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는 다른 물구나무로 섰고 (2)
24.12.23
다음 공식으로 넘어가기 전에 앞서 설명했던 제1공식 Af-F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복기도 할겸 도식을 다시 소환해 보자.
이 팬텀 공간의 체험 도식은 정상의 것과 달리 a'의 탄성률에 문제가 생겨 불가피하게 단축된(야스나가 선생은 '고무 판이 부드러워졌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타원이 본래 정상적인 타원과 중첩되어 '역설적인 균열'을 발생시키는 도식이다. 이 공식의 대표적인 임상 사례가 '이인증'이라고 한 데에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못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해당 공식이 '현실 지각'의 체험을 가리키는 가설적 장애라는 것이다.
또 공식 표기에 대한 부연도 추가한다. Af-F라고 표기할 때 f-F는 f와 F 사이의 '역설적 균열'을 의미하는 하이픈(-)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A가 그대로 표기되는 이유는 일단 주체의 질적 측면은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통상 패턴을 표기할 때 A→B라고 한다면 이는 체험 공간의 성질을 반영했을 때 eE→Ff였고, eE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A와 같은 의미였다. 즉 Af-F는 '현실 지각'에 있어 가설적 장애가 발현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공식으로,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듯 'A를 사용한 이유는 자아 쪽에 이상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f-F는 역전과 틈을 그대로 나타낸다'를 의미한다.
'지각'을 강조하는 이유는 제2공식이 '망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표상-지각'의 미묘한 차이, 그러나 '혈연과도 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표상'의 측면을 다뤄야 한다.
해당 시리즈는 약 21편의 논문(에세이 2편)을 최대한 일반인의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게 무리한 정리를 하는 글이다. 따라서 건너뛴 논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논의 전개를 위해 불가피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징검다리들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표상-지각'인데, 이를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조해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너무 과도할 것이므로(야스나가 선생은 사르트르의 '무' 개념을 자주 인용한다) 앞서 최대한 나의 실제 체험을 예시로 삼아 설명했으나 역시 부연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오늘날 '망상 장애'로 진단하는 바로 그 내용을 야스나가 선생의 논의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일반인에게 있어 '망상'이란 무엇인가? 또 실제 그러한 장애 진단을 받는 이들이 체험하는 '망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환청, 환각, 환시를 겪는가? 또 그러한 것을 어떻게 (소위)정상적 표상-지각과 분간할 수 있는가? 그 미묘한 감각에 대한 이야기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제1공식은 '지각' 입장에서 탄성률 저하라는 가설적 장애가 발생했을 때, 라고 정리해 주시길 바란다. 제2공식은 표상-지각의 입장이며 '망상 지각'을 다룬다. 정상 체험이 아니므로 이해에 무리가 뒤따르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최대한, 다뤄보겠다.
(2) 가설적 장애 유형 4가지
(b) 제2공식 ((AB))-F 망상 지각
*들어가기에 앞서
아마 일반인들에게 '조현병'하면 통상적인 이미지는 '망상 장애'를 겪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들이 내보이는 '말'은 우리에게 현실로 느껴지기보다 망상으로 다가온다. 최근(이라고 해봤자 벌써 1~2년 된 일이지만) 내가 케이크를 사러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만난 조현병 환우와의 에피소드를 들어보겠다.
당시 나는 케이크를 사러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본래라면 자주 드나드는 동네가 아니었고, 한적한 오후를 앞두고 있는 10~11시 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창가 자리에 앉아 멍때리며 가던 중 한 정거장에서 한 중년 여자가 버스에 올랐다(나는 버스가 멈춰 승객을 받을 때 늘 누가 버스에 타는지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그 여자는 타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어딘가 남달랐다. 행색은 일반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당당히 무임승차를 했고, 버스 기사는 일단 출발하면서(때로 승객들은 자리를 확보한 뒤 버스 카드를 꺼내 태그를 하기도 하므로), 백미러를 통해 여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돈을 낼 기척을 보이지 않아 기사가 돈을 내고 타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속사포와 같은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산스럽게 버스 공간을 왔다갔다거리며 '러시아 국가 원수' 뭐라고 하며 버스 기사의 명함을 보며(버스 하차 공간 근처에는 늘 기사의 명함이 게시되어 있다) '신고 010 XXX 버튼 위치 한국 법 모르면 좆까 죽어 시발 경찰 몇 명 죽었다 이제 없다' 등의 말을 아주 빠르게 내뱉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직통 스파이 국가 원수 고위직' 등의 말도 중간에 섞여 있었다. (이후 얘기는 불필요하므로 하략한다)
오해와 편견, 선입견에 일조하는 이런 '불안한 상황'을 느낄법한 이야기를 과감히 적은 데에 나는 책임을 느낀다. 일반인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것이고, 그들 입장에서 이런 '망상'은 아마 심리적으로 '바퀴벌레'와 같은 수준으로 다가올 것이다. 과거 정신병리 모임을 운영할 때 참석하던 한 조현병 분의 에피소드에서는 '누가 내 머리에 칩을 심었다'의 내용이 있었다. 아마 일반인 중에서도 흔치 않게 접하는 내용일 것이다. 종로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관련 '전단지'가 발견되기도 한다(이 '현실'을 겪은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일반인으로 분류되고, 또 스스로도 그렇다고 말한다(해야 한다). 내가 접한 망상 장애의 인상은 수상하리만치 어떤 코드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 칩을 심었다'는 건 한국에서도 흔하게, 그러나 아주 은밀하게(완전 은폐된 건 아닌)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칩'의 설계와 작동 방식, 무엇에 취약한지의 정보를 공유한다(그래서 자신의 머릿속 칩을 '녹이기' 위해 특정 행동을 강박적으로 한다). 미국발 관련 망상은 상세히 아는 바가 없지만 대체로 이와 다르지 않다(국가 수준의 감시, 도청, 미행 등. 스파이 첩보 물의 코드는 사실 괜히 대중화가 된 게 아니라는 징후를 나는 말한다). 여기서 일관되게 흐르는 코드는 '누가 내 머리에 직통으로 명령을 내린다'다. 과거 뉴스 생방송 중 한 사람이 들이닥쳐 '내 귀에 도청장치'를 외쳤던 사건이 아마 일반인에게 가장 익숙할 법하다. 나는 파라노이아라고 불리는 편집증적 망상 장애에서도 어떤 '코드'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대체로 '자신을 미행한다', '내 저의를 알고 있다', '훔쳐본다', '날 죽이려 한다' 등등으로 체험된다. 여기서 내가 느끼는 코드는 소위 '피해 망상' 코드로, 자신의 위협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코드(자신을 향한 위협의 전방위)다.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도, 어딘가 수상하다고 느꼈다. '코드'가 포착된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뭔가 있다고 말이다.
