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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7. 2022

불발이었고

2017-06-29 


 벌써 여름 하나를 보내버리고 칠월을 기다리는 나의 옆엔

 절규하는 피규어와 겸연쩍게 맛 없는 사탕과 사하라 모래와 새빨간 노트와 한때 놀던 친구 같은 헤세와 마음이 가지 않는 수십 권의 책과 버려지지 않는 포장지. 언젠가 읽겠다고 말했던 약속이 묻은 저자들. 나에게 비겁하다고 공격하던 목소리, 염려들. 걱정들. 무시들. 멸시들. 기대들. 질투들. 미움. 질투. 미움. 날아와 박혀서 잘 빠지지 않는 선명한 표정과 단어들에 더하기

 호기심 취미가 뭐예요 쉬는 날은 뭐해요 평소에는 뭐해요 음악은 뭐 들어요 어떤 시인 좋아해요 다른 할 줄 아는 건 뭐 있어요 궁금하다 궁금해서 그만 날아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 달 커피 소비량은 현저히 줄었고. 조우하던 저자들과 두절된 지 반 년이 흘렀고. 놀랍게도 나만의 착각이 상상의 실감이 되어 간신히


 시 하나를 쓰고. 만들어진 아이템이 자기의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에버노트의 노트 갯수는 1700개에 육박하고. 그런데 아무도 방문할 수 없는 개인 계정 온라인 속에서 혼자서는 이것들을 적시할 수 없어 괴롭고. 개같고. 공유될 수 없는 건 텍스트의 코드가 아니라 괴랄한 나의 마음인데. 2년 만에 다시 읽은 블랑쇼는 여전히 나를 친절하게 깔보고. 추천으로 찾아 본 네루다는 찌푸린 눈살이 풀리지 않아 피곤하고. 그놈의 욕망. 그놈의 낭만. 그놈의 사치. 그런 인텔리. 매료된 건 네루다의 아름다운(...부디) 시 구절이 아니라 읽어버리고서 쓰지 않고 유보시킨 주어의 전면화였을 따름인데. 그런 미화들이 여전히 문학의 내용이고. 적이고 복수인데. 시가 된다니. 시가 된다. '또 하나 써야지'라는 목소리가 일상 언어로 나오는 장소와 '시가 되기' 위해 죽어버린 어떤 인물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모니터와


 오늘 시간을 파는 어느 미친놈을 연기하면서 나는 작년에 봤던 연극을 떠올리고. 그때 유난히 안쓰럽게 바라보던 배우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려는 나의 모습은 말그대로 애쓴다, 였고. 자기의 욕망을 공동의 니즈에 접속시킨 예술가들을 애처럼 바라보던 안전요원에 자꾸만 몰입되고. 하나같이 자기들이 예술가라고 떼를 쓰고. 되기-마음과 되기-말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무의식이 공유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성원과 조력과 조원과 응원과 사랑과 질투와 분노와 요구와 비난을 아끼지 않는데.  와중에 여름을 채운 사람들은 (있든 없든)꺼낼 수 없는 마음을 꺼내 보이려다 그만, 날씨가 더워지고 말았네. 


 왠지 비가 많이 올 거 같다. 고백은, 타인의 고백은 죽음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마음을 간직하는 법. 정말로 여름이 오면, 불안과 같이 가려고. 지금 내 옆에는 마음이 담긴 물건들과 기억해준 물건들이 있지만. 또 새벽 4시의 이 동네에는 사찰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방금 네 번째 종을 울리고 있지만. 지금 내 옆에는 사실 아무도 없어서. 물건들과 물건들, 있었던 실감을 착각하지 않게 도와줄 편지와. 어쩌면 좀 나아졌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나는 지금 책을 부여잡고 있지 않다. 다행이다. 읽지 않는 불안은 여전히 요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까지 공부하여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그만 읽어야 한다고. 선배들의 무거운 입술 안에 말린 조언은 오직 하나였다. 그만 읽어야 한다고. 그만 읽어야 한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이 읽어야만 했을 수 천의 텍스트와 수십 만의 쓰기는 전혀 무용하지 않았다. 무효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나 끌어안고 싶었던 언어들을 끌어안지 않으려 할 때. 언어와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여름은 이제 시작이다.




