 일본 정신의학자 '기무라 빈' 선생은 독일 유학을 통해 '인간학적 정신의학'의 영향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번역과 저술 활동에 힘을 써 소위 '2세대 정신의학자(일본에서는 이 세대로 나카이 히사오, 야스나가 히로시를 포함시킨다)'에게 주요한 영향을 남겼다. 다만 나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단편적인 글을 통해서만 추론하는 것이지만, 정신병리학 현장에서는 의사들 간 이론적 관점이라는 일종의 '대립-갈등'이 있었고, 나카이 선생도 자신의 직업적 행보에 있어 '다행스럽게 나는 그들의 갈등에 연루되지 않아 자유로운 고민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에서 형성된 '인간학적 정신의학'은 하이데거와 메다드 보스의 만남으로 진행된 연구(국내에선 '졸리탄 세미나'라는 책으로 출간된 적 있다)와 더불어 후설(현상학)적 영향이 만나 자생된 것으로 안다. 한편 영국에서 로널드 랭의 '반정신의학'적 움직임도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프로이트로부터 출발된 '정신분석 학파'가 있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간 정신'에 대한 관심이 분수령처럼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다시 거시적으로 보아 하나의 조류로 볼 수도 있지만, 요점은 이것이다. '인간학적 정신의학'이란, 기존에 '정신병'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다루는 의사들의 위치가 '타자의 실존'에 초점지워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조현병을 치료한다고 뇌 부위를 도려내는 의사가 노벨상을 받는 둥 '이해의 수준'이 확연히 '생명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 비판, 이론화가 분위기로 퍼지며 '인간학적'이라는 말이 '전인적'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되고, 정신의 문제를 불필요하게 확장시키는 태도가 아닌 인간 실존의 존중과 배려를 우선시하는 '주의'다.
이에 따라 현실적인 문제, '미친 인간'을 '감금-격리-강제 입원'시키고 치료라는 이름의 '고문' 요법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할 수 있는가?가 사라졌다. 다만 정신분열증은 그 와중에도 너무나 난해한 인간 증상이었다. 실제 사례를 담은 책들이나 증례를 보면, 일단 그들의 실존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가 턱 막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현병 환자였던 '르네의 사례'도, 세셰이예 박사의 상징화-동반을 통해 회복될 수 있었던 성공적 사례지만, 그렇다고 그 방법이 '모든 조현병의 치료법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합의될 수 없었다. 다만 증상은 어쨌든 눈앞에 나타나므로 그것을 기준삼아 '무슨무슨 장애'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이며 이런 내용을 띤다는 식으로 하는 게 차악의 최선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역시 완화된 접근이지만 본질적 해소는 아니다. 그저 '이러한 증상이 있고 장애가 있다'와 '그로인해 불필요하게 인격적으로 확장하지 않는', 스티그마화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인 셈이다.
야스나가 선생은 그러한 '내적 논리의 부재'로부터 '심리 현상의 작용 방식을 파악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인식은 체험에서 직접 도출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전개시킨다. 중요한 건 '체험에서 직접 도출되는 방향'이다. 만약 '카프그라형 망상 장애' 유형의 증상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가 자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가짜'라고 느껴져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다면, 그 내용을 그저 '망상 장애'가 있다고 진단하는 게 과연 그의 '체험에서 직접 도출되는 방향인가?' 상상해 보면 된다.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아빠가 가짜다, 엄마가 가짜다'라고 말하는 자신의 가족을 보면 좌절과 절망 말고 대안이 있을까... 만약 가짜로 '진짜' 느끼는 정신 상태가 그려진다면, 그래서 그 '지각 세계 체험'이 가설적으로나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심리적 고통의 유발은 조금 다를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이해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즉 조현병의 기본 장애라 부를 수 있는 원리적 작용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불가피하게 '상당히 높은 추상적 차원'이 될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체험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방향이어야 하기에 추상-실제 간 유연함이, 그때그때에 맞는 상황적 이해가 요청된다. 하지만 내용을 소개하는 입장이기에 조금 꾀를 부려볼까 한다. 1960년에 발표된 [분열병의 기본 장애에 대하여]로부터 출발해 2001년 발표된 [O.S.Wauchope의 차세대에 대한 기여]까지의 내용을 한 번에 다 다룰 순 없다. 시간으로도 약 40년어치다. 특히 초기 논문과 더불어 생소하고도 낯선 관점이자 사고 방식인 '패턴'을 어떻게 정신분열증을 설명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지, 그 징검다리 논리가 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너무나 중요하지만, 다 다루진 않되 오해를 무릅쓰고 시작해 보려 한다. 덧붙여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가설'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이 가설이 효과를 발휘하면, 첫째로 정신분열병 환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절실한 실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정신분열병의 다양한 증상 대부분에 무리 없이 평등하게 적용할 수 있어, 이전에 논의되던 증상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어디서 파생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일거에 불필요하게 만든다. 셋째로, 어떤 다른 질병에서도 볼 수 없는 이 병의 특성을 묘사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을 얻게 되었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33
1) 패턴-체험 공간
야스나가 선생의 '일반 체험 선-공간'을 도식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패턴' 논의로부터 시작해 '공간'으로, 강도와 거리 논의 그리고 '팬텀 가설'이 더해져 '팬텀 공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한 발상의 발전을 초기 논문부터 천천히 따라가는 건 오래 걸리므로 최대한 간결하게 요약된 글을 따라가며, 필요에 따라 초기 논문들의 내용을 발췌하도록 하겠다.
먼저 '패턴' 논의다. 패턴은 앞서 소개한 적 있듯 O.S.Wauchope의 [Deviation into Sense]의 중추 개념이다. 패턴은 A→B로 표기되며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1. A와 B는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A 없이 B를 이해할 수는 없고, 또 B 없이 A만 이해할 수는 없다.
