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39
26.04.18
23년도 8월 5일부터 시작된 꿈 기록이 어느덧 3년차가 되었다. 그간의 꿈 일지를 묶어 문서로 만드는 건 딱히 기준을 뒀다기보다 '한번 정리할 때가 된 거 같다'는 느낌이 들 때 했다. 지금까지 총 3개의 문서가 완성되었다.
지금 나에겐 개성화 일지가 3편 있다. 그간의 꿈-환상 이미지 기록을 정리하고자 이 일지를 남긴다. 글자는 총 15만 자다.
현재 나는 '어떤 상징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문장을 눈 앞에 세웠다. 처음 융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나의 의식 깊은 곳에는 '빨리 나만의 상징, 개성화, 자기 실현을 맛보고 싶다'는 성급함이 몸집을 키워갔다. 그 성급함은 자아의 현실 욕구와 맞물려 꽤나 끈질겼다. 인정과 과시, 구원 서사 등 영웅적 모티브를 불러일으키는 그 욕구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면서도 여전히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는' 자아의 면모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자아 욕구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파편으로는 그런 욕구를 눈치채고 억압하기 바빴다. 외면하기 바빴다. 하지만 전체를 보는 건 아니었고, 그렇기에 그런 대응밖에 못했으며, 결국 제자리 걸음이었다. 난 '자기 실현'을 오독했으며, 자기Self와의 접촉을 왜곡했다. 분리되어 있던 교만과 양심을 이제는 하나로 두려 한다.
나는 길을 걷는 자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발견했고, 영적 조급함이 일어 마치 자기의 빛을 나의 업적인 것처럼 여기려 했다. 자아와 자기와의 관계를 그르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돌이키지 않는 건 내게 중요한 태도다. 내가 발견한 심혼의 가치들은 아직 내 삶이 되지 못했다. 내 정신 속 아니마들은 항상 날 도와주는 안내자이자 조력자이자 제공자이지만, 나의 여정엔 나의 용기와 절제와 훈련이 필요하다. 또 나에게 부친 콤플렉스와 맞물린 중재자 역할이 과업으로 남아 있다. 난 여전히 나의 아비를 구하려 한다. 내 삶을 사는 걸 내려놓을 만큼 과하지는 않지만서도, 여즉 내 정신 심층에 나의 아비를 구원해야 한다는 그 사명감이 숨쉬고 있다. 그 환상 이미지가 공상으로 번질 때, 난 늘 언젠가 내 책을 들고 아비의 묘를 찾아가 약속을 지켰다고 말하는 장면을 그린다. 아비와의 마지막 약속. 마지막 믿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그 마음이 질기게 살아 숨쉬고 있다. 의식은 안다. 이 질긴 생명과도 같은, 기생 식물 같은 욕구가 나의 불안과 결핍을 먹고 자란다고. 나의 불안과 결핍을 뿜어낸다고.
중재자는 나의 정체성이다. 다만 나를 잃어버리는 문제로까지는 아니라 해도 분명 나를 바로 세우는 데 능숙한 건 아니다. 자칫 나를 뒷전으로 미루고 과해질 공산이 크다. 이 정체성이 부친 콤플렉스와 맞물려 있다. 내가 아비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내가 미성숙했기에 도와주지 못했는데, 이제야 힘이 되어줄 수 있게 되었을 때 죽어버려 완수할 수 없는 미완의 사명이 되고 만 자책감.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과업이 운명으로 자리한 것이다. 중재자는 나의 정체성이면서도 이 콤플렉스와 만나 마치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데 미완의 사명을 덜기 위한 자극으로 작동하기 쉽다. 내 의식은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역시 무의식을 이길 수는 없다. 내 정신의 상징이 내 삶이 되려면, 아비를 이제 보내야 한다.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더 이상 구해야 하는 사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 보내줘야 한다. 솔직히 난 아직도 그럴 수 없다.
나에게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벌써 몇 년인가. 콤플렉스라는 말도, 내 자아로는 분노가 인다. 이게? 뭐? 그렇게 함부로 말한다고? 뭘 안다고? 하지만 지금 이런 목소리조차 나에게는 분노가 아니게 됐다. 결국 떠나보낼 때가 된 걸까. 박박 긁어 얼마 남지 않은 독 밑의 물을 간신히 짜낸 눈물이 난다. 이 눈물은 분노도 아닌, 미처 꺼내지 못한 감정이 아닌 시간의 중력으로 가라앉은 추출물에 가깝다. 부친 콤플렉스. 꿈에서 늘 울분으로 아비를 구하려 했다. 반복해서, 아비를 붙들고 내가 살리겠다고 말했다. 도와줄 수 있다고. 하지만. 하지만 꿈에서 아비의 얼굴은 도움을 바라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내 감정만을 보기 바빴다. 아비는 그저, 그렇게 살다 갔다. 손 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는 여전히 내 삶을 살지 않았음을 고백해 둔다. 말의 오명을 무릎쓰고서 나를 내어놓는다. 상관없이. 내 정신은 계속 상징을 내게 보내온다. 그 상징들을 내 삶으로 받들지 못했던 건 내가 알아보지 못한 나의 불안, 공포, 두려움 같은 그림자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비는 나 때문에 죽은 게 아니다. 나는 아비를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불안해 했다. 결핍이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제서야 나는 아비를 떠나보낼 준비가 된 것이다. 남은 애도를.
