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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6. 2022

쓸모 없기를

16.11.03


15년도 이맘때였다. 여느 때처럼 마을버스에서 내려 골목으로 내려가던 중 구석에서 가로등의 밝기를 빗나간 하수구를 향해 속을 게워내던 젊은 남자가 있었다. 술 냄새가 짙었고 풀어헤친 넥타이와 길바닥에 누운 서류 가방으로 보니 그는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때, 위액이 매워서 우는지, 너무 마신 술이 눈까지 차올라 흐르는지, 미쳐버릴 지경으로 힘들어서 우는지,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왜 하수구를 붙들고 우는 걸까 헷갈린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의 등을 두들겨 줬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손에 토가 묻은 기분이 들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의 등에 닿은 나의 손바닥에 오해가 묻어 있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는 괜찮다고, 나는 괜찮아질 거라고, 당신도 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괜찮다고, 그렇게 찰나의 위로가 오고 갔다. 분명히 오해였겠지. 서로는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나는 그때 한창 나의 쓸모에 대해 골몰하며 고개를 내려오고 있었고, 마침 그는 터질 것 같은 속에 못 겨워 게워내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나눈 대화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이해와 공감도 있질 않았지만, 마침 서로는 누군가에게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괜찮다고 했다. 자꾸 괜찮다고. 나는 그 '괜찮다'고 말할 때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집에 가버렸다. 내가 골목의 코너를 돌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하수구에 남아 속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쯤, 그가 방금 있었던 일을 일부만 기억해 '괜찮을 거에요'라는 말만 기억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행나무들은 정말 빠르게도 발가벗고 있었다. 한 손에는 한 시인이 13년 동안 썼던 시들을 추린 개나리색 시집 『발 달린 벌』이 있었고, 마침 나는 스물여섯짜리라 노인의 팔 같은 나무의 가지들을 보며 어쩐지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월이 마중 나온 것 같은 가을에, 떨어지는 은행잎과 손에는 개나리색 시집과... 고작 스물여섯. 청량한 하늘은 평소에 들지도 않는 고개를 들어야만 보이니까,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는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가을은 분명 노화의 전문가가 분명했다. 그 어떤 계절도 가을만큼 노련하게, 능숙하게 나뭇잎을 낙엽으로 바꾸지 못했으니까. 낙엽은 불과 한 살도 채 되질 않았는데, 거리마다 나뒹굴며 불현듯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지나가던 신발들은 밟기를 좋아라하며 바삭거리는, 그 끊어지는 소리를, 가벼운 질량의 부푼 나무의 자존심을, 밟기 좋아라하며 쓸쓸해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다 자라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제때 통과했어야 할 누군가의 사랑과 인정을 왠지 놓치고만 것 같은데, 무참한 시간은 나를 성인으로 만들어놓고서, 머리 없는 사회는 나에게 많은 걸 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시간이 따돌려버린 그 격절을 내 힘으로 과연 메울 수 있을까? 자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 가을을, 나는 나이만큼 통과해야만 했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래처럼 마른 잎은 또 거리를 나뒹굴다 지나가는 신발에 밟히고. 그런 가을을, 능숙하게 통과하는 일이 어쩐지 불가능하다 여겨지고 있었으니까. 분명 노곤해진 거리는 지나가는 신발과, 마른 잎과, 또 이런 스물여섯짜리를 읽고 치울 것이었다.


그러니까, 점점 움츠러드는 그 계절 아래에서, 모쪼록 괜찮을 거에요, 같은 위로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더위에서 추위로 가기 위해 바쳐야 하는 온갖 결실들 앞에서,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이 없어 움츠러들거나, 대단히 잘난 그 무엇이 되기는 고사하고 준비도 안하고 머뭇거리고 있다거나, 공과 사의 모순된 감정을 들고서 쓸모와 입장 사이를 수도 없이 오고가다 그만 지쳐버리거나, 그러니까 열등해지고 마는 나날들을 겪고 있을 때 위로와 용기의 한 마디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해 가을, 동네 언덕에서 술 취한 아버지를 집으로 업고 가지 못한 여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취한 아버지는 꼬인 혀로다가, 아이구 미안하다, 그만 취해버렸다, 아니 그러니까, 같은 중얼거림만 반복할 뿐이었고, 난처한 여학생은 아무래도 집으로 가야만 한다며 휘청거리는 팔을 붙들고 들어보지만 무게를 겨누지 못했다. 지나가던 주민 몇몇은 흘깃 보고는 각자 제집을 찾아가고 있었고. 이 여학생은 여차저차 취한 아비를 끌고 무사히 집으로 가는 모습이었지만, 거창하지 않은 이런 모습에서도 온기는 느껴지는 것이었다.


학교를 다니다 보면, 또 사회의 문턱에 있다 보면, 이처럼 기성의 삐긋거림과 어긋남 앞에서 쪽팔리다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그런 또래들이 분명 있긴 있지만. 그럼에도 대낮부터 술에 취해 길가에 널브러진 아비를 보고서 못 본 척하지 않고, 그런 추태와 창피를 무릅쓰고서 집으로 데려가야겠다는 마음도 있다. 못난 모습이 보인다는 건 그처럼 손길이 필요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니까. 쓸모 없음이 내려앉은 이 시기에 위로와 용기는, 그런 말 한마디가 실질적으로 어떠한 숫자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을 견뎌 가는 데 크나큰 힘이 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말 한마디는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분명 그런 모양의 문장들, 목소리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애써 찾는다면 수십 차례라도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 그런 말을 필요로 하는지, 혹은 그게 아니라 다른 어떤 말을 필요로 하는지 적시에 알아내지 못한다. 귀갓길에 마주한 젊은 남자에게 건넸던 '괜찮을 거에요'와 '감사합니다' 사이에 우연과 오해가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그 순간은 취객에게 접근한 불한당처럼 비춰질 수도 있었고, 호의를 거절한 안하무인이 되었을 수도, 혹은 그냥 지나가버릴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순간들을 우리는 결코 의도해낼 수 없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실 그건 의도된 거였어, 라 알게 된다면 실망하고 말 테니까. 감동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견뎌내야 하는가, 섣불리 믿어 버리지 않고 고민을 붙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고민을 멈춘다는 건 충돌을 피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피곤한 일이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계절 중에서 가장 모순된 계절이라 하면 바로 가을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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