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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y 28. 2022

쓰지 않는 생활 3



2021-06-29


한 달간, 아니 모아 놓고 보면 몇 년이 될 숱한 세월의 이름은 중독이다. 어느 아편쟁이의 고백처럼 보잘 것 없고 나약하다. 자신의 뜻과 마음으로 스스로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마음 앞에서 중독은 세상을 채우고 있는 99%의 미물처럼 나타난다. 한 번의 발길질로 스러지는 목숨처럼, 한 번의 타격으로 정지당하는 하루살이처럼 하찮고 가엽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면 살수록 미물의 존재가 있고 없고로만 점철될 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생명은 눈 앞에 띈 죽일 수 있는 생명이 되고 만다. 존재를 알아차리는 그 순간에 가능한 상상은 죽음 말고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 앞에 나타난 중독자의 모습이란 이렇다.


 의지박약, 무능, 동물만도 못한 존재. 사람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자. 그 의의는 다름 아닌 인내요, 통제 능력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인간 이하로 여겨지거나 마땅히 인간이어야 할 부족함으로 여겨진다. 그 틈새에 기생하는 중독자들은 자신의 중독 능력과 함께 살아간다. 중독자에게 정면 승부란 없다. 돌파란 없다. 현실을 벗어날 비상구, 대피소로 망각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가? 중독으로의 침잠은 피해야 할 금기인가? 인간 실격인가.


 나는 중독자이다. 쉽게 중독된다. 나는 잊는 걸 사랑한다. 현실의 대체제를 사랑한다.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시작되었던 중독은 사실, 중독 원인의 일부에 불과하다. 상상, 구체화할 수 없는 망상을 사랑하는 이들과 궁합이 잘 맞을 뿐이다. 중독은 그 관계를 가리키는 어휘일 뿐이다. 나는 현실이 아닌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실이 되는 그 순간을 막고 싶다. 그 누구도 권하지 않겠지만. 그 누구도 현실적인 구체화를 하지 말라고 말할 리 없겠지만. 중독은 내가 세상과 맺은 협약이다. 나는 결코 세상이 있는 그대로 있길 원하지 않는다.


 이 마음이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건 21세기라서 그럴까, 도시에서 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라서? 현실은 계속해서 현실임을 요구한다. 그것이 실재의 폭력, 사물의 힘이다. 폭력의 비대칭성이 발생하는 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 따위 없는 인간이라면 현실을 부당하게 여기지도, 사물을 막대하게 여기지도 않았을 텐데. 이제는 출처가 기억나지도 않지만, 이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언제부터 이성이라는 현상을 갖기 시작했는가, 인간이 언제부터 이성 때문에 불가피한 마음들을 갖게 됐는가. 그런 흔적들을 추구하던 때가 있었다. 인간에게 이성 따위 없었다면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이성으로 인해서 열등이 생기고 비열함이 생기고 나약함이 생기고 무능력이 생긴, 말 그대로 '불구자'가 되어 버린 운명을 포용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말하지, 인류의 유산을 보라. 내 주변을 비롯해 나 자신까지도 소급되는 인류의 업적이 곧 이성의 산물 아니겠느냐고. 이렇게 생각을 언어로 대응시키고 감정을 다듬을 수 있는 모든 현상 자체가 이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느냐고.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이 짓거리는 이성에 반기를 드는, 이성에의 혁명인가?


 그런 표현을 한 작자를 아직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분명 이성에의 혁명은 언제나 있어 왔다. 이성의 힘을 사랑하고 이성으로 인해 다스려지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이 혁명의 의미가 나와는 정반대겠지만. 그들은 이성에의 혁명이 소외되고 절하되던 이성의 제권리를 되찾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 믿음을, 감정을, 무능을 포획했다. 상황이 역전된 21세기, 이제는 이성의 포로가 된 상태들이 이성에게 목졸리고 있다. 이성은 그들을 끔찍한 것으로 둔갑시켰고, 충분히 길들여진 우리는 비이성에의 비위를 장착한 채 끔찍한 것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모두 비이성과 연관된 것이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이성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비이성적인 게 아닌 것들은 문제조차도 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은 그것들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이성의 문법으로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이성 외의 것들을 비이성으로 몰아가지 않고 바라볼 힘이, 정녕 존재할까? 만약 그걸 발견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이성의 문법 아닌 것으로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중독자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상상하고 말한다. 같은 중독자끼리도 대화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중독자가 아닌 사람 눈에는 허황되거나 비현실일 뿐이다. 중독이 추구하는 비현실 때문에 나는 원천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다, 없는 걸까? 중독은 언제나 고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혼자서만 가능한 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중독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것들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을 교화시키거나 더 이상 중독에 빠져들지 않도록 가로막는 일뿐이다. 중독에 빠져 있는 자는 책을 읽는 사람과 같아서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사실 이건 중독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유년기라는 중독기를 거친다. 이성이 인류를 침투해 온 과정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애초에 인간이란 생명은 이성을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태어난 인간들 또한 이성 개발을 거친다. 그 과정 속에서 이성 개발 이전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모든 정부든 사회든 그 기간을 비이성으로만 포착하고 길들여야 할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그리 여겨지는 것이겠지만, 당사자들은 당시 그 시기를 매우 혼란스럽게 보내게 된다.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이성을 주입시키는 와중에 자기 자신의 비이성적인 면모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생명은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될까. 그중 내가 선택한 방식은 감추기였다. 내가 사랑으로 더 이상의 침입을 가로막은 그 공간에, 방식에 유년을 숨겨두었다. 나는 유년을 사랑했기에 유년을 감췄고, 유년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이성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에게 언어를 건넸고, 사회를 언어로 받아들였고, 시대를 언어로 파헤쳤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어린애'로 바라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언어를 배워갔다.


