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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7. 2022

나의 동네, 상도 3

17.12.23


 1


 상도를 떠난다. 98년 5월 처음으로 상도에 당도한 이후 줄곧 벗어난 적 없었던 19년 동안 이사를 4번 다녔고 도중에 가족 한 명이 죽었다. 첫 이사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희망으로 이뤄졌다. 집이 생겼고 각자의 방이 생겼으며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네 식구가 살기에 충분한 평수와 남향의 포근함이 스미는 집이었다. 추운 겨울 손을 꽁꽁 얼려가며 집에 도착하면 야근을 한 아버지가 자상하게 웃으며 자신의 체온으로 덥힌 이불 속으로 손을 끌어 넣기도 했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항상 식혜를 끓여 나와 아버지의 입맛을 돋았고, 나는 가끔 옥상에서 못된 장난을 치며 친구들과 놀기도 했다. 하나하나 열거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기억들이 운마맨션이라는 거주지에 기입되어 있지만, 처음 이사를 올 때 들고 왔던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나야 했던 가족들은 두 번째 이사까지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사채업자들이 찾아오고 법원에서 발송한 우편들이 계속해서 찾아오던 운마맨션 402호는 우리 가족의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버지가 망가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만 했던 가족은 자꾸만 집을 위협하는 온갖 '빚'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빚들이 전형을 달리하며 우리를 괴롭히자 제정신으로 서있을 수 없겠단 아버지는 술병과 몸을 자꾸 바꿔쳤다. 한 번도 정신을 놓은 적 없던 우리는 이제 망가진 아버지에게도 시달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 이사를 마친 집에서는 칼부림과 살인 위협이 기대와 희망을 대신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어미에게 나를 버려달라고 애원했으며 어미의 속을 찢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항상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유치한 서구식 낭만을 읊조리며 우리로 하여금 불안을 덜어내려고 했으나 정작 자기의 불안을 도무지 마주할 수 없어 끊임없이 정신을 놓았다. 그림자에게 도망치고 싶어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불안증자처럼 그는 현실을 잊기 위해 자꾸만 정신을 마비시켰다. 그런다고 그의 어두운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데도. 그렇게 나와 누나는 어느덧 성인이 되고 말았다. 망가진 정신과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내일을 뺏길까 손에 쥐지 않고 입에 물며. 입을 꼭 다물며. 그동안 운마맨션에서부터 기르던 개가 새끼를 낳았다. 일주일이 채 안되어 새끼들은 아비의 손에 어디론가 다 팔렸다. 얼마에 새끼를 넘겼는지 누나는 서럽게 울며 물었지만 아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는 날마다 마시던 소주와 막걸리가 묻어있었고 누나는 여전히 개의 새끼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내가 스물이 되고 반 년이 흘러 세 번째 이사를 가게 됐다. 사정은 더 지독해졌고 우리는 더 이상 희망 따위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비도 더 이상 내일 따위를 혹여나 취기에라도 내뱉지 않았다. 저주와 재앙은 나의 안식이었고 죽음은 더할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했다. 다들 사연은 있는 거라고. 괜찮냐고. 어쩌면 나는 이때 처음으로 인간에게서 심연에 자리잡은 무구함을 발견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쏟아내도 쌓이지 않는 그 심연에, 나는 온갖 저주를 퍼부었었다.


