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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8. 2022

쓰지 않는 생활 2


2019-05-24 


요즘은, 자기 소개를 쓰고 프로젝트를 제출해 모인 사람들과 수요일 저녁 토요일 오전에 공부를 하고 책방에 나가 일을 배운다. 시를 안 쓰고 책을 안 읽었다. 심정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갖고 싶지 않다는, 투정 아닌 투정도. 이런 걸 말로 하고 싶지 않고 꺼내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과 동시에 기꺼이 입 밖으로 꺼내서 스스로를 확인하지 않으면 어쩐지 더 멀쩡해질 거 같다는 불안. 공부 아닌 공부를 하고 일 아닌 일을 하면서 읽기와 쓰기를 못하고 있다는 핑계 아닌 핑계.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을 뿐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아닌 게 아닌데. 


 쓰기는 한시라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이 놀이를 그만두겠다고 집으로 가버리면 그만인 시소 타기처럼. 한 번 앉고 나면 건너편에 앉아줄 누군가가 있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으며 서로의 발을 맞춰 뛰는 놀이를, 기다리게 된다. 앉아서 혼자 기다리는 상태. 쓰기는 여러 태도들을 낳는데, 그 중 하나는 멀쩡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앉혀 스스로 고문 받도록 온몸을 무방비로 만든다는 것. 물리적 타격이 없어 그는 불안하다. 그가 기꺼이 몸을 내줬지만 아무런 가해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가해인 것을 떠올린다. 세상이 방해하는 그 감각들을. 자신이 일그러졌던 그 순간들을. 일상이 거울인 줄 알았던 당연함의 배신들을. 그렇게 그는 가만히 앉아 차분히 비명을 지른다.


 한 번은 인생 프로젝트를 발표하라는 요구에 맞춰 정신병리에 대한 접근을 정리해 봤다. 나는 여전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20대의 지난한 방황이 하나의 초점으로 정리될 거라는 점성술사의 말을, 사실은 기대했다. 오늘이 볼록한 렌즈라면 내 안구는 내일을 겨냥할 줄 알아야 했다. 뒤편에서 쏘아대는 시선들을 한데 모아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몸을 던져야 했다. 돋보기는 어쩌자고 빛을 모아 견딜 수 없게 만들까? 무엇이든 과잉-집중된 것들은 뜨겁고 감히 접근할 수 없다. 쥐를 사냥하던 길냥이의 집중력에는 주의력이 없었다. 내 일상에는 사냥할 만한 탐스러운 것들이 부재해서 집중도 주의도 제대로된 것이 못 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나올 수 있는 시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는, 굳이.


 비명을 지르던 사람은 더욱더 세상을 밀어내 자기-세상을 확장해 나간다. 고통의 팡파르란, 온 세계를 자기 몸으로 체현하는 것. 비명들은 모두 창조자의 첫 말씀이다. 쓰기가 낳은 이 태도는 간신히 첫 번째 수정률을 가닿게 만든다. 시와 저자 사이에서 그는 감히 벗어나려고 한다. 클리나맨. 이탈과 삐딱함. 그는 더 이상 쓰기를 위해 자발적으로 앉은 사람이 아니다. 자발이라는 혐의는 더 이상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된 '자율'에 묶여 안절부절하는 불안을 겪는다. 이 상태는 자신의 구명줄을 놓친 우주 미아의 상태와도 같다. 산소가 얼마나 남았는지. 연료는 얼마나 남았는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과연, 있는지. 그는 세상으로부터 이탈됐고, 자기 스스로로부터 이탈했다. 클리나맨. 그는 분명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 운동이란 것은 내부 분열이다. 그는 내적으로 계속해서 나누고 쪼개고 부순다. 그의 지금 상태를 구원해줄 어휘가 과연 나타날 수 있을까? 혹은, 그는 도대체 어떤 '힘'으로 분열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이런 비하와 혐오를 가지고서도 어쩐지 위선적으로도 위안되지 않는 요즘. 나는 지금 어떤 껍데기를 감각하는 중이다. 이 뻔한 은유 속에서 내가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이 막 같은, 껍질 같은, 끈적거리는 늪 같은 것을 '언어'라고 한다면, 나는 도대체 뭘까? 주어인 나는 어째서 쓰려는 상태 속에서만 이토록 추악해지려고, 잔인해지려고, 뻔뻔해지려고 하는 걸까? 충족할 만한 쾌락도 없으면서. 이기심이 작동되는 구조도 아니면서. 쓰는 '나'는 죄를 지르는 사람과 닮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범죄를 지르는 사람은 항상 뭔가를 쓰고 있는 사람과 같은데, 그들의 공모에는 어쩐지 희열이 느껴진다. 그들의 희열이 그들의 것은 아님에도. 그들은 분명 개인이 지를 수 있는 어떤 가용치를 확인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 단계에 있어서 그렇게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걸까? 혹은 확실한 게 없기 때문에 그런 걸까? 하루하루가 점점 볼록해진다. 이 볼록함은, 개구리의 볼처럼 어떤 울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인데. 감히 슬퍼할 수도 없는 요즘. 감히, 나를 망가뜨릴 수도 없는 요즘. 불행히, 미쳐버릴 수도 없는 삶은. 나는 어떤 '언어'들을 투과시키려고 하나.