 모두 거짓말이다. 이성의 유일한 기능인 거짓말, 사실은 모두가 알면서도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진실인 그것을 이용했다. 이성의 정체는 거짓말인데, 이걸 알면 나머진 그럭저럭 해낼 수 있게 된다. 나의 유년을 숨기고,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합의된 거짓말을 시의적절하게 활용할 때 수월하다. 이걸 잘 못해도 상관없다. 당신의 주변 인간들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이성을 요구할 것이고, 당신이 아무리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걸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결코 포기란 없다. 이성적이지 않으면 덜 이성적으로 대하면 될 뿐이다. 당신이 담보로 잡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먹고 사는 문제'라고 느껴지겠지만 모든 게 이성이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애초에 사람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건 거짓말을 정말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진짜와 가짜로 정의내리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선동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오토포이에시스의 함정에 빠져있으면 무결점의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겠지만. 


 이성의 정체가 거짓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진실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성이 거짓말이라는 유일한 이점은 자신의 비이성적인 면모를, 유년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것 말고는 달리 큰 게 없다. 달리 말해 '사랑' 말고는 큰 수확이 없다. 일전에 나의 유년에 복수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서도 몇 년이 시간이 흐르자 다시금 나 자신에게 당하고 있었다. 내 안의 어린 나는 몹시도 유치한데, 나는 그 유치함을 몰라보고 끌려다닌다. 이성으로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다. 어린 나를 숨긴 곳이 비현실이기 때문에, 내가 비현실에 다가갈수록 더욱더 어린 나가 선명해질 뿐이다. 나는 지금 내가 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가, 왜 중독에 취약해지고 마는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 무기력, 잠금 상태, 블록 현상, 슬럼프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그것이 나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없었지만 문제는 내가 이것을 정말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나의 유년을 향해 복수할 수도 없으며, 그런 시도조차 결코 시행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사랑뿐이다. 사람들의 입에 영원히 오르내릴 저 단어는 평생의 숙제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고작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수많은 순간들로 삶을 채우고 있으면서, 그럼에도 고작 사랑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2021-09-27


1.


근래 읽기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욕심만 많은 독학자다. 이해하지 못한 언어를 마주하면 채무감을 느끼고, 읽을 수 없는 책을 마주하면 무력감을 느낀다. 읽기는 능력의 문제다. 적절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지적 권위를 획득하는 노선을 위해 요구되는 능력치를 외면한 이상, 말로만 독학자인 텅텅 빈 사람이라는 꼬리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혼자이기 때문에 이런 모든 과정을 홀로 씌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건, 방심하는 순간 누군가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무척 불리한 행동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양되어야 할 공중도덕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건 철저히 무방비다. 제도가 이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평생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채무감과 무력감. 문제는 이 둘이다. 나에게는 읽고 싶은데 읽을 수 없어서 유보한 '읽을 거리'가 산처럼 쌓여 있다. 절대 하루아침에 읽어낼 수 없는 분량이면서도 마음은 조급해진다. 이 심리 상태는 읽으려는 이라면 모두가 느끼지만 아무도 이를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기분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이니 혼자 해결해야 한다. 그 누구도 어찌 해줄 수 없어서다. 이 욕심에 부하를 느끼는 사람은 유일한 처방전인 '능력 갖추기'를 체득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다.