 세 번째 이사를 가고 난 뒤로 아비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을 않던 아비는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여실히 보여줬고 우리는 그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발작이 일어나면 아비는 온 몸이 뻣뻣해져 달달달 떨며 나무토막처럼 굴렀다. 처음 발작 때 나는 아비가 죽겠구나라는 두려움보다 그걸 지켜보던 어미의 눈에서 절망을 읽고 절망했다. 아무리 원망하고 죽었으면 좋겠다 빌어도 현실은 언제나 내 뒤통수를 후려 갈겼던 방식 그대로. 어미의 눈에서 절망을 읽어버린 나는 미치도록 울었다. 자기를 망가뜨리며 끊임없이 괴롭히던 남편이, 사랑하는 남편이, 칼을 들이밀며 죽이겠다 협박하던 남편이 발작을 일으켜 사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걸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때 어미는 절망했다. 그렇게 응급실로 실려간 아비는 다짜고짜 집으로 와버렸다. 진료를 거부하고 진단을 부정했다. 그는 애초부터 '건강'해질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자연사' 뿐이었다. 나는 그때 알아차렸다. 사지는 진작에 찢겨 궁지에 몰린 그가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있던 희망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는 걸. 그건 자살일 수 없었다. 자살이면 결코 안 됐다. 그는 반드시 '자연사'로 죽어야만 했다. 할머니가 된 사강이 프랑스 법정 앞에 서서 외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느낀다. 그녀는 얼마나 편안했는가. 책임 앞에서 여유로웠는가. 아비는 자신의 '자연사'를 최대한 앞당기기 위해 미친듯이 술을 마셨다. 그는 영리했다. 갖고 있던 직장을 잃지 않으며 '자연사'할 수 있는 방법 중에 그는 가장 영리한 선택을 했다. 그는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단신이 아니었고 빈손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나를 파괴할 권리'따위 외칠 여유는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했고, 아니 자연스럽게 파괴되어야 했고 결코 의도될 수 없는 죽음에 다다라야 했다. 그 과정을, 그는 고집스럽게 수행해나갔다. 사람들은 말한다. 알콜중독자라고. 그랬다. 아비는 알콜에 중독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비를 알콜중독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더욱이,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며 온갖 해로운 기호상품에 젖는 청춘들, 예술에 퇴폐적 감수성을 입히는 애송이들, 망가짐-무너짐에 희열을 느끼는 반동분자들. 이 모든 치졸한 반항들이 우스워지고 말았다. 그들이 신념을 버리면 버릴수록 그들은 원없이 뛰놀 수 있다. 냉소적일 수 있으며 종말을 노래할 수 있고 무엇보다 '즐길 수 있다'. 가진 게 없는 거라면. 나는 이때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털어낼 수 없는 짐을 짊어진 사람의 망가짐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발작 이후 였을까. 나는 입대를 하게 됐다. 당시 충동적으로 입대 날짜를 신청해버린 나는 생일을 앞둔 12월 21일 입대 확정을 받게 되고 미루고 미루다 한 달 전에서야 집에 알렸다. 아비는 착잡해했다. '사내라면-'이라는 남아선호 프레임에 강하게 길들여진 아비라도 자식의 멀어짐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빚더미에 깊숙이 박혀서도 가장 행세를 무조건 해야만 하는 사내였으므로 돈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푼돈이라도 구해오고야 말았는데, 나의 입대 날짜가 정해지고 나서 그는 외식을 하자며 동네 자그만한 중국집에 우리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고 책임감이 막대한 장남이자, 집안의 기둥이자, 가장이었는데 그가 빚더미에 박힌 이후로 줄곧 우리에게, 나와 누나에게 용돈을 줬던 걸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실상 그가 죽고 난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직장에서 받는 봉급 절반은 이미 차압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또 어디론가 새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돈을 빌리기 위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안됐던 사내였으므로, 그만큼 제정신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신념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만 했으므로 끊임없이 어디선가 돈을 구해왔던 것이고. 내가 대학에 들어간 때에도 어디선가 백 만원을 구해와 내가 쓸 컴퓨터를 하나 장만하라며 건네줬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일을 하는 누나에게까지 손을 벌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꼬박꼬박 마셨던 것이다. 어쨌든 내가 입대하고 난 뒤로 4달 만에 그가 죽었다. 나는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일산에서 면회 외박으로 만났을 때인데, 야근을 가야 한다며 일찍 출발한 모습이 나의 눈동자에 들어온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



 아비가 죽었을 땐 봄 기운이 완연한 4월 첫날이었다. 일산 전방에 위치한 포병 부대는 조그만한 동산 속에 자주포를 배치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반복 숙달하는 비사격에 부대의 정체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위에서 좌표가 제공되면 3분 안에 우리는 포탄 준비를 마쳐야 했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잠을 자던 밥을 먹던 일을 하던 상관이 없었다. 불시라는 말은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날은 순찰 나온 주임원사가 자주포의 궤도에 동산의 나무가 걸린다며 나무를 베어야겠다 넌지시 지시를 남기고 떠난 며칠 뒤였다. 중대 규모의 부대였던 우리는 이렇다할 장비를 제공받지 못하고 오직 도구로만 나무를 베어 날랐고, 말그대로 손으로 산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작업이 한창이던 오후에 중대장은 나를 불렀다. 그는 나에게 '이 소식을 듣고 너가 어떻게 할지는 너에 따르겠지만 성장의 밑바탕이 될 거다'라는 말부터 던졌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한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였고 서둘러 휴가 준비를 하라는 말이었다. 군대 경험이 있는 사내들은 알 일이지만, 이등병을 달고 자대배치를 받고 나면 100일 포상 휴가 이전에 결코 '휴가'는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세습적인 군대 문화가 적용되지 않거나 빽을 빌어 빈틈 많은, 다시 말해 세금이 새어나가는 부대에서 생활을 했거나, 소위 꿀빠는 곳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여하튼 내가 속한 곳은 그렇지 않았고 나는 100일 휴가를 나가기도 전에 벼락처럼 부대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나를 장례식장까지 동행해준 간부가 누구였는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장례식장에 도착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도착했을 때 어미는 아연실색의 얼굴이었고 누나는 견딜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장례식이 시작됐다.