이제 연습을 해야 한다. 아비의 삶을 떠나보내는 연습을. 더 이상 나의 과업이 아님을. 나를 바로 세워야 한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개운해지는 이 느낌은, 늘 나의 진정성이었다. 양심이자 영혼의 목소리였다. 소임을 다해서가 아니라 나의 소임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 놓친 기회가 아니라 지켜봐줘야 할 생명-죽음의 관계임을. 나와의 관계임을. 아비의 그림자. 나의 그림자. 아비의 그늘 안에서 숨어 산 것은 아니었다. 난 그의 빛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빛이 되려는 모양이 곧 나의 그늘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아본다. 이 모순은 자기와 자아의 관계와 닮아 있다. 자기의 빛을 자아의 빛으로 보려 할 때 그것이 곧 나의 그림자인 것과 같다. 투사는 우리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성능이자 삶이자 생명이지만, 투사를 걷어들일 때 그 생명은 비로소 제 위치의 생명이 된다. 같지만 다른 생명이 된다. 같지만 다른. 이 미묘함은 역시 언어 친화적이지 않다. 언어는 분명함을 사랑한다. 우리 인간이 언어를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 덕분에 친화적이지 않다는 걸 말할 수 있다. 언어가 있기에 언어 이전을, 너머를 말할 수 있다. 언어는 비-언어를 그림자로 두고 있는 빛이다.
내가 글 쓰기의 준칙으로 삼았던 정현종 선생의 말, 말에 대접받고 싶은 만큼 말을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말을 새기고 또 새겼을 때, 그 청춘의 시절 때 말은 내게 그림자로 인도하는 빛이 되어 주었다. 이제는 말이 나를 인도하지 않는다. 나는 말이 말로서 있기를 어떻게 하지 않는다. 말은 한낱 말일 뿐이면서도 전체가 되기도 하면서도 말놀음이 되기도 하면서도. 이 반복을 만들면서도 진리같은 금언이 되기도 하면서도 다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우리 정신의 여정과도 닮았다. 너무 선적인가. 난 그저 한낱 도구라는 걸 확신한다. 언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말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 원천이 정신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정신이 언어라는 옷을 입는 것조차 내게는 한낱이자 전부가 된다. 아비의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이를 알려준다. 관계란 이런 것이라고. 자아와 자기의 관계가 곧 세상의 관계임을 알려준다. 있는 그대로를 배우느라 내 일생을 다 쓰고 있다. 고작이면서도 전부다. 배워도 배워도 늘 새롭다. 이 즐거움은 날 14살 시절로 돌려 놓는다. 호수가 있는 오두막 집으로 데려간다. 난 살면서 이 나선을 진정으로 귀찮아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게 삶의 전부이자 생명이라고,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고, 숨을 쉬었던 것이고, 다음과 내일과 미래를,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껴왔다. 그저 그런 것이라고.
요리를 할 때 된장을 쓰라는 외할머니의 말을 이제 조금 알 것만 같다. 그동안 내가 시간을 들이지 못했던 나의 불안이 어디서 샘솟고 있었는지 알아보니 선명하다. 26년 4월 12일 보살피는 꿈을 꾸고, 4월 16일, 나는 거대한 크라켄 괴물을 잡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니마들은 내 곁에서 날 지켜주고, 에너지를 주고 동행해줬다. 난 낡은 권위를 이제 내 힘으로 제압한다. 그전까지는 동등하거나 맞서는 장면으로 꿈에서 나왔는데 이제는 필요하기에 폭력을 행사한다. 더 이상 남성의 폭력성이 마냥 열등한 걸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내 힘이 되었다. 써야 할 때를 알기 때문이다. 4월 17일, 이제는 범죄를 저지르고 일본으로 도주를 하는 꿈을 꿨다. 점점, 점점 이동 중에 있다. 내 정신은 계속 날 향해 '준비 됐어'라고 말해 왔다. 난 내 상징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여기까지 왔기에 가능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해야 하고, 지금이기에 할 수 있다. 난 이제 검증과 구현을 해야 한다. 뭔가의 증명이 아닌, 내 삶이 될 수 있는지를.