읽을 수 없음 앞에 모종의 모욕을 느끼는 요즘이다. 기계 기술, 기술 철학 등 관련 텍스트의 신선한 지평이 모두 외국어에 편입되어 있다. 학자도 아닌데 왜 학자처럼 읽으려고 할까? 논문을 쓸 것도 아니면서 왜 논문들을 그렇게나 찾아 읽나? 자문자답을 하게 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잖냐. 그럴꺼면 대학원을 가라.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불만이면 비판을 해라. 입밖으로 푸념을 꺼내지 못하도록 사전에 봉쇄하는 말들이다. 혼자이길 자처하는 이는 언제까지고 혼자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 소속되든, 제도에 입학하든 지적 연대를 맺어 특정 공동윤리에 적극 동의하고 행동하지 않는 이상 혼자는 언제나 위태롭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용되는 '혼자'는 무척 위험한 존재다. 멋대로 고정관념을 갖기도 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을 강요하기도 하며, 무엇보다 발전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은 '혼자'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주목받는 개인이 되는 건 그가 거쳐온 수많은 공동체-제도가 그림자로서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의 모습은 유령이거나 불길한 존재가 된다.


읽고 싶은데 읽지 못하는 채무감은 벌써 7년이 다 되어 간다. 일본 정신의학의 독창적인 현상 해석들을 탐독하고 싶지만 마음만 굴뚝이다. 점차 흥미가 생기던 기계 대상들, 기술적 현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구권에서는 이미 '기술 철학, 기계 철학, 기계주의' 등등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한다. 거진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모양이니 한국어로의 번역에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더욱이 누군가를 읽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읽어야 하고,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책은 책의 주석이다. 특히 학계의 책들은 대개 그렇다. 아무것도 학습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 우리는 눈앞에 계속해서 쌓아둔 책의 책들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 막막함, 징그러움, 패배감, 채무감, 혐오, 권위 앞에서의 굴복 등등.


무지를 향한 도덕적 열등감은 여기서 만들어진다. 알아야 하는 무언가가 나타난 이상 당신은 알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노력하지 않으면 (이 책에 관해서는)평생 무지한 상태로다. 두 가지 선택을 주면서 정답이 정해져 있음을 가시화시키지 않는 걸 '권위적'이라고 한다. 권위가 없으면 아무도 부하를 느끼지 않는다. 권위를 느끼는 많은 이는 속으로 어떤 '굴종'을 느낀다. 그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이 학계 윤리를 따르지 않으면 그는 결코 '전문가'가 될 자격을 획득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안다고 말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철학 책은 바보 상자다. 내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자기들이 아는 걸 아는 만큼 보이게 쓴다. 아무나 읽을 수 없게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나는 세계의 지성 상아탑을 어떠한 노력도 없이 드나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바보 천치다. 적어도 수많은 학자들은 이들을 바보 천치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신들은 마땅히 노고를 대가로 치렀기에, 그런 책을 읽고자 하는 이에게도 같은 조건이 주어진다. 책을 읽기 위해 다른 책도 읽을 것, 당신의 시간과 노력을, 나아가서는 삶을 투자할 것. 제대로 읽으려면 분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철학 책의 초대장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일상을 포기한 채 책에 파묻힐 수 있는 사람만'


결국 무력감이 나타난다. 읽어나가는 이들은 이 무력감과 화해하거나 길들이거나 어찌 됐든 데려가야 한다. 모든 게 자기의 역량으로 떠맡겨져 있다. 무력감이 시간을 잡아먹기 시작하면 채무감도 뒤따른다. 읽어야 할-청산해야 할 거리가 마음의 짐으로 남는다.


살면서 수도없이 겪었던 이 읽기의 구도 속에서 나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 종착지는 결국 볼멘소리다. 또 볼멘소리하네, 읽고 싶으면 배워라. 노력해라. 뿐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를 건드려보기도 전에 채무감과 무력감은 노오력으로 모든 게 해소되고 말 것이다. 읽기의 위태로움 앞에 일어난 정신의 지진을 묘사하는 게 하소연, 불평 불만, 볼멘소리로 전락되는 것이다. 나도 안다. 아니, 모두가 느끼고 알 것이다. 학교에 입학한 이상 그 누구도 이 과정을 맛보지 않은 자 없을 테니 말이다. 있다면 그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를 천재 아니면 바보다. 자신의 정신으로 인해 삶에의 공감-상상력이 얼마나 확장되지 못하고 있는지 반추하는 데 삶을 쓸 수밖에.


2.