 쓰기가 만든 사람의 자율은 그에게 몸의 감각을 일깨우게 돕는다. 발을 움직여 봐, 다리를 이끌어 봐, 몸통을 기울여 봐. 그에게 부위가 있다는 걸, 의자와 책상은 알려준다. 그는 이탈을 겪으며 문득 그를 구원에 동조하게 만들었던 지난 손길들을 떠올려본다. 시들어버린 잎사귀처럼. 닳아 해진 현수막처럼. 도무지 지금의 것이라고는 느껴지지가 않는다. 죽어버린 것들. 지나가버린 것들. 스스로를 이탈한 나머지 그는 한때 사랑했던 모든 은유들마저 배신한다. 또는 그를 배신한다. 그에게 '의지'는 더 이상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쓰기는 사람에게 다음의 수정률을 가닿게 만든다. 되돌리기Back-up. 모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야, 그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차분해질 수 있다. 명상에 돌입할 수가 있다. 케노시스. 그는 모든 걸 되돌리기 위해, 중단하기 위해 반복 행동을 기꺼이 수행한다. 발을 움직여 봐, 다리를 이끌어 봐, 몸통을 기울여 봐. 여기서 그는 읽기를 수행할 수 있고, 쓰기를 수행할 수 있고,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그런 반복 행위-교육으로써 자기 교정을 수행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안증세-의 보다 사회적으로 안전한 행동들. 그는 이 시간 동안 버텨내고 견뎌내는 걸 배운다. 그에게는 이것이 마치 고통의 총량이 속도에 반비례한다는 걸, 때로는 알아차릴 수도 있다. 가끔 넘어지면서.


 혼자가 되려는데 혼자일 수 없어서 내가 어디에 나 스스로를 안주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는 요즘. 나는 혼자인가? 아니다. 혼자가 아닌가? 아니다. 나는 어디에 있지? 나는 뭘 쓸 수 있지? 내가 쓰려는 건 어디에 있지? 더 심해지는 건, 내가 지금 어떤 '출발'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감각들은 모두 일촉즉발이라는 '위기감'과 닮아 있다. 나는 지금 위기다.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나 곧 벌어질 것이라는 징조를 체감하는 상태. 그 벌어짐 속에서 나는 도무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을 거란 공포의 상태. 나는 요즘 확실히 '자기위기감'이 굳세지고 있다.


이게 시의 수정률, 이라고 내가 앞으로 기대려는 태도와 상관이 있는 걸까? (라고 물으면 당연히 상관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나만의 준칙들에 사로잡히면, 그래도 삶이 좀 나아질 수 있을까? 율법이 한 민족의 정체성을 수천 년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고리라고 하는 건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아서 더 끊기 어렵고 건드리기 어려운 거 아닐까? 


 사실은, 시를 쓰는 게 겁난다고 말하는 게 맞다. 나는 시를 쓰는 게 겁난다. 내가 쓰는 게 아니라서. 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2020-03-31


작가의 블록 현상은 그 양상과 원인이 다양하지만 두 가지 공통된 특질을 보여준다. 첫째, 지적으로는 글쓰기가 가능한데도 글을 쓰지 않는다. 둘째,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p. 121

- 하이퍼그라피아, 앨리스 플래허티, 휘슬러, 2006


1. 3년이라는 0시 0분 0초


쓰겠다는 삶이 불명이다. 사는 게 곧 쓰는 거라고 감히 의심할 수 없었던 시간이 아득하다. 살기와 쓰기는 떼어낼 수 없는 한 몸인 실체라고 믿었는데, 감히 떨어질 수 있는 거였나. 살기는 쓰기일 수 없다는 걸.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사실은 그게 맞다고. 내심 바랐던 건 아니었나.


