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는 다른 물구나무로 섰고 (3)
24.12.23
(2) 가설적 장애 유형 4가지
(c) 제3공식 E-eB - 사로잡힘 체험, 의사 놀이성
다음 가설적 장애 공식은 제3공식 E-eB다. 앞에 서술한 제1공식, 제2공식이 패턴 AB에 있어 B단에서 장애가 발생한 것이라면, 제3공식과 제4공식은 A단에서 장애가 발생한 유형이다.
제1공식 Af-F와 제2공식 ((AB))-F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체험 거리 체계가 '어긋남이 발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 어긋남을 주체는 B단에서 처리하려고 했으며 결국 대상 도식F가 밖으로 빠져 나가는 상황이 나타났다. 표현상 미묘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야스나가 선생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다시 복습하자면, 제1공식에서는 동일해야 할 a와 a'에 어긋남이 발생하고, 제2공식에서는 달라야 할 a와 a'가 균형을 이루는 듯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처럼 B단에서 어긋남을 처리하려 할 때 발생한 장애 유형에 반해, 만약 A단에서 그 어긋남을 처리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제3공식 E-eB다.
이 어긋남이 A 단에서 처리될 수도 있음을 도식 3-15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e를 앞으로 전진시켜 자(기준, 척도 ものさし)로 잰 끝을 계속 B 단에 맞추면, A 단 쪽에서 어긋남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 다시 생각해 보면 체험 공간은 늘어나고 줄어드는 하나의 자폐 공간이지만, 그 자체에는 절대적인 위치라는 것이 없고, A와 B 사이에도 상대적인 관계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A에 비해 B를 가까이 하거나 멀리 두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으며, B에 비해 A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특히 '표상 공간'의 경우, 이 둘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일반적인 외부 지각의 경우, 경험적으로 정리된 외부 세계의 '도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그것에 비추어 보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 경우에도 결국 간편성과 합리성을 위해 그렇게 된 것이지, 어느 한쪽에 절대적인 '진리'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자연과학 도식 간에서도 태양계를 다루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식과 코페르니쿠스의 도식 사이에는 간편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A 단에서 어긋남이 발생한다면, 이탈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그 방향은 어떻게 될까? B 단에서의 대상 이미지(대상 도식 F)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 A 단에 있던 것은 자아 이미지, 혹은 '자아 도식' E여야 한다. 이 경우, 의식의 평소 모습에서는 자아 도식 자체가 대상화될 수 있는 위치에는 있지 않지만, 기능적으로는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탈하는 방향은? 기준선의 화살표를 살펴보면 그것은 e의 뒤쪽으로 향한다. 이는 단순히 공간의 내부와 외부의 문제만이 아니다. 도식 열의 상위, 경험의 근원으로부터 더 깊은 근원으로 이탈하는 것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46~247
야스나가 선생의 '팬텀 공간론'에 대한 논평 중 이와 관련된 비판적 의견이 있었고, 이에 야스나가 선생은 답변을 한 적이 있다. 문제 제기는 이것이다, '체험 공간 도식 안에서 '자'측이 이동된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즉 E-eB 성립이 가능한가?이다. 이에 대한 야스나가 선생의 답변은 위 발췌 중 두 번째 문단에 해당된다. 다만 이는 이해가 다소 어려운, 난해한 내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야스나가 선생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의 내용도 이 부분에서 발생했다.
체험 공간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한다'는 공리를 어기지 않으면서 '자'측이 이동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확실히 철학적 문제로 다뤄질 수 있을 만큼 어려운 문제다. 다만 내가 이해한 바로 최대한 부연을 붙여보겠다.