쓰기의 순간은 반드시 오지만, 분명 언제나 오지는 않는다. [기계이거나 생명이거나]를 읽다가 시몽동의 기술미학을 요약-설명하는 파트를 읽는 와중에 착상이 떠올랐다. '어 이건 시로 써야돼!'라며 마음의 감각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지만 첫 줄을 쓰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이런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번 시를 쓰려고 하면 저 '아무것도 쓰지 못함'의 긴장을 버텨내는 시간이 불가피하다. 저 긴장은 사실 위태로움이다. 딛고 있던 언어로부터 도약을 하려고 할 때, 도착 지점에 발 디딜 무언가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의 공포다. 추락 공포, 고소공포증에는 중력에 길들여진 우리네 본질적 감정들이 스며 있다. 지면紙面이 지면誌面이라는 동의어는 글 쓰는 누구나에게 그렇듯 단순 은유가 아니다. 나는 시를 쓸 때, 정말로 롤러코스터나 자이로드롭의 절정에서 맛보는 어떤 공포, 두려움, 불안, 스릴, 환희를 느낀다. 몸의 감각은 소외되어 있지만 정신은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 위태로움은 다시 발을 디디기 전까지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읽기의 위태로움이 채무감과 무력감을 제공해준다면, 쓰기의 위태로움은 안주하기와 미루기를 제공한다. 쓰기는 철저히 혼자만의 세계에서 벌어진다. 쓰고 싶은 마음이 연상되면 그걸 붙들기 위해 적절한 언어를 찾지만 무엇이 적합한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찾고 내가 맞춰야 한다. 쓰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난데없이 쓰려고 하면 쓰는 상태가 아니라 쓰려고 노력하는 상태일 뿐이다. 억지로 쓰면 어디서 읽은 글이 흉내되어 나올 뿐이다. 이 과정을 10년 넘게 체험하고 있는 삶이란.


시간이 지나면 좀 노련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산이다.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 읽기의 채무감과 무력감이 해소되지 않은 것처럼 쓰기의 안주하기와 미루기도 전혀 나아진 게 없다. 이 버릇을 뜯어 고치지 않으면 결국 이 상태로 평생 '무력하게 안주하며 채무감을 느끼며 미루는 삶'을 살겠지. 이게 뭐란 말인가. 한심하다 못해 욕이 나온다. 글쓰기의 동료들이 이 '쓰기의 위태로움'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모두 개인의 몫으로 치부된다는 걸 감내하고 있다. 아무도 이걸 문제삼지 않는 기분이다. 자처한 일이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그러고 그걸 왜 문제 삼냐고? 읽기의 문제랑 별반 다를 게 없다. 쓰기의 불평 불만은 읽기의 불평 불만과 마찬가지로 '혼자'가 내뱉는 독기 어린 푸념으로 전락한다. 가히 글쓰기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이가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자기 책을 내기 시작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이 쓰기-읽기의 도덕이 거론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책을 많이 낸 게 훈장이라도 된냥 글쓰기를 강의하고 조언하고 다닌다. 이력서에 '저서 한 줄'을 적는 게 출판의 유일한 목적이다. 쓰는 자들의 욕심은 읽는 자들의 욕심과 이상하게 교차한다. 자기 책을 내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 글을 읽어줄 누군가를 상상하기 급급한데,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늘어나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자기 글을 봐달라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기분이다. 읽는 자는 나타나지 않고 쓰는 자는 전면에 나타나기 때문에 보여지는 착시일 뿐일까? 사실 상관없다.


쓰기의 불만은 읽기의 불만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결국 쓰려는 자, 읽으려는 자 모두에게 제공되는 모종의 법칙으로 내재화되어 있다는 은폐된 사실만이 핵심이다. 쓰는 자는 쓰기에 길들여져야 되고, 읽는 자는 읽기에 길들여져야 한다. 이 두 가지 상태가 각각의 상이한 상태임을 인지할 필요는 없다고 속삭이며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다 위태롭다. 이렇게 구구절절 위태롭게 묘사하기를 멈추지 않는 건, 이 두 가지 위태로움을 일으키는 정신의 지진, 다시 말해 읽기와 쓰기에 담긴 어떤 진실의 울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무감과 무력감은 '노력과 순응'을 유도하고, 안주하기와 미루기는 '불안과 두려움'을 낳는다. 불안과 두려움을 거쳐 쓴 글을 노력과 순응으로 읽는다는 것. 이 현상은 무얼 뜻할까?