이성 사용자로서 말해도, 소위 '미친 정신'은 정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술 안에서도 그렇지만 '완전히 다른 정신 세계'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공감하고 알아볼 수 없는 세계다. 아무리 새로운 것, 독창적인 것, 낯선 것 등등을 말하는 그 수준은 한참이나 '일반적인' 것이다. 정상적인 패턴을 갖고 있기에 그러한 것들을 감각하고 말하는 수준일 뿐이다. 진실로 이질적인 패턴, '체험'이란 대체로 인간들이 지각할 수 없다(그래서 궁극적으로 인간중심주의는 우리 인간의 본질이다. 다만 '패턴'의 이해가 있다면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일반인의 관점으로 망상에 대해 겪은 바를 말하는 건, 과연 우리가 이 체험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망상'이라고 말하는 건 변함이 없겠지만 그에 따른 '본능적 반응'과 같은 감정, 기분, 인상, 느낌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의도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알면 달리 보인다'. 그러기 위해 그런 부정적 인상에 과감히 맞서야 한다. 당신들은 틀렸다가 아니다. 일반인도 그렇고 망상도 그렇다. 왜 우리가 그런 비대칭을 겪게 되는지를 알면, 적어도 서로의 실존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줄일 수 있을 것이다).
관련 논의에 익숙한 사람을 대상으로 쓰는 게 아니기에 서론이 길었다. 제2공식 ((AB))-F의 임상 사례는 '망상 지각'이다. 이 망상 지각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기 위해 먼저 '의미'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제2공식 도식을 보고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을 보기에 앞서 이 부분을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의미"란 무엇인가? 이렇게 일반적으로 물으면, 이는 방대한 문제가 되어 본 논문에서는 논할 여유가 없다... 간단히 말해 "의미"란 주체가 대상에 부여하는 "가치"다. 이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접근·회피 등의 목적 행위를 일으키는 체험의 "질"적 내용이다. 모든 체험은 어떤 "질"을 수반하기에 ('패턴'적으로!), 이런 넓은 정의로 보면 의미 없는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용의 종류와 정도에는 물론 매우 넓은 범위가 있다...
한편 "의미"는 항상 어떤 주체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 주체로부터도 벗어난 절대적, 객관적인 "의미" 또는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령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체험에 들어올 수 없다). 이는 나의 문맥—‘패턴’·팬텀 공간 문맥, 넓은 의미의 이해 문맥—에서 논리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과 예술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바와도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인생의 의미"란, 만약 그것을 궁극까지 외부에서 추구한다면—"없다"(부조리, absurdity). 단지 그때그때의 현재, 구체적 모습에서 각 개인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우연히 그것이 다수의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이는 단지 인간이 대체로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우연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관한 (진부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안정된 "의미" 기반의 존재는 정신의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일상성 도식을 의미 있게 만드는 조건이며, 따라서 더 깊은 차원의 "현실감"의 기반을 형성한다. 그것이 상실되거나 병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 [ファントム空間論の発展], 安永浩, 2018, 金剛出版, p149~150
우리 인간에게 '의미-가치'가 얼마나 중대하고도 근원적인 기반을 자아내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21세기 사회 기저에 깔린 '철학의 위기'는 곧 '무의미의 아노미 상태'가 바탕지워져 있다. 한국 사람들이 왜 '돈'에 미치고 환장하며 사는가? '돈'이 모든 의미와 가치를 '대리-대표'하는 것으로 상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정에 깔린 논의나 관점, 실제로 그러한가에 대한 이견들을 다루는 건 삼천포이므로 빠지지는 않겠다. 중요한 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 '의미-가치'인지, 그리고 그것을 중심삼아 어떤 삶-가치관이 펼쳐지는지 그 기반을 감각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는 '안정된 의미 기반의 존재는 정신의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정신과 의사 야스나가 선생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인간 관계, 삶의 방향,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희망' 등 우리네 일상 기저에 깔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단순히 무의미하다, 의미가 없다고 퉁치듯 말해버리는 게 아무리 가볍다할지라도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에서 벌어지는 표상-지각 활동에 깊게 관여되어 있으며, '패턴'을 이해한다면 원천이나 다름없는 중추다. 의미란 '자신의 체험을 체험답게 만드는' 힘이다. 야스나가 선생이 따로 언급해주는 포인트는 아니지만, 거진 평생을 시 쓰는 일에 바친 내 입장에서 제시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 인간 안에 근원적 A가 자리한 패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바로 그 자명한 감각 속에는 eE로 지시되는 '의미를 "나의 것"으로 느끼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공감, 이입, 동일시 등의 원-투영(야스나가 선생의 표현)을 가능케 만든다. 그것이 '내 안'에 있을 때 우린 그걸 '자발성'으로 느낀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으로 출발한다'는 공리에 동의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이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힘이 a'의 탄력 문제로 뒤틀려 빗겨난다면?... '내 안'으로부터 이탈돼 다른 위치에 놓인다면...? 나의 이해에 불과한 설명이지만, 나는 이걸로부터 꽤 많은 걸 '정상 패턴' 기준으로도, 가설적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제2공식 ((AB))-F 도식을 따라가 보자. 앞서 제1공식이 '현실 지각'의 측면에서 다뤄졌다면 이제는 '주체의 표상' 측면에서 다뤄진다. 먼저 '표상'에서의 d에 대한 논의다. 표상이란 기본적으로 주체 입장에서 자신의 a 에너지의 여분을 강하게 갖는 체험이다. 즉 a>a'의 상황이다. 이때 a=a'의 상황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a의 에너지 차이가 d로 표기된다. 이 d를 야스나가 선생은 사르트르의 '무'로 말한다. 사르트르가 상상력 관련해 여러 철학적 탐구를 진행한 바 있는데, 야스나가 선생의 논의에서 핵심은 이렇다. 지각된 대상이 먼저 있고, 우린 그 지각된 대상을 '임시로(가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무(a 에너지의 차이)'에 기반해 표상 활동을 한다(눈을 감고 뭐든 떠올릴 때의 상황을 고려해 보자. '무'는 못 느껴도 괜찮다).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는 느낌만 따라가도 괜찮다. 특히 '꿈'을 갖고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 꿈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표상 이미지는 죄다 '현실'에서 빌려온 것이다. 융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무의식이 보여주는 현실의 상징화다(단 원형 상징에 대한 건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중요한 건 '현실 이미지'로부터 일단 입력되어, 그 이미지가 우리 정신에서 표상으로 떠오르기 위해 무언가 지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반 체험에서 몇 가지 도출되는 게 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주입하지 않았을 때 표상은 곧 흩어지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의적으로 표상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임의로도 표상은 떠오른다는 것이다(멍 때릴 때). 꿈은 무엇보다 임의성이 강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a 에너지가 의식적일 때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의식일 때 분산되는 에너지가 '꿈 활동'으로 모두 모여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곳에서 '체험'되는 감각은 현실 지각의 체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돌려 말해, 표상 행위로도 '지각 체험'과의 유사성이 있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그걸 '마치 내 일인 것처럼'으로 투영해 공감할 때 벌어진다. 이때 자신의 a에너지는 높게 상승해 있으며(지각할 때에 비하면), 지각 대상은 상대적으로 작게 유지된다. 이처럼 표상에서의 a-a' 관계가 기본적으로 차이 d를 만들어낸다는 걸 이해한 뒤 다음을 보자.