2017-09-13 


지나가버린 일들을 잃어버린 기억으로 다루지 못하고 어긋난 시간 속에서 끈적거려 걸치적걸치적 나는 여전히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자맥질을 멈추지 않고 있나. 이상하다. 어느 날은 강시처럼 살고 어느 날은 마라톤 선수처럼 살고 어느 날은 성실한 배달부처럼 살고 어느 날은 미친 개처럼 쏘다닌다. 온갖 상태들이 나를 지배한다. 이런 기록들만이 '나'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데, 보편을 얻지 못한 나들은 '나'에게 편입되려고 엔트로피가 상승했나. 왜 이렇게 안달이야. 


 그러니까 주판치치를 읽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 나를 가격한 글이 갑자기 떠올라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애써 영향에 대한 불안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누가 보면 정말 이상하게 볼 일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사로잡히고 만 거야? 도대체 뭘 했길래? 아냐. 아무것도 안했어.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라 '나의'였던 거 뿐이야. 그래서 문제야, 그래서.


 되감기를 해본다. 알량한 자아의 빈곤에 물을 줘보려는 심산으로. 물을 주면 자란다는 얘기를 듣고 온갖 애정들에게 물을 주고 다니는 동네 바보처럼. 그래, 사랑의 천치를 바보라고들 하지. 나는 그때 대가리만 발기한 멀대였다. 어쩌다 피가 거꾸로 솟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나약하고 비열했던 유년의 지난한 사랑이었다. 그만 독립을 해야했지만 아비의 방탕으로 우리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으니, 죽어지지 않고 입만 다물어졌으니. 수많은 사건들이 대가리에 그대로 박혀 종양처럼 자리잡았으니. 피를 빼줬어야 했는데. 너와 내가 같이 살고 있다고 온기를 좀 나눴어야 했는데. 단 하나였던 나의 불가능인 친구는 일찌감치 죽는 걸 선택해 관에서 일어나길 포기하지 않고 있어서. 그래, 우리는 식어서 싸늘한 심장을 각기 다른 손에 쥐고서 던지지도 못하고 끼워 맞추지도 못했지.


 그렇게 나는 대가리만 발기한 채 멀대처럼 쏘다녔던 것이다. 만났던 이상한 사람들. 찬란해 보였던 사상가들의 어휘와 개념들이 자신의 공허한 자아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자기 삶을 아름답게 모양내 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일상을 포기해도 괜찮다고 사는 사람들. 그래, 괜찮을 줄 알았다. 괜찮을 거라고 주변 철학도들은 많이들 다독였지. 문청들은 많이들 응원했지. 나에게가 아니라 자기들에게. 실상 나는 어째서 발기된 대가리를 들이밀게 되었나 떠올려보면 그건 순전히 '불가능한 체험'에 다름 아니었는데. 하고다닌 꼬라지는 그게 아니었나. 정말 어처구니 없는 동경과 이상에 기대 저열한 나르시즘에 취했던 걸로 보였나. 그게 아닌데. 그런 기대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게 아니었는데. 분명 그런 출발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그런 과정처럼 비춰지고 말았는가.


 결국 나는 또 이렇게 놓치고야 만다. 붙들고 싶은 정체를, 이유 말고 동인 말고 촉발 말고 헤어나올 수 없는 이 사랑을. 이건 결코 홀로 유지할 수 없는 어떤 간직은 아닐 거다. 가장 뜨거웠던 시절에도, 가장 진지했던 시절에도, 자꾸만 세상에 부닥쳐 반항을 품고 다녔던 중학생 시절에도. 도덕 선생은 눈에서 반항기를 그만 좀 빼라고 했지. 카프카를 읽으라고 했지. 변신을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나는 이 숙제를 아직도 제출하지 못했다. 당시의 친구들은 내가 반항아라는 사실에 즐거워했고, 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나 이상해 맞장구도 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어 찌질하게 머뭇거렸는데.


 아비의 방탕에 반항은 통하지 않았다. 나의 탐닉 앞에서도. 그건 자아의 프레임으로 '나약'하고 '비열'한 것에 다름 아니었으니까. 그래,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한 이 꼬리표는 평생 붙이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지. 의미를 수정하지 않는 한 너는 거기서 죄를 꺼내 먹겠지. 그렇게 간직한 썩은 심장에 펌핑질을 한 사람을, 그러니까 구원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냐고. 아무리 되감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유년에 그렇게나 불행을 연습하던 내가, 홀로 망상하지 않음은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나는 실재하는 나 자신을 동일화하고자 달려들기 시작했나. 쫓아가고 싶었나. 