2. A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B는 조건적 우연성contingency을 갖는다. 반대로 B로부터 출발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A가 전제되기에 논리적 필연성logical necessity을 갖는다. 이것을 비대칭성이라고 부른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패턴이란 '전체에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이 전체를 이룬다'고 정의되어 있다.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A→B로 표기해 A와 B라는 대립되는 개념들이 소개된다. 질/양, 생명/죽음, 전체/부분, 자/타, 정신/물질 등이다. 앞선 관계에 따라 A로부터 출발해 B가 있다. 또 A 없이 B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것을 설명하는 내용이 해당 책을 구성하고 있지만, 해당 철학을 깊이 이해하기엔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하므로 핵심은 다음과 같다. A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걸,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생생한 주관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삼는다. 이것이 유일하게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는 공리다. 이건 마치 우리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공감해달라고 바라는 것과 같다. 나의 주관을 상대가 느꼈으면(체험했으면) 싶을 때, 우리는 결코 상대에게 나의 감정을 강요할 수 없다.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동의를 '바랄 뿐'이다. 딱 이 태도로, 공리를 요청한다.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듯, '여러분이 공감하고 이해해 주셨기를 바라지만...'이다. 왜냐하면 전제 자체가 모순없이 공리로 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대 또한 그렇다는 걸 바라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에게 논리란 Wauchope 말마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다소 비약처럼 읽히겠지만, 논리는 탄탄하다. 어쨌든 이에 대한 야스나가 선생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마치 선험적 단정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의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다. 이는 ‘적어도 내가 내 체험에 물어보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며, 다시 말해, 나의 체험 세계의 사실적 ‘존재 방식’에서 유래한 ‘하나의 파생된 결과’를 말한 것에 불과하다. 독자들도 각자의 ‘체험’에서 출발한다면 대체로 이 결론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이상의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타당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즉, 사람에 따라, 또는 같은 사람이라도 특정 체험 상태에서는 이와 다른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는 A와 B 간의 일종의 비대칭적 관계를 강조한 표현이다. 위에서 정성적으로 일관된 진술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이 원칙 내에서도 그 비대칭성의 ‘정도’에는 다양한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유연한 ‘현실’ 자체가 주인공이지, 결코 ‘죽은 형식’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원칙도 필요에 따라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점들은 글을 읽어나가면 점점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의 나, 특히 주체성이 넘치는 이 순간의 ‘나’에게는 위와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 [安永浩著作集1(ファントム空間論)], 安永浩, 1992, 金剛出版, p29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할 수 없다면, 한번 생각해 보자. 모든 체험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된다는 바로 그 '일방성'을,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패턴적 사고방식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한때 과도한 이성 사용자였기에 오류 몇 가지를 덧붙여 보겠다. 만약 '타자-사물(B)'의 절대성이 있기에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더라도 외부 대상들은 그대로 있다고 말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예시를 들면, '내가 없더라도 세상은 굴러간다'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애초에 그 전제부터가 이미 '자기 자신'으로 출발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B의 절대성이 있다는 걸 어떻게 말할 것인가? 혹은 그걸 말할 수 있다는 것의 출발은 어디서부터인가? 결국 주체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식'을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고 고집부리지 않는다면 말이다(그 고집은 결국 다른 문제, 심리의 문제일 뿐 논리에는 문제가 없다). 다른 한 가지는 논리적 무의미다. A 없이 B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B의 있음을 밝혀야 하는데 그 논리적 의미가 A=A고 B=B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B가 B인 것을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죽은 형식'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데에 판단하는 입장이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논리적 형식은 문자 그대로 '형식'이기에 양적으로 무한히 결정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B가 B일 수 있는 출발이 없다면 B는 결정될 수 없다. B=B라는 게 있어야 B가 아닌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A로부터 출발하는 일방성을 부정하기 위해선 A에 의지하지 않는 B=B가 성립될 수 있어야 하지만, B=B일 수 있는 근원적 능력, 그러니까 '그것이 그것임을 자명하게 만드는 존재 근거'를 아쉽게도 우리 인간은 자신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패턴 사고 방식으로 나아가기 위해 요청하는 공리에 대해 만약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질적 의미로부터 체험이 출발된다는 공리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일단 속는 셈치고 '맞다고 치지 뭐'라고 넘어가는 것도 방법이다(유해한 결론으로 전개되지는 않으므로 이념 경계 수치는 높지 않다).
그러나, 진실로 자신에게 A로부터 출발하는 B가 자명한 게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Wauchope도 야스나가 선생도 나도 패턴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다른 주체에게 이 공리에 대한 동의를 바라는 건 그 주체 또한 나와 같은 '패턴'이 있다고 가정하기에 가능한 바람인 것이다. 야스나가 선생은 이 패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유레카를 외쳤는데, 원문을 읽는 게 더 생생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분열병 환자의 경험 세계에는 마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워쵸프가 정상적인 체험의 공리로 패턴을 제시했을 때, 나는 '이거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상적인 패턴을 A≥B로 표시하기로 했다. 이 부등호는 논리적 비대칭성을 나타내며, 경험의 실제에서 주체, 즉 A 측의 에너지 발산과 B 측의 입력 에너지의 실감을 표현한다. 생명체는 입력, 즉 외부로부터의 힘을 능가하거나 적어도 그것과 균형을 이루는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으면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등호는 극한의 경우, 그와 같은 최소한의 균형을 나타낸다(워쵸프도 생명체의 행동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유클리드적 공리는 위의 식을 부정하는, 즉 A<B로 나타낼 수 있다.
이 내용은 이미 패턴의 정의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정의문에서 A와 B를 바꾸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이 역전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B가 자명하고 공리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A는 B에 휘둘리며 불안정한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이는 환청에 저항하지 못하고, 주체적으로 그것과 마주할 수 없는 정신분열증 환자, 사고의 일부분이 독주하면서 전체가 그것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사고 장애를 겪는 환자, 착상의 결론 부분에 빠져 추론 부분이 완전히 그것에 종속되는 망상형 정신분열증 환자의 주체 세계 그 자체다. (주: 예측의 구조 또는 원인/결과의 관계는 하나의 패턴이다.)
이것들은 정상적인 사람도 빠지기 쉬운 단순한 오류나 '언어'에 휘둘린 착오와는 다르다. 바로 그것이 정신분열병을 미스터리한 질병으로 여겨지게 했던 이유다. 정상인은 이런 상황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하지만 패턴 역전이라는 설명 가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이해는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이해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32
그렇다. 만약 당신이 앞서 말한 공리에 대해 반대한다고 했을 때, 오류나 '언어'에 휘둘려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충분히 추체험할 수 있는 상황이다(미처 생각하지 못한 오류라 해도 설명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 체험 자체에 대해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실로 그 자체가 역전된 패턴으로 살아가는 정신이라면? 그러한 방향으로만이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면? 이야기는 분명 달라진다...