 17년부터였다, 아무것도 쓸 수 없어진 건. 드문드문 그 블록 현상(Writer's Block)에 대해 토로를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 사이에 뇌는 우울과 패배에 절여 도피성 도파민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중간중간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현실이라는 위협과 살기로부터 안전했다. 뇌는 자기 보호 장치-완충 역할을 톡톡히 해내서 좌절 속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학습시켰다. 좌절했지만 전혀 좌절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도파민을 불러 올 사소한 쾌락들만 있으면 된다고. 


 길들여지고 나니 쓰기에 매달릴 재간이 짧아졌다. 조금 하다 안되면 바로 시들어졌다. 읽기도, 쓰기도 나에게는 과거의 유산처럼 죽은 사람을 향한 기도문처럼 강박으로 맴돌았다. 반복해야지, 반복해야지. 의미였던 그 세계를 추모해야지. 세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순간의 번뜩임을 추억해야지, 하면서. 그 시간이 어느덧 3년이다. 3년 전의 나와 나는 도무지 마주칠 수 없어졌다. 세상의 모든 글자가 모래 같았다. 세상의 모든 풍경이 물에 빠뜨린 수채화 같았다. 아무런 감흥도 낙도 흥분도 희망도 할 수 있을 거란 의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3년이라는 세계는 그랬다.


‘작가의 블록 현상 writer’s block’ (작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글을 쓰지 못해 고통스런 상황에 빠지는 현상) p. 10


 자정의 질병에 걸린 것이다. The Midnight Disease,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는 책은 위와 같은 작가들의 병에 대해 말한다. 하루에서 다음 하루로 넘어가는, 시계라는 기계가 발명한 시간의 층위에 끼인 사람들의 절규가 바로 자정의 질병이다. 그 층위에 끼인 사람들은 과거로 가지도 못하고 내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블락되고 만다. 꽉 끼인 상태. 갑갑함, 폐쇄 공포, 두려움, 박탈감, 죽음에의 공포, 그 모든 심리적 정황들을 겪어야 하지만 놀랍게도 현실은 자유롭다. 여지없이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세계는 굴러가며 사람들은 자고 일어나길 반복하며, 기호와 자본의 성욕이 사회의 내일을 잉태하는 무한 출산-증식이 작동한다.(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굳이 대를 이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걸까) 기어와 기어 사이에, 반도체 소자의 극과 극 사이에 끼인 듯한 개체는 자기 자신을 잊어야만 그 시스템에 흘러들어갈 수 있다. 블락된 자신을 유기하라고, 뇌는 제안한다.


 어때?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 온오프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너의 이웃들처럼 - 살아도 괜찮아. 돈을 벌고 그 돈을 쓰는 맛을 봐. 널 위해 뭔가를 사봐. 너가 원하는 걸 충족하는 상품을 찾아봐. 너의 삶은 그런 것들을 차지하는 거여도 괜찮아. 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제안들. 당신의 욕구-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자본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세계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 현실 따위 잊게 해줄게, 아니면 현실을 바꿔버릴게, 유례없는 커스텀화 권력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 라는 아주 친절하고 포용력 있는 손길들. 뇌는 차라리 접속하기 편한 현실에 안착하길 제안한다. 너의 고통이 이제 그 어떠한 도취-성취도 불러오지 않는다면 좀 더 손쉬운 방법을 택하겠어. 라는 생존 방식.


 3년이라는 세계가 그랬다. 1년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다 1년은 그래도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다른 삶을 살았다. 불안한 삶이었다. 두고 나온 아이가 무슨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는, 필시 그 일은 사건 사고를 가정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불안이 계속해서 나를 노려봤다. 뒤에서 누군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처럼, 그 순간의 소름처럼, 불안했다. 결국 친구들을 뒤로 하고, 사회로부터 루저화되고, 끝끝내 뇌조차 배신해야 할 지경을 위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뾰족했던 방 아닌 방으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그 자정의 방으로. 길들여진 방식을 배신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뇌는 나에게 익숙하지만 편리한 행동 양식을 끊임없이 부추겼다. 쓰기와 읽기는 너랑 맞지 않아. 너 사실은 하나도 재미 없잖아? 속삭이는 목소리. 시계를 부숴 버리고 싶었다.