먼저 정상 체험 도식에서도 'A단의 이동'이 발생한 체험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는 게 필요하다. 이는 야스나가 선생이 따로 다루지 않은 내용이지만, 팬텀 공간론을 보며 약간의 무리로 내가 확장한 내용이다. 앞선 글에서 표상-지각 체험에 있어 의미 부여가 진행되는 체험 도식을 설명한 적이 있다. 당시 표상은 a 에너지의 여분, 그러니까 a>a'의 체험이기에 체험 공간이 '자'측으로 줄어든 형태로 나타났다. 그때 우리의 실제 체험이라면 지각 대상일 때는 그에 상응하는 체험 공간이 펼쳐지고 표상일 때는 상대적으로 신축된 체험 공간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이 신축된 체험 공간이 앞으로 이동될 수 있느냐 하는 게 바로 정상 체험에서의 'A단의 이동'이다.
실제 우리의 정상 체험에서 그러한 도식을 도출해내는 게 참으로 미묘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몰입의 두 양상을 갖고서 설명해 보겠다. 일상 체험에서 겪을 수 있다시피 몰입에는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지각'에의 몰입이다. 80년대 언저리 이후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체로 공교육에 편입되어 자라므로 '수험' 체험을 겪게 된다. 이때 다들 알다시피 '공부'란 행위에 있어 '순수 몰입하는 공부 시간'이 따로 있다는 걸 체험적으로 알 것이다. 이것은 눈앞에 있는 지각 대상에 몰입하는 것으로, 자신의 질적 에너지가 분명 상승해 있긴 하지만 그 체험 공간 안에서 만큼은 자기 자신이 분명 희미해져 있다. 몰입은 기본적으로 '표상적 성격'이 무척 강하기 때문에 '지각에의 몰입'이라고 하면 조금 혼동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몰입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차이가 분명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 유형은 자기 자신에의 몰입으로, 연주나 노래, 그림 등 자신의 질적 의미를 표현할 때 나타날 수 있다. 이때의 상태는 분명 '지각'을 두고서 나타나고 있지만 대상은 마치 없는 것처럼, '자기 몸과 동기화된 듯' 희미해져 있다. 일상적인 용법으로는 '몰입'이나 '집중'이라는 말로 구분없이 사용하지만, 이 상태에 대해서는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다.
지각에의 몰입은 대체로 '자신이 흡수되는 체험'의 색채를 띤다. 이때 우리 정신은 외부 대상을 '학습'하는 일종의 받아들임을 나타낸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건 자신의 질적 의미가 아닌 지각적 실체의 의미다. 즉 우리는 '의미를 체험하는' 상태에 놓인다. 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공리에 있어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과 다소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능력과 만나 발현되는 체험이기도 하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유아들의 모방 능력을 떠올려도 좋다. 바깥을 향해 열려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 주체는 지각 대상의 추상 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마치 '표상 행위'를 하듯 지각 체험을 할 수 있다. 가설적 이해지만 수학자들의 '유레카' 에피소드도 이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자기 자신에의 몰입은 대체로 '자신이 샘솟는 체험'의 색채를 띤다. 이 또한 지각 대상과의 일체화, 소위 '몰아일체'라는 말로 이해하기 쉽다. 그 상태에서 발견되는 건 대상의 실체감이 아닌 자신의 질적 의미다. 미묘한 차이지만 '의미를 체험하는' 상태임은 같아도 전자는 '체험되는'의 성격이 짙다면, 후자는 '체험 앞에 의미를 내는' 성격이 짙다. 다소 철학적 개념처럼 다뤄진 점은 양해를 구한다. 즉흥적으로 꺼낸 설익은 설명이므로, 아마 하느니 만 못할 수도 있다.
말하고자 하는 건, 각각의 몰입 상태에 따른 우리의 체험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지각에의 몰입은 지각 대상이 확고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의 몰입이 어렵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몰입을 할 때 무언가가 지각되지 않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체험 묘사도 가만 보면 미묘하게 다르다. 조종을 하거나 운전을 할 때의 몰입은 지각 대상에 기울어져 자기 자신은 점차 희미해진다. 그러나 그 기체와 한 몸으로 느끼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반면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할 때의 몰입은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져 지각 대상은 점차 희미해진다. 이때의 도구들이 우리에게 한 몸으로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두 양상에 따라 우리의 체험 공간은 분명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나의 설명이 부적절하고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죄송한 일이지만, 야스나가 선생이 말하는 'A에 비해 B를 가까이 하거나 멀리 두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으며, B에 비해 A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체험 감각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정신에는 분명 그러한 상대적 체험 감각이 일상 체험으로 있으며, 주체는 단지 그때그때 아무렇지 않게 겪을 뿐이겠지만 차이는 있는 것이다.