아마 이에 관해서는 한 권의 흥미로운 책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징그럽고 무서운 감정도 든다, 이 거대한 기계화 절차란!) 우리가 읽기를 할 때의 읽혀지는 언어들은 어떤 노정을 거쳐 눈앞에 당도한 것인가? 거진 평생을 언어의 의미와 개념만을 만지작거리며 '읽기'를 수행한 나에게도 이런 관점은 조금 신선한 것이었다. 이건 언어 자체를 모종의 개체들로 바라보려는 관점인데, 사물화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공유 자전거인 따릉이를 집앞에서 타고 외대 앞에 거치했을 때 누군가가 외대 앞에 따릉이를 타려고 한다면 그 따릉이가 어디에서 온 건지 알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언어가 특정 사물처럼 '이동되고 있다'는 상상은 조금 헛된 상상일까? 그 이동의 과정 속에서 닳지 않는 어떤 과정을 통과했다는 상상은 개소리일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읽기와 쓰기 앞에서 불평 불만을 밤새도록 꺼내놓을 수 있는 나는, 이게 단순히 볼멘소리나 푸념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언어를 다루려고 하는 모든 이에게 벌어지는 공통 감각, 세상의 사물을 감각하려고 할 때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감각의 성질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위태로움, 두 가지 정신의 지진을 얼마나 견뎌내냐가 근래 관건이다. 나에게 오랜 숙제다. 어떻게 하면 읽기를 좀 더 능숙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쓰기를 노련하게 할 수 있을까. 푸념은 푸념인 이유가 있다. 그게 정답인데 하기 싫어서다. 정답은 모두가 알지만 그래도 그 풀이 방식은 조금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고 싶었을 뿐이다. 혼자라서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말이지만, 보이지 않는 모든 읽는 자와 쓰는 자에게 응원을 건네고 싶은 마음이다. 난데없는 인류애적 문장이 튀어나온 건 원래 언어가 그래서다. 언어 앞에 모두가 공평한 것처럼, 언어 자체가 박애주의적 성질을 띠지 않고서 언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람을 가린다면 그게 언어일 수 있을까? 언어는 소유할 수 없는 무언가이자 끊임없이 겸손해지게 만드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2021-12-17


나는 근래 좌절해 있다.


추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추락이어서 멀쩡해 보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중력에 몸을 맡기는 일. 절망은 뇌의 핵이다. 강력한 중력을 발휘하여 언제든지 정신을 잡아당길 준비를 한다. 방심하는 순간, 떨어지고 만다.


조상들은 이런 정신 상태를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 '낙담'같은 심리-물리적인 어휘를 창안해 놨다. 마음이 떨어지다니. 도대체 어디로 떨어진단 말인가. 떨어지지 않는 마음은 무엇에 지탱되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자꾸만 게임 세계로 도망치고 싶다. 그곳에서의 놀이, 놀이를 가장한 노동이 나에게 아무런 효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끌린다. 그래서 넘어가지 않으려고 붙든다. 그 세계는 나의 수많은 감정들을 절단하도록 부추긴다. 나와의 접속을 끊어야 한다고 말이다.


의지가 정신을 붙드는 힘일 수 있다면, 나는 의지박약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고장난 것일까? 삶의 의욕들이 희미하다. 나의 정신 상태는 경고를 울리지만,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감추려고 애를 쓴다. 마음이 가까운 사람에게는 이 애를 쓸 때 나는 땀 냄새가 들킬 수밖에 없다. 아무도 맡고 싶지 않고, 때로는 불쾌한 몸부림의 냄새. 개인의 심리적 고통은 혼자서 끙끙 앓기보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과연 누가 손길을 건넬 수 있단 말인가. 절망의 상태는 좌절을 끌어당긴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은 정신 안에 기생하는 그 상태에 깊게 전염되어 있어 괴로워하지만, 몸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그 사람'이 곧 그 상태인냥 대한다. 절망하는 사람이 다가오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괴로움이 나 그 자체가 되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좌절은 고독을 부르고, 고독은 더한 고독을 부른다. 그가 지닌 의지의 유일한 선택지는 이제 자살 말고는 남아나질 않게 된다. 어쩌다 이지경이 되고 마는가? 의지를 강탈당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가 저지른 죄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잘못인가? 그의 고독이 그의 책임인가? 구경꾼들은 이처럼 절망과 좌절에서 도덕을 읽어내려 한다. 그의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본 원칙이다. 문명화된 도시 사회에서 1인분이라고 하는 건 이런 원칙을 기본적으로 탑재함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방치하면 알아서 자립하고 있어야 하는, 본능적인 그 무언가. 차라리 야생에서의 동물이나 식물이었다면 좌절이나 절망 따위 없이 오롯이 순수한 고통만을 느끼다 순순히 생명 연쇄를 받아들였을 텐데. 깨어 있는 동안 먹이를 구하고 낮잠을 청하고 생존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재수 없으면 잡아 먹히거나 상처를 입고 곪아 죽는 게 낫다. 차라리 그러고 싶다. 인간의 의식이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결함 투성이다.