2. 사로잡힌 사람의 일시정지



오차를 최소화한 기어들의 운동은 규칙적인 강박으로부터 추상적인 개념을 가능하게 만든다. 시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안에서 시간을 발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겠다. 시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규칙적인 운동의 지표가 현실과 대응해서라고. 한 번 발명된 시계가 지금껏 단 한순간도 멈춰본 적 없다는 사실같이, 대응이 끊어진 적 없다면 시간은 영원히 존속된 것이라고. 발명된 시간은 마치 발견한 것처럼 원래 그랬다는 듯 우리를 지배했다. 시간은 규칙적인 질서의 지표 위에 덧씌워진 징검돌일 뿐, 언제든지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고. 


 고전 물리가 시간을 표상하는 방식은 위치의 변화를 납득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방식이었던 거 같다. 시간과 공간이 결합하게 된 방식이기도 하다. 같은 공간 안에서는 두 가지 시간이 흐를 수는 없다고. 물체가 그걸 보여주고 있다고. 그건 나에게 있어서 몸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결합된 의식의 방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 된 우리에게, 언어는 몸과 친하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언어는 완전히 다른 시간과 공간을 따르는 의식이다. 그 의식이 몸과 결합되어 언어에도 마치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따르는 방식이 유일한 것처럼 여겨졌다. 적어도 무언가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쩌다가 살기와 쓰기가 같아졌던 걸까 나는. 언제부터 나는 읽기와 쓰기에 매달리기 시작했던가. 그래서 불안에 시달리면서까지, 모종의 살기를 느끼면서까지 다시금 제발로 돌아와야만 했을까. 21세기가 사는 방식과 왜 친해지지 못할까. 결국 이런 탐구를 하는 것조차 납득하기 위함,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닌 극복하기 위함, 달리 말해 더 불안해지고 더 반-사회적이 될, 그런 삶을 위한 것일진데. 합리화를 종용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납득해야만 하는 이 상태는 자정의 질병에 걸린 한 환자의 몸부림이자 면역을 기르려는 노력처럼 보일까? 자의식이 만연한 이 시대가 너무 괴롭다.


 단순히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만 한다. 작가의 블록 현상 역시 실패에 대한 두려움 또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너무 의식할 때 찾아온다. 지나친 자의식은 결국 글을 쓰고자 하는 동기를 약화시켜 버리고 만다. p. 89


 그러나 이 모든 헛짓들이 결국 부차적인 시도들임을 안다. 언어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럴 수는 없어. 그걸 느껴버린 순간 결국 세계가 정지해버리고 만 것이다. 시계가 망가진 것이다. 현실이라는 시간이 끝나고, 돌연 언어의 시간으로 살게 되어버린 순간. 쓰기는 곧 살기가 됐다. 쓰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었다. 산다는 건 읽기라는 잠을 자고 쓰면서 깨어나는 삶이었다. 그게 언어의 방식이었다. 아름다움의 방식이었다. 


 3년이라는 세계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환멸에 아무리 의미화를 시도해도 모두 헛짓이었다. 0. 0이라는 허무 말고는 아무것도 붙일 게 없었다. 시작이 되는 0도 아니었다. 나는 이걸 인정해야만 했다.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노예가 된 이상, 나는 나의 과오, 마땅히 그렇게 살았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죄의식, 종교를 지탱하는 그 마음 가짐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아름다움이 들어선 순간 나에게 신의 자리는 없어졌다. 나는 벗어나려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다. 아무리 현대판 자아 심리들을 이용해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근대의 발명품들을 이용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다른 건 다른 거다. 쓰고 싶다가 아니라 쓸 수밖에 없다라는 걸. 그걸 종용하는 건 이상도 욕망도 명예도 꿈도 희망도 자본도 아니라는 걸. 언어는 나를 도구처럼 쓴다.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보고 싶다고 호소한다. 언어는 나더러 자기를 충분히 이용하라고 한다. 그런데, 언어는 몸이 없다. 나는 겁이 난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게나가 아니다. 겁이 난다. 언어를 쓰는 게 아니라 나를 쓰는 거라서. 결국은 내가 나를 도구처럼 써야만 해서. 언어는 신이자 시스템이다. 자리만 만들어놓고 거기에 나를 앉힌다. 나는 또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앉고 말았다.




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배우기를 쓰기로 보여준 프루스트는 읽기를 동원해 하나의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기계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기계와 기술을 혼동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기술의 수행체가 기계라 해서, 마치 시계처럼 시간을 말하기 위해 시계를 말한다 하더라도 시간과 시계는 엄연히 다르듯, 기술과 기계는 다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시간은 기계의 시간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사람의 시간이다. 언어의 시간이자, 자정에 끼인 시간이다. 기계의 시간이 기술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지만, 둘의 시간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정에 끼이고 싶지는 않았다.