단 가설적 장애의 경우를 말하고 있으므로, 제1, 제2공식에서 나타났던 체험 공간과 달리 a'계의 탄성률 저하에 따른 정신의 처리 방식이 A단에서 벌어질 때가 제3공식 E-eB인 것이다.
(정 이해가 안 간다면, 최대한 상식에 맞춰 '일단 그렇다 치자'는 방식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우리는 예술에 재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왜 저렇게 흠뻑 빠져 연주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또 어떤 이는 수학에 재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추상적인 숫자를 갖고서 마치 살아 있는 대상을 다루듯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따라서 우리의 정신 안 팬텀 공간에는 표상-지각을 처리하는 방향에 있어 A쪽이냐 B쪽이냐 하는 방향으로의 어떤 '친화적'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고서 넘어가자는 의미다)
제1 공식 Af-F의 설명에서 대지를 밟는 발(단축)을 비유로 사용했다. 이번에는 벽을 밀고 있는 팔을 비유로 사용하려 한다. 이 경우에도 팔이 갑자기 단축되고, 주체는 그것을 모른다고 가정한다(물론 시각이나 다른 감각 기관에 의한 수정도 없는 것으로 한다). 이 경우, 발의 예처럼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지만,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손이 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몸 전체가 벽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기울어진 결과, 단축된 만큼의 틈은 주체의 뒤에 남겨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아 도식은 e의 뒤에 남겨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제3 공식을 “방치 효과"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 역설성은 (대상 극에서 나타나는 그에 상응하는 현상보다도) 훨씬 심각하다. 체험 공간은 본래 e가 E를 거쳐가는 화살표로 작동해야 했다. (사실 지금도——가설적 장애가 있는 지금조차도 —— 본질적으로는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체험 착각으로는, e(이것은 항상 체험의 출발점이어야 한다)의 뒤쪽에, 상위에, 교묘하게 틈을 두고 타화된 E가 있으며, 그곳에서 모든 것이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보이는 위치 관계가 형성된다. 이 구조가 제3 공식 E-eB이다(B 단은 이 상황에서 이상이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도식 3-16).
이것이 바로 분열병 증상에서 가장 기괴하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자아 장애", 특히 "사로잡힘, 시키는 체험”의 여러 측면을 규정하는 공식이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48~249
이 가설적 장애는 주체의 체험 공간이 대상 측에 고정된 채로 자 측이 당겨지므로 그 끝인 e가 E 뒤에 있어야 하나 앞에 놓이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 장애는 자아 도식을 둘러싸 진행되므로, 그 체험은 몹시 치명적이다. 다음의 설명을 보자.
예를 들어, 병자는 겉보기에는 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면서도 "이것은 내가 말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상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충동적 행동——즉 동기의 강렬함이나 억제력 부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분열병 환자도 그런 정상 범위의 충동적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행동조차 본질적으로 다르게 작동하는 "사로잡힘"의 구조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는 "사로잡혀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행동하는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그의 의식에 반영되는 한에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성립한다. 본래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것이 평온하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 아니, 이 체험 공간에서는 이 모순이 이론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중성"은 정상인에게 자명하게 존재하는 주체성, 자유,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 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구조다. 앞서 언급한 일반 대화에서의 "사로잡힘" 상황에서, 진료자는 병자가 언제 "사로잡혀서" 말하고 있고, 언제 자유롭게 말하고 있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가장 난처한 점이다. 병자에게 질문을 하면 "나는 말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혹은 "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입니다"라고 타인의 일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병자가 자기 마음대로 상황에 따라 선택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불성실한 것일까? 이전에 언급했던 "도회설(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설)”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자는 분명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정상인도 자주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가?),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제3 공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이 끊임없이——자신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뒤집히고 공허해지는 이 의식 구조에서는, 성실함이나 불성실함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병자가 외견상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자주 있다. (특히 파과형 정신분열병에서는 그 점이 두드러진다. 과거에 파과형 정신분열병을 명명한 헤커는 Albernheit에 대해 기술한 바 있다.)