진보 정신이 프로그래밍된 21세기인 대다수가 이런 절망과 좌절은 딛고 일어설 희망과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해석하길 추앙한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조차 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진보'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프레임에 강력히 결속된 인간 정신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여기에 도대체 무엇이 끼어들 수 있단 말인가. 마주하는 사람들의 처세술은 편리하게 말해 '사람이 문제다'라고 취급하게 만든다.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특정 인간들은 구제 불능이 된다. 칸트가 바보 멍청이 미친 인간들을 외따로 떼어놓고 비판 정신을 운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강력한 시스템의 통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번 거대한 정신이 구축된 이상, 그 정신을 건드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부정적인 인간은 그 버릇으로부터 탄생된 유형 중 하나다. 특정 믿음이 공존하는 공동체에서 그에 반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 이는 '부정성'을 띤다. 이 부정성은 사회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밀려나기 때문에 좌절, 절망, 우울, 고독을 자주 접한다. 개인의 정신사는 그렇게 구축된다. 나는 내 정신에 마취제를 놓지 않고서는 멀쩡한 시민으로 코스프레를 할 수 없어진다. 고독도 절망도 우울도 좌절도 모두 친숙하고 편안하다는 믿음을 주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처를 봉합할 수 없다. 현실로부터 벌어진 상처, 사람으로부터 벌어진 상처. 상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상처다. 아픈 건 나고, 내가 곧 아픔이다. 자연 생명체에게 상처는 곧 죽음으로의 지름길이라, 그저 그런대로 받아들이면 되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 어떤 생명체도 다른 생명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무엇을 희생하지 않는다. 치료 행위가 없고, 대신 죽기, 고통 공감은 없다. 인간의 환상만이 동물에게서 어떻게든 그런 이타성을 발견하고 일반화하길 원한다. 뻔뻔한 인간중심적 해석이지만, 그걸 즐기는 이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특정 동물에게서 '이타성이 본능'이다, 다른 생명체의 고통에 반응한다, 등등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싶어 한다.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상위라는 믿음을 훼손시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각종 비유로 동물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말을 내뱉는 건 이중 기만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걸 내세우기 위해 열등함으로 둔갑시켜 실질적으로 동물보다 못하다는 걸 감춘다. 사실은 인간이 동물보다 못난 게 아니라 그냥 인간이 못난 거다.


각종의 정신 마취제는 자기 자신에게 투여하는 현실 망각이다. 그것이 진리의 자리다. '신'의 의자다. 믿음이 무너지면 그는 정신이 붕괴하거나 믿음이 주요한 공동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유아론자, 비관론자, 염세주의자, 종말론자. 마트에 진열된 썩은 식품처럼 진열된 꼬리표들. 당장 치워야 할 이름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름들. 죽음에 가까운 것들은 죽게 내버려두는 게 인간 사회의 철칙이다. 특정 죽음에 동정과 연민을 발휘하는 선택적 이타심은 대체로 선별된 죽음 현장이다. 그 누구도 모든 죽음을 케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에, 실제로 벌어지는 무수한 죽음들에는 마음을 닫고 '와닿는' 죽음에 마음을 연다. 선택된 이기심과 선택적 이타심의 공존. 부정적인 사람은 그들의 도덕 축제에 참여할 수 없다.


부정이 쉽사리 긍정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부정에 대한 상상력은 불필요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정적인 사람을 대할 줄 몰라 한다. 위로와 공감을 건넬 줄 몰라 한다. 이타심과 이기심 중 어느 것을 건넬 줄 몰라 한다. 차라리 그들을 안 좋게 생각하고 대하는 게 경제적이다. 무관심이 제일 주요하다. 이기심은 무수한 무관심을 토대로 기능하는 심리다. 무관심이 없다면 그는 이기적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이기심이 무관심으로 인해 발목잡히면 그건 또 이기심에 위배되므로 기만과 위선을 적절히 섞을 수밖에 없다. 그 균형이라는 '정치'는 사람 간의 대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채 경직되어 국가 정치로만 활용될 뿐이다. 보들레르가 '사랑과 정치는 같다'고 통찰한 건 타당하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문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이들은 필시 이기적인 인간으로 모양나기 때문이다.


좌절에 빠진 사람은 말할 기회도, 소통 기회도 점차 잃게 된다. 순전히 본인의 '부정성' 때문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는 점점 소외된다. 비상구의 아이콘은 왜 혼자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모양새일까? 사회의 은밀한 이기심 부추기기는 소외된 자에게 남은 유일한 '이기적 선택'이 '자살'뿐이라는 걸 방치하는 꼴이다. 한 명의 죽음이 가소롭게 다뤄지기 시작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자살도 민폐를 고려하며 해야 한다. 죽을 거면 혼자 죽어야 한다. 멀쩡히 운전하는 차량에 대물-대인 피해를 입히지 말아야 하고, 보다 필요한 치안에 동원되어야 할 경찰과 응급요원들의 인력을 낭비시키지 말아야 하고, 집주인의 집세를 떨어뜨리는 고독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일찍이 과도한 이기심의 양면인 과도한 이타심을 주입시켰던 일본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가는 현상이 있었다. 그 숲은 일견 관광 명소가 되어 사람들에게 공포와 스릴의 엔터테이닝을 제공했지만, '그런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심리에는 죽음까지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짓밟혀 찌그러진 정신들의 비명이 새겨져 있다. 그 비명조차 아무도 듣지 못하게, 아무도 불쾌해 하지 않게끔.