표상의 a’계 성분의 장력이 저하된다면, 그것은 표상 이미지의 명료도가 떨어지며, 사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는 표상 이미지를 떠올리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지각의 (b)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각의 (a)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a계의 에너지 일부가 a’계로 흘러들어 고무판이 압축되어 이전과 같은 장력에 도달하지만(즉, 이전과 동일한 표상 이미지가 발생할 수 있지만), 그만큼의 a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d0-d)만큼의 차이가 의미를 잃는 상황이 된다(도식 3-11). (이때의 에너지 '손실분'은 제1 공식에서의 '강제 상승분'과 대응한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로는 도식 3-12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며, 여기서 차이 d는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이는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사르트르가 말한 '무(neant)', 즉 ‘부재(不在)를 가설적으로(임시로) 떠올리고 있는' 구조의 소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부분에서만 지각과 동일한 구조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주체는 표상 이미지에 대해 마치 지각 대상처럼 균형을 이루는(a=b인 것 같은) 관계와 태도를 취하게 되고, 외부 대상에 대한 태도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된다(즉, 도식 3-12의 사선은 사실상 a=b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론적 귀결을 '표상의 의사 지각화'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의점을 살펴볼 수 있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31~232
천천히 설명해 보겠다. 옆의 도식을 참조하자. 정상적인 표상 행위는 a>a'에서 벌어진다. 현실 지각의 경우는 a=a'다. 즉 옆의 도식에서 실선으로 그어진 수평 선분이다. 다만 표상은 지각된 a'보다 높은 a에너지를 부여해 그 차이만큼을 지탱삼아 가상으로 떠오른 것이므로 d만큼의 a에서 출발하는 점선으로 그어진 선분이다. 지각과 표상의 차이는 밑의 '타원'으로 나타난 체험 공간이다. 저렇게 중첩된 타원을 보면 제1공식을 설명할 때 나온 도식의 체험 공간과 '같게 보여'서 헷갈릴 수 있다.
이것은 지각 체험-표상 체험을 할 때 주체가 겪는 '체험 공간'의 역동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앞서 타원은 일종의 '체험 무대'라고 묘사했다. 그 무대 위에 우리의 체험이 펼쳐진다. 지각을 할 때는 a=a'에 가까우므로 표상보다 넓게 무대가 펼쳐진다. 다만 같은 지각 대상을 두고서 표상을 할 때는 a의 에너지가 더 크므로 무대가 좁혀진다. 이 의미는 '같은 지각 대상'을 두고서 '표상 행위'라는 의미 부여를 할 때 우리 안에서 보다 질적 감각이 커진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자유롭게 지각을 하다가 표상을 하다가 다시 지각을 하는 식으로 마치 렌즈 배율을 조절하듯 한다는 뜻이다.
반면 제1공식에서 중첩된 타원은 얘기가 다르다. 그것은 역설적 균열로 나타난 타원-체험 공간이다. 그 체험 공간을 따라가 보면 a'계에서 탄성체의 문제가 적용되어 있다. 따라서 주체는 Ff가 동시에 조절되는 지각-표상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역전된 f-F를 체험한다. 이 의미에서 앞선 설명에 따라 '표상의 a'계 성분의 장력이 저하된다면, 그것은 표상 이미지의 명료도가 떨어지며 사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정상적으로 표상할 때 동일한 장력으로 유지되던 a'가 저하되어 본래 상승된 만큼의 a'가 가정되어야 했으나 그보다 덜한 a'가 나타나므로 그만큼의 '명료함 저하'와 지탱되는 d의 손실에 따라 '사라짐'이 유도되는 걸 의미한다.
이 설명은 앞선 글에서 (b)의 경우에 해당된다. 이 (b)는 고무줄에 열을 가하는 식으로 비유했던 상황이다. 즉 탄성체는 그대로인데 탄력이 저하된 경우다. 앞서 (a)는 탄성체가 이동된 것이고 탄력은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이 둘의 차이는 미묘한 것이므로 일단 무시하자고 야스나가 선생이 말했지만, 여기서 구분지어 언급한 것이다.
이어서 (a)의 경우다. 'a계의 에너지 일부가 a'계로 흘러들어 고무판이 압축되어 이전과 같은 장력에 도달하지만', 그만큼의 'a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옆 도식 3-11의 상황이다. a의 수직선에 찍힌 좌표 x를 눈여겨 보며 설명을 따라가 보자. 정상적인 표상이라면 x를 기준으로 d만큼 발생했을 때 그만큼 내려온 a'가 수평으로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탄성체의 탄성률 저하에 따라 밑으로 내려간 a'에 유도된다. 그에 따라 본래 x 만큼의 격차 d0가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d가 아니라 d0가 나타나고 d0-d만큼이 손실되는 것이다. 표상에 있어서 이 손실분은 그만큼의 '의미를 잃는 상황'이다.
또한 극단적으로 3-12처럼 그 차이가 같아질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a=a'의 지각 상태와 같아지므로 '표상'이어야 했을 상태가 '지각'으로 체험된다. 이를 야스나가 선생은 '표상의 의사 지각화'라고 부른다. 이 느낌이 실제 임상에서 어떤 성질로 나타나는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⑴ "자칫하면(가정되는 느낌)”성질 (이는 앞서 '지각의 이인증화'에서 언급한 '따라다님' 성격과 대조하여 명명하였다.) 표상에서 a와 a’ 사이의 크기 관계(따라서 차이의 양상)는 물론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하며, d가 큰 표상과 작은 표상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일정한 비율로 가설적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표상에 나타나는 '결과'는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충분히 큰 d를 가진 표상은 일부 장애로 인해 영향을 받더라도 여전히 여유가 있어 표상으로서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애에 부딪힌 후에 a 에너지를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관습적인 표상 수준이 있을 것이며, 항상 일정한 비율의 장애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원래 d가 작은, 다시 말해 '의식'의 정도가 낮은, 반자동적인 표상이(콤플렉스로 인해 부과된 표상 등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 장애에 쉽게 걸려 의사 지각화되기 쉽다. 이러한 표상 기능의 활동은 원래부터 항상 유동적이고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의 의사 지각화도 그때그때 일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이인증화처럼 지속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 전체가 의사 지각화, 즉 환각화되기 쉬운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그 의미에서 병리 상태는 잠재적으로 항상 존재하며, 그 속에서 증상의 발현이 '자칫하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 공식의 이 면은 임상 증상으로서의 분열병형 환각——주로 환청——의 양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32~233
나의 이해가 올바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한 바에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표상은 분명 d의 다채로움이 있다. 이는 주체에게 있어 a에너지의 자유로운 발산 능력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한 주체가 체험을 해나가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에 따라 '의식 정도가 낮은' 표상들이 대체로 '의사 지각화'에 노출되기 쉬울 것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a'계의 탄성체 가설 장애의 정도에 따라 그 표상들의 정도는 조절될 것이다.