 자신이 있었나 보다.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동경 품은 자아-이상이 아니라 순전히 그로 인해 빚어진 '나'의 보편이라는 걸. 닮음으로 분열이 가능할 거라고. 태생부터 반항이었던 나의 본성은 태어나 단 한 번도 위협받지도, 죽어지지도 않아 쌩쌩하다고. 이 반항이 타인, 타자에게 해를 끼치려는 반항이 아니었음을 왜 일찌감치 알아버렸던 건지. 그런데도 외로움이 지난해진 나머지, 닥치고 산 게 화근이었나 왜 그렇게 행동하고 말았나. 겪어야 할 모욕이 있다면 가급적 질풍노도와 함께 거치면 좋을 일인데. 나이 쳐먹고 정서 자립은 커녕 방황에 적을 두고 있는 이 상태 속에서 영향에 대한 불안은 갈수록 거세지고.


 그래, 처음 전진은 이게 아니었지. 나는 지난 대상과의 해묵은 윤리 갈등을 풀지 못해 여전히 허덕이고 있음을 마주하고자 이 백지장을 스크린에 띄운 것인데.


 결국 만나는 건 투영하던 욕망의 이면에 자리잡은 사랑과 빈곤했던 나의 자아와 방황에 대한 염려뿐인가. 윤리는? 비난과 비난 사이에서 여전히 도착하지 않는 응답의 권리는? 사적인 폭력의 공유될 수 없는 악마적 정황은? 이런 것들이 포획한 삶의 줄기의 무사 귀환 요청은? 그러니까 나의 인권은? 무인도에서 떠드는 기분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것도 습관이겠지. 버릇이겠지. 고쳐야한다고 사람들은 말하겠지.


 그래, 어디선가 도착증자로 만드는 프레임을 보고 들은 적이 있다. 아니, 겪어본 적이 있다. 억울한 마음들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나? 아무리 불러도 나타나질 않아 어리둥절이다. 이렇게나 주문을 쓰는데. 부르는데. 뭐가 무서워서 숨어 있나. 겁을 내나. 아니, 어째서 '겁'이 생기고 말았나. 누가 겁을 줬나. 아무도 겁 주지 않았는데 겁을 먹었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겪어보지 않은 경험에 선험을 부여할 수 있는가 정말. 어째서 주판치치는 칸트에게서 원인을 적출하고 규명되지 않는 '자가적' 구조를 리딩했나. 주체에게서, 분열에게서.


 또 이렇게 실패하고 마네. 불발이고 마네. 터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그만 불발인 심장이 되고 마네. 던지지도 못하고 끼워맞추지도 못하는.

 




