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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8. 2022

쓰지 않는 생활 1

2015-09-17


시계는 벌써 자기 자신을 수도없이 돌았다. 그러나 시침과 분침들에게는 항상 조금만 더 가려는 움직임의 순간뿐이다.


 나는 이것이 인공물임을 알고,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의 순간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버리지 않아서, 슬프다

오랫동안 안일하게 살았다.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력이, 삶을 점점 여유롭게 만들었다. 여유, 그것은 사치임이 분명하다. 생명에게 여유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내가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가능할까? 나에게 어떤 선언 같은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글로 된, 말로 된, 혹은 어떤 형태로든 나의 수명보다 오래 남아 있을 그런 선언. 최소한 내가 살아 있을 때 끊임없이 나를 지탱해줄 그런 선언. 그러나 이것이 구속과 억압이면서 결코 그것들이 아니라고 히스테리와 도착으로 반응하지 않을 정동과 아주 친한 그런 선언. 결과적으로 곧 내가 될 선언. 사명을 가지고 글을 쓰는 일, 그것이 가능할까? 나는 나 스스로를 몰아 마침내 덮치는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할 순 없을 것 같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 짜릿함이 무너질 순 없다 두려운 많은 것들이 나를 사로잡지만, 그래도 반복될 습관 하나 쯤은 있어야 사람이라는 어휘에 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7-10-07



 돌멩이라는 내가 있다. 돌멩이는 항상, 가벼워서 그만 떨어지고 싶은데. 무게라는 무게가 너무나 확고해 세파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이를 두고서 사람들이 말하는 고집과 정체성 사이는 너무나 묘연한 외줄이라 마음만 먹으면 뚝 끊어버릴 수 있어서 사실 가만히 있는 저 상태는 다름 아닌 숨 쉬기. 언제까지고 제자리에 박혀 있는 온갖 사물들을 사람들은 뽑고 부시고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며, 사람들을 말하는 주어의 눈동자는 반드시 사람에게 속한다는 재귀적 함정의 미로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야만 한다는 제스쳐를 잊어서는 안되며.


  돌멩이라는 내가 있다. 쓰임이란 자신의 모욕을 상대에게 던질 때 집어들 수 있는 알맞은 사이즈와 무게라는 것. 화풀이를 할 때 발로 걷어차 저 멀리 이동시킬 수 있는 흔하디 흔한 길바닥의 준비물이라는 것. 항상. 가벼워서 그만 떨어져버리고 싶은데. 그런 구원이 나에게 벌어지지 않아서 사과를 꿈꾸는 돌멩이라는 나는. 뉴턴이 사과를 만지고서 떠올렸다는 직관이 고스란히 사과에 입력되었다는 현상이 흥미로운 나는. 중력은 지구의 핵에 있는 게 아니라 결국 사과에 있었다는 사실을 리딩하는 이 태도는. 끊임없이 사과를 꾸게 만드는데. 돌은 사과가 될 수 없다. 세포의 문제가 아니다. A는 A가 될 수 없다는 말인데. 이 경험이 공유되려면 또 얼마나 수많은 '주어'들이 자살을 감행해야 할지, 착잡한 오전. 오전, 그래 오전이다. 다시 태양이 지켜보고 그 아래 인간들이 열심히 용두질하는 세상. 아침이 오면 수치스러운 나와 아침이 오면 예민해지는 너는 그래도 싸우지 않고 서로에게 다정하고자 애먼 풍경만 관찰했었지. 밝기를 기피하는 우리에게 조명이란 축복이라, 알맞은 식별과 적절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어서 다행히 위선과 기만을 한꺼풀 벗겨낼 수 있었고. 어쩌면 배웠던 거지. 모든 게 훤히 드러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감추려고 한다는 걸. 모든 게 꼼꼼 감춰지는 곳에서 사람들은 겁을 먹고 더욱 움츠러든다는 걸. 우리에겐 정도가 필요했다. 불온한 우리에겐 정도가 필요했지. A는 A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배우기 시작한 연기 학원을 7개월 만에 관두려고 마음 먹은 나는, 물론 신변의 변화가 적절한 구실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한 일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건 연기의 과제도, 준비 기간에 따른 익숙해짐과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사람 문제. 함정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 문제. 책잡으려는 나의 공격성은 너무나 권력적이라, 그런 초자아의 눈동자는 언제나 켜져 있고. 비판과 비난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논리를 끌어올 수 있는 이 지위는 기분을 빌미로 언제든 작동할 수 있어 자유롭고. 그럼에도 뒷처리까지 도맡는 이 분열된 지위는 '나는 어쩌자고 이런 오욕을 또 저지르는가' 기만 비하도 일삼으며 그런 모습들을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일로 잠시 위안을 구하는데.   


