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6.09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 센터에 갔다. 그곳엔 미디어 아티스트를 기리는 비전과 정체성이 작동되고 있었는데, 건물 외형과 프로그램까지 적용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대국민 미디어 아티스트는 한 명뿐이니, 그냥 백남준 아트센터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싱겁지만.
미디어 아트(라고 쓰지만 뉴 미디어 아트라고 불러야 할) 전공을 해'내'면서 사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었고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와서 느끼는 건, 20세기 중후반으로 자꾸만 동아줄을 당기고 있는 호랑이 중 한 마리 같다는 느낌 아닌 느낌. 졸업을 앞둔 와중에 끊임없이 나를 사로잡는 키워드는 '비인간'이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STS쪽 텍스트와 더불어 당대 사상가들 저작으로 이끌렸다. 3년이 지나서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기계'라는 단어는 나에게서 모든 언어를 분해시켰다. 자연스런 수순일까? 방기한 삶의 보복일까? 알게 뭐람. 지금 당장, 시를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만 처지 때문에 죽을 맛이다.
쓰기 시작한 이래로, 리듬 있게 이런 주기가 있어왔다. 마구마구 쓰고 싶은 상태가 되면 가감없이 휘갈기다 '뭔가'를 만든 기분이 들고, 이내 거기서 손을 떼고 등을 돌리는 순간 언어 꾸러미는 제로가 됐다. 제로가 됐는데 '더 써야 돼'라는 압박을 스스로한테 주게 되면, 우주에 떨어진 미아의 처지로 의자에 묶여 절망에 빠진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아무 데도 도달할 수 없어서. 누구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고 기다리는 게 자연스런 수명 뿐이라서. 운이 좋다면 충돌이나 폭발이 벌어지는 스펙타클을 구경할 수도 있겠지, 싶은 허망한 환상에 침범당하는. 무력 그 자체. 실어에 빠지면 이런 기분일까? 모든 게 말이 아닌 거 같고 어떤 단어도 문장이 될 수 없겠다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계속해서 증식하도록, 떨쳐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언어 질식에 빠진다. 이 괴로움을, 한동안 겪게 된다.
그러다 '딸깍'하며 구멍이 트인다. 투명한 모양들이 알맞게 맞춰진다. 무늬(문장)를 그리고 색(의미)을 칠한다. 그러면 어떤 그림이 나타난다. '아 됐다. 이제 살 수 있어' 안도감이 찾아온다. 살던 지구로 다시 귀환되는 기분이다. 그제서야 남들처럼 일상의 고민도 하고, 뭘 먹을까, 오늘은 돈을 어떻게 쓸까, 새로나온 피자는 무슨 맛일까, 요즘 어떤 영화가 재밌지?, 뭐가 검색어 1위야?,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등등. 친구 생각도 나고 미래 걱정도 들고 뭐 해 먹고 살지 불안도 들고 그런다. 읽고 싶던 책도 생각나고 사회-시민으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한 조건들도 생각나고 그런다. 문제는 어떻게 '딸깍'하는지 절대 모른다는 것이고, 더 심한 문제는 이걸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시를 안 쓰면 되는데...' 혜영누나가 말했다. 맞아... 그러면 되는데... 시가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괴롭게 하는데. 날 좋은데 놀러도 안 가고 책 붙들고 끄적이게 만드는 시가 도대체 뭐라고. 사람 괴롭게 만드는데 할 필요가 있냐고. 맞아. 시는 싫어. 싫다고. 딱 거기까지. 싫다, 에서 딱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러질 않는다. 되풀이되는 영화처럼 끝나도 끝나질 않는다. 시는 좀비 같다. 물어 뜯으려고 다가와서 온갖 잡다한 방식으로 쳐 죽이면 더 온다. 그러면 도망쳐야 한다. 너무 많아, 어떻게 저걸 다 죽여. 살고 보자는 식으로 도망치는데. 문제는 우리가 좀비를 정말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너무 많고 많아서 이제는 친구 같아, 좀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껄? 살지도 죽지도 않아. 우리 곁에 영원히 남을 거야. 좀비는 느리고 흐느적대고 감염 됐고 멀리서 보면 초식동물 같고, 그렇지. 딱 시네, 시야.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이 언제나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도시에 사는 시인은, 좀비에 둘러싸인 생존자가 아닐까. 선택해야 한다. 도망치며 살아남을 것인지(도대체 무얼 위해?), 하나하나 죽여가며 생존할 것인지(도대체 왜?). 사실 선택지 따윈 없다. 혼자는 뭘 해도 혼자다. 한 번 좀비를 보면 그게 없어도 모든 게 좀비인 것처럼. 내가 지금 뭘 씨부리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언어를 잃어버린 처지가 너무 괴로워서 망상으로 위무해 볼까 싶었다. 기계에 빠져 완전 소진되고 말았다. 가타리를 읽고, 랏자라또를 읽고나니, (들뢰즈를 읽을 땐 힘이 막 생겼는데,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의미가 사라졌다. 무슨 좌절을 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실패를 겪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의미가 사라져서 절망에 빠진 거고 삶이 실패하고 만 것이다. 대안도 없이 세계관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비인간을 갖고서 이론화 욕심도 냈었고 남들 안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싶었던 것인데. 막상 그걸로 뭔갈 해버린 선배들을 만나고나니 탈탈 털렸다. 언어가 없는 세상으로 유배당한 기분이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 도대체! 라는 말조차 꺼낼 수도 없다. 이게 뭔가 싶어, 어처구니도 없고. 이걸 어쩌라고, 흥미도 안생기고.