이는 가장 심각하고 구제할 수 없는 인격 변화를 나타내는 징후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불성실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농담"의 즐거움이 없다. (농담을 하더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사로잡힌" 상태라면, 과연 그게 즐거울까?) 나는 그것을 "의사 놀이(연기)성"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인격"의 변질이 아니다. 이것은 질병이 의식 구조에 미치는 직접적인 변화로, 그 영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병리적 구조가 회복되기만 하면 쉽게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인격 변화"와 같은 무서운 개념은 아직 한참 먼 미래의 일로 남겨 두어도 괜찮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49~251
본래 정상적인 체험이라면 우리는 '나'를 의식하지 않고 체험을 겪는다. 때에 따라 자신의 '자아 도식E'를 표상 대상으로 삼아 자기 반성을 하든 관찰을 하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황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있어 '자의식'의 자명함은 부정될 수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게 e의 실체감이라고 가정한다. 자아 도식E는 우리에게 단일한 것이 아니고 복잡한 것이다. 추후 다루게 되지만 대상에 대한 의미가 4가지가 있듯 자아에도 4가지 의미가 서열화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알 수 있듯 가장 내밀한 자기 자신, 애인이나 가족에게 내보이는 자신, 친구에게, 사회에서(일을 할 때) 내보이는 페르소나 등 다채로울 것이다. 그 중에서 '진짜' 자기 자신을 딱 하나 집으라면 무리한 요구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질적 의미'의 강도 측면에선 당연히 가장 내밀한 자기 자신으로 갈수록 더 진실되게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자아 도식은 없는 게 아니요 단일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상 도식F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형체'라고 말할 수 있다면, eE여야 했을 체험 공간에서 그것이 뒤바껴 E-e로 체험된다.
제1공식 Af-F에서 대표적인 임상 사례인 이인증에서 대상의 실체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핵심이었다. 그 대상이 이제는 '나'다. '사로잡힘'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 부분은 본래 자기 자신의 실체감이 배후에 있는 '나'여야 하나, 그 실체감이 배후에 없는 텅 빈 '나'가 먼저 있고 e가 있으므로 그 나의 자발성을 근거지을 무언가의 부재로 인해 텅 빈 것을 '시켜서 하게 된, 사로잡혀서 하게 된' 듯한 느낌으로 체험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본래 eE였다면 자발적인 느낌이어야 하나, 그 자발성이 결여된 채로(그러나 '무언가를 하기는 하기에')그 하고 있는 행위의 실체가 그 안에 없다는 오류의 처리인 셈이다. 이는 상대가 보기에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의 '주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우리에게 당연한 근거로 자리해 있기에 손쉽게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바로 그 '주체'의 조건이 다르다면 말이다.
