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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Dec 08. 2021

#55. 언제든 녹아버릴 희망일지라도

2021년의 마지막 기록

별일 없이 산다.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다면 아마도 약간의 무료함이 섞인 평온한 목소리가 실릴 것이다. 아침이면 출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쇼프로나 드라마를 보며 잠이 든다. 그렇다고 희노애락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크고 작은 생활의 파도에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되었다. 연말이 되었지만 새해의  일기를 쓰던 나와 지금의 나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히 인생의  1 안건이고,  미래를 생각하면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달라진  있다면, 이젠 아침마다  입을까 고민하고, 쇼핑을   심각하게 할부금을 헤아리며, 저녁엔  먹을까가 세상 제일의 난제가 되었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직 ‘정착이나 ‘안정 말하기엔 이르지만,  이상 울거나 화내지 않고, 눈앞의 생활에 오롯이 집중할  게 되었다.


2021년 12월의 나는 생활을 잘 했던 나로 기억될 것이다. 나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대체로 성실하다. 퇴근 후에는 운동을 가고, 대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세탁기와 청소기는 수시로 돌린다. 분리수거장에 가는 것만큼은 귀찮아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나오는) 마츠코의 방만큼 일회용품이 쌓여야만 겨우 치우는 시늉을 한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미루던 새치 염색을 시작했고, 시사 매거진을 우편으로 구독하며,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일주일에 한 번은 피부관리를 받는다. 일요일 오후에는 혼자 관악산에 오르고, 가끔 합정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무인양품에서 예쁜 식기를 사며 기분 전환을 한다. 냉동고에는 집에서 보낸 반찬이 냉동화석이 되어 가지만, 습관 탓인지 밥보다는 빵이나 과일을 사먹는 날이 더 많다. 토요일에 열리는 프랑스어 토론 수업은 일주일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사무실에서 맞는 오후 두 시는 하루 중 가장 고비인 시간. 진공 상태의 사무실 공기를 가르며 고개를 들면, 무심한 가습기가 하얀 안개를 뿜고 있다. 그 기계적인 움직임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눈앞이 아득해진다. 아직도 한 나절이나 더 살아야 하루가 끝난다니. 하지만 사소하고 배부른 절망은 잠시일 뿐, 시곗바늘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퇴근을 향해 달려준다. 회사에서의 나는 때때로 바쁘고, 대체로 한가하며, 가끔은 쓸모있고, 자주 하찮다. 뭐 대단한 일을 할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이로운 인간이고 싶었는데. 이직을 생각하고 있지만, 여름 내내 지쳤던 마음이 덜 회복되었는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면 뭐든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을까, 그 땐 생활을 잘 꾸리는 것을 넘어서 자아실현이나 삶의 의미 같은 것을 고민할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침대에 널브러져서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한 해였다. 호조와 악화를 되풀이 하는 코로나 상황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마음이 힘들 때 누군가를 만나니, 자꾸만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짐을 상대에게 부려 놓았다. 미움과 분노, 좌절과 열패감, 불안과 혼란 같은 감정들은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터진 수도꼭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를 오랫동안 견뎌온 절친한 사람들을 두어 번 질리게 만든 후에야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주변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떠났던 그를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딱 거기까지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별일 없는 시시하고 평온한 생활이 천천히 찾아왔다. 아주 못 견디게 힘든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고 저항 없이 안기고 싶었다.


올해 초에 썼던 신년 계획을 다시 읽고 차게 웃었다. 뭘 그리 열심히 살고 싶었고, 어쩜 그리 낙관적이었는지. 문장마다 들어찬 희망에서 풋내가 났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솜사탕을 물에 씻어 먹으려는 라쿤처럼 나는 또 새로운 일기장을 사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한다. 새하얀 첫 장을 펴고, 다시 문장마다 차곡차곡 희망을 싣는다. 내년은 뭔가 다를 거라는 내 순진한 믿음일까, 아니면 다르고 싶다는 내 질긴 의지일까.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이 순진하고 질긴 마음으로 내년도 잘 버티고 싶다. 예상치 못한 물살에 솜사탕 같은 희망이 다 녹아버릴지라도. 실망할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다쳐도 또 사랑하면서.


올해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아 미리 새해 인사를 남겨본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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