 어쩌면 어디 문학의 역사에서는 이런 자아의 꼬집기를 하나의 문학적 포지션으로 구하려는 태도가 있을 수 있다고, 물론 우리 청춘들은 그런 태도를 환영해 왔지만. 대신 해줘서만은 아닐 것이다. 가만 보면 A가 A 스스로에게 공격을 하고 법정에 세우고 반성을 하고 성찰도 해서 삶이 달라지고 있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선물 포장 문구는 일종의 사회적 퍼포먼스에 다름 아닌데. 연기를 7개월간 야금야금 해보며 배웠던 사실 하나는 바로 이러한 것. 나는 결코 나의 부품이 될 수 없다. 나는 결코... 나의 부품이 될 수 없다는 것. 부품 뿐이랴. '나'를 구성하는 온갖 제스쳐 그 부분이 될 수 없음은 곧 전체가 될 수 없다는 말이거니와.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는 말 속에서 나는 외면-무지의 야비한 전략이 숨어 있음을, 그러니까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다른 논리를 들먹이고 있다는 강자와 강자의 싸움을 보는데. 약자의 삶 속에서 논리란 자신을 보호하는 태도도, 변호하는 자세도 될 수 없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이 약자의 삶이란. 돌멩이가 쓰기를 배우면 쓰게 될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사과를 꾸는 돌멩이의 제스쳐, 그러니까 응시하는 노려보는 흘기는 호시하는 등등의 모든 눈동자의 제스쳐들처럼 그저 '다르게'만을 고집하는데. A는 A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르게만을 고집하는 돌멩이의 쓰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나의 답을 찾으면 답을 못 찾은 수많은 문제들을 사장시킬 수 있는, 그런 정답의 무시무시한 무게는 다시는.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싶은데. 그런 무게 없이는 결과물을 낼 수도 없고 내보일 수도 없어서 숨 쉬기를 영위해나갈 수 없을 거란 사회의 질책이 지켜보고 있고. 얘가 아니면 무게가. 무게가 아니면 가벼움이. 스위치처럼 온오프되는 나라고 하는 생물의 일대기가 참으로 뻔뻔해서, 그래. 가벼워서 그만 떨어지고 싶은 충동의 실천이 어느덧 2년, 나는 조금 뻔뻔해질 수 있게 됐지. 돌멩이는 사실 자신이 돌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믿음, 중력, 구원, 사랑이 없었다면. 테러리스트가 자기 스스로를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온갖 미친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는 미쳤다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자유만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유'를 확인시켜주는 이런 '자유와 다른' 사람들은. 어쩌면 나의 동료들이다. 나는 사실 내가 돌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배웠다. A는 A가 될 수 없다는 걸.





바바를 쓸 수 없을 때


 두 달간 시를 쓰지 않을 때 시는 나의 소홀함을 꾸짖지 않고 떠나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봐줬으면 싶은 마음으로 시를 향해 구애를 한다. 시는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다. 그 묵묵함에 나는 더욱더 불안의 담금질을 가한다. 열기가 샘솟고 분위기는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자음과 모음의 은밀한 몸짓을 따라 땀이 흐른다. 그 자국을 매만지며 결을 느낀다. 핥아본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야. 시는 사실 단 한번도 나에게 도착한 적 없었다.