우리가 단순히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했을 때, 거기에 전제되는 우리의 온갖 패턴들이 있다. 우리는 놀랍게도 '타인'을 그냥 이해하는 게 아니다(레비나스를 비롯한 타자-철학은 잠시 괄호쳐 두자). 타인의 감정, 생각, 그와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기 위해 우리는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지만 서로 엇나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같은 것을 듣고 보고 말할 수 있고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패턴의 조건적 우연성이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가 만날 수 없는 반대의 선상에 있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엇나갈 뿐일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발판 삼아 야스나가 선생은 보다 '내적 논리'를 추적해 나간다.
특히 나는 의사였기 때문에, 결국 뇌의 문제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패턴의 세계는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기초는 결국 뇌의 생리학적 물질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설명적으로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같은 책, p 133
이 전개, 그러니까 '패턴 세계'가 '공간'으로 전환되는 부분에는 바로 우리의 체험적 '거리감-강도'가 반영된다. Wauchope의 예시이기도 하고 야스나가 선생도 즐겨 인용하는 예시를 통해 이 논의를 따라가 보자.
생명체에는 우선 '살아 있음'의 행동이 있고, 그것을 위협하는 죽음으로부터 회피하려는 행동이 있다. 이것을 A/B로 본다면 삶→죽음이 자명해진다. 그 반대를 우리는 자명하게 체험할 수 없다. 그런데 '죽음 회피'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영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영양은 저 먼 곳에 있는 사자를 본다. 그 사자는 그냥 사자가 아니라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사자다. 영양은 멀리 있는 사자를 보자마자 '가까이에서 살점을 물어 뜯는 사자'를 떠올린다(동물의 세계이므로 이미지나 표상, 소위 말해 인간 정신 비유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기제'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 즉시 영양은 멀리 있는 사자지만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징후sign'로 느껴 즉각 도망을 간다. 즉, 죽음 회피 행동을 한다. (실제로 영양의 머릿속이 어떻고 하는 건 역시 A→B를 따르는 게 아닌 A 없이 B만 보려는 접근임을 마지막으로 적어둔다, 패턴 사고 방식을 위해)
이 예시를 통해 야스나가 선생이 설명하는 건 바로 체험의 강약이 체험의 거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시각'이 월등히 발달되었고, 따라서 촉각에 비해 대상과의 거리, 공간을 감지할 수 있게 진화했다. 또는 데모크리토스의 말을 빌려 '촉각의 연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거리-공간'은 그저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체험 거리이자 공간이며, 그 안에 체험의 강약에 따라 거리감이 주어진다. 혹은 거리감에 따라 강약을 조절한다. 무엇보다 Wauchope의 통찰에 따르면, 이것이 우리 정신에 있어 '합리'의 월등한 기능이다. 즉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예상과 예측 능력을 고도로 발달시켰고, 영양처럼 시야에 포착되는 거리를 넘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위협에도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이해를 돕고자 21세기 대도시 사회로 돌아와 보자. 일반인들에게 있어 만연해 있는 '리스크 관리'는 매우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나만 그럴 수도 있다) 관념이다. 그 리스크는 애진작 '죽음'까지 가 있다. 노후 대비, 보험, 은퇴, 불상사, 사고, 암, 요양, 이력 관리, 스펙, 고독사... 본래 미국에서 우후죽순 쏟아지기 시작한 '자기계발'의 원형인 '기업가적 자아'에서 자신을 마치 경영체 운영하듯 스스로를 운영해야 하는 주체 길들이기라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우리는 하루하루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생생하게 느끼도록 연습해야 했다. 다만 생명체 입장으로 한 번 이 상황을 봐 보자. 모두가 살면서 느끼듯이 '눈앞에 현전한' 일에 대한 신체 반응과 그저 관념으로만 떠올리는 일에 대한 신체 반응은 그 차이가 확연한 걸 알 것이다. 특히 수험생들이 지겹고도 방대한 양의 공부를 하루하루 해나가기 위해 길어올려야 할 '의지 양분'의 노력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회피해야 하는 일이 닥쳤을 때 즉각 몸이 반응하도록 진화했고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어 정신이 고도화돼 달려나갈 때 몸을 억지로 혹사시키는지도 모르는 건 21세기 현대인의 불편한 진실이다. 당연히 모두가 느끼고 있겠지만... 오늘날 왜 정신 질환이 유행처럼 번지는지.)
여담은 이정도로 마친다. 죽음 회피 행동을 통해 우리 정신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체험 강약'이 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에게 정교하게 발달한 시각, 그리고 그 분석 기능을 통해 완성된 외부 공간의 입체적인 지도에서도, 그 거리감은 위험이 가까운지 먼지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외부 공간의 질적 측면이다. 위험과 무관한 단순한 공간 지도만으로는 외부 공간의 극단적인 양적 측면에 불과하다'고 야스나가 선생은 말한다. 이때 '패턴 역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체험 공간이 조현병 환자의 체험 공간처럼 문제시 될려면 어떤 기제가 작동되었을까 발상을 이어간 야스나가 선생은 착각 운동 실험에서 힌트를 얻어 어떤 '기능 고리'를 발견한다.
2) 팬텀 공간
'기능 고리'란 내가 보기에 야스나가 선생의 이론에 있어 조금 대체된 개념이다. 처음 논문에서 야스나가 선생은 우선 '증상 기구론'과 '가설 체계'란 개념을 사용했다. 이 개념들은 '팬텀 공간'을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되므로 최소한으로나마 다루고 넘어가도록 하자.