특히 '책임'의 문제는 조현병-범죄에서 가장 큰 논쟁이자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여기서 다룰 내용은 아니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 상황에서 보다 복잡하게 흘러가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란, 본래 원투영을 통해 타인의 자아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타인의 자아 도식(타자 도식)을 E'로 기호화하려 한다. 그러면 정상 상태에서는 E'가 거의 E와 동일한 위치에 있고(엄밀히 말하면 E보다 약간 아래에 있으며, 물론 e보다 아래에 있다), E와 동등한 형태로 항상 작동한다. 하지만 병리적 상황에서는 역시 e의 뒤쪽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e의 배후에 있는 자아 외 공간에는 E와 E’(복수일 수도 있다)가 뒤섞여 있으며, 자신의 E조차도 "타자화"되어 마치 다른 자아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둘의 역동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주체는 그보다 상위에 존재하는(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일반적인 타자 자아"라는 모호한 존재에 의해 온전히 감싸여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환자는 종종 타인이 "자신을 장악한다", 타인에게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을 하며, 더 나아가 "끌려가서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마치 그 타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종종 “나, ○○(다른 사람의 이름)이에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가볍게 보면 "연기"로 보일 수 있지만, 심각하게 보면 "빙의 현상"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인성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빙의와는 완전히 다르다. 대부분 일시적으로 발생하며, 눈앞에 있는 타인의 모습에 직접 자극을 받아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는 매번 단편적인 현상일 뿐이며, E'의 내용은 그때마다 달라진다. 의식 상태도 전혀 다를 것이다(심인성 빙의의 경우처럼 그 상태에 몰입하거나 나중에 기억 상실을 남기는 의식 상태와는 다르다). 그 배후에는 '시키는 경험'과 같은 구조가 존재한다. 나는 이를 "의사 빙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현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공식을 도출해야 한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51~252
부연이 필요한 부분은 E'에 대한 설명일 거 같다. 이는 쉽게 말해 우리가 동일시하거나 투사, 공감할 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영화 속 주인공에 강력한 몰입을 한다고 치자. 그때 당신의 체험은 표상 성격이 강할 것이며, '마치 나인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 대상이 F로 나타났어도 마치 자아 도식 E인 것처럼 체험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나'는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배우가 한 캐릭터를 몰입해 연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한까지 동일해진 E=E'일 순 있어도 절대 그것이 자신보다 배후로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배후로 넘어가면 그는 지금까지의 '나'가 페르소나로 밀려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인간 정신은 가공할 에너지로 그러한 극한으로 나아갈 순 있겠지만 일반적인 건 아니다. 따라서 설명처럼 정상 체험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강력한 추체험을 행할 때의 체험 공간은 eEE' 순서로 이론적 위치를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복잡한 상황은 바로 '복수'일 때, 역전되어 실체성이 없는 나E와 덩달아 있을 때다. 우리의 정상 체험에서 이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eE가 아주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타인을 이해하고 몰입해도 우린 마치 '닻'을 느끼듯 '나'로 돌아온다. 그것은 당신과 한 몸이고, 타자 도식E'는 기본적으로 표상 체험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당신이 a 에너지를 계속 주입해주지 않으면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닻이 끊어졌다. 타자 도식E'가 표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닌 그 배후에 있다. 그것을 구분지을 e가 배후에 없다. 그러면 야스나가 선생의 설명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말하는 다음 공식은 제4공식 E-((AB)), 의사 빙의다.
(d) 제4공식 E-((AB)) - 의사 빙의