그래서 박차고 일어나 센터에 가서 전시를 봤다. 백남준 작업 몇 개와 공동전시에 포함된 외국 작가 두 명의 작업을 알게 됐는데, 흥미로웠다. 빌어먹을. 무슨 기분이었냐면, 외국에 나가 있는 나한테 전화가 와서 현지의 나한테 '흥미로운데!' 라는 걸 들은 기분이다. 뭐가 이렇게 감동이 없냐 감동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관심을 줄 수가 없다. 누가 잃어버린 언어 좀 되찾아줘. 이 막막함을 어쩌면 좋아.
마치 에드 앳킨스의 Hisser 속 인물처럼, 종국에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기분이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미안했어요. 미안해요. 미안. 중얼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힘껏 딴짓을 했다. 나는 지금 뭘 뺏긴 걸까. 어디다 흘린 걸까. 다시 주우러 가야 하나. 어딘진 알아? 되찾아올 수단은 있나. 잃어버린 건 정말 언어인가? 내 삶인가. 그건 어떤 시간이 아닐까? 그러니까 세계를 잃어버린 기분이네. 몸이 이토록 무책임하다니. 잃는 동안 뭘 하고 있던 거야. 가만히 쳐 앉아서 샤프로 밑줄이나 죽죽 그어대고. 떠오르는 단상이나 적고 말이야. 원래 혼자가 되면 혼자서 잘못도 하고 혼도 내고 그런다. 다 외로워서 그런 거니까. 그래도 잃어버린 언어를 좀 되찾고 싶다. 표현을 잃어버린 게 아니야, 언어를 잃어버린 거야. 내 언어 어디갔어. 아, 잘못했다. 애초에 내 건 없었지. 미안해, 미안합니다. 미안했어요, 미안. 그런 다리를 데리고 산책 갔다.
돌아오고 나서 이 모양이다. 그래 일기를 쓰자. 다리는 가만 있고, 손가락들은 또 말을 잘 듣지.
'오늘 전시를 봤다. 환상(환각) 영상 작업물을 힘껏 보고, 외딴 방에 놓인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물의 혼자 놀기를 훔쳐보고, 살인범들의 고백을 들었다. 모두가 자기 얘기를 했다. 누구는 신나 보였고, 누구는 슬퍼 보였고, 사죄를 했고, 즐거워했고, 자랑스러워했고, 울었고, 노래했고, 잠을 잤다. 나는 듣고 보고 적었다. 사실 많이 적지 않았다. 쓸 수 있는 언어가 별로 없어서, 간신히 붙드는 손가락처럼 단어 몇 개를 썼다. 썼다, 쓰고 나니 텅 빈 기분이다. 누가 날 다 사용했나? 누가 날 죄다 베꼈나? 꽉 막힌 기분이 해소되지 않았다. 오래가지 않았으면 싶은데,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의지가 도망쳤을 땐 뭐라도 해야지. 산책을 1시간 했다. 시시껄렁한 책도 읽었다. 흥미로운 마취의 역사를 읽고, 문단 아이돌론을 읽었다. 로르카도 읽었다. 나만 빼고. 나도 나를 좀 읽고 싶은데, 아무것도 써진 게 없다. 이번엔 야생 동물의 질병을 읽을까? 다시 한 번 가타리를 읽을까? 왜 나는 언어를 뺏겼지? 기계적 예속이 뭐길래? 아이러니에 갇혔나? 로티를 읽을 땐 안 이랬는데. 분명 이런 적이 숱하게 있어 왔는데, 태어나 처음인 기분이다. 정말 완벽히 까먹었나봐. 언제 그랬냐는 듯 몸도 기억 못하나봐. 자살의 '자'자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눈금이나 봐야지. 하나하나 천천히 세다보면 다 지나가겠지.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기는 나의 눈금이니까. 날짜도 적고, 기분도 적어야지. 그렇다.'
다리야 그만 좀 빌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