심리적 요인과 분열병 발병 간의 관계는 (약간 비약적인 비유일지 모르지만) 외력과 탈구(혹은 골절)의 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다. 주체의 소질에 따라서는 자발적 탈구(혹은 골절)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발병"에는 외력이 필요하다. 외력이 발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절대적인 힘의 크기뿐만 아니라, 작용 방향, 방심, 우발적인 요인 등이 작용해야 한다. 꽤 강한 힘이 가해지더라도, 주체가 이를 예측하고 근육을 단단히 하면 탈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분열병의 경우, 완전한 복구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가짜 관절이 생기거나, 혹은 강한 습관성 재탈구의 경향이 남는다. 그리고 분열병의 가장 큰 문제로 돌아가면, 여기서는 말단 증상(비유를 계속하자면 "팔을 움직일 수 없다"거나 "이상한 자세를 취한다", "통증이 있다" 등의 증상)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증상의 근본적인 기구 부분(즉, 뼈머리가 관절구에서 벗어났다는 것—엑스레이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혹은 충분한 개념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 [安永浩著作集1(ファントム空間論)], 安永浩, 1992, 金剛出版, p116
즉 '증상 기구론'이란 설명되다시피 조현병의 발생 원리를 가설적으로 접근하고자 채택한 용어다.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보충하자면, '발생 원인'이라고 했을 때의 차이가 있고, '기구적'이라고 했을 때 기능적 문제를 말한다는 뉘앙스가 있다. 여기에는 보다 마음이 담긴 접근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앞서 '문제 의식'을 떠올려주시길 바란다. 또한 비유하면 한 기계가 고장났을 때 그것에 접근하는 우리 인간의 자세를 떠올리면 된다. 근데 그게 기계로 보이지 않는다면, 반대로 생명체라면 기계처럼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의학을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보다 설명할 내용이 많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만 말하면 '문제를 보다 선명히 파악하기' 위함이다. '기구'라는 낯선 용어가 증상과 결합된 건 여러 인식적 효과를 염두에 둔 야스나가 선생의 제안이다.
더불어 물체 가설에 대한 내용을 보자.
즉, "물체 가설"은 인간이 몇 가지 "단서" 자극만 제공받으면 즉시 그곳에 공간적 성질을 가진 "물체"를 본다는 강력하고 고유한 경향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가설"은 지적 추론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사용되는 "가설"과는 다른 의미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이며, 단지 기능적으로는 의식적 가설 설정과 동일하게 작동한다. 즉, 어디까지나 그 순간의 해석일 뿐이며, 이후의 검증이나 지식의 획득에 따라 변경되거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그 물체는 그렇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 [安永浩著作集1(ファントム空間論)], 安永浩, 1992, 金剛出版, p243
그레고리는 이를 '물체 가설'이라 불렀다. 즉, 대상을 공간적 존재로서 '물체'로 보는 강력한 기본 경향이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실제로는 항상 물체 가설을 통해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가설'이라는 단어는 물론 우리가 의식적으로 방법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 이전의 전제'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표현이지만,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이 용어는 버리기 아깝다(따라서 앞으로도 이 단어를 사용할 생각이며, 이 의미로 사용할 때는 '……'를 붙여 사용하기로 한다).
그레고리는 시지각 전문가이므로 시지각에 대해서만 '물체 가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즉시 다른 국면으로 확장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또한 그렇게 해도 나쁜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우선 '물체'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공간 전체에 관한 '가설적 구조', 즉 '공간 가설'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기존의 '공간 도식'에 해당한다. 오히려 '가설 체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또한 각 대상이 주체에 의해 직관적으로 해석되는 의미, 즉 '의미 가설'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자는 '무섭고 위험한 것', 꽃은 '아름답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접시는 '물건을 올려두는 것' 등으로 해석되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 전체에 대한 세계관적 가설은 '세계 가설(체계)'이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에 관한 가설에는 '자아 가설(체계)'이 있다. (자아의 경우 '가설'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더욱 강렬하다. 정확히 이 의미는 아니지만, 과거 다카노가 정상인의 '정상적인 자아 의식'이 단지 하나의 확신에 불과하다고 논의한 것이 떠오른다.)
- 같은 책 p170~171
이렇게 증상 기구론-가설 체계-기능 고리란 개념으로 발전되고 중첩된다. 이런 개념의 적확 논리는 다소 까다롭겠지만 목적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가설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다. 당신이 갈비찜을 만들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재료 사기'가 아니라 '만드는 법'을 아는 것이다. 만드는 법에서 재료가 추론되는 것이지, 재료로부터 만드는 법이 추론되는 건 보다 숙련된 요리사에게나 가능하다. 쉽게 말해 증상 기구론-가설 체계-기능 고리란 '갈비찜이란 이런 요리입니다'를 설명하기 위해 놓이는 징검다리다. 이 개념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팬텀 공간'이 무엇인지다. 그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우리는 팬텀 공간을 자각하지 못한다.
2. 우리의 체험으로부터 자각할 수 없는 어떤 '기능 고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요한 건,
3. 만약 그러한 기능들이 만약 각각의 '체계'를 갖는다면, 그것은 절대 부분적으로 작동되는 게 아니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기에 기능에 '고리'가 붙은 개념이, 가장 최신 에세이에서 채택된 것으로 나는 유추하고 있다. 기구론이나 가설 체계로는 바로 이 '전체적 움직임'을 바로 이해하는 데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건 증상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패턴'이다. 전인적 이해에 있어 놓쳐선 안될 핵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접근으로 점차 '공간' 스케치가 진행되고, 이윽고 '팬텀 공간'에 대한 설명이 나타난다.
우리의 체험적 공간은 일정한 "거리"에 걸쳐 있다. 우리의 표상 이미지나 지각 이미지는 (어느 것이든 본래 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이 "일정한 거리"의 끝에 투영된다. 이 거리는 문자 그대로의 공간적 거리라기보다는, 주체에게 있어 실존적 여유를 표현하는 것으로, 공간적이면서도 시간적인 간격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러한 전체적 "간격"의 공간적 투영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공간적 거리 "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리적 공간 거리와는 관계없이, 주체에게 "최적"인 정적 거리 "감"이나 "간격"이 항상 유지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화면이 클로즈업이든 원경이든, 영사막과 주체 간의 거리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거리가 멀수록, 주체는 이미지에 대해 "존재적 여유"(안도감)를 느낄 수 있다. 주체는 위험한 것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도록 거리감을 유지하려 한다. (위험은 그대로 두면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어떤 것이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위험, 고통, 불쾌감을 주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초래한다.) 이 기능은 주체와 타자 간의 거리를 "늘리고", 멀리 "유지하는" 데 방어적 의미가 있는 기능이다.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종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기능이 약해지면 거리가 축소되고, 이는 약한 자극도 위험 영역까지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음을 의미하며, 생체에 본질적으로 불리한 장애로 작용한다.
이 논의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러한 거리 공간의 존재는 분명한 사실이며 전적으로 "실체적"인 것이다. (마치 팬텀 리브(phantom limb, 환지)가 주체에게 전적으로 실체적인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에 따라 여기서는 "팬텀 공간"(체험 가능한 가장 가까운 점에서 가장 먼 점까지의 범위로 정의한다)과 "팬텀 거리"(그 가까운 극점에서 당시의 이미지까지의 체험 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를 유지하는 특별한 에너지 실체의 작용을 "팬텀 기능"으로 약칭하겠다. (이미지의 형태 자체를 산출하는 기구는 이 팬텀 기능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가정한다.)