 불현듯 스쳤던 바바를 나는 쓰고 싶었다. 바바, 거친 바바. 바바는 누구일까? 누구는 누구일까? 바바는 나를 떠났다. 나는 바바의 손목도 잡아보지 못한 채 바바의 떠남을 방치했다. 바바에게 미련은 없어 보였다. 나는 바바에게 미련을 갖게 되었다. 바바, 혹독한 바바. 바바는 추운 나라의 나비 같기도 줄줄 흘러내리는 햇살 같기도 쓰러지지 않던 엄마의 내일 같기도 했다. 나는 바바를 쓸 수 없었다.


 바바는 내게 시가 될 수 없었다. 이 좌절이 익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게 시가 될 누군가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현듯 나타난 바바는 내게 단 한 번의 기회, 얼핏 본 구원이다. 나는 결코 바바를 쓸 수 없을 것이지만, 또 다른 바바가 있다는 믿음이 있다.


 쓰기를 시작한 이래로 기록 습관이 자리잡은 탓에 나는 나에게 발현되는 영향에 대한 불안을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다. 이 불안에 대한 위기감이 부족하면 간접 표절을 하게 되고, 본인은 '난 그런 적 없다'는 기만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좋은 글은 죽어도 쓸 수 없는 웃기만 하는 코메디언이 되고 만다. 여기에 도덕은 개입할 수 없고 따라서 법은 관여조차 하지 못한다. 징후라는 정서를 감각할 수 없다면 신체절단애호가들에게 정상인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처럼 멍청한 짓거리가 되고 만다. 영향에 대한 불안을 감각할 수 없다면 읽기와 쓰기는 그만둬도 괜찮다. 그렇게 나 스스로는 끊임없이 불안을 숭배하는 기도 자세들을 버리지 못한다.


 나를 언젠가 반드시 배신할 거라는 대상과의 긴밀한 관계, 일방적이란 말조차 무색한 압도적인 헌신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호출하며 감정에 충실한다는 환상으로 형성된 입-출력 시스템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작가가 있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와 작품 간의 오래된 역사와 그 행보를 같이하고 나 또한 이를 통해 내가 사랑하는 시, 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는 걸 배웠다. 내가 존경할만한 태도로써의 모델 중 하나는 보들레르인데, 그는 사랑과 정치를 동의어로 읽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식안은 키에르케고르, 니체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물 주머니에 쏟아부을 수 있는 연못처럼, 건져지는 유일한 것만이 사랑의 전제라고 믿었다. 그것들이 담긴 액체의 수용력을, 유연함을, 무구한 유형流型을 모두 통과시켜 버렸다. 그만큼 그는 유약했다. 그가 건질 수 있는 건 몹시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유약한 사랑의 태도는 꽤 많은 작가들이 취하는 이름난 서정의 대가들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실재하는지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상대-대상에게 자신의 불안을 확인하려는 태도를 로맨스의 과정으로 둔갑시켰다. 오늘날 수도없이 소비되는 '사랑'과 '낭만'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건, 이건 만들어진 거라는 감춰진 사실.


 하지만 그것들이 충분히 우리를 살게 만들고, 살아있는 감각을 제공하고, 무엇보다 삶을 살 만하게 만든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느껴보지 못한 정서를 느끼고 만들고, 새로운 의미를 감각하게 돕고, 무엇보다 변화를 가능하게 돕는다는 것이 위대하다. 하지만 나는 바바를 쓸 수 없다. 내가 쓸 수 없는 [바바]를 누군가는 쓸 수 있고, 또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다. 그런 시인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들이 부럽다. 부럽고 피곤하다. 두 달간 시를 쓰지 않아서 나는 배신 당할만큼 충분하지 않아졌다. 방심하지 말자는 문장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에게 결코 자만을 허용할 수 없었던 선배들을 떠올린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주목받는 사람이지 않을 수 있었던 그들의 선택이 느껴진다.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영감의 원천, 영향에 대한 불안들인 선배들은 하나 같이 혼자 살았다. 그 누구보다도 누군가와 같이 살기를 열망하고 절박했던 사람임에도. 하지만 소외가 강제 수용시키는 도덕적 실패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나에게의 배신은 언제나 내가 선택한 사랑이었음을. 