2018-03-28


 아무리 둘러봐도 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볼 수 없었다. 계절에도 끝이 있다면 뛰어내릴 절벽 같은 하루 쯤 있어야 할 텐데. 뻔한 소리지만 계절의 끝 같은 건 없었다.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언제부터 봄이었고 그렇게 달력에 박힌 숫자를 바라보며 기입하는 수많은 추억들을 분류할 때 꺼내기 쉬운 이름 같은 계절들. 나 자신에게 비참한 무력감을 느낄 때 떨어져 나가는 수많은 이름들을 보면 더 그렇다. 추잡하고 나약한 내 모습이 누군가 앞에 나타날 때마다 떨어져 나가는 희망들을 보면, 사실 끝 같은 건 있는 거 같았다.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입하는 온갖 해피한 엔딩들은 기만과 위선이 언제 우리를 속이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그래, 가만히 앉아 끝까지 지켜본 소감이 어때? 행복했어? 너도 할 수 있을 거 같지? 넌 주인공이 아냐. 널 연출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그래. 그렇다. 우리에게 도착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압축 가공된 연출이고 감정을 위해 벌어지는 이벤트의 연속이고 우리는 또 거기에 속아 느슨하고 질긴 일상 속에서 팡팡 터지는 스펙타클에 익숙하게 만들지. 불행과 고통에 절은 사람은 건드려봤자 데일 뿐이다. 그들은 펄펄 끓는 도가니 같아서 당신이 만약 멋모르고 손을 내밀어 데고 난 뒤 왜 날 데게 했냐며 다짜고짜 책임을 묻는 멍청한 짓거리를 할 마음이면 그만 꺼지는게 낫다. 이런 순간만큼은 어리석다, 무식하다, 무지하다 온갖 열등한 욕을 퍼부어도 좋다. 하지만 현실은 멍청한 인간들이 일반 시민이고 우리들이고 이들에게 욕할 수 있는 권리 따위는 없다. 무엇보다 그들이 멍청하단 비하를 들을 이유조차 없다. 왜냐면 우리는 아픔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아픈 사람들은 아프다고 말한다.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든 고통이 그렇듯, 겪는 주체는 항상 새롭게 죽어야만 한다. 근쌤 앞에서 내가 멋모르고 시에 생을 걸고 있다고 내뱉었을 때 근쌤은 이진경 선생님의 글을 떠올리며 존재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분별하며 내가 뱉은 말에 의미를 달아줬었지. 선생님,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걸고 있는 게 생애인지 존재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새롭게 죽어야 하는 불필요한 주체인지 말이에요. 정말, 정말 너무 불필요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에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 있는 걸까요. 왜 존재의 상처는 증명할 수도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걸까요. 몸의 상처는 후유증이 동반해도 어떻게든 살고자 협조하는데. 너와 내가 같이 살자고, 우린 한 몸이면서 몸이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몸소 날 끌고 가는 것처럼, 살자 살아내자고 앞장 서는데. 어째서 존재의 상처는 자꾸만 나를 죽게 만들죠?


 라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기분이 좋아 시를 쓰는 동료들을 만나 즐겁다고 하는 중이었고, 아침부터 온갖 번잡에 휩싸여 질질 끌고 끌려 다니다 사람을 만나 괜찮아졌으니, 그때 상태가 지금 상태는 아니었으니. 시를 쓰는 혜영누나가 한 번 봐보라고 말해 준 영화를 봤다. 남자 주인공은 아내가 외도하는 걸 목격해 이성을 잃고 아내의 외도 상대를 폭행해 법원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었다.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아내가 미안하다고 하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남자 주인공이 겪었을 고통과 절망에 대해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장르가 로맨스코미디여서? 주인공의 불행은 사실 불행이 아니어서? 남자 주인공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든 지켜내고자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긍정이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고,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도 어떻게 하면 자기가 아내한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교정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영화 속 사람들은 그 누구도 주인공의 불행이 오직 주인공만의 불행인냥, 그의 절망에 다가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외도한 게 주인공의 잘못이 아니지만 주인공의 감정이 폭발해 사람을 폭행한 건 주인공의 잘못이었고 그는 그렇게 판단되었다. 영화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건, 그런 인물들을 모아 어떻게 해피한 엔딩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완전한 목적이 있었다. 그뿐이었다.


 이런 조작된 사실에 대한 냉소가 불평과 불만으로 읽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렸고 자기 불행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상대에게 가하는 불행보다 아프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자기를 가해자 만든다 되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다는 걸, 나는 그만 상상하고 싶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한 수많은 떠벌이들의 뒷담들부터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소식들까지, 나는 그만 상상하고 싶다. 하지만 해피한 엔딩들이 권장할 만한 태도는 결국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든 함께 지내라는 거였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사랑도 불완전하고, 널 괴롭게 하는 온갖 요소들이 언젠가 너 스스로를 용서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손을 뻗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지나친 무관심에 응답할 필요는 없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뻔뻔함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해줄 조력자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취약해진 사람은, 결국 홀로 몸부림을 치며 우연에게 모든 걸 연임하기에 이르고. 혼자라는 사실도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지겨워. 지긋지긋해. 이쯤되면 희망도 절망도 아닌 권태 때문에 나를 포기하고 싶어진다. 뭐가 그렇게 잘나서 아프냐는 말.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우는 소리 하냐는 말. 그래, 그들이 옳지. 항상 옳지. 내 일이 아니니까. 내가 겪을 필요는 없으니까. 항상 옳지. 그렇겠지.