 자정의 질병에 걸린 사람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 한다. 그 어떤 의미도 달라붙지 못한 기호들을 거쳐 어떤 시간성을 획득할 때 비로소 잃어버렸던 것이 된 도래할 시간이라고, 느낄 수 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방해받는 감각들을 찾아나선다. 뇌가 종용한 편리하고 유용한 도파민들을 방해하는 다시 그 세계로. 사랑하던 수많은 것들이 다가서면 멀어지던 배신의 세계로. 나는 방해받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라는 걸 받아 적을 수 있다. 자의식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게 언어의 세계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현실이 아니라 모든 게 정지한 채 마주하거나 지나친다. 운동이 가능한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의식일 뿐이다. 정지한 걸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언어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는 나를 쓴다. 나는 그래서, 나를 쓰려고 발악한다. 언어의 흉내를 내는 것이다. 언어가 나를 쓸 때는 항상 자의식의 신호에 따른다. 방해받는, 가로막히는 신호. 그때 언어가 빌려간 나를 되찾기 위해 나는 더듬기 시작한다. 그 과정이 더디고, 버겁고, 막막하고, 배신당하는 세계라는 걸. 자정에 끼이는 시간이라는 걸. 이제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잃어버린 시간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니다. 바로 여기 없음. 부재 그 자체다. 부재를 찾는다는 건, 있었던 감각을 좇는다는 것. 있었던 감각을 불러 일으킨 어떤 순간의 감각에게 항의하는 것. 돌려놓으라는 호소가 아닌 나 자신을 쓺으로써 일종의 복수 같은 태도로 항의하는 것. 닳는 게 곧 잃는 거라는 시간의 무정한 질서에 항의하는 것. 이제는 감각을 다시 세워야할 때다. 기호에 대한 감각, 기호라는 감각을 일으켜야 할 때다. 모든 게 나를 투명인간처럼 빗겨가던 3년이라는 세계를, 이제는 배신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불안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수개월은 뇌의 종용을 알아차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나 다름 없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를 보기 위해 쓴다는 건,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다.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비밀이다. 시를 쓰겠다고 5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태도랄까 하는 것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도, 시를 쓰려고 하면 겁부터 난다. 언어가 모든 걸 뺏어 갔다고 어디다 하소연 할 수도 없었으니. 블락과 실어는 다르다는 걸. 악랄함으로 따지면 블락이 더 심하다는 걸. 아는 데 필요한 시간이 3년이었으니. 지금까지도 겁이 나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시를 쓰려고 할 때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수록, 나의 시간은 빨라진다. 너무 빠른 나머지 모든 게 그대로다. 과잉된 나는 지쳐 나가 떨어진다. 뇌는 이때다 싶다. 나는 요즘 가속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사로잡는 은유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나는 5년 동안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다. 은유에게 진실하지 못했다. 나에게 붙들린 은유들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게, 안타깝고 처참하다. 어릴 때 잡던 곤충들처럼. 나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붙들고 있는 은유들은 모두 15년도에 잡힌 것들이다. 새로운 것, 나아진 게 무엇도 없다. 흥미가 떨어진 읽기와 감흥이 없는 쓰기에 허덕이는 동안, 은유들은 그래도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배신하지 않고 있다. 배신했던 건 나였을 뿐이다. 우연을 가장해 다른 책을 읽고, 다른 활동을 하고, 그러다 아예 읽기를 멈추고. 쓰기를 말아버리고. 무엇이 더 배울 게 남아있다는 강박으로 여전히 철학을 붙들고 있고. 퍼즐 조각 하나 찾지 못한 채 5년이 흘러가 버렸다. 얼마나 사로잡혔는지 숨 돌릴 틈도 없었던 거 같다. 내가 사랑했던 은유들을 되돌아볼 틈이, 그 자정의 또 다른 시간이.






2020-12-25


일상이 밀어내는 '바깥의 상상'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요즘,

나는 어딘가 해어지고 낡은 기분이 들어, 사실은 연식이 오래된 기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이기도 해서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자 애써 낭만들을 호출해 보지만. 턱없지.