일본의 한 알콜중독자 이야기다. 일반인으로 보이는 그가 알콜 중독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 어느덧 심신이 피폐해지고 '환청'을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한 사람이 환청을 듣게 되는 트리거는 뭘까? 언제 환청을 듣게 되는지, 어떤 내용을 듣게 되는지 과연 그 조건을 파악할 수 있을까? 그는 소위 정상 팬텀 공간을 갖고서 잘 살아왔다. 그러나 알콜 중독에 빠져 잠을 못 자 불면증에 걸리고 이후 환청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예시와 더불어 우리는 정상적인 일상을 살다 모종의 '문제'로 인해 망상과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여기서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소위 '현실'이라 부르는 정상적인 표상-지각 활동이 어떤 문제로 환청, 환각, 망상으로 전환되는 것일까?
'증상'으로의 진행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분명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문제'시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일단 우리는 이 상상을 통해 무언가의 '강도'가 있다는 것을, 가소적인 성질을 지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야스나가 선생의 이론적 틀 안에서 우리는 그 '강도'를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의 성질이 함의하는 두 핵심은 이렇다. 하나는 a 에너지가 커서 a'계의 탄성 저하를 덮을 수 있을 만큼의 여분 a가 있다면 그것은 '지각화'가 되지 않고 어느 정도 '표상'임을 체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체험에 의거해 가늠짓자면 자신의 강렬한 감정 체험이나 질적 의미의 강도가 높은 체험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감정의 양상으로는 기쁨, 행복, 환상 충족하는 쾌감의 공상, 불안, 공포, 두려움 등등 다채로울 것이다. 중요한 건 강도, 그러니까 a 에너지가 어느 정도로 작동되는가에 따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본래 격차가 적은, 그러니까 현실 지각에 가까운 표상일 때는 의사 지각화가 자주 발생할 것이다. 우리네 표상을 보면 현실 지각에 가까운 표상들이 꽤나 많다.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a 에너지와의 격차 d가 작은 체험이다. 이는 내가 개인적인 탐구를 진행하며 '비의식'이라 부른, '반자동적 표상'들이다. 화장실 사용을 예시로 들어보자. 우리가 어렸을 때 기억나진 않겠지만 부모로부터 화장실 사용을 배우게 된다. 용변 처리, 위생을 위한 손 씻기, 세면, 양치, 샤워-목욕 등이 그렇다. 그것들을 매일매일, 수많은 세월을 거쳐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의식하지 않은 채', 그러니까 자신의 a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써도 한다. 그러나 그 행위를 할 때 우리는 표상을 갖는다. 용변 처리는 신체 감각에 따른 느낌들을 표상으로 떠올리며, 위생 관련 씻기도 마찬가지다. 기분을 올리기 위해 각종 향이나 물의 온도 등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의식의 정도가 낮은' 표상들이 우리 일상에 무수히 많다. 식사, 운전, '익명화된 타자', 각종 백색 소음, 잔잔하게 깔려 있는 자신의 불안이나 두려움 등... 일단 여기선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⑵ 이 구조의 역설적 성격을 띤 의사 지각화된 표상을 단순히 "생생해진 표상"으로만 단순화해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 느끼는 의미에서의 생생함은 사라지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생생한 표상은 분열병에서도 물론 나타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정상적인 의식에서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표상의 내용이 질적·양적으로 증가한 것일 뿐이다. 의사 지각화의 역설적 이유는 표상 이미지의 표상적인 부분, 즉 지각에 비해 훨씬 더 모호한 부분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힘의 관계만이 지각적인 수준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상적인 체험 범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표상 이미지가 상당히 명확해져 지각 체험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사르트르가 지적한 바와 같이, 표상은 어디까지나 지각과는 다른 종류의 의식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융합되거나 전이되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은 현상을 "표상의 유사 지각화"라고 별도로 명명하여 다루고 있다. 분열병형 환각(예를 들어 언어적 표상이 환각화되어 특유의 언어형 환청이 되는 경우)에서 가장 신기한 점은, 병자가 그것을 지각으로 받아들이는 망상적인 확신이 언어 내용의 명료함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자는 종종 "뭐라고 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것을 명확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환청에 압도되고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 심각할수록 오히려 명료함과는 반비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 환청 체험은 라디오를 듣는 정상적인 청각 체험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후에 논의하겠지만, 꿈이나 섬망, 즉 이른바 의식 장애 시에 나타나는 환각화 경향과도 전혀 다르다.) 이러한 분열병형 환청의 특성은 (앞서 설명한 "자칫하면" 성격을 포함하여) 여기에서 제시한 이론적 구조를 통해서만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한 '지각의 이인증화'에서는 지각의 내용적(도식적) 명료함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힘의 관계는 a>a’로 나타나는 구조가 보였다. 이는 진정한 '무'의 차이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체험적으로는 표상이 되지 않지만, 이 점에서만 보면 본래 표상이 지닌 성격(힘의 관계)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인증은 지각이 일부 표상의 성격을 띤 것이며, 즉 이는 "지각의 의사 표상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이인증 환자가 대상을 지각하면서도 "실감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표상 이미지라도 있는 것처럼……"이라고 보충할 수 있다.) 이것을 "표상의 의사 지각화"와 비교해 보면, 두 현상은 각각 진정한 지각과 진정한 표상의 속성 일부를 잃고 그것을 교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본래 지각이지만 균형 관계에서 a>b가 되고, 후자는 본래 표상이지만 균형 관계에서 a=b가 된다. 지각과 표상의 특성 대조와 균형 관계는 본래 평행하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교차하고 교환된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33~235
즉 우리에게 자명한 표상은 표상인, 지각은 지각인 그 감각이 반대로 있는 게 바로 '의사 지각화', '의사 표상화'다. 지각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그 '생생함'으로 유추하는 건 잘못이라는 게 야스나가 선생의 지적이다. 이를 좀더 체험에 따라 이해하려면 앞선 타원, 그러니까 체험 공간의 성질을 호출하는 게 도움될 수 있다.