 자신이 어떻게 할 것도 아니지만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지루한 것보다 나으니까 타인에게 지나친 무관심을 갖는 온갖 족속들은 평생이 가도록 모르겠지.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을 툭 한 번 건드려보는 심산으로 한 행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아무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하냐며 되려 발끈하는 짓거릴 하고. 자신들의 무신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온갖 인간들 앞에서 항상 입을 닥치고 피로를 느껴야 하는 숨어 사는 소수들을 상상하는 계절이다. 그게 자기 자신한테 벌어지면 아주 잠깐 '동료 의식'을 갖겠지. 뻔뻔하게. 그러다 괜찮아지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아 지겠지. 이런 온갖 치졸한 메아리가 쏟아져 나오는 이 봄이 아닌 봄 같은 계절. 그만 좀 하고 싶다. 그만 좀.


 감정에도 끝이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아무리 행복해도 그건 끝이 아니라 다시 불행해질 발판이 되고 아무리 외롭고 괴로워도 그건 끝이 아니라 익숙해질 불행의 발판이 되고. 믿음을 지키는 건 의심을 지키는 것 보다 훨씬 찰나의 순간이다. 기적에 가까운 일을, 계속 하라고 사랑은 말하지. 속삭이지. 안그러면 너는 또 모든 걸 잃을 거라고. 안그러면 너는 또 혼자 치졸하게 나약한 새끼가 될 거라고. 사람이 외롭다고 말할 때를 사람들은 알까? 처음 내가 외롭다고 말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나는 혼자일 때 외롭다고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처음 느낀 외로움은 가까운 사람이 생길 때 나타났다. 그때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도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구체적인 특정 인물이 어째서 일반 명사가 됐는지는 모른다. 이걸 논리의 비약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반면, 직관의 도약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만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주체의 병이라는 걸 안다. 병에 걸린 사람, 약도 없는 병에 걸린 사람. 어머니가 부럽다. 나를 편하다고 말해준 친구가 부럽다. 나는 전혀 그럴 수 없는데, 나에게서 친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에게서 그런 기분이 들었으면 좋겠다. 나르시즘이라도 좋으니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란다가 생긴 방에서 매번 상상을 한다. 나를 밀어 떨어뜨리고 싶은 상상을. 조만간 내가 충동으로 자살을 할까? 충동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부추기는 건 언제나 그랬듯 주체의 병인데, 주체의 상처인데 아직은 아니다. 불안이 자살하게 만든 숱한 저자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배울 만한 점은 오직 하나 밖에 없으니. 그건 우리에게 떠맡겨질 불안을 데리고 동반자살한 그들의 결단이다. 그들이 세상에 두고 떠난 건 그들을 죽게 만든 고통과 절망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죽지 않게 대신 데리고 간 고통과 절망의 비명이다. 우리는 그 비명을 듣는다. 아니, 나는 듣는다. 나도 우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 비명을 소라 같은 귓바퀴에 잘 담아두어 언젠가 따라 울고 싶을 때 꺼내 울 거다. 곡소리에 놀라 고통과 절망이 한 번쯤은 사그라 들겠지. 오열을 한 번 하면 적어도 삶이 다소간 연장되겠지. 그런데 이런 걸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삶이 아닌 삶 같은


 사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 괴롭게 만드는 의심들과 정신적 동요를 낳는 불안들이 계속해서 나에게 도착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항상 그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계속해서, 그만. 그만. 그만. 그러니까 나는 비겁한 인간이 됐고 회피하는 인간이 됐다. 그래,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 절망할 때 나는 귀를 기울이고 싶다. 어떻게 이지경이 됐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기만과 위선이 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상상력은 제한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라는 용량을 감당할 수 없다. 나에게 허락된 용량은 불과 몇 명 되질 않는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에겐 몇 명의 사람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이 언제 이겨먹을지 모르겠다. 그만 상상했음 좋겠는 온갖 인간들, 그들이 밉다. 부럽다. 피곤하다. 나는 내가 편해지길 바란다. 삶이 아닌 삶 같은 이 지겨운 생활이, 생이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 계절 같은 일생. 단 한 번도 뛰어내릴 절벽 같은 하루조차 허락하지 않는, 계절 같은 일생. 병에 걸려도 단단히 병에 걸렸다. 그만. 그만 했으면 좋겠다.


