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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ug 10. 2018

#13. T에게

느리게 걷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

우연히 들어간 너의 블로그에서 낯선 닉네임과 몇 가지 키워드만 보고도 너라는 것을 직감했어. 분명 너일 거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너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어. 맑고 수수한 풍경을 찾아 헤매는 시선과 꼭꼭 바르게 닫힌 영근 문장은 그 공간의 주인이 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어. 반가움이 와락 달려들었고 너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싶었지만, 책이 나오고 원치 않는 연락이 밀려들어 고통스러웠다는 말에 오래 망설였던 것 같다. 용기 내어 긴 댓글을 달았던 내게 너는 변한 것 하나 없는 선하고 단정한 답글로 응해주었지. 나 역시 너처럼 “신기하고 묘한 기분”으로 동동 떠다니다가 이렇게 글을 남겨. 너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스물셋이었던 나는 어느새 서른이 넘었고 배낭을 둘러메고 훌쩍 떠날 수 있었던 배짱 좋은 여자애가 이제 내게 없다면 너는 실망할까. 어린 내가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시간을 가로질러 온 것 같아.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면 쑥스러움에 목도리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던 스무 살 소년도 지금은 사라졌을까.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건조한 시간들, 언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모르는 뜨내기 생활을 견디며 너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니까 싱그러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청평사의 기억, 축축한 흙냄새, 풀냄새와 서툰 하모니카 소리 같은 것이 가끔 그리웠어.


내일이 두렵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뒤돌아보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 흘러넘치는 시간과 쏟아지는 자유를 어쩔 줄 몰라 허덕이면서 반짝이고 신기한 것들을 향해 내달리기 바빴지. 그래서 너에게 나는 늘 뒷모습만 보여준 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 여린 기억 때문에 닭과 계란을 못 먹는다고 뒤늦게야 고백하는 너를 수줍고 조심스러운 사람으로 여긴 건 내 실수가 아니었을까. 사실은 언제나 저만치 앞서 뛰어가 버리는 내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아닐까. 내가 너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면, 너와 눈을 맞추고, 너의 여린 기억과 그림자에 먼저 귀 기울였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너. 나도 이곳에서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언제 지어졌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저 먼 과거로부터 온 잿빛 건물들 사이를 헤매면서. 사무실 창밖으로 아주 조금씩 얼굴을 바꾸는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눈 앞에 반짝거리는 것들을 따라 달렸던 나는 많이 변한 것 같아. 외치지 않고 애쓰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 있어지는 것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몸짓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들을 찾아가고 있어. 너의 한걸음 한걸음이 유난히 빛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너다워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순연한 시선과 느린 발걸음을 격려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일게. 낯선 땅에서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세상이란 어떤 것인지, 너절한 일상 속에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내 자리'를 찾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 간절하게 응원하게 된다, 부디 지치지 않기를. 이렇게 느리게 걷다 보면 우리 언젠가는 만나는 날도 있겠지. 이번엔 내가 너의 뒷모습을 지켜볼게.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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