- [安永浩著作集1(ファントム空間論)], 安永浩, 1992, 金剛出版, p120~121
낯선 개념이므로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야스나가 선생이 '착각 운동 법칙'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우리의 착각 체험이 '심리적 거리'라는 어떤 체험을 겪을 수 있게 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팬텀 공간이라 불리는 용어의 출처는 Phantom limb, 우리말로 '헛팔다리'다. 환상 사지라고도 부르는데, 팔 다리가 절단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실체가 없으나 있는 것처럼 느끼는 증상이다. 내가 알기론 환상통이 수반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를 설명하는 건 우리 뇌가 지금은 없는 '팔 다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신경 혼란이다. 이것을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의 정신은 자신의 몸에 대한 도식, 그러니까 '신체 도식'을 갖고 있다. 이것의 동기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자명하다(그렇기에 이것의 수정-대체도 가능한 것이다. 보철물의 보조를 받는 장애우들을 상상해 보자).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이것이 분리되거나 와해됐다고 가정할 수 있다. 즉 신체는 그대로인데 도식만 고장난 것이다. 아마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 DeepWeb을 호기심에 탐험하다 '신체 절단 애호가'들의 공간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스텝이 있었다(일반인들에게는 기분적으로 좋지 않으므로 자세한 소개는 하지 않겠다). 핵심은 이것이다, '내 몸이 이물질로 느껴진다'. 팬텀 공간을 읽으며 나는 이 신체 절단 애호가들의 '체험'이 '가설적으로 이해'됐다. 그들의 '나-실체감'이 자신의 '신체 도식'과 어울리지 않는 것,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라면 자명함으로부터 출발하는 나가 있고 그 안에 신체 도식이 일방적으로→ 있어야 하는데 그의 뒤쪽으로, 아니면 외부로 밀려나는 시스템으로 가정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몸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상상해 보라, 자신의 팔이나 다리가 '나'가 아니라 '외계인 팔 증후군'처럼 내 의지와 상반된 혹은 무관하게 작동되거나 이물질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은 '나'로 온전히 있기 위해 그것을 떼어내려 할 것이다(그 방향이 바로 우리 인간 모두의 자명한 방향,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출발 방향이다). 그 정도가 약하다면 불편한 옷을 입고 있는 상태일 테니 어쨌든 심정적으로는 끊임없이 불편할 것이다.
따라서 야스나가 선생이 '팬텀'이라는 말을 그대로 갖고와 사용하는 건 이방인인 내가 보기에도 기묘하면서도 무언가 잘 맞는다. 억지로 번역해 '환영, 유령' 따위로 하면 그건 우리 상식에 연상되는 표상들 때문에 어울리지 않다.
팬텀 공간은 우리의 심적 '거리'를 확보해주는 일종의 보호-안전 장치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기능이 없다고 가정한다면(그런 인간 정신이 가능할까?...조현병의 가설적 장애는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온갖 정보량-위협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태양의 플라즈마, 온갖 생명 위협적인 파장을 모두 완충해주는 지구 대기라고 가정하면 이해가 쉽다. 즉 지구 안에서 우리가 태양의 '빛'을 은총으로 생명의 원천으로 여길 수 있는 건 태양이 진실로 그런 원천인 게 아니라 지구가 조율하고 있기 때문이다(또 우리가 그 필터된 파장에 맞춰 생명 원리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태양 빛'으로 보이고 그게 우리의 체험이 된다. 즉 빛=태양이다. 우리가 이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다만 태양이 은혜로운 빛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우주 개척 시대가 열린 20세기 중후반부터 새로운 지식 도식이 생겼으므로, 우리는 지구 밖 태양이 얼마나 위험한지 지식을 갖고 있기에 이제는 '가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정신에도 그러한 흡수-완충 공간이 있고, 그것을 실체적으로 가정한 용어가 '팬텀 공간'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핸드폰만 보다가 낙차가 끝나는 걸 모르고 발을 헛디딜 때의 체험이 착각 체험이고 우리의 팬텀 공간이 노출되는 순간이다. 팬텀 공간은 우리의 심리, 그러니까 보다 근원적인 나를 절대적으로 지키기 위해 고안된 진화적 시스템으로, 일단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 이해를 가정한 뒤 여러 정신 능력 간 협응으로 '살아 있음'을 전개시키는 생명체에게 팬텀 공간이란, 표상-지각과 실체적 '나' 간 조절 장치에 가깝다. 야스나가 선생이 '기구론'이라고 덧붙인 건, '마치 화면이 클로즈업이든 원경이든, 영사막과 주체 간의 거리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체험을 할 때 겪는 '현실' 혹은 내적 '표상'으로부터 나 자신과의 거리를 변하지 않게 잡아주는 '기구적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팬텀 공간이 만약 단축된다면 어떻게 될까? 야스나가 선생은 발상의 흐름대로 '거리-공간'으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그것이 '단축'되는 것으로 먼저 가정했었다. 하지만 점차 이론이 발전되었고, 마지막에는 '탄성체적 매질의 탄성율 저하'라는 가설로 정리된다. 이 중간 논의는 생략하도록 한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가볍게 읽고 넘어가자.
(팬텀 공간에 대한)구체적인 물질적 기초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기능만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것은 탄성체의 비유로 생각할 수 있다... 고무와 같은 탄성체는 외력을 받아 일정한 변형을 일으키고, 동시에 그와 동등한 내부 장력을 발생시킨다. 이 비율이 탄성율이다. 이 관계를 그래프로 그리면, 앞서 언급한 경험 공간 도식의 삼각형과 완전히 동일한 모양을 얻을 수 있다.