이런 사회에서 유대나 연대를 맺지 않고서 사회 공동체에 속한다는 건, 가능한 일일까? 한 명의 인간에게? 누군가 사람이 싫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진실이 담겨 있다. 개인의 투정이나 가치관, 혹은 배배 꼬여 있다는 식의 인격 절하가 유발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회가 짓밟고 있는 인간적인 정신이 묻혀 있다. 그것들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방치하고 못 본 척했으면서 뭘 알아볼 수나 있겠는가. 일반인들의 상상력이 제로에 가까운데, 그들과 같은 공동체에 소속될 수나 있을까. 과격한 잔인함으로 폭발하고 만 그런 소외된 정신들이 범죄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드러난 순간, 이 악순환은 완벽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거기에 틈은 없다. 그들에게 '인간이 사는 법'을 나눌 수 있게 할 어떠한 여지도 남아나질 않게 된다. 인식은 선입견이 되어 상상력은 더욱더 쪼그라든다.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부정적인 사람들은 오직 본인의 노력으로만 해당 사회에 스스로를 위치지울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실패한 자들이 쉽게 범죄자가 되고, 격리되고 추방되고 살해되는 건 언제나 그랬듯 '당연한 일'이었다.


나의 좌절은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찾지 못해서 비롯된 고통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책임을 찾는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과감히 생을 거는 정신 나간 사람들은 거기에 부채질하며 나에게서 선택을 찾는다. 많은 이가 의구심을 품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 내용들이, 나 자신이 노출될 때 그물쳐져 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애초에 타인에게 기댈 수 없는 정신이라면, 그래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진보 정신'이라면 그게 왜 다른 이에게도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가? 본인이 세뇌되었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가? 아마 이에 모욕감을 맡는 사람들은 이런 내용에도 진즉에 경직된 정신을 탑재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사회 공동체, '다른 사람'의 범주는 안봐도 뻔하다. 책임의 비대칭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책임 전가에 비해, 그들을 대하는 상상력이 왜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책임은 무척이나 과장된다. 애초에 그들은 이기적인 사람에 가까우므로, 그런 책임 전가에 무척이나 민감하지만 말이다. 방치와 무관심으로 인해 투기되는 책임이라는 차원이 다르다. 쓰레기는 본인이 필요할 때만 취하고 더이상 쓸모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딱 그 지점이다. 그 쓰레기가 모인 곳이 부정적인 사람들의 정신 지평이다. 그들은 남들이 버리는 무책임이 누적되는 장소다. 그들도 똑같이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오는 무관심은 덤이다.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정신 공동체에서, 나같은 인간들은 쓰레기 섬처럼 떠돌아 다닌다. 선택적 이기심이 제대로 작동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후손이었다면, 나도 아무데나 버렸을 언어 찌꺼기가 삶의 이력 만큼이다. 버리는 게 안 된다. 잊고 살 수가 없다. 누군가 가져가길 기다리는 게 아니다. 비물질 쓰레기인 언어 찌꺼기는 '이동'이 아니라 '승화'에 소멸 가능성이 있다. 전환이 가능하다. 문학의 오래된 유의미가 이것이지만,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이 전환은 빈번하게 이뤄져야 한다. 상대적으로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범죄자' '자살' '정신병자'는 부정성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의 결과다. 천성적으로 잔인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무관심은 덤이다. 일상의 차원이란 결국 우연의 확률을 높여야 발생되는 일반 체험이다. 거창한 말로 '시민 의식의 고양'이라고 슬로건을 휘두르면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유약한 속마음에는, 나도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어릴 때부터 숱하게 겪어 온 소외감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사람과의 유대를 느끼며 살고 싶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불편해 한다. 나도 내가 불편하다. 그래서 부정적인 사람이기를 자처할 수밖에 없다. 나도 내가 편하면 얼마나 살만 할까. 수많은 사람이 누리는 즐거움을 소소하게 누릴 수 있다면, 건강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게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안 되기 때문에 결국 '노력'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 말고는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까딱하면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못난 인간으로 낙인 찍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태로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농담이라는 둥 재미라는 둥 본인의 무책임을 전가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낙인 찍는다. 매니아-덕후를 비롯해 서브컬쳐부터 시작된 모양새는 수전 손택의 '캠프적 감수성'에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성별을 갈라치고 세대를 갈라치고 자신의 욕망대로 인간을 솎아내며 혐오하기 바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부정적인 사람은 각종 이름표를 부여받는다. 사회가 그런다고 말해선 안 된다. 서로가 서로한테 낙인 찍고 있으니까.