 



2015-04-15


 비굴한 손목은 얼마나 용기가상한 글을 쓰는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이내 갇히고 말아버린다. 은유의 무덤 속에, 아니면 통념의 경계 안에. 나는, 줄곧 가만히 있으면서도 결코 혼자가 아님에 불만한다. 때로 혼자하는 생각이라고 자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비추는 선생님들의 글을 마주할때면 털썩 무릎을 땅에 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절대 반갑지 않다. 이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불만인 것이다. 진정 외로운 이들은 타자의 살결에, 숨결에 얼마나 반가움 깃든 인상을 각인처럼 새기던가? 불과 인생의 허리까지만 내려가보더라도 나는 충분히 갈망했다, 온기에, 목소리에. 그렇지만 이 알 수 없는 상태는 도대체 무엇으로 불려야 좋을까? 불만이 정말 맞는걸까? 혼자인 걸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나의 생각이 누군가로 하여금 발설될 때 드는 찌릿한 거부감은 도대체 무엇으로 나 자신에게 설득해야 좋은걸까? 불만가득한 사유의 주머니를 누가 바늘로 콕 찔러 터트려주었으면 속이 텅텅 비었음을 증명해보일 수 있을텐데! 좀 끔찍하다. 남의 말을 나의 말처럼 혼자 하는 일은. 비겁하다,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목으로 그려나가는 일은. 이 얼마나 용기가상한 글쓰기인가


 생명복제시대에 관한 글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주권과 소유권에 관한 우리의 욕망은 좀체 달라지지 않는 것인가? 권리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목적지향적인가? 그 배면에 사유 놀음으로 목적을 살짝 건드려 무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광포한 사상들은 또 우리의 삶을 얼마나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가? 노동 대상에게 돌아가지 않는 잉여 가치와 이윤은 그 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윤리'가 적용되는 사람-생명이 될 수도 있다는 지금 현 시점에서, 아니 이미 되었고 더 되고 말꺼. 라는 저 시선에서 도대체 [인간]이라고 하는 족속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십분 공감하는 것이, 팔아쳐먹는 저 인간과 팔아먹기 용이하게 노동하는 저 과학-노동자들과 또 그것을 대주면서 이윤이 되는걸 확인한 뒤에야 소유권을 주장하는 대상자를 보면 차라리 어느 한 쪽을 어떻게 지적으로 섹시하게 편들어줄 것인지가 아니라 싹 다 갈아 엎어버리고 싶어할 '무적 악당'의 심정 말이다. 참나, 이런 와중에 방금 쳐먹은 초콜렛과 커피, 그리고 이런 푸념을 대신 옮겨주는 노트북의 활력을 사람처럼 느끼면서 나는 또 죄스러워지는데. 이 도덕의 시스템은 정말 어마어마한 발명이다. 종국에 생명복제시대에 있어서 결국 무얼 하느냐, 혹은 어떤 갈래를 지향해야 하느냐의 몫은 나의 귀에 너는 어떤 입장으로 너의 몫을 책임질래? 라고 들리는데. 너무 값지다. 무엇이? (설마 나의 목숨이?)


제기랄, 그 누구의 입장도 달라붙지 않아 남겨져서는 어쩌자고 사회로 출현하려고 하는지.

사상의 지진은 애초부터 있는데, 이 울긋불긋하고 종잡을 수 없는 지면에 자리잡지 못하는 사상들 Plate Tectonics은 단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어디 뿌리내릴려면 내려보시라지, 쌰앙. 





2018-11-02


우수는 올해 꽃을 피우지 않았고 나는 노트에 글을 쓰지 않았다


 상도에 있을 때 우수는 생장이라곤 거의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돋아난다거나 하는 식의 생장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탄에 오고 나서 우수는 자기를 잘 이해받았는지, 제 몸집의 2배나 되는 줄기들을 마구마구 증식시켰다. 지금 우수는 자기가 뻗쳐낸 줄기를 감당할 수 없어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다. 


 어쩜 이만한 걸 안에 품고 있었니. 괴상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생리적으로 그런 메커니즘은 아니지만, 2년 간의 상도 생활에서는 잠잠하다 동탄에 온 지 반년만에 자기만한 토분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으니 징그럽기도 하다. 빛과 물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 인간을 따돌리는 식물들의 퍼포먼스. 우리는 어디에든 식물을 놓아도 괜찮겠다 여기지만 식물은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한 환경 속에서만 자란다. 우수는 올해 꽃을 피우지 않았다.