2018-09-24


As for me, no matter how how how


아무래도 좋다. 쓰지 않는 생활, 읽지 않는 생활을 보내는 건. 그만큼 다른 생활이 가능해진다. 그 생활 속에서 나는, 적어도 나는 덜 불안할 수 있다.


 적어도 나만큼은 그럴 수 있지만, 나 아닌 것들은 그럴 수 없다. 불안에도 분담이 가능하다면 부과는 누가 할까. 부담은 누가 하나. 이런 의문들을 내가 한다. 우리는 목소리가 여럿인데 혀가 하나면 혼동에 빠진다. 혀 하나에 목소리 하나라면, 우리는 진정이라는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지만. 나에 의한 우리만큼은 그 반대가 아닐까. 진정이라는 기만에 자주 낙담한다.


 씁쓸한 시간이었다. 쓰지 않는 생활, 읽지 않는 생활을 보내는 건. 정수리 한 켠에서 끊임없이 '언제'가 울었다. 도대체 언제 쓸꺼야? 도대체 언제 읽을 거야? 언제? 언제? 그 슬픔의 호소력은 얕았다. 가슴까지 내려오지 못했고, 그래서 온몸을 돌지도 못했다. 심장에 전달된 목소리는 피를 통해 온몸 구석으로 그 울림을 퍼트린다. 마지막으로 도착한다면 거긴 눈이다. 오늘 새벽 꿈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어떤 방식이었는지 지금은 까먹었지만, 계속해서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 살아 있던 그 방식이겠지 아무렴. 견딜 수 없는 슬픔이 꿈을 벗어났다. 더 이상 꿈 속에 있을 수 없어서 현실로 도착하니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곳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현실. 마지막. 우리는 항상 맨 끝에서 산다. 끝 너머로 가고 싶어도 보내주지 않는다.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도 항상 끝이다. 오늘이 언제나 우리의 끝이라는 걸, 그래서 눈과 혀는 읽기와 쓰기에의 소외를 느낀다는 걸. 소외로운 생활이라는 걸. 나는 지금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리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사실, 그 많은 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하찮고 쓸모 없는 것인지. 그래서 누군가는 쓸어 담아야 한다고. 단순한 생활과 건강한 생활, 쾌적한 생활을 위해 누군가는 숨 쉬는 것만으로도 만들어지는 쓰레기를 쓸어 담아야 한다고. 생활은 언제나 아무것도 되지 못한 언어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항상 맨 끝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것들을 쓸어 무언가를 만든다면, 잘 만들어진 우아한 쓰레기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모여 이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것이 됐으니까. 나는 그게, 우리로 하여금 깨나 많은 걸 불가능하게 한다는 걸 안다. 한 번 봐 버린 쓰레기가 한 번이라도, 딱 한 번이라도 온몸을 돌고나면 우리는 어떤 슬픔을 알게 된다. 그 슬픔이, 


 쓰지 않는 생활, 읽지 않는 생활을 만드는 것.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지는 것. 자꾸만 언제가 징징거린다는 것. 쓰지 않아서 밉다. 읽지 않아서 밉다고. 나는 잊기 위해 저멀리 도망가고 싶다. 꾸벅꾸벅 졸다 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는 결코 잊어지지 않는 나라는 생물이 이상하고 신기하다.