 여전히 나는 17년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망령, 유령의 드리움. 우울의 도화선이자 애도의 시한폭탄인 '시간의 어긋남'이 17년에 발생했다는 걸, 시공간의 일그러짐이 삶의 궤적을 틀고 말았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왜이리 많은 시간이 요구됐던 걸까. 어쩌면 저 저주는 데리다를 읽어버렸기 때문에 나타난 걸 수도 있다. 어쩌면 저 저주는 스스로의 마침표를 찍어버렸기 때문인 걸 수도 있다. 여느 학자들의 생태를 소문으로 듣다보면, 공부를 이어가는 건 깨나 무수한 심리적 부침을 극복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데. 나는 그 부침을 극복하지 못한 채 나가떨어진 건 아닐까, 아니 정확하게 정말 그랬다고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닐까. 이 사실을 외면하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어가 문제길래,


 이렇게 스스로를 다그쳐보지만 사실 소용이 없다. 그저 계속 진 것 뿐이다. 졌다. 상상에게, 은유에게 졌다. 진다는 건 멈춘다는 것이고, 멈췄기 때문에 왈가왈부가 달라붙는 것이다. 지난 3년간 구구절절 시가 왜 써지지 않으며, 쓰는 생활과 읽는 생활을 왜 유지하지 못하며, 읽고자 하는 쓰고자 하는 세계로의 몸 던짐이 왜 감행되지 않으며를 토로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일종의 문을 두들긴 셈인데, 그 어디에서도 호응은 없었으므로 좀 더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이 둔하면 얼마나 둔한 걸까. 독학자의 분투는 이런 데서 발생하는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역시 대처가 민첩하지 못하다. 집단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런 데서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불행이겠지만,


 하지만 각도를 조금 틀어보면 나는 분명 '졌지만' '돌아갔다'. 태어난 지 30년이 되는 오늘, 내가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옷들이 사실은 얼마나 인위적이고 우연적인지 새삼 떠올린다. 언제부터 내가 책을 읽었다고. 언제부터 내가 시를 썼다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나잇살 덕분에 계산은 수월하다. 내 삶에 있어서 '나'라는 주어가 쓰이기 시작한 분량은 전체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남은 2/3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상상과 은유에게 매혹되어 같지만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 관점에서 보면 그 삶은 현실에게 진 것이지만, 애초에 그렇지 않았던 다르지만 같은 삶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저 멀리 갔다 서서히 돌아왔을 뿐인 게 지금 처지인데.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방적인 말의 폭력에 낭비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라는 주어는 언제나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걸. 설명이 안되면 은유를 필요로 한다는 걸. 삶의 1/3 속에서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다시 '돌아오니' 그런 사실이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기계 인간으로 살면 어때, 그 속에 담긴 말에도 설명되지 않는 시적인 것들이 분명 꿈틀댄다는 걸. 올 한 해는 다시 읽고자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또 지고', 생활을 위한 돈 벌이를 했다. 우연이지만 1년이 완벽하게 양분되는데, 해어진 기분이 드는 건 이 때문일까.


 졌다는 감각은 분명 나에게 여전히 '인간'이라는 소명과 함께 기계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중대한 가치가 화해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는 일종의 수법임에 틀림없다. 이 아스라한 타래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냐가 앞으로의 삶을 다시금 틀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예감. 별의 운행을 꾸준히 지켜본 한 해이기도 하다. 더 이상 작고 크고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별' 수준에서의 운동에 스스로를 대입한다는 건, 그만큼 삶의 궤적은 모호하면서도 애매해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분명해지고 만다는 것 때문이라고. 


아무렴


 빛이 개발되기 이전 인류에게 별은 상상의 촉진제였다. 밤이라는 창조주의 권력 아래 몸을 덜덜 떨었던 호모에게 별은 그나마 친근하게 여겨졌던 걸까? 자기 역량의 누승을 체화한 인물들이 별의 주인이라 생각하게 된 계기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별은 인류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인류 최초의 장난감은 별이라는 생각을 하는 요즘, 도시 서울의 밤은 공허하지만 그래서 더욱 분명하다. 


 삶에 있어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지닌 네버엔딩적 성격 때문에 함정에 빠지고야 마는 '인간 실격'들이었다가, 순응하고 예속화하여 나를 지우는 기계 인간이었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도 저도 아닌 - '오롯이 나로서도 아닌' - 참으로 불투명한 상태의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진 시적 태도라고, 나는 천천히 지켜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7년의 기점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 드넓은 대륙이기도 해서, 지금의 운행에 들이닥칠 심심한 일상들을 조금 더 끌어안기로.


 무심할 거라면 충분히 무심할 것이고, 질 거면 충분히 져야 한다는 게 진짜 어중간함이다. 이도 저도 아닐 바에야가 아닌, 애초부터 이도 저도 아니기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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