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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ul 25. 2018

#01. 나는 별일 없이 산다

프랑스 외노자, 생애 첫 직장

별일 없이 잘 지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대체로 별일 없이 산다. 매일 크고 작은 별일들로 가득하지만, 잠자리에 누우면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였구나, 싶은 그런 나날들.  


외노자 생활도 어느새 3년 차에 접어들었다. 통번역 대학원 졸업장을 받던 날, 그리고 파리 통번역 학교에서 수료증을 받던 날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파리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게 될 줄은. 이십 대의 끝자락에 시작된 첫 직장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참 신세계였다. 무엇보다 막 시장으로 뛰어든 프리랜서 번역가의 불안정한 생활을 벗을 수 있어 좋았다. 일이 떨어지기만을 기약 없이 기다리던 날들, 일거리를 주는 사람들의 주변을 시녀처럼 기웃거렸던 날들로부터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복된 일상의 달콤함. 매일 아침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곳에 항상 내 자리가 있고, 처리해야 할 내 일이 있다는 그 안온함이 좋았다. 출근길 사람들 무리에 섞일 때 "남들처럼 살고 있는 듯한" 안도감과 안전하고 일정하게 통장에 들어오는 급여도.


학교가 아닌 곳에서 겪는 집단생활은 생애 처음이었다. 첫 출근 날, 회사라는 공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며 느꼈던 생경함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내게 직장은 거대한 연극 무대 같았다. 모든 것이 역할극일 뿐, 현실로 느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동료와 상사는 직책과 계급에 따라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 역시 내 역할을 어색한 발연기로 소화했다. 그때의 나의 인상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워킹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알게 된 이후였다.


일알못이었던 초보 말단 계약직 직원도 시간이 흐르며 나만의 (정확히는 사람들이 내 배역에 기대하는) 가면을 갖게 되고, 짐짓 능숙한 척 연기할 정도는 되었다. 다만, 아직 무대 경험이 짧아 나의 워킹 페르소나는 너무 쉽게 금이 가고 깨어진다. 그럴 땐 벌어진 틈새로 '내'가 줄줄 샌다. 특히 이성이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 예컨대 다급하거나, 피로하거나, 화가 나거나, 억울한 상황에서는 연기고 뭐고 무대 바깥의 내가 쩍 갈라진 페르소나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다. 그런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가면을 고쳐쓸 때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동료나 상사들의 흠 없는 가면을 나는 동경한다. 실수로라도 가면 뒤의 낯선 이면은 별로 보고 싶지 않고, 보여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대 위에서 보는 얼굴은 부디 무대 위에서만.


사실 "능숙한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다짐보다 더 잦은 건, "언제까지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다. 자아실현에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주 허무하고, 특별한 기쁨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고 있는 것 같아 힘에 부칠 때가 많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옷이 맞지 않는다기보다 그 옷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이 내게는 없달까, 카파의 문제랄까. 파워 염소자리인 내가 (염소자리에게 최선이란 120%의 노력을 쏟아붓는 일이다) 최선을 다하는데도 정기적으로 욕받이 대잔치를 하는 것을 보며, 역시 적성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김없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오늘의 내 심정을 비유하자면, 테니스 코트 위에 홀로 서서 한꺼번에 스무 개씩 날아오는 서브를 받아치는 벅참과 숨 막힘..? 생각해보면 잘리지 않는 것이 기적일 따름이다. 놓고 온 책을 가지러 집에 돌아갔다가, 책을 챙기고 핸드폰을 놓고 오는 나 같은 사람이 여태 버티고 있다니.


그렇다고 매일 불행한 것은 아니다. 대체로 별일 없듯, 대체로 행복한 편이다. 둘러보면 모두들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그에 따르는 희생을 맞바꾸며 살아간다. 나의 상사들이 사회적 지위와 연금, 고용 안정과 높은 급여를 선택한 대가로 회사라는 벗어날 수 없는 우주 속에서 과중한 노동과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떠안아야 하듯이, 대책 없는 노후와 고용 불안, 빠듯한 월급을 받는 계약직의 나는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자유와 가벼운 책임과 저녁이 긴 삶을 등가 교환했다.   


번역이 좋았고, 지금도 번역하는 내가 좋고, 아직도 번역하는 삶을 꿈꾼다. 누군가 내게 같은 수준의 급여를 주고 정기적으로 번역을 시켜주었다면 지금보다 생활의 만족도는 훨씬 높았을 것이다. 오늘의 내가 생활 곳곳에서 목도하는 불합리, 부당함이나 속 삼키고 마는 치사하고 졸렬한 상황과 사람이 그곳에는 없겠냐만은 (어디서 무얼 하든 혐생은 혐생이니까), 내게는 번역이 '하고 싶은 것과(vouloir)', '할 수 있는 것과(pouvoir)',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해야 하는, devoir)'의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는 절대적 이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성취 면에서 더 나은 번역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성실한 내가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가진 능력이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요 혹은 기쁨이 되기에 내 노동력은 훨씬 가치 있었을 것이다. 능력을 소진하지만 물리적으로 결과물이 남는다는 것도 한 몫한다. 일에서의 성취가 삶의 성취가 되는 즐거움.


성취의 기쁨을 거세당한 지금의 나는 최대한 일과 삶을 분리하고, 삶을 충분히 누리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고 있다. 외노자로 살기 시작하면서 내 이상은 정직하게 노동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을 뺀 나머지 삶을 존중받는 사회에서 사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상은 이상인지라 실현은 묘연하다. 말단 계약직 3년 차의 노동력은 자주 소외되고 폄하되며, 저녁은 물론 주말까지 당연하게 습격당할 때가 많다. 요즘은 잠자리에 누워 진지하게 빵을 구워 파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정직하고, 정당하며, 여가를 존중받는 삶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이불 속에서 예전에 따두었던 제과, 제빵 자격증을 들여다보거나, 제빵학교, 캐나다 기술이민 같은 것을 검색하다 잠이 들곤 한다.


별일 없이 산다. 이 삶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없어 조금 쓸쓸하지만 대체로 행복하다. 천천히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이 속도를 흠뻑 누리고 있다.


보고 싶은 얼굴이 많은 밤. 서울은 안녕한지, 다들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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