표면에 드러난 부정성 이면에는 당연히 소외된 부정성이 있다. 이는 별개가 아니지만, 전자는 대체로 무책임과 무관심의 생산물로, 후자는 '없던 것'으로 모양난다. 애초에 일상의 상상력이 왜소한 상태인데, 그 누적된 정신적 데미지가 어느새 모양을 이루고 언어를 입고 폭발하고 만 현 상황 속에서 그 책임은 누구한테 가겠는가. 책임 프레임 이전의 문제다. 한 번 경직되고 만 정신 상태가 완화되려면 문학적 언어의 힘이 아니고서야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백 수천 년이 걸린 게 인류 역사다. 정신에는 분명 가소성이 있다. 돌이킬 수 없이 구조적으로 변형되면, 그 경직은 풀리지 않는다. 


나는 살면서 나의 이야기를, 내 삶을 관통하는 호기심과 의구심을 마음 편히 꺼내 놓는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눈 경험이 손에 꼽힌다. 그렇지만 잔인함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이런 정신 상태가 까딱하면 강요와 억압, 혹은 혁명이나 변혁이라는 가면을 쓴 범죄 이상화로 흐른다는 걸 사전 예방하고자 이성을 붙든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감정, 좌절 절망 소외 우울 고독 등이 완화되는 건 아니다. 타인의 영역을 혼자서 채우려고 하는 순간 그는 '신'을 지향하거나 오만해진다. 결국 기약 없이 기다리게 된다. 지친다. 소진되고 만다. 마지막 선택을 만들어 그곳에 자살이라는 퍼즐 조각을 마련해 둔다. 최대한,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건강한 사람들을 흉내낸다. 그런다고 내가 될 리 만무하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 '마지막'이라는 걸 최대한 보류하는 게 일상이라는 하루하루의 숙제다. 이런 정신 상태를 마냥 자책으로 끌고 오면, 마지막으로의 과정은 가속화될 뿐이다. 이 메커니즘이 고작 나에게 한정된 정신일까? 


나는 알아본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이런 부정성에 가담되어 있는지를 말이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상처들이 계속 누적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깃발 들고 위로와 위안을 '감히' 입에 올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그 기만과 위선에 가담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위로와 위안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부정성은 분명 있지만, 더 고착화되고 더 깊어지면 소용이 없다. 기성과 사회가 젊은 세대의 갈등 앞에 '미안합니다'라는 한 마디를 건네주는 상상. 일반 사람들과 사회가 부정적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잘 몰랐다, 그랬었구나'라는 경청을 그려보는 상상. 분명 필요한 모습이지만 그걸 바라기에는 나는 너무 떨어지고 말았다. 일상의 상상력이란 기본적으로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 판단을 잠시 중단한 채 그 '잠시'라도 다른 판단을 그려보는 힘. 그게 그렇게나 힘들다. 잘 안 된다. 분명 이런 힘이 필요한 사람들이 수두룩 한데 말이다. 


나는 좌절과 절망의 롤러코스터를 탑승한 지 오래다. 스릴은 없다. 그냥 지친다. 그만 내리고 싶다. 체력이 있는 사람은, 상상력이 가능한 사람은 그래도 주변 사람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주길 부탁드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다. 얼마나 왜소한 역할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연에서 태어난 동물이었다면 순순히 죽었을 텐데, 인간이라서 생각이 많다. 지향점은 순순히 죽길 바라는 것이지만, 의혹들이 덜미를 잡고 있다. 나의 일상은 항상 살기와 함께다. 일상이라는 하루하루의 뒤편에서 무언의 살기가 느껴진다. 방심하는 순간 죽겠구나, 근데 이게 물리가 아니라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지 않는 비유뿐인 묘사. 그래서 힘을 잃고,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결국 편집증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성은 이걸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도덕화 패치를 해놨다. 소외된 정신이란 건 늘 이렇다. 남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만 같고, 들어주지 않을 것만 같은 경험이 숱하게 누적되어 왔기 때문에 닫힌 문이다. 오래 닫힌 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오래'가 되지 않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살만 한 사회였으면 좋겠다. 기계기술과 정신병리를 자꾸만 들여다봐서 같지만 다른 현실을 일상 언어로 풀어내고 싶은 건, 정신적 삶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게 없어도 된다는 사람들을 의심하길 바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기계 부품으로 살기를 자처하는 정신이 되니까 말이다. 기계 기술 장치는 정신적 삶과 병행되어야지, 정복되어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차라리 야생의 동물이 되는 거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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