앞서 표상의 체험 공간은 지각 체험 공간에 비해 왼쪽으로 몰려 있었다. 즉 '자'의 측면으로 수축되어 그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는 건, '표상'은 우리에게 있어 eE의 성격이 근거가 되는 것이고, 표상을 표상으로 느끼는 바로 그 감각의 출처는 eE에 있다. d를 근거삼아 '표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다소 이해에 무리가 갈 수 있는 부분을 나의 독단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eE에 가까운 표상을 우리가 체험할 때 표상을 표상으로 느끼는 그 미묘한 감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의미의 자발성에서 유도되는 감각이다. 반대로 대비해 생각하면 구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Ff에 할당된 '대상'의 지각에 있어 그 명료함은 바로 생생함, 그러니까 '외부에 있다'는 그 실체감이다. 이에 반해 표상의 생생함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실체감으로부터 지탱된다. 이는 지각 대상의 명료함을 파악할 때 삼는 '실제'와 다르다. 표상은 가상, 허구, 공상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내 안에 부유하듯 떠다니는 것이지만, 나의 a 에너지로만 지탱되기에 그것으로부터 '표상이 표상인' 느낌을 얻는다. 이 차이가 있기에 일반적인 체험 공간에서 우리는 표상을 표상으로, 지각을 지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꿈을 꿀 때 '지각'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기에 우리는 표상 공간에서 지각 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하지만, 깨는 순간 '지각'이 활성화되면서 즉각 '꿈이었다'고 느끼고, 현실적 구분이 작동되는 것이다. 즉 지각은 그 출처가 '외부'에 있다. 그것을 근거지우는 감각의 원천은 바로 '밖에서 들어오는 느낌'에 있다. 패턴으로 말해 eE→Ff에 있어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마치 마중나오듯 밖에서 나타난 그 방향이다.
따라서 야스나가 선생이 예시로 설명하듯 환자가 '망상 지각'을 겪었을 때 그 내용의 명료함(지각 감각)이 지각 확신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그 내용의 명료함이 우리로 하여금 '지각이다'라는 확신을 근거지운다. 그러나 표상이 의사 지각화된 것이기에 표상의 성격을 갖지만 '힘의 관계'가 지각적인 것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본래 지속적인 a 에너지로 지탱되어야 하는 표상이기에 그것이 힘의 관계가 지각적이라는, 그러니까 '밖에서 들어오는 느낌'으로 체험된다 해도 a 에너지로 지탱되는 정체이기에 환청을 듣더라도 그것을 명료하게 설명할 '대상'이 바깥에 없고 희미해지는 걸로 이해된다(또 a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주입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전제로 보면 망상 지각은 흩어지거나 산발적일 것이다). 지각 체험 자체라면, 우리는 그 대상이 바깥에 '그대로' 있기에 그것을 다시 보며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의 성격이 에너지로 지탱되지 않으면 곧잘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와 같은 '표상'이라면 그 체험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얘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제1공식에서의 '이인증'에서 '표상의 측면'이 가미되는 것도 이론적으로 도출된다. 기본적으로 표상이 a>a'의 성격을 지니는 한, 강제적으로 a 에너지 상승이 유발되기 때문에 표상적 성질이 더해지는 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정상 체험으로 비유하면, 어린 시절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나에게 난데없이 대답하라고 선생님이 지목하는 상황이 있다. 이때 당황하고 순간적으로 모두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그 체험에 따라 얼어붙는다. 이 과도함이 무언가 진행되면, 나는 유사 이인증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나는 그 강렬한 '실체감'을 마치 표상인 것처럼 희미하게 감각하기에 다소 여유를 되찾아 조금이나마 맞설 수 있게 된다. 이 유사 이인증 체험은 사실 매우 흔한 것이다. 이에 대해 꽤 많은 사례와 논의가 소개되는 부분도 있어 흥미롭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위의 예시에서 어린 내가 취한 태도 안에 '생존의 전략'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⑶ '망상 지각'과의 연결: 다음으로, 표상은 독립적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대상 지각과 협력하여 의미 표상으로서도 기능한다. 이 경우의 논의는 분열병 이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이는 기존에 매우 분열병적 현상으로 여겨졌던 망상 지각 현상에 대한 이론적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추론 자체는 이제 간단하다. 도식 3-13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지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도식 3-4에, 지각의 이인증화와 의미 표상의 의사 지각화를 겹친 것이다. 이중 의미 표상 부분은 의사 지각화되어 지각적인 체험 양식으로 변한다. 이는 주체가 그때그때 수행하는 의미 부여가 주체 자신의 표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 지각에 의해 강제로 주어진다는 방식으로 체험된다는 의미이다.
정상인 경우에도 의미 부여는 대상 지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해당 개인에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의미 부여가 이루어진다.) ... 분열병형 망상 지각의 경우, 병자가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이 항목에서 설명한 것처럼 '의미를 강제로 부여받는다'는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 "…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 상대방의 표정과 행동이 모두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생각하게 되는" 의미는)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지각 내, 즉 외부 세계 쪽에 있기 때문이다. "암시한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행동 등의 비언어적 표현은 통상적으로 명확하지 않고, 병자가 주장하는 "필연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병자 자신도 그 부분을 지적받으면 당황할 것이다. 행동의 어느 부분이 그러하다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일로, 본래 표상적 직관의 모호함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성이 나타난다. 병자는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라는 태도는 실제로 당연한 것이다. 표상의 의사 지각화라는 기제는 바로 이러한 역설적 형태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35~237
이 내용이 가장 핵심적이다. '망상 지각'이 어떤 성질을 띄며 어떤 구조로 인해 그러한 느낌을 자아내는지 도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는 태도'가 어떻게 체험으로 가능한가? 표상이 지니고 있는 모호함이 지각으로 의사 체험된다면, 그것은 실제로 당연하다. 우리가 지각 체험에 있어 지각 대상에 대한 '확신'을 느끼는 것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 힘의 관계가 자명할 때 우리가 말하는 '정상 체험'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관계가 역전된 것으로 스스로에게 자각되지 않으면서 나타날 때, 우리의 '정상 체험' 구조는 유지되면서도 이질적인 체험이 펼쳐진다. 표상의 모호함과 지각의 확신이 유지되면서 뒤바뀌는 것이다. 환우들의 진술 속에 '암시한다'는 뉘앙스가 저변에 깔리는 것이 어쩌면 실마리였던 것이다. 전인적으로 보면 그들은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꾸며내거나, 피해자라는 반사 이익을 꾀하거나, 사고 장애라거나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당연히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환우도 그럴 수 있다). 만약 있는 그대로로 그러한 체험을 알아볼 수 있다면, 불필요한 낙인을 찍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수동적 성격을 자아내는 '생각하게 된다'는 성격도 주의깊게 봐야 한다. 나의 개인적 이해에 따르면, 환청, 환각, 환시, 망상, 각종 분열병형 체험 일반에 깔려 있는 코드가 바로 이 수동성이다. 이 수동성은 곧잘 사동태로 전환된다. 일반 사람들에게 자명한 체험이 아니므로 나는 이 측면의 체험이 우리 정신에 얼마나 깊은 연관을 지니는지 마치 해명하고 설명해야 하는 입장을 자주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그러니까 내 정신으로 그려지는 세계에서는 이 '사동태'적 세계가 얼마나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지가 포착된다. 이 점에 대해선 여기서 다루지 않겠지만, 해당 논의에 있어 이해의 보탬이 될까 싶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분열병형 체험에 있어 사동태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이해는, 왜 '다른 성격'이 아닌 하필 '사동태'인가? 이며, 그것을 결정짓는 혹은 그러한 성격에 자주 유도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자발성'의 뒷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다. 즉 eE에 있는 근원적 힘인 그 자발성이 외부로 들어오는 힘의 관계로 뒤바꼈을 때, 그것은 자발성의 강력한 원천이 바깥에서 샘솟고 있기에 '강제성'으로, 그러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그 문법의 코드가 반전되어 '하게 된다'로 전환되어 체험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던 '할 수 있다'가 바깥에 놓이면 '하게 된다'로 전환되는 건 상식 선에서 이해가 쉽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발성,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타자라는 '내가 아닌 주체'의 자발성을 맛볼 때 그것이 대상Ff로 나타나면 '강제성'으로 자주 느끼는 체험은 흔하다. 특히 '감정' 관련해 공감을 강요하는 상황이 그렇다. 단, 지금 이러한 설명은 어쨌든 정상 체험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를 토대로 분열병형 체험을 이해하려는 건 맞지 않다. 괜히 설명한 느낌은 있지만, 주의하길 바란다.
