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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ul 26. 2018

#02. 생활이라는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한다면”

프랑스의 여름 바캉스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인들은 긴 휴가를 떠나지만, 한국 조직의 컨베이어 벨트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 놀라우리만큼 다를 것이 없는 하루. 늘 같은 시간 욕실에 들어가 같은 순서로 몸을 씻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하고 늘 같은 자리에 둔 열쇠를 챙겨 나와 어제와 같은 하늘, 같은 건물, 같은 가로수를 지나 회사로 향한다. 사무실 불을 켜고 정리하고 컵을 닦고 커피를 한 잔 뽑아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복사-붙여 넣기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이 '같은'을 열두 달 반복하면 새로운 해가 밝아 있다. 어쩌면 생활이란 '같은'을 견디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문학과 예술과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곁에서 생활은 자주 하찮아진다. 생활이란 먹고사는 일, "살아서 목숨을 보전(生活)"하는 삶의 밑그림이자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끼얹기 전의 디폴트 값 같은 것이다. 이 '기본 중의 기본'일뿐인 생활이 내게는 전부처럼 버거울 때 가끔 억울해진다. 밥벌이를 하는 최소한의 생활조차 허덕이는 날이 태반인 나로서는 퇴근 후 술을 먹거나 자기계발?할 기운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3년이 훌쩍 넘어가는 체류기간 동안 취미랄 것이 없었던 것도, 마음 나눌 벗이 없었던 것도,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닿는 이웃나라로 여행 한 번 못 갔던 것도 다 생활이 모자랐던 탓이다. 물리적인(돈과 시간)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생활이라는 밑그림을 그려놓은 자리에 꽃과 음악 같은 것을 칠할 영혼이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육신과 자아의 수장(?)으로서 나를 부리는 일만으로 힘이 부치던 날들.


지금에야 수퍼문을 쫓아 밤거리를 헤매거나, 요가매트를 펴놓고 부들거리며 스트레칭을 하거나, 침대 한 귀퉁이에 몸을 찌그러뜨린 채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부리는 일이 고되고 피로하다. 매일 아침 부지런히 씻겨야 하고, 매 끼니 식사를 챙겨야 하고(심지어 식단도 고민해야 한다), 너무 늦지 않게 적당한 때에 잠자리에 들여야 하고, 변비에 시달리지 않게 '때 되면 변까지 뉘어야' 한다. 이 하찮지만 당연해야만 하는 수고를 무덤덤하게 소화하는 세상 사람들이 가끔 놀랍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게 다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상처는 어찌나 잘 받는지, 스트레스에는 또 얼마나 약한지(개복치니?) 취향에 맞는 옷이나 달고 기분 좋은 디저트로 위로와 칭찬도 해주어야 한다. 너무 싫고 미워서 확 버리고 싶을 때도 버릴 수는 없는. 때로는 무절제하게 살도록 놓아버리다가도 어느 순간 어르고 달래서 다시 건강한 생활로 끌어 와야 하는 이 시지프스의 저주를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같은 일상에 길들여지다 보면 마취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를 부리는 행위에 무뎌지니까. 언젠가 외근을 나갔다가 복귀하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사무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옛 애인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헤어진 지 반년이 다 되었는데도 당연한 듯이 회사와 정반대로 달리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리고 한 정거장을 더 가고 나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상이 의식조차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무섭게 나를 길들였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다. 매일 찾아오는 일상에 코를 박고 그저 전진하다 보면 생활을 꾸리는데 드는 품이나 나를 부리는 수고 따위는 신경쓰지 않게 되고, 그렇게 오늘이 가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 가고, 내일과 같은 미래가 찾아온다.


생활을 '잘'하고 싶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너끈하고 수월하게 하루를 껌처럼 살고 남은 에너지로 꽃과 음악을 즐기겠다는 당찬 계획은 자신이 없다. 여전히 생활은 보잘것없지만 당연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할 것이고 "같은"의 무한 굴레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나를 '잘' 부려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키고 싶다. 여기서 욕심을 조금 내본다면, 쉽게 지지 않을 사소한 얼룩들이 가득한 생활이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옆자리 P와의 맛있는 식사와 길에서 만난 고양이와 누군가의 슬픔과 아름다운 문장과 강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과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에펠탑과 한국에서 도착한 깜짝 편지와 때마침 쏟아진 한낮의 소나기나 젖은눈 같은 불규칙하고 고운 얼룩이 생활 곳곳에 번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매끄럽고 균일하려는 일상에 얼룩덜룩 저항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생활이라는 생각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절망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이현승,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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