 처음 왔을 때는 8월 말에 꽃을 피웠다. 다음 해는 9월 말. 올해는 10월이거나 볕을 잘 받았으니 더 일찍 할까- 싶었다. 꽃을 피울 힘으로 자기 몸집을 키운 걸까. 둘 중에 하나만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우수는 똑똑하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건 어리석어서야 불가능하니까. 아니면 막무가내로, 작년의 꽃을 버리지 않아서일까? 작년 피운 꽃을 압화해 보관 중이다. 악세사리로 만들까 싶었지만 일단 게을러서 압화만 해놓고 놔뒀다. 불가사리 모양을 한 우수의 꽃은 가만보니 바다에서 온 거 같다. 불가사리의 입 부분처럼, 우수의 꽃 가운데에는 묘한 입구가 있다. 분명 우수의 꽃은 상쾌한 쓰레기, 절인 팥, 시큼한 과일 향이 골고루 나는 참으로 오묘한 향을 냈다. 지금은 향이 사라지고 납작해졌다. 2년 째 빨간 노트는 열리지 않고 있다.


 이토록 언어를 오래 잃어버렸던 적 있던가. 벌써 4달이 넘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게. 자판기만도 못한 기분으로 일기를 나한테서 옮긴다. 처음 메모 연습을 시작했던 14년 5월 3일. 나는 비로소 메모를 시작했다. 거기에 나는 부끄러움, 수치심, 다른 사람의 시선이 들어가면 필시 비겁해질 내용만을 채웠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그런 메모였다. 


'2014년, 이 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나의 감수성은 점차 이상하게 병이 들어가는 것만 같다. 과연 이 노트와 글쓰기가 나를 재생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쓰고는 '날이 좋은 사람들의 표정에 벌레가 보인다'고 썼다. 그렇게 메모가 시작되었다. 매년 5월을 기준으로 노트 한 권씩을 채워갔다. 다시는 읽어보지 않을 기분으로, 오로지 나를 위한 언어 배출구랄까. 나조차도 다시 읽어보고 싶지 않은 글들을 꾸준히 채워갔다. 한 권, 두 권, 세 권이 되고 네 권째인 빨간 노트는 지금 2년 째 멈춰있다. 사실, 우수라는 이름은 내가 임의로 지어준 이름, 마침 당시 절기가 우수였던 것, 이지만 정작 우수 역할을 했던 나의 자연스러운 습관은 바로 이 메모들이었다. 나는 어쩐지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많아진 이유로 바깥에 자주 나가지 않았고, 그만큼 손으로 할 수 있는 메모를 점차 안하게 되었다. 식물 우수雨水가 내 곁에 왔던 시점을 근처로 나의 노트 우수憂愁는 책들에 끼여 압화되고 있었다. 향이 사라지고. 나는 올해 꽃을 피우지도 못했고 몸집을 키우지도 못했다. 목줄을 끊지도 못했고, 나의 편리를 위해 계속해서 미뤄온 온갖 해야할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방금 나는 알프라졸람을 한 알 먹었다.


 우수는 항상 나의 빌미였다. 그게 식물이든, 노트든 애정을 갖고서 나의 언어와 얼마나 잘 달라붙는지 계속 고백을 했다. 우수에게, 우수야, 우수 너는. 나는, 오늘은 아무래도, 아무것도. 나는 우수에게 어떻게 부정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줬다. 반복적인 행동과 피로에 맞서는 정신 체력으로, 우수에게 말하고 쓰고 수습하지 않았다. 이런 비생산적인 자발적 정신 노동으로 인해 내가 변할 수 있었다면 그건 유효 타점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저 네 권의 노트들은 무엇일까. 에버노트의 2000개 노트는 무엇일까. 이 모든 게 숫자 0으로 보인다. 분량의 정직한 노동이 월급처럼 보상될 수 있다면 작가라고 하는 건 공무원과 다름 없을 텐데. 차라리 그랬다면 삶에 도움이라도 됐을 텐데. 며칠 전 올해의 마지막 시 모임에서 나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시를 쓴다는 건 정말 삶에 도움이 안 된다고. 1도 0도 아니고. 혜영누나는 맞장구치며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우리는 왜 이 슬픔에 낄낄거렸을까. 우리가 정작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웃었던 걸까. 