망상 지각에는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즉, "지각"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만약 가설적 장애가 이 시점에 지각 영역까지 침범한다면, 이 부분은 이인증화되어야 한다(도식 3-13). 하지만 이 이인증은 주체에게 그 "소외감"이 직접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리된 지각 층을 대신할 만한 의미의 "의사 지각" 층이 존재하고, 이것이 일종의 이인증 공간의 내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a 공간의 끝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즉, 이인증은 잠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숨겨진 구조는 망상 지각의 임상에서 종종 그 실재를 암시한다. 이른바 망상 기분의 초기 단계에서, 외부 세계가 지각적으로 변모하고, 이상하게 소외감을 느끼며, 일상적으로 안심할 수 있었던 친근감이 사라진다. 이전에 부여되었던 매우 평범한 의미 체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해체되거나, 그 통합이 어려워지고, 병자 자신도 그것을 이상하게 느낀다. (이러한 현상을 마토우세크(Matousek)는 "자연스러운 지각 연결의 이완"이라고, 우치누마(内沼)는 "지각의 비규정화"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태에서 뒤이어, 무언가 팽팽하고 충만한 이질적인 공간 변동이 나타나며, 그 시점에서는 특이하게도 강렬한 의미가 외부로부터 전달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기에는 의미가 아직 특정한 형태로 결집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병자가 "… 주변이 마치 수중 세계로 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사람조차도 직접적으로 무언가가 교감하고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무언가에 의미가 부여된 이 과포화된 공간은 곧바로 특정한 개인적 의미 추정에 의해 구체적으로 채색된다. 급성기 망상 지각에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 그때그때 나타나고 사라지며, 일정한 경향이 없다. 이는 콤플렉스 등의 심리적 요인이 (중첩될 수는 있지만) 일차적인 원인이 아니며, 강력한 병리적 구조가 우세하고 지배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만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느끼는 이른바 "자기 관계 맺기" 성격만큼은 거의 항상 존재하고, 눈에 띄게 나타난다. 이는 상황 지각의 본래 성격이 드러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패턴' 역전의 전체 상황에서 "자아"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로부터 지목되어야 한다는 것(방향 역전)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지각 부분 F는 균열을 사이에 두고 이인증화되고, 그 뒤에는 의사 지각화된 가상의 B가 나타난다"라는 체험 구조를 여기서 ((AB))-F로 기호화해 두기로 한다. (이중 괄호는 그것이 의사 공간임을 나타낸다. 이 경우 특히 B 측이 그렇다. -F가 붙어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이것은 분열병 체험 공간의 기본 공식 제2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37~239
제2공식의 본격적 설명이다. 앞서 제1공식은 Af-F로, 이인증으로 대표되는 가설적 장애 유형이었다. 이 체험 공간은 지각 대상을 두고 역설적 균열이 발생한 것으로, 대상 도식F가 본래 f의 앞에 놓여야 했을 정상 상황에 역전된 체험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상에 실체감이 없게 느껴졌고, 대상은 형해화된 이미지로(도식적으로 표상의 인상이 가미된 상태로) 체험되었다. 반면 표상의 측면에서 벌어진 가설적 장애를 따라 '표상의 의사 지각화'가 발생되는 체험 공간은 표상의 모호함과 지각의 확신감이 뒤섞인 체험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자칫하면) 나타나는 체험이었다. 이 체험 속에서 주체는 본래 정상적이었다면 표상에서 수행하는 '의미 부여' 행위가 의사 지각화되어 지각 체험으로 '의미 부여를 받는' 성격으로 체험된다. 이때의 망상 지각에 있어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듯 '지각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물었을 때, 제1공식에서 체험되는 이인증과 달리 그 앞에 '의사 지각' 층이 놓여 이인증 공간 앞에 위치지워진다. 체험 공간으로 표한한다면 eE의 표상이 의사 지각화되어 있고 난 뒤 역설적 균열의 (-)이 있고 그 뒤에 F가 있는 체험이다. 이로부터 제2공식 ((AB))-F로 표기된다.
이를 좀 더 풀어내면 ((eE-Ff))-F가 될 터인데, 편리하게 패턴 AB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중 괄호는 의사 공간임을 나타낸다'에서 그 의사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주체의 체험 자체는 패턴적으로 같기에(다만 a'계의 탄성률 장애로 유도된 역전이 체험적으로 나타나지만 주체 입장에서 패턴적으로 문제가 없기에), ((AB))로 표기한 것이다. 덧붙이듯 핵심은 '특히 B측'이 의사공간화 된 것이다. 그러나 표상 측면에서 가설적 장애가 영향을 끼치므로 A 또한 묶여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제1공식에서 B면에 해당되는 부분이 f-F로 표기된 것을 비교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제1공식 Af-F는 이인증 체험을 유도하는 가설적 장애이고, 제2공식 ((AB))-F는 망상 지각을 유도하는 가설적 장애다. 각각의 공식에 해당되는 도식은 다음과 같다.
복기하자면, 기본적으로 a'계의 탄성체에 탄성률 문제가 발생한 것을 가설적 장애의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정상적이었다면 a와 a'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유지되어야 했으나, a'계에 단축이 일어나 '강도 저하' 그러니까 수직선으로 보면 밑으로 당기듯, a의 측면에서 봤을 때 미끄러지는 관계가 형성된다. 팬텀 공간 안에서 이런 a-a' 체계로 우리의 표상-지각이 이뤄질 때 발생할 수 있는 경우 중 '지각 대상'의 측면에서는 제1공식이, '표상의 의사 지각화' 측면에서는 제2공식이 도출된다.
가설적 장애가 적용되는 체험이 '지각'일 경우 이인증 체험처럼 '실체가 없는 형해화된 대상'을 체험하게 되고, '표상-지각'에 있어 의사 지각화가 발생할 경우 주체가 겪게 되는 '망상 지각'은 그때그때 출현하듯 종잡을 수 없으며 표상의 모호함을 지닌 지각에 의미를 부여받는 체험이 나타난다. 다만 도식의 해석에 근거한 이런 내용은 반드시 체험→도식이 출발이어야 하므로, 이런 내용은 '이론적 뼈대'로 가정하는 게 중요하다.