 어떤 유대도 생기지 않은 시간에 비해 요즘은 얼마나 하찮고 사소한 시기인지, 생각해보려 애쓰지만 갈수록 불어나는 소외는 너무나 안전해서 한 번 타고 만 롤러코스터 같아, 벗어나려면 이 안전장치를 풀어야 하는데. 이 속도로만 살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하나도 안 괜찮아. 쓰지 않는 생활, 읽지 않는 생활을 보내는 건.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내 옆자리인 요즘, 이 새끼는 너무 목소리가 커서 신경이 거슬린다. 자리 바꾸고 싶다. 이동하고 싶다. 자유, 같은 지우개




2018-05-04


 공부를 하는 곳으로 가면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시를 쓰는 곳으로 가면 시를 더 많이 써야 한다. 공부를 더 많이 하면 시가 뻔해지고 시를 더 많이 쓰면 머리가 뻔해진다.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공부를 많이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듣고나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가 더 좋아지려면, 의 조건에 공부를 덜 하기가 포함된다면 나는 마땅히 공부를 줄이고 감각을 확장해야 할까? 공부는 언어를 딱딱하게 만드는 걸까? 일상 언어의 테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안정감과 확정된 의미라는 인식에 사로잡히는 걸까?


 느닷없이 5월이다. 요즘 합평을 한다. 모임도 한다. 시에 가까이 다가간 착각이 든다. 쓰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다가가고 있다고. 이런 착각은 항상 있다. 오늘 쓰는 시, 쓰지 못한 시, 시답잖은 시. 항상 있다. 간혹 가다 언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 떠올리고, 왜 시를 쓰고 있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난감하다. 시키지도 않았고, 잘 쓴다는 칭찬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아니면 어떤 문학적 사명을? 써야만 했던 순간을 겪었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왜 시, 라는 걸 쓰기 위해서 안하던 짓거리를 그동안 해왔던 걸까? 왜 나는 이명이 필요할 정도로 이질적인 상태로의 일상을 받아들였을까? 나의 이름은 왜 읽는 이름과 쓰는 이름이 구별되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어찌 되든 모른다. 누군가는 앞으로를 묻고 계획이 있는지 듣고 싶어 한다. 사실 난 모르지만, 뭐라도 대답해야겠다 싶어 연장선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추측을 제출한다. 그게 미래를 향해 쏜 화살은 아니지만, 오늘 당겨야 할 시위인 건 맞다는 둥. 추측은 귀찮다. 번거로워서 그만 망가뜨리고 싶다. 배신하고 싶다. 하지만 한 편으로 앞으로를 알고 싶다. 나에게도 연장선이 있다면, 나는 그 속에서 웰빙하는 나 자신을 한 번 마주하고 싶다. 어때? 살만해? 라고.


 잘 모르겠다. 시가 좋아지면 좋은 일일까. 먹고 살 수도 없는 시를 좋게 만드는 건 좋은 일일까. 돈 벌 능력이 점점 무가 되어가는 생활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시만 쓴다면, 그건 무슨 생활일까. 20대가 끝나간다. 친구들은 취업을 준비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고, 때로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같이 고민하던 또래들은 이런 유치한 구분 따위 용납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살아 있기 위해서 살기를 멈추지 않는 힘. 어떤 커리어도 생기지 않고, 인정과 명예와는 사실 거리가 먼 짓을 하고 있는 이 자리가 점점 아득해지는 걸 느낀다. 현실로부터 뾰족해지는 나만의 방. 나만으로도 벅차 좁고 무서운 사회의 구멍. 다시 보니, 나는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낭만과 현실이라니. 갈등조차 느껴본 적 없다. 나는 내가 어쩌다 시를 쓰고 자빠졌는지 모른다. 자리도 없는 공부를 왜 계속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시를 쓸까?