이는 제2공식 ((AB))-F에 대응하는 A측 현상으로서 E-((AB)) 공식이다. 야스나가 선생은 '자아 도식의 의사 자극화'라고 말한다. 이후 설명에서 '자극'이 나오면 stimulate가 아닌 자극自極을 의미한다. 이 극은 북극 남극할 때의 극Pole이다. 자아 도식에도 앞서 잠깐 언급했듯 의미 서열이 있고,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상 의미의 도식에 여러 층(서열)이 있는 것처럼, 자아 도식에도 세밀히 들여다보면 층이 존재한다. 우선 가장 상위에 있고, 정상 상태에서는 e와 일치하는 것을 "극자아 도식"이라고 부른다(참고로 이것은 도식으로서의 극자아이며, (E)pol로 기호화해야 할 것이다. 제3 공식에서 먼저 배후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매번의 살아 있는 경험의 기준점, 즉 현재 기능하고 있는 현상학적 자극 e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물론 e와 (E)pol이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 즉 정신적 기능의 개인적 특성의 묶음으로 볼 수 있는 자아 도식의 수준을 "정체성 자아(도식)"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는 e보다는 약간 하류에 있다(e에서 보면 '패턴' B로서 대상화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즉, 내성할 때 보통 떠오르는 자아 이미지가 이 수준의 것이다). 이 내부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로 통합된 것만은 아니다(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른바 교대 인격처럼 두세 개의 단위적 통합체가 잠재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들을 하나로 묶어 부르기로 한다. 그보다 더 하위에는 상황에 따라 주체가 의식적으로, 때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역할 자아(도식)"라는 것이 있다. 이는 주체가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체험 상징적 자아(도식)"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자신을 늑대에 비유하거나 바람에 비유하는 것처럼), 이 도식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일정하지 않다. 때로는 정체성 위치에 준할 수도 있고, 역할 위치에 준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약간 하류의 E 도식들에 대해서는, 주체가 상상 속에서 그곳으로 진출하여(e가 상상적으로 그곳에 일체화하여—원초적 투사—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상을 가깝게 다가가는 형태의 표상과 상응하는 형태가 되지만, 여전히 표상의 일종이다. 무(無)의 거리 d는 진출한 e의 앞부분에 발생한다(도식 3-17). (소괄호 하나가 원문에서 오탈되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나 '기능하는' 앞에 끊는 게 적절해 보인다.)
이 의미 설명을 읽고 다음의 내용을 같이 보자.
문제는 가설적 장애가 있는 경우, 이 자아 도식들의 어긋남이다. 제2 공식에서는 표상이 B 방향으로 어긋나 의사 지각화되고 d가 사라진 것처럼, 여기서는 자아 도식이 A 방향으로 이동한다. 자아 도식이 e와의 사이에 있던 간극(대상 표상에서 d에 해당하는)은 점차 사라지고, 결국 그 간극이 사라져 e와 일치한다고 착각하는 지점에 도달한다.——그리고 그 지점을 넘어서면 e의 배후로 벗어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은 발생하기 쉬운 순서로 보자면, 먼저 정체성 자아가 영향을 받고, 이어서 역할 자아로 진행될 것이다. 전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d가 사라지고, 여기서 a=b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인격 내에 어느 정도 존재하던 내성, 자각 가능한 구조,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던 여유, 흔들림, 망설임…… 같은 인간적인 정서의 존재 여지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자기완결적이고 정서 없는 기계 인간 같은 무미건조함의 인상을 주게 되며, 이러한 전환과 도약의 불가능함에서 병의 흔적이 보일 것이다. 더군다나 극자아 E의 배후화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수반되므로, 아직 배후에 "인격" 상이 결합되지 않았지만, '시키는 체험’의 양상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도식)이 자기 자신에게 의사 빙의하는 형태이며, "자→자 의사 빙의"라고 부를 수 있는 유형이다.
역할 자아가 e와의 간극을 잃으면, 상태는 더욱 병적이 된다. 동일화된 이미지가 이미 역할이라는 형태로 타자적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예처럼, 그 순간의 현실적인 외부 압력에 따라 타인의 이해 이미지 E'가 의사 빙의화되면, 단편적으로 출현하는 '타→자 의사 빙의'의 형태가 된다. 더 나아가 '타→타 의사 빙의'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도 이론적으로나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특정 타자 이미지 E'가 또 다른 타자 이미지 E''를 통해 이해되는 경우, 타자 이미지 간에 의사 자극화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물 오인 망상의 일부, 특히 프레고리형(같은 악당이 다양한 지인으로 변장해 나타나는 형태)은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 [精神の幾何学], 安永浩, 1987, 岩波書店, p254~256
정상 체험에 근거해 보면 도저히 감도 안 오는 체험으로 보일 것이다. 자→자도 쉽지 않은데 타→자를 넘어 타→타라니. 그러나 표상의 의사 지각화를 설명할 때 본래 a 에너지의 상승분에 따른 차이 d가 a'계의 탄력 저하로 a=a'인 것처럼 느껴져 지각화가 되듯, 자아 도식의 '의사 자극화' 또한 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 '자극화'가 진행되면 자신의 자아 도식 E는 철저히 e가 사라진 채 '정서 없는 기계 인간'같은 인상을 나타내게 된다.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왜 우리 인간은 '정서 없는 인간'에게 '불쾌한 골짜기'를 느끼는지, 그 감정이 왜 다른 게 아닌 '불쾌감'인지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특히 카를 차페크가 탄생시킨 '로봇'도.)