23년 8월 5일부터 시작된 나의 꿈 기록, 개성화 여정은 삶이 되고 있다. 15만 자의 무의식 언어는 그간의 내가 어떤 정신적 여정을 해왔고, 하고 있는지를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서야 내 안의 거대한 에너지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아직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거대한 크라켄으로 나타났고, 내가 죽여야 하는 괴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 괴물을 더 이상 괴물로 볼 게 아니라 이 힘을 다루는 걸 배워야 한다. 지금의 내가 깨닫고 있는 가장 중요한 건, 이 힘이 '내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대한 크라켄인 그 에너지는 내 힘이 아니다. 내가 마음대로 쓰는 그런 힘이 아니다. 난 그 힘을 다뤄야 한다. 아니마는 내가 그 힘에 맞설 수 있도록 흰색 팔찌와 검은색 팔찌를 무장시켰다. 크라켄이 날 공격할 때 내가 다치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어 도구였다. 게임 아이템처럼. 흰색 팔찌가 부서지자 아니마는 새로운 걸로 바꿔줬다. 난 크라켄과 맞서면서 한번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낡은 권위도 날 무조건 위협하는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는 날 돕기 위해 남자 3명이 내 편이 되었다. 꿈에서 참 많은 도움을 받는다. 이 여정을 위해, 내 정신적 존재들은 날 돕고 이끈다. 살리고 돕는 건 내 정신 안에서 너무나 당연히 벌어진다. 내가 하고 받는다. 오늘 우연히, 그러니까 아무런 상징도 계기도 사건도 없이 생뚱맞게 아비와 연결된 콤플렉스를 느슨하게 한 이 우연은 뭔가 며칠 전 꿨던 무지개색 나비를 연상시킨다. 이 나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연히 발견하는 방법 말고는 불가능했다. 꿈에서 나에게 그런 메시지를 줬다. 지나왔던 길이라도 우연히 발견해야 한다고. 그게 오늘의 콤플렉스가 아니었을까.
무의식은 참 많은 걸 알게 돕는다. 이 생명 덕분에 인간은 혼자서도 삶을 지닐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인간은 왜 '개인'이 됐는가?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건, 우리 인간이 열등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지금도 그 확신에 변함은 없다. 다만 우리 인간이 '개인'이 되도록 열등해진 데에 보상으로서 무의식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다리가 맞아 떨어진다. 이는 우리 인간이 포유류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자, 동물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생명이자, 조에, 즉 비천한 생명이기를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생명으로부터 가장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우리 인간이 다시금 생명일 수 있는 삶도 가능하다는 게 인간이라는 묘미라고 느껴진다. 인간의 세상은 오직 인간만을 가리키지만, 세상의 인간은 다른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다. 나는 이 전환이, 생명의 회귀가, 속된 말로의 '구원'이 오직 '개인'의 힘이라고 느낀다. 이는 교육과는 거리가 멀고, 누군가의 언어로는 도달될 수 없는 힘이다. 교육과 타인의 의의는 그런 표상에 지나지 않음이니. 그 가치 이상 이하도 아니다. 상징들은 은유보다 원천이다. 정말 많은 걸 느끼게 돕는다.
왜인지 꿈에서 자꾸 일본 토리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토리이는 내게 더 이상 경계가 아니라 하나의 문이 되었다. 날 거부하지 않고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계의 경계를 의미하는 토리이는 내게 하나의 말이 된다. 아비는 죽었다는 말. 한낱 말. 죽음을 조금 더 배운 기분이 든다. 죽음이 오직 생명에게만 도착한다는 철학적 시선은 내게 더 이상 가르침을 주지 못한다. 생명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는 워쵸프의 말에 배울 점이 남아 있다. 이 시선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떠나보낸다는 것은 무얼 가리키는가. 자기 앞에 자아는 죽음이라는 걸, 희미하게나마 느낀다. 생명으로서의 죽음. 오직 죽음은 없다. 반드시 생명으로서의 죽음. 이 죽음만이 죽음이다. 그 외는 인간의 죽음 뿐이다. 죽음을 아는 체 하려는 죽음 뿐이다. 갑자기 환상 이미지로 촛불 2개가 켜진다. 22년 3월 관악산이구나. 죽음으로 걸어갔던 꼭두새벽 관악산 속 불상 앞의 촛불이구나. 자기 자신을 태워 내는 빛이구나. 다시, 그 빛이구나. 내 무의식이 죽음이 그거라고 말하는 걸까. 자기 자신을 태워내는 빛이 죽음이라고. 아비의 죽음이라고. 생명으로서의 죽음이라고. 말이 된다. 한낱 말이.
그저 눈을 잠시 감고. 다시 내려가는 것이다.
어딘지 모를 일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