보다시피 제1, 제2공식은 모두 대상Ff를 향해 발생한 가설적 장애 체험이다. 따라서 '자'측에 있어 역설적 균열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인증화나 표상의 의사 지각화는 모두 '지각 대상'의 체험에 있어 나타나는 체험이었다. 여기에 우리가 이해를 한층 올리기 위해 덧붙여야 하는 논의는 바로 '의미 부여'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 체험만 보더라도 모든 표상-지각 행위에 따라오는 건 바로 '의미 부여'다. 아무리 무미건조한 지각 행위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내 앞에 모니터가 있다는 지각 체험에도 의미는 있는 것이다. 야스나가 선생은 이 의미를 보다 세분화해 4가지로 구분한다.
"의미"에도 여러 층이 있고, 그것은 논리적 도식 열을 이루어 체험선에 포함된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양적인" 의미는 우선 개별 대상의 이름, 사전적 개념 등이며, 생생한 체험 전체 중에서 질적인 부분을 가능한 한 버리고 남은 가장 기초적인 형태, 추상이다. 나는 이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 "물체 의미"라고 불렀다. 이는 거의 F의 끝에 위치한다(도식 3-14).
다음으로 개별 대상이 주변의 다양한 상황 구조 속에서 위치 지워지는 관계적 의미 파악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틀 의미"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눈앞의 책상이 "3년 전에 구매한 익숙한 것이고, 가격적으로는 중간 정도이며, 한 부분에 흠이 있는데 이는 언젠가 칼을 미끄러뜨려서 생긴 것이니 이상할 것이 없다"라는 일련의 인식이다. 이는 개별적인 양적 추상보다 더 개인적이고 질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반대로 말하면, 여기서 더 순수한 "양"이 추출될 여지가 있다.)
세 번째 의미는 그 대상이 "지금, 여기"의 상황에 따라 해석되는 의미다. 예를 들어, 같은 책상이라도 현재 상황에 따라 "지나가는 데 방해된다"거나 "천장을 청소하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상황 의미"라고 명명했다. 질적 요소가 더 높아지고, 도식적 순서로도 더 상위에 위치한다.
또한 네 번째 의미 층을 추가하자면, 그 대상의 "체험적 상징"적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책상에는 그곳에서 작업한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고, 사용하기 편리함과 맞물려 이 책상은 나에게 다른 책상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애착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질적인 것이며, 체험선 상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해야 한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40~241
이처럼 의미에 일종의 서열을 확인하는 건 우리의 일상 체험 속에서도 구분 가능하다. 기준을 자신의 A, 그러니까 질적 의미 감각으로 삼으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에서 무엇이 더 멀리 위치하고 가까이 위치하는지가 느껴질 것이다. 이것을 논하는 이유는, 앞서 가설적 장애를 말할 때 a 에너지의 격차-강도에 따라 의사 지각화의 정도 차이가 야기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면 매우 중요한 논의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 체험에 색채를 입히는 느낌이다. 야스나가 선생의 다음 설명을 보자. 임상 사례와 연결된 설명이므로 길게 인용하겠다.
이렇게 대략적으로 구분해 보면, 망상 지각의 임상에서 나타나고 문제시되는 것은 대부분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의미는 마토우세크가 급성 망상에서 두드러진다고 한 본질 속성(Wesenseigenschaften)에 해당한다. 급성 망상 기분 상태에서는 종종 이질적인 질적 강조가 체험의 전면에 드러난다. 아무렇지 않은 물체가 "엄청나게 아름답다"거나 "엄청나게 소름 끼친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감각은 일정하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면서 망상적 의미 부여를 수놓는다.)
그렇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 층은 어떻게 되는가? 가설적 장애가 아직 약할 때도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는 d 부분이 매우 적기 때문에 쉽게 의사 지각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본래 "양적"이고 지각과 매우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다시 의사 지각화되더라도 체험 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병적인 기하학적 사고와 연결될 가능성은 있지만, 망상으로서의 의미는 생기지 않는다.)
가설적 장애가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비로소 상황 의미가 의사 지각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망상으로서의 형태를 가장 취하기 쉬울 것이다. 이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다. 비전문가에게는 의외일 수 있지만, 망상 지각의 내용은 대개 그리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신문이 버려져 있는 것은 나에게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 무언가의 내용은 오히려 알 수 없어서 더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이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지각할 때, 상식적으로는 무시해도 될 사소한 일이 자신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므로 (즉 "자기 관계 부여" 현상), 그 점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원래 모든 지각은 한 번은 자신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며, 그 구조는 지각 안에 본래 잠재해 있던 것이다. 망상 지각이 망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이유는 그 의미 부여가 자신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그렇게 판단하게끔 강요받는 것으로 관계가 전환되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상식을 벗어난 집착, 즉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가 발생한다.) 결코 내용 때문에 망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을 단순히 말로만 들어서는 그것이 망상인지 단정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는 지금 언급한 전반적인 얽힘을 (이론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며, 그 전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처음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그것을 병적인 망상으로 진단하는 것이다.
네 번째 체험적 상징 의미가 의사 지각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대개 급성기의 극기, 즉 병세가 가장 심각할 때다. 이 점도 이론적 이해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 현상이 이질적인 이유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 위치한 것이 지각적으로 체험을 강요하는 강도 때문이다. 또한 그 내용이 순수하게 "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황 의미에서처럼 현실과의 불일치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급성기를 지나면 이 측면은 보통 소멸한다. 그리고 오히려 (급성기에도 혼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이인증적인, 양화된 감각이 망상 경향의 "기저"로서 인식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 때때로 망상적인 말을 꺼내는 병자가 평소에는 "머리가 구름에 덮인 것 같다"거나 "시간이 흐른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등으로 불평한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41~243
이는 풍부한 경험이 있는 임상의에게 확실히 이해될 내용일 것이다. 다만 나같은 일반인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내용이다. 예전에 '르네의 일기'로 복간된 적 있는 조현병 환자의 일기라는 책을 통해 '상징 의미'가 어떻게 체험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급성기 증상을 보였고(조현병이 대체로 청년기에 자주 발발한다는 통계로 보면 희소한 사례라고 한다), 그녀의 '상징 의미'의 병적 체험을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기술해주었다. 그것을 읽다 보면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이 생생히 이해된다.