제1, 제2공식에서 설명했듯 a'계의 탄성체 탄력 저하의 정도가 심할수록 a 에너지의 격차 d의 상승 정도를 그만큼 손실시켜 대상 의미의 서열에 따라 일련의 증상이 나타남을 언급했었다. 마찬가지 자아 도식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자'측의 끝단인 e보다 멀수록, 각각의 증상이 나타나지만 제2공식 ((AB))-F에서 '상황 의미'가 망상 지각에 취약했던 것처럼 '역할 자아'가 의사 빙의에 더욱 병적으로 나타나는 걸 알아볼 수 있다.
또한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되는 '프레고리형'은 망상 유형의 두 가지 중 하나로 주로 분류되는 유형군이다. 한쪽은 '카프그라형'이 있다. 이 설명은 검색하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야스나가 선생이 정리한 분류를 아래 인용해두겠다. 본래 원문에서 표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브런치에 옮기는 입장이므로 간단히 기재해두겠다.
카프그라형과 프레고리형의 "유형"적 대비
"가짜"로 여겨지는 대상: 카프그라형(극히 가까운 가족{특정, 단수적}) / 프레고리형(우연한 지인 일반{불특정, 복수적})
"진짜"로 여겨지는 대상: 카프그라형(바람과 일치, 이상화, "자기"와 유사, 유령적이지만 실감이 있으며 복수화 가능) / 프레고리형("원흉"이나 "정체불명"적, 실체 파악 어려움, 단수화 경향)
두 존재 간 관계: 카프그라형(공존하며, 간접적 관계{닮았으나 "다르다"가 강조됨}) / 프레고리형("진짜"가 "가짜"를 직접 지배, 조종하며 "다른" 것이 "하나의 실체"로 융합되는 점이 강조됨)
기타: 카프그라형(종종 자신의 내력을 부정하는 망상을 동반)
- [ファントム空間論の発展], 安永浩, 2018, 金剛出版, p51
야스나가 선생은 자신의 가설적 장애 유형을 통해 임상 사례, 증상들을 충분히 설명(폭넓게 설명)하므로 이런 유형 또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상으로 모든 가설적 장애 유형에 대한 소개가 끝났다. 야스나가 선생은 '기타 분열증 증상'에서 환청, 사고 장애, 만성 양태 등을 공식을 활용해 이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특히 분열증 증상의 경계 영역으로 임시 설정한 의식 장애, 신비 체험, 강박증, 감정형 의식, 비현실감, 편집증 등은 [팬텀 공간론의 발전]에서 사례와 함께 폭넓게 다뤄지고 있으므로, 공식에 기반해 이해하면 보다 깊이가 더해질 것이다.
해당 시리즈는 전문의를 대상으로 설정된 게 아니고(당연히 나에게 그럴 자격도 없고), 무엇보다 개인적 시간 한계가 있으므로 최대한 줄여서 다루고자 했다. 만약 여기까지의 내용에 더하거나 잇는다면 야스나가 선생이 들어준 사례와 더불어 같이 '가설적 이해'를 넓히는 내용이 남아 있다. 또한 언어 구조주의에 있어 '패턴'적 사고방식으로 보는 비판적 관점도 유의미하다. 야스나가 선생 본인은 계속 '철학자'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낮추며, 그런데도 할 말은 과감히 하는데, 뭐... 나도 당연히 어디 전문적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철학 공부를 이어가는 입장에서 야스나가 선생의 관점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 또 타인의 눈높이에 맞추는 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일반 철학 책보다는 훨씬 명료하고 단순하다. 그렇다고 논리가 허술한 것도 아니다. 여하튼 언젠가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야스나가 선생의 이론이 소개된다면, 한번쯤 읽어보면 재밌을 것이다.