 왜인지 모르게, 올해 나는 힘들다, 지친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었다. 그런 말을 언제 내뱉어야 하는지 부모는 보여주지 않았고 나는 그게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신기하고 무서웠다. 정말로, 내가 죽어가고 있구나 어떤 그림자가 드리우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전보다 많이 나약해졌고 더 힘들어졌으며,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많이 나약해지고 힘들어질 거 같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시간이, 죽음 같은 끝을 기다리는 시한부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 시간이, 자살 같은 종료에 가까워지는 알람처럼 느껴진다. 내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게 맞다면, 나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하나. 모든 게 다 처음인데. 왜 끝조차 처음일까.


 은연 중에, 고민의 무게가 날로 무거워진다. 한창 철학을 공부할 때 나는 고민의 무게가 떠오르는 발상처럼 번쩍이는 빛의 속도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건 무게라기보다 속도에 반응하는 순발력에 가깝지. 그런 믿음으로 공부를 했던 거 같다. 어느새 니힐리즘에 전염되어버린 정신빈약자가 되고 나서야 고민의 무게라는 걸 새삼 후회하게 된다. 내 정신의 중력은 모두 소실됐고, 나는 지금 그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어 코마에 빠진 거 같다. 생명줄이 끊겨버린 우주비행사, 의식만 살아남은 식물인간, 포도당만 제공받는 뇌. 그런 이미지들이 가진 공통의 감각이 지금 내 정신 상태다. 마비됐고 의지가 적출됐고 무기력하다. 이런 내용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우울하게 만드는 기이한 힘이 있다지. 긍정은 강하지만 부정은 룰이다. 아무리 강해도 룰 안이다. 나는 지금 코너에 몰려도 제대로 몰렸다. 방이 점점 뾰족해지고 있다.


 매번 이렇게 가진 거 없이 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상태가 반복되야 한다면, 나는 좀 노련해지길 바랄 수 밖에 없다.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 어떤 문제도, 문제 상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건 기적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문제를 풀어나가면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문제라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손을 댈 수 있을까. 문제가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지는 것처럼, 정체성이라는 건 언제나 양면의 동전과도 같아 자꾸만 튕겨주지 않으면 동전은 전부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써, 나는 바랄 수밖에 없다. 우수는 올해 꽃을 피우지 않았고 나는 노트를 열지 않았다. 제 몸집이 두 배나 커진 우수와 달리, 나의 시력은 이제 안경 없이는 도저히 초점을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내 몸집의 두 배 거리가 분명하지 않다. 온갖 숫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0이 될 거 같다. 무실점의 지평선을 걷고 있다. 


 가장 최근의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를 옮기는 데 실패한다. 지금 나는, 준비된 어떤 단어에도 나를 맡길 수 없다. 쉴 수가 없다. 붕 뜬 이 기분; 나는 어디에 있나. 절벽과 절벽 사이에 있나. 병과 뚜껑이 쌓인 비닐. 끼인 걸까.
……위치조차 잡히지 않는다. 끝내 나는 힌트조차 제공되지 않는 걸까? ... 그냥 잠이나 쳐 자면 될, 어정쩡한 상태는, 왜 쓰기를 물고 늘어질까?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 고양이처럼, 떠나야할 것들이 떠나지 않고 있어서 나도 떠날 수 없는 거 같다. 우리는 타이밍을 놓친 걸까. 약속이라도 한 듯, 등을 돌려야 하는데. 잠시 동안은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시선을, 배신하는 기분도 느껴야 하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 끝을 봐주는 일. 이건, 배신하지 않기 위한 노력일까? 그렇다면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새벽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일까.
……데리고 갈 수 있을까? 나는 언어와 여전히 친하지 않다. 나는 항상 까다롭고 빈약한 언어 수용을 가졌다. 희미하다, 한 번이라도 있었다는 듯. 완전 없는 건 아닌, 희미함의 희미함. 즐거워야 하는데 전혀 즐거운 시를 써내지 못하고 있다. 개운해야 되는데 전혀 개운해지지 않고 있다. 찝찝함이 남아서, 이것으로 나는 찝찝한 시를 쓴다. 그냥 넘어지고, 잘 모르겠는 걸 그냥 둔다...... 자꾸만 걷는 발이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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