이 탄성율이 어떤 병적 과정에 의해 변화하거나, 매번 불안정하게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현상에 앞서 있는 기구를 생각해보려는 탐구이다. 세포 수준에서부터 쌓아가는 기초 연구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훌륭한 과학적 사고다. 이 두 방향, 즉 표면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과 기초에서부터 쌓아가는 방향은 양쪽에서 터널을 파 들어가는 것과 같은 관계로, 현재로서는 두 방향 사이에 있는 어두운 영역이 매우 넓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는 성공한다면 표면적 현상의 신비를 하나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37
이후 '팬텀 공간'은 곧 '탄성체 가설'로 대체되어 불리는 거 같다. 다만 그 공간 자체에 대해서 어떤 이론적 결함이나 오류가 있어서 대체되었다기보다, 이후 도식을 보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가설적 장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다. 즉 이전에는 '패턴 역전', '팬텀 단축' 등으로 조현병 증상의 체험 도식을 설명했지만 보다 개념이 발전되었고, '역전'과 '단축'은 일종의 착각으로, 궁극적으로는 실제로 비유클리드적 공리가 작동되는 게 아니라 주체로 하여금 진실로 그렇게 느낄 만한 가설은 이해 가능하되 실질적인 '다른 공리'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이해는 소박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본래 다음 순서인 '조현병의 체험' 장에서 다룰 내용으로 나와야 하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인용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제 이 사태가 이렇게 이해되었다는 것(패턴 역전, 팬텀 단축에서 탄성체로)은, 순수 논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었던 그 a<b라는 상황이 (분열병에서조차)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솔직히 나에게도 안심이 되는 점이다. 그렇게 비유클리드적이고 이차원적인 상황이 쉽게 실현된다면, 인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29
그렇다. 본래 해당 대목은 [팬텀 공간론]의 가장 마지막에 부근에서 만나는 문장으로, 이걸 하나의 스토리라고 본다면 약간 '해피 엔딩' 같은 것이다. '엄마 깨어났어..'라고 읊조리는 전화를 받는 장면?... 조금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정신'을 향해 이해의 굴 파기를 약 30년 간 수행한 한 의사가 '안심이 된다'고 말하는 무게를 상상해주길 바란다.
다시 돌아와 이어가 보자. 팬텀 공간-탄성체 가설은 우리 정신 기능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정신 체계로, 나카이 선생의 말마따나 징후적인 무엇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네 체험에서 희미하지만 분명 '낌새'가 있는 무언가다. 나카이 선생은 이를 '체험 선의 팽창'으로 이해해 자신 또한 개인적으로 애정을 많이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또 야스나가 선생은 자신의 환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생활(필자 주: 대인관계를 의미)은 결국 압력의 공간입니다... 저는 탄성 공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에 조금 놀랐다. 그 환자는 물리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물론 나의 팬텀 이론을 알지는 못했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74
이 부분에 대해선 주제넘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아직 때는 아니다. 다만 환자들의 사심없는 말, 혹은 지나치듯 흘러나오는 말 속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많은 걸 배우거나 꿰뚫리는 경험을 한다는 기록을 자주 찾을 수 있다.
이제 팬텀 공간의 도식을 보며 논의를 이어가자. 도식 3과 관련 설명이다. 본격적 설명이므로 좀 긴 인용이다.
원리적으로는 매우 간단한 것이지만 이 그림이 기본이 된다. 내 이론에서는 '패턴'의 A와 B에 각각 해당하는 강도가 있으므로, 이 공간은 이중으로 그려진다. 기준 빗변은 a=b인 경우를 나타낸다. 여기서 조건은 a≥b이므로, 모든 체험은 그림 3의 오른쪽 위 삼각형의 범위(AB-Ao-OO) 내의 어느 한 지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A와 B의 정상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또 다른 거리 개념 d가 있지만, 복잡함은 그 정도에 그친다. 이를 종합하여 나는 이 공간을 '팬텀 공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본인만 알 수 있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공간으로,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환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 지식, 도식으로서의 객관적 공간 도식이 성립되어 있으며, 일반적인 의식에서는 이쪽이 항상 주목의 대상이 되어 '흔적 공간'으로 간주되지만, 체험에 대한 직결도, '패턴' 우위성의 축에서 보면 순서가 뒤바뀐다. 팬텀 공간이야말로 의식을 담당하는 직접적인 '몸'이다. '현실' 공간은 그 팬텀 공간 안에 자리 잡은 추상의 영역이다. 게다가 '현실' 공간의 거리가 일정하더라도, 그것은 그때그때의 주체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팬텀 거리 축 위에서 부유한다. 예를 들어, 현실 공간의 무한 원점은 보통 자극 효과가 제로이므로 팬텀 거리 축의 먼 끝, 즉 유한한 선분 내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인해 지평선에 주목하게 된다면, 그것은 상당히 가까운 팬텀 거리 점으로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체험은 간단하게 화살표가 달린 선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분이 짧을수록 체험 강도가 강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선분이 짧을수록 곡률이 강한 호선을 첨가할 수도 있다. 특히 a 강도와 b 강도에 차이가 있을 경우 이 표현이 유용하다(그림 3의 하단).
내가 쓴 '팬텀 공간'에 관한 원고에서는, 뇌 내에 각각 a와 b에 해당하는 측정값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능계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때, a에 해당하는 것은 'a계'라고 할 수 있지만, b에 해당하는 것은 'b계'라고 하지 않고 ‘a’계’라고 표기했다. 그 이유는 이 계가 실제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오히려 자신(a) 쪽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음에 설명할 조현병 메커니즘의 가설→추론에서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그림 형식에서는 a나 b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52~54
보다 압축 요약해 내가 풀어낼 수도 있지만, 가급적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을 따라가는 게 이해에 안전해서 길게 인용했다. 좀 덧붙일 만한 내용이 있다면 바로 '팬텀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나는 이 공간을'이라고 말할 때 이 공간이 도대체 어딜 말하는지 헷갈릴 수 있다.
나 또한 팬텀 공간론을 첫 논문부터 읽어 나갈 때 도식 등장에 있어 뭐가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때가 있다. 위의 인용은 2002년 출간된 책의 내용이고, 1960~1987년 간 논문에서는 점차 발전되고 채워지는 과정이 있었기에 분명치가 않았다. 정리하면 이렇다. 앞서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는 '이 공간'은 도식 그 자체, 도식이 의미하는 '체험 공간'이다. 즉 '팬텀 공간 도식'이란 바로 저 도식 자체를 의미한다. (처음에 나는 이해를 잘못해 a'계가 '팬텀 공간인가?' 헷갈렸다...) 이 도식 이해에 오해를 줄이고자 가급적 각각의 부분에서 설명 부분을 발췌해 최대한 다각도로 이해해 보자(목적은 조현병 가설 장애를 이해하는 데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먼저 팬텀 공간은 우리의 체험 공간 해부도에 가깝다. '특히 거리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체험 공간을 도식화 한 것은 '타원이 있는 선'이 최종 산물이며, 그 산물이 어떤 '기구'로 인해 그려지는지를 해부한 것이 위로 대응되는 각 선분과 삼각형 도형이다. 야스나가 선생은 스스로 말하지만 '질적 기하학'을 고려한 것이기에 가급적 간단하고도 단순한 기하-도식을 구상한 것이며, 그러나 패턴 사고방식에 의거해 질적 의미로부터 출발한다는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해→설명→이해의 과정으로 크게 봐야하며, 위의 도식으로 말한다면 체험→도식→체험이 되어야 한다.