 지금에서야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아비가 죽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식을 위해 장의사의 염처리가 진행되고 관 속에 들어가 관을 흙으로 덮어 무덤을 만들기까지도 도착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와 그의 직장에서 그가 쓰던 모든 물건들을 수거해 올 때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 과정 속에서 나에게 위로의 말, 연민의 눈빛, 탄식, 슬픔, 동정, 때로 소회를 건넸던 수많은 얼굴과 혀들은 끊임없이 아비의 죽음을 완성하려 했지만 내게는 그저 거울을 두고서 자신들에게 건네는 악수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건네는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거울을 깨부셔 나를 보려고 한 사람은 없었고 그저 자신들의 정서가 내 입을 거쳐 따뜻해지길 바랐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순식간에 흘러간 사회에서의 생활이, 아비의 죽음을 처리하기 위한 시간이 5일이었다. 군에서 허용한 시간. 그렇게 나는 다시 부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선 군대에서의 생활을 차마 언어로 담아낼 수 없다. 여하튼 당시 아비가 죽고 부대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우울증에 빠졌고 3달 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현대의 우울 증상은 무기력을 동반한 기진과 소진, 소외 망상을 거칠게 '우울'이라 진단해 버리지만 대부분의 증상들은 그저 "사회"의 배면, 실지로 우울증이 아닌 사회에 속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림자를 증상으로 반영한 것이다. 자신의 내적 상태, 특히나 정서로 대변되는 종잡을 수 없는 상태를 툭하고 '우울'이라 말해버리는 데 개인의 잘못은 없지만 보통의 정신 증상들이 그렇듯, 그러한 것들이 '인정받기' 시작하면 대부분 씻은 듯이 사라진다. 내가 부대에서 겪은 상태를 우울증이라 부르는 건 지나고보니였다. 3달 동안 아비의 죄를 씻는 물은 내 눈에서 흘렀고, 24시간 동안 '화장실'을 제외한 단 1초도 혼자두지 않으려는 군대 안에서 내가 어떻게 생활을 했던가, 결코 언어로 담아낼 수 없다. 당시에 나는 절대 '개인적'일 수 없었다. 자아를 지우려는 긴장을 놓지 않는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아비의 죽음을 겪었을 때 끊임없이 들었던 말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는 꼰대식 표현들과 그렇게 정말로 괜찮아지는 사람들의 집단이 주는 공포가 들렸다. 나를 통해 자신을 반영하려는 거울은 여전히 깨진 적 없었고 정서가 소용돌이치는 상태 속에서도 '제정신'이 못 견디겠다 확 미쳐버리지 않는 나 스스로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 환경 속에서도 거울을 깨고서 손을 잡아줬던 사람이 있었다. 외부에서 찾아와준 상담사였는데 그녀는 내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읽고 쓰고 읽고 또 썼다. 사람들에게 제안을 했고 공부를 함께 하고 싶어 집단을 찾아다녔다. 전역을 하고 아비가 사라진 상도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시작됐다. 


 

3



 일대기의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고 괄호쳐지고 블랙박스가 됐지만, 상도는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이 되고 말았다. 내가 상도를 떠나 이 기록을 남기려는 이유는 실마리를 위해서였다. 기억의 사이사이에 잔향처럼 남아 있는 정서들이 계속해서 진동하고 사건들, 계기들, 추억들이 이물질처럼 표류하고 있지만 한 번 떠나버린 상도를 나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절실히 느낀다. 한 번 떠나버린 상태, 이건 내가 시를 읽어버린 상태와도 같다. 많은 이야기를 말하고 싶지 않다. 아비의 죽음도 마찬가지고 내 삶도 마찬가지다. 말할 수 없기 위해 말하는 것들이 어느 정도는 이 글의 의도이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더 깊어지는 침묵을 지금 느낀다. 나는 이제 상도를 떠났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비의 죽음이 앞으로도 도착하지 않을 것처럼, 나는 결코 상도에 도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혼자임을 절실히 느낀다. 어릴 적 일기를 쓸 때 매번 '나는 ~'으로 문장을 구성해 담임에게 교정을 받았던 그때의 나처럼. 나는 계속해서 '나는' '나는' '나는' 읊조릴 수밖에 없다. 그때 담임이 나에게 했던 말이 생생하다. '누가 너가 쓴 줄 모를까 봐? 왜 "나는"이라고 계속 쓰니'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내가 몰라서 그렇다.' 일기는 보여주려고 쓰는 게 아니니까. 그건 검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모르는 걸 나를 위해 쓰는 게 바로 일기다. 저건 상도로 처음 왔을 시절에 겪었던 초등학생 때 기억의 일부다. 근 19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대답을 한다.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모르는 걸 보여줄 수 있다고. 나는 확실히 상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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