정신병리학에 관심을 둔 지 9년이 흘렀다. 비록 욕심 만큼 몸이 앞서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야스나가 선생의 이론을 접할 수 있어 감사했다. 원래는 기무라 빈 선생의 책도 두루 읽고, 무엇보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책을 '읽을 거리' 삼아 나날이 읽고 싶었지만 역시 현실적 제약이 크다. 국내에 번역된 나카이 선생의 책은 단 두 권이지만, 다른 에세이들이 참 탐난다. 책을 끼고 산 지 14년이 흘렀다. 어느새부터 나에게 '읽으면 좋은 글' 같은, 취미로 삼을 만한 '읽을 거리'가 내 곁에 없었는데, 나카이 선생의 글은 그만한 구미가 당긴다. 글맛이 좋은 글을 읽고 싶다. 눈은 높아만 가지, 아는 건 늘어만 가지. 그래서 쓸데 없는 기준들만 증식해 나의 질적 의미가 메마르고 불감증에 걸려도 단단히 걸렸었다. 그래도 작년 융을 기점으로, 올해까지 나의 '의미'가 치유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 다행이다. 특히 올해의 책은 O.S.Wauchope의 [Deviation into Sense]다. 야스나가 선생이 왜 '차세대에 대한 기여'라고 말했는지, 자신 또한 그런 기여를 받았는지 이 무인도 같은 방에서 답신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어떠한 사적 인연도 없는 이 관계가 정신의 우연성이라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 '의미'가 결국 아직도 살아 있다니. 이제야 제 발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거 같다.
[팬텀 공간론]에 대한 나의 오만한 소개가 부디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오해와 오류로 연결되지 않았으면 싶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책임을 질 것이다. 다만 이 글은 초고 수준임을 알아주셨으면 싶다. 어떤 기획도 없이, 자료 정리도 없이 그저 자리에 앉아 더듬거리며 써내려간 글이다. 언젠가 정식적으로 책으로 만들게 된다면, 그때는 보다 섬세히, 재미도 더해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러지 않더라도 이 글은 나의 A→B에 따라 언제든지 내릴 수 있기도 하다. 다만 내가 알기론 한국에서는 어떠한 자료도, 그 누구도 소개하고 있지 않기에 과감히 용기를 내본 것이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뭐 세상엔 관심 대상이 수두룩하니 필요한 사람에게 도착될 수 있으면 그만이다.
한때 수열이 전염병일 때 그 정체를 몰라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유사 사례는 또 얼마나 많은가. 신체 질병뿐만이 아니다. 정신질환은 주체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가장 '나다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분리시켜 하나의 '부분'으로 다룬다는 게, 전체→부분으로 나아간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이라는 걸,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누군가의 진심어린 노고가 담겼다는 걸 느끼실 수 있다면 다행이다. 비록 요구되는 '이해 과정'이 까다롭고 추상적이라 말만 일반인이지 아무에게나 다 가닿을 수 없는 내용이란 건 잘 안다. 반대로 그렇게 손쉽게 민주화가 될 내용이었다면 그만한 고통과 괴로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신에 병이 있다 진단 받더라도, 자신의 일상과 함께 사는 사람과의 일상이 부디 온화하고 의미가 가득할 수 있길 바란다.
(불필요하게 덧붙이는 말이지만 인간 정신에 내재된 '공격성'과 '폭력성'은 정신병과 무관하다는 게 나의 오만한 주장이다. 손쉽게 정신병=범죄로 연관짓는 오늘날 사회 인식에 난 과감히 반대한다. 그렇지만 근대 법의 한계로 인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반인들의 관점도 이해한다. 비록 내가 거들 수 있는 현실적 개선은 없지만 일개 시민으로서의 본분은 지키며 살 것이다.)
*대문의 그림은 뭉크의 [태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