또한 이러한 가설을 통해 이해 가능한 체험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도식, '이해의 틀'이 없었다면 분명 갈피를 못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르네의 사례에는 세셰이예 박사라는 탁월한 전문가가 있었기에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너무 특별한 행운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있어, 그리고 발발하고 만 조현병 환자에게 있어 그런 행운이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는 아마 절망스러울 것이다. 이론의 역할은 그런 현실적 허들을 낮추는 데 있고, 우리 모두가 세셰이예 박사 만큼의 언어-상징화에 고도의 감각을 갖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불필요한 편견은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대상을 향한 의미 성격의 서열은 우리네 일상에서도 무척 중요한 내용이다. 앞서 의미화가 우리네 정신 건강에 얼마나 깊은 연관을 자아내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떤 '의미'가 자신에게 보다 더 깊은지를, 그 중요도가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의 삶 속에서 혼동하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자. 저출산, 남녀갈등, 정치 갈등, 세대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 희망의 포기, 1인 가구, 과도해진 개인성-진정성, 끝이 없는 부채-자본주의 등 한 개인에게 있어 '의미화'에 위협적인 '지각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 일반 사람들이 호소하는 모든 문제 의식은 그 자체로 모두 타당하고도 진솔한 것이다. 그에 따른 보상 행위로 나타나는 면모도 마찬가지다. 과거 문명 공동체가 결혼-가족이라는 모델로 제시했던 '의미'가 퇴색된 오늘날,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현대적(소위 젊은이들의 대안적) 삶 자체는 아마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도시 네이티브-디지털과 같이 자란 세대로서, 또 철학과 더불어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시대별 문제의식을 접한 한 시민으로서, 우리네 정신에 근원적인 '의미 부여 능력'이 있기에 그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입장에 도착했다. 나는 우리 정신에 그러한 '부여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시대에 맞춰 그러한 의미화를 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융의 '상징'을 읽으며 그런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지각 대상'은 필수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게 뭐가 됐든, 우리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의미화',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필연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 의미, 상황 의미, 틀 의미, 물체 의미는 각각 우선시 해야 하는 서열이 있다. 특히 우리는 '상징 의미'를 무엇보다 가장 질적인 타자에게서 구축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진정 생생한 것이 된다. 우리 정신의 이러한 역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자기 삶의 여러 험난함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융의 경고이기도 했다...
여하간 이런 내용은 여기서 이만 줄이도록 한다. 망상 지각에 있어 의미 서열에 따른 체험 양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논하는 야스나가 선생의 말을 보면, 우리가 비록 스스로의 체험으로 겪을 수는 없지만 '망상 지각'을 체험하는 한 정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가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추가로 야스나가 선생의 말을 읽어 보자.
어쨌든 병자에게 망상 지각은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상황이다. 한편으로 그 이질성이 병자를 불안으로 몰아넣지만, 다른 한편으로 외부 세계가 의사 지각화된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그 강도는 엄청나다. 어느 병자는 "이것이야말로 경험입니다! 이전의 것은 경험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표상의 불가사의함이 지각 층을 덮고 있는 반면, 진정한 현실 지각은 이인증화되어 색이 바래고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병자의 병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다만 병자가 병식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체험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분명히 지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성적으로는 상식적인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물론 당신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겠죠.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다른 이유로 인한 병식 결여의 유형은 또 나중에 다룰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병자가 체험하는 세계가 어떤 움직임을 하고 있는지 잠깐 살펴보자. 지각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표상 이미지는 외부로 흘러가 지각의 끝까지 이탈한다. 이것은 제1 공식인 Af-F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향이다. 이 현상은 병자의 생각(표상)이 즉시 외부 세계에 실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의사 지각화되어 체험되는 것), 병자 자신은 여기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낄 수 있고, 심지어 초능력이라고 여길 수 있다. 의사 지각화된 층은 마치 마법의 거울처럼 병자가 생각하는 것을 반사한다. 병자는 그 마법의 궁전에 갇힌 포로다. 하지만 그가 갇혀 있다는 사실은 체험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무(無)'의 자유를 잃은 구조로 인해, 콘라트가 말한 '넘어서기'(Überstieg)를 할 수도 없고, 탈출할 길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단편적이고 끝이 없다(결말이 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병자가 망상을 믿고 현실에서 활동하면 즉시 어떤 장애물에 부딪힐 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의사 지각화된 운동 자체가 끊임없이 붕괴하는 모래 위에 있는 것이다. 발을 헛디디는 쳇바퀴 속의 햄스터나, 개미지옥 구멍에 빠진 개미처럼 병자가 바라보는 하늘은 무의식이 포함된 그의 마음 전체가 투영된 어두운 하늘이며, 미약하게 암시되는 어떤 것 너머에 누군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그 '누군가'는 사실 그 자신이다). 그 끝이 없는, 불쾌한 순환 속에 그는 갇혀 있다. —— 병자 자신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있다. 이 미세한 감각을 통해서만 병자는 의사에게 의지할 수 있으며, 의사는 병자를 도울 수 있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43~245
추체험의 역량에 따라 이 서술은 다르게 와닿을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가... 단순 그러한 주체의 체험을 멀찍이 바라보는 데서 오는(마치 비극 무대를 관람하는 관객같은) 감정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단편적이고 끝이 없다'는 데서 분명 주체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그러나 너무나 매혹적인 유혹으로도 느껴져 그것이 스스로에게 마치 '자기 실현'인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중성에서 소진되고 또 소진되는 나날... 앞서 잠시나마 인용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어째서 환자들이 치료를 잘 받다가 중간에 '병이 다 나았다'고 말하거나 갑자기 재발하듯(돌아가듯) 행동하는가를 두고 나카이 선생은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는 히말라야에서 조난당해 산 정상 쪽으로 도망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발달이 많이 된 인간이라 하더라도 무관하게 노출되는 어떤 '취약함'이 도사리는, 우리 인간 본연의 '역설'이 잠재되어 있다고 느낀다. 융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개성화 작업'은 단순히 매혹적인 '자기 실현'이 아니었다. 이 메시지에 함축된 내용은,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진정 하고 싶다'는 바로 그러한 eE의 성취-실현,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그 공리에 따르다 '자기감'에 과도하게 빠지는 상태는 인간 본연의 정신에 내재된 일종의 함정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길러져야 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편한 말로 '자기 관찰 능력'이라고, 소위 '자성 능력'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미세한 감각을 통해서만 병자는 의사에게 의지할 수 있으며, 의사는 병자를 도울 수 있다'가 말하는 것이다.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그 미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치료의 길이 열린다. 이 길을 나는 '현실'의 길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길이기도 하다.
이로써 제2공식에 대한 내용은 끝났다. 간략히 요약한 내용이지만, 다음 공식으로 넘어갈 차례다. 배가 고파져서 그런지 사변이 달라붙는 걸 보아 여기서 잠깐 끊고 가는 게 맞는 거 같다. 다음은 제3공식인 E-eB를 다룰 차례다. 이 공식은 앞선 제1, 제2공식과 달리 '자'측인 eE에 역설적 균열이 발생한 가설적 장애다. 조현병 환자 입장에서 이해해 보면 참 잔인하다고 느껴지는 체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다루겠지만 야스나가 선생은 사람마다 E형, F형으로 부를 만한 기질적 성격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건 아니겠지만, 분명 특정 시기에 사람은 그런 면모를 보다 부각시키며 나타낸다. E형 사람은 아무래도 E형 가설적 장애에 취약하고, F형 사람은 F형 가설적 장애(제1공식과 제2공식)에 취약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E형에 가까운 인간이라서, 아무래도 개인적 체험으로도 이해가 좀 더 가닿았던 측면도 있다. 이 글은 이만 줄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