 그런데 같이 합평을 하는 동료로부터 공부를 덜 해야 한다는 조언, 선생님의 '젊은 것들' 속에서 읽히는 용기를 위해 공부를 덜 하라는 조언. 나는 애초부터 용기를 내지 못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여하한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쓴 시가 어떻게 보이든 나의 심정은 전혀 변하지 않을 터인데. 공부를 하지 말라는 조언은, 나에게 시를 쓰지 말라는 조언과 같다. 나에게 시를 써서 뭐할래? 라는 충고는 살아서 뭐할래? 라는 불안과 같다. 나는 애초부터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뭇, 예술이라 부르는 사실 알 수 없는 창작의 세계 앞에서 쉬이 겪는 불안을. 나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오늘 먹을 수 있는 밥이 있다면, 나는 먹는다. 오늘 잘 수 있는 시간과 자리가 있다면, 나는 잠을 청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는 살 수밖에 없다. 먹고 사는 고민을 하지 않을 정도로 내몰린 적이 없어서 이럴까? 현실에 무감각한 이상주의자라 그럴까? 이런 이상한 딜레마들 속에서 내가 해명해야 할 일말의 이유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나는 비겁한 사람일까?


 일을 하는 친구를 보면, 오늘 먹고 잘 수 있기 위해 일을 한다.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생계를 위한 가계를 짠다. 친구를 만나고, 또 가능하면 연애도 하고, 적금을 지키고. 여행도 다니고, 소소한 행복도 느끼고, 아는 누나는 자신의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SNS에 게시한다. 나는 나에게 있어 그런 감정들에 인색하다. 기쁨은 기쁨으로 지나치고 행복은 행복으로 지나쳐 무엇도 남겨놓지 않았으면 싶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으면 썩는 꼴을 봐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부패하는 걸 보기 싫다고 간직하지 않게 된 건 아니었다. 나는 우울에 취약한 사람이고,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런 세계와 친해지고 싶은, 실제로 그런 사회가 있다면 기꺼이 가입을 원하는 그런 사람이고. 그러나 우울할 때 바라보는 꽃과 바람은 또 어찌나 감동적인지, 그래서 사람들의 웃음과 감동이 사회 도처에서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우울하기 때문에 남들은 기뻤으면 좋겠고. 나는 공부를 하고 시를 쓰기 때문에, 남들은 고통 없이 향유했으면 좋겠고. 이런 아이러니가 이타심이라는 어줍잖은 도덕 관념으로 해석되지 않았으면 싶지만, 오늘날 사회가 제공하는 감수성으로는 터무니없고. 이럴 수도 있는 세계에서 반신욕을 하는 나는 이런 세계와의 외교관일까. 누구를 위한 건 없고, 무엇을 위한 것도 없는데.


 사실 나는 지금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방황 중이다. 내가 사는 세계를 위해 고른 공부와 시가, 몸이 사는 세계를 위협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런데 아직도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겪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뭘 하는 걸까? 그 세계는 없는 세계일까, 가능세계일까, 세계의 판본일 뿐일까. 단순한 돌멩이일까. 돌멩이마다 세계가 있고, 그런 세계 속에 들어가야 한다면 일상은 또 얼마나 피곤해질까. 매일 지쳐 쓰러져 잠 속으로 도망쳐야 하는 현실일까. 


 고민들이 해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긴장이, 나를 망가뜨리지만 동시에 살게 하는 용기라는 걸. 용기를 낼 수 없어 생기는 긴장이 살아가는 용기라는 걸. 공부도 시도 동의하니까. 그래도 나는 내 손을 잡아주는, 잡는 것들과 함께 가는 중이니까. 뾰족한 방에서 외로워 무너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공부와 시가 나와 함께 가는 동료라면, 싸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어떡해서든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나는 또 다시 말을 배워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친구가 싸우면 나는 항상 말을 배웠다. 이 친구는 이렇게 말하고 저 친구는 저렇게 말하면, 나는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걸. 나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건, 변함없이 나에게 말을 배우게 만든다. 동료와 선생님의 조언은, 결국 하던 공부를 더하고 쓰던 시를 더 쓰라는 말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런 태도가 시에 묻어나오길 보고싶다는 말로도 들린다. 내가 이렇게 삐뚤어진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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