이 맥락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네 일반 체험을 통해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이 표현을 토대로 다시 우리네 일반 체험을 '가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해부도'라고 한 부분은, 앞서 '증상 기구론-가설 체계-기능 고리'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 정신에 있는 특정 '기능계'를 구분지었기에 '해부도'라 언급한 것이다. 이해를 위해 반복해 보자.
(도식 4)여기서 a는 직접적인 의식 계통, A의 뇌내에 해당하는 힘이며, a'는 외력 B의 뇌내에 해당하는 힘이다. 두 힘은 대항 관계에 있지만 각각 독립된 계통이다(여기서는 외계 지각, 즉 a = a'인 경우를 나타낸다).
이곳에서는 앞서 언급한 어떤 경험 거리를 기준으로 수직선을 내려, 경험 공간을 하나의 선분으로 대표하고 있다. 삼각형 그대로 두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이렇게 단순화한 것이다.
이 선분(삼각형의 빗변과 만나는 선)은 길수록 거리가 "멀다", 그리고 힘의 면에서는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힘의 강약은 선분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호선을 추가하여 강한 경험은 강한 호선으로, 약한 경험은 약한 호선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직관적으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체험 선"이라고 부르는데, 가장 단순화된 경험 공간의 모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너무 간단하므로 약간의 보충을 하여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자 한다(도식 5).
e와 f는 이론적인 양극이다. 즉 e는 현상학적 자기극, f는 대상극이다. 이론적인 "점"이므로 형체도 내용도 없고, 위치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반면 F는 대상의 형상과 내용 그 자체다. 컴퓨터로 비유하면 파일과 같은 것이다. 동일한 파일이라도 상황에 따라 멀리 혹은 가까이 놓일 수 있다. 위치를 f와 일치시킬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대상이 입체감을 가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f보다 조금 앞에 두는 것이 더 적합하다(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대상의 이미지로, 이미지는 앞쪽에 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이런 F를 나는 '대상 도식'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E는 자아 도식으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아(ego)에 해당한다. 이 도식은 이 그림에서 대상의 위치에 놓여 있지 않으며, 즉 의식되지 않은 상태임을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A의 분석 작용은 자아 도식을 통해 작동한다. 즉 파일보다는 애플리케이션과 같은 것이다. 보통은 의식하지 않지만, 어렴풋하게라도 이 부분에서 이미지화되기 때문에 이를 설정해 두면 이 모델이 인간적인 면모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다. 물론 반성적으로 이를 대상의 위치에 놓을 수도 있으며, 즉 이를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자아극 e보다 조금 하류에 놓인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 [精神科医のものの考え方: 私の臨床経験から], 安永浩, 2002, 金剛出版, p138~140
도식 4는 '팬텀 공간의 해부도'로 체험 공간의 도식이 도출되고 있다. 도식 5는 그 체험 공간의 이해를 위해 보충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헷갈릴 수 있을 이해 과정 하나를 짚고 넘어가겠다. 앞서 패턴 A→B를 얘기하다 '공간'으로, '강도-거리'로 넘어가 '팬텀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 중간에 '패턴 역전'을 말할 때 패턴 A≥B와 A<B가 설명됐었다. 야스나가 선생은 우리의 '체험'을 말할 때 패턴 A≥B를 정상적인, 일반적인 패턴이라 말한다. 여기서 다시 도식 3을 보면,
a>b, a=b, a<b가 표기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a와 b가 패턴이라고 생각될 수 있고, 따라서 좌측 수직선인 각각의 기능계 a, b가 패턴 ab구나, 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도식 5를 보면 그것이 우리의 '체험 선'이며 '화살표가 달린' 타원으로 그려져 있다. 이 화살표는 패턴 A→B를 의미하는 건가? 생각될 때, 이제 a와 b, 그리고 체험 공간의 인식 좌표가 헷갈릴 수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패턴'으로부터 출발된 이 논의의 발전 속에서, 먼저 야스나가 선생이 '공리'로 요청을 구했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우리 체험의 '방식'을 의미한다. 즉 그 출발이 일종의 '진행'을 의미하는 화살표로 표시된다. 따라서 패턴과 화살표가 같은 의미로, 단순히 이해되면 오류는 아니지만 어딘가 이해되지 않을 찝찝함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패턴'이란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즉, a 기능계와 b 기능계는 패턴이다. 따라서 a를 직접적인 의식 계통, '나', '자기 자신', '질적 의미를 부여하는 쪽' 등등으로 그때그때 적용해 설명한다. 또한 a로부터 출발한다. 그 대상은 b다. 이 b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대상이며 우리 체험 안에서 '강도-거리'로 입력된다. 이것이 뇌내 전위라 부르는, 쉽게 말해 '머리 안에' 입력되기 때문에 a'로 전환된 것이다. 즉 b계=a'계로 일단 이해해도 괜찮다. 이제 a계→b계(a'계)다. 일반적인 패턴이라면 늘 a가 b(a')보다 같거나 크기 때문에 그에 해당되는 체험 공간이 a≥b에 해당된다.
여기서 우리의 '실제 체험'을 그려보자. 우리는 늘 체험을 그 순간 있는 그대로 겪는다.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팬텀 공간'을 자각하면서 체험하는 게 아니라 체험은 그저 체험이다. 다시 말해 체험이라는 '패턴'이 있다. 그렇기에 (a→b)로 출발하는 패턴이 바로 체험 선(타원)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도식 5를 보면,
eE-Ff가 있다. 이것은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대로 각각의 위치가 가정된다. (a→b)로 출발하는 체험으로, 체험 안에서 우리는 eE→Ff로 겪는다. 앞서 설명하듯 체험 안에서 우리의 자아 도식 E는 자각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그렇듯 무언가를 할 때 늘상 '(나는 커피를 마신다)를 나는 체험한다'로 느끼는 게 아니라 그저 '커피 마신다'로 체험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일기를 쓰든 명상을 하든 반성을 하든 때론 자신의 자아 도식 E를 표상으로 대상화할 수 있다. '자기 관찰'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모든 체험은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a→b, eE→Ff를 단순히 보면 패턴의 패턴인가? 그럼 {(a→b)→e-(a→b)→E}→{(a→b)→F-(a→b)→f}인가? 까지도 '생각'은 나아갈 수 있다. 만약 중학교 수학 시간에 집합을 배울 때라면 이런 접근은 올바른 쪽에 가까울 것이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좀 아쉽다). 패턴 사고방식은 Wauchope의 [Deviation into Sense]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이를 적극 활용하는 야스나가 선생은 초기 논문에서 이 논리를 논의하고 넘어갔기에 이후에는 상시 다뤄지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서만 다뤄진다. 패턴 사고방식이란 최대한 간추려 말해 우리의 기본 공리,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체험되는 모든 것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바라볼 수 있다로 일단 정리해 본다.
전체가 부분이 되고 부분이 전체가 된다는 그 재귀성이 일방적인 진행으로 어떻게 형성되는지가 이해의 핵심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이 부분이 정 감이 안잡히신다면, 그냥 아주 거대한 패턴 선을 그린 다음 우린 그 위에서 임의로 이게 패턴이다, 라고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다고 맘 편하게 생각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즉, 세상 만물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대한 시간'이 있기에 우리 모두가 '현재'를 누리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만약 도식 기호 표기로 인해 이해에 가로막힌 것이라면,
이처럼 '화살표' 자체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지 어느 순서로 배치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면 위의 헷갈림은 싹 사라질 것이다.
몇 가지 놓치고 건너 뛴 것들이 있지만, 이제 글을 정리할 순서다.
지금까지의 설명, 앞으로의 설명에는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다. 이해, 그리고 설명과 전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와 오류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이 만약 '애인에게 밥을 해준다' 같은 것이라면 그저 밥을 해주면 될 뿐이지만 지금 내가 자신이 없다고 앞서 말한 건 재료는 다 있는데 조리할 줄 몰라 상대에게 '밥'으로 보일지 자신이 없다는 의미다. 어쨌든 사람들은 먹을 것에 엄격하고 꼼꼼하므로 내 입장으로선 할 말이 없다. 밥같지도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밥같이 보이도록 노력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험→도식→체험은 사실 너무 어려운 내용이다. 왜냐하면 도식→체험이 과연 이해될 수 있을까?에 어쩔 수 없이 '전인적 이해도-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분열증 도식으로 넘어갔을 땐 도식만 봐서는 탄성체에 문제가 생겼고, 타원이 찌그러졌을 뿐인데 그런 체험이?라고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은, 그런 방식으로 실제 사람의 면모를 해석하려고 할 때다. 그렇다고 전인적 이해-경험을 상품처럼 전달해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난 살면서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갈고닦는 기술과도 같아서 옛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바퀴 깎는 기술'과 마찬가지다. 말로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필요하다. 결국 내 책임이라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당사자에게 떠맡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설명과 표현에 대해서는 반드시 내 책임이다).
우리 정신에는 팬텀 공간이라 부르는 가소적 체계가 있다. 이 세계는 외부 압력으로부터 변형되지만 일정 한계까지는 형태를 복원시킨다. 그러나 '성질을 변화시킬 만큼'의 강한 압력(치명적 압력)이 들어오면, 이 탄성체는 변형되고 만다(게이머들에게는 익숙한 용어지만 '약점-뒷치기'다). 이것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없는가?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실제 증상이라면, 조현병에 걸린 환우가 다시 일반 정신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나카이 선생의 책도 그렇고 야스나가 선생의 책도 그렇고 '치료' 관련 내용을 보면 그렇게 절망적이진 않다. 그러니까 조현병은 '나아진다'. 나는 그런 희망을 분명히 이해했으며,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론으로 보더라도 '희망의 실마리'는 보인다.
분명한 현실적 사실은 우리네 팬텀 공간은 성장하고 발달되는 체계라는 것이다. 즉 유아기부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정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관찰해 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과학기술의 진보 속도로 점치듯 가정해 보면 이 체계가 실체적으로 밝혀질 날이 그렇게 까마득하게 멀지는 않은 거 같다. 다만 중요한 건 '전인적 이해'고,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기에 놓쳐선 안 될 끈, '유대'다. 따라서 우리네 정신에 그러한 가소적 체계가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정신병의 이해를 '정신'이나 '인격' 등의 뭉뚱그린 개념이 아닌 정형외과적 비유처럼 특정 부분의 문제로 이해해도 충분하며, 이것은 현재 채택된 DSM 체계와도 싸울 필요가 없으므로 실용적이다.
아마 실천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병식'이라 부르는 자각 능력일 것이다. 일반 팬텀 공간을 우리가 자각하지 않기에 그것이 고장났다고 해도 자각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나는 생각한다. 단지 주체 입장에서 자신의 실존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외부 현실과의 어긋남이 문제다. 이 구도로만 보면 어떻게 정신병에 접근해야 하는가의 자세가 잡힌다. 이해 당사자들은 결국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부모라면, 가족이라면, 당신은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며, 지구 공동체로서 모든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거창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어떤 논리로든, 어떤 감정으로든 이 방향은 문제 없다. 단지 맞서 싸워야 할 것들이 문제다. 생명체의 '적응'과 '저항', '산다는 것'을 굳게 붙들 수 있길 바란다. 우리 인간 또한 마찬가지며 정신이란 곧 주체의 현실 적응일 뿐, 그것이 문제라면 그 문제에 달라붙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일은 당연히 강도가 천차만별이다. 예술과 광기를 논할 때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거리가 충분히 확보된 세계에 대해서는 안전에 의거한 감정 이입을 잘 한다. 다만 그 거리를 좁힐 수 있는가? 과연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그 사람처럼' 살 수 있는가?가 바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건 우리의 가소적 체계가 도와줄 것이다. 당신 또한 주체이며, 상대도 주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건, 자신이 중재자가 되어야 할 때 과연 어떤 도식들을 활용해야 하는지의 자세 감각이다. 나는 세상에 그런 문제를 보다 덜 고통스럽게 다룰 수 있도록 공헌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 마음 만큼은